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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좌전』 주역점 사례

⇒《歸妹》之《睽》 : 晉獻公筮嫁伯姬於秦, 遇歸妹之睽

繇曰, “士刲羊, 亦無衁也; 女承筐, 亦無貺也. 西鄰責言, 不可償也.”

 

《歸妹》卦의 上六 爻辭로 풀었다.

上六,女承筐无實,士刲羊无血,无攸利。

상육(上六)은 여자가 광주리를 받지만 담긴 과실이 없고, 관리가 양을 베었는데 피가 없으며, 다스려[攸]도 이로움이 없다.

 

《歸妹》之《睽》의 괘상(卦象)으로 풀었다.

<震之離, ‘爲雷爲火,>

◎ 못[] 위에 우레[]가 불[]로 바뀌었다.

 

 

『춘추좌전』 희공(僖公) 15年

[僖公 十五年 秋] 初, 晉獻公筮嫁伯姬於秦, 遇歸妹☳☱之睽☲☱.

史蘇占之, 曰, “不吉. 其繇曰, ‘士刲羊, 亦無衁也; 女承筐, 亦無貺也. 西鄰責言, 不可償也. 歸妹之睽, 猶無相也.’

震之離, 亦離之震. ‘爲雷爲火, 爲嬴敗姬. 車說其輹, 火焚其旗, 不利行師, 敗于宗丘. 歸妹睽孤, 寇張之弧. 姪其從姑, 六年其逋, 逃歸其國, 而棄其家, 明年其死於高梁之虛.’ ”

[희공 15년 가을] 애초에 진(晉)나라 헌공이 딸 백희를 진(秦)나라에 시집보내며 시초점[筮]을 하여 귀매(歸妹,☳☱) 之 규(暌,☲☱)괘를 얻었다.

사소(史蘇)가 점괘[占]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불길하다. 그 점사(占辭)에 이르기를 ‘관리가 양을 찔렀는데 또한 피가 없고, 여자가 광주리를 받들었는데 선물(膳物)이 없으며, 서쪽 이웃에게 책망을 당하고도 보상(報償)을 받을 수 없다. 귀매(歸妹)괘가 규(暌)괘로 변하였으니 도움[相]이 없음과 같다.

진(震)괘가 리(離)괘로 변함은 또한 리(離)괘가 진(震)괘로 변함이니, 우레[雷]가 불[火]이 되도록 함은 영(嬴; 秦) 성이 희(姬; 晉) 성을 깨트리게 됩니다. 수레의 바퀴받침이 빠지고 깃발이 불에 타며 출사(出師)를 행하면 이롭지 않고 종구(宗丘)에서 패하리라. 귀매(歸妹)괘와 규(暌)괘는 외로움[孤]인데 도적이 당기는 활(弧)이며, 여동생이 그 언니를 따르다가 6년만에 달아나 그 나라로 도망쳐 돌아와서 그 집안을 버린 것이니, 다음해 고량의 빈 터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  주역점(周易占) 사례

◎ 춘추좌전 희공(僖公)15年[bc 645]

[僖公 十五年 秋] 初, 晉獻公筮嫁伯姬於秦, 遇歸妹☳☱之睽☲☱. <[희공 15년 가을] 애초에 진(晉)나라 헌공이 딸 백희를 진(秦)나라에 시집보내며 시초점[筮]을 하여 귀매(歸妹,☳☱) 之 규(暌,☲☱)괘를 얻었다.>

史蘇占之, 曰, “不吉. 其繇曰, ‘士刲羊, 亦無衁也; 女承筐, 亦無貺也. 西鄰責言, 不可償也. 歸妹之睽, 猶無相也.’<사소(史蘇)가 점괘[占]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불길하다. 그 점사(占辭)에 이르기를 ‘관리가 양을 찔렀는데 또한 피가 없고, 여자가 광주리를 받들었는데 선물(膳物)이 없으며, 서쪽 이웃에게 책망을 당하고도 보상(報償)을 받을 수 없다. 귀매(歸妹)괘가 규(暌)괘로 변하였으니 도움[相]이 없음과 같다.>

震之離, 亦離之震. ‘爲雷爲火, 爲嬴敗姬. 車說其輹, 火焚其旗, 不利行師, 敗于宗丘. 歸妹睽孤, 寇張之弧. 姪其從姑, 六年其逋, 逃歸其國, 而棄其家, 明年其死於高梁之虛.’ ”<진(震)괘가 리(離)괘로 변함은 또한 리(離)괘가 진(震)괘로 변함이니, 우레[雷]가 불[火]이 되도록 함은 영(嬴; 秦) 성이 희(姬; 晉) 성을 깨트리게 됩니다. 수레의 바퀴받침이 빠지고 깃발이 불에 타며 출사(出師)를 행하면 이롭지 않고 종구(宗丘)에서 패하리라. 귀매(歸妹)괘와 규(暌)괘는 외로움[孤]인데 도적이 당기는 활(弧)이며, 여동생이 그 언니를 따르다가 6년만에 달아나 그 나라로 도망쳐 돌아와서 그 집안을 버린 것이니, 다음해 고량의 빈 터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54. 귀매괘(歸妹卦)[卦象:뇌택귀매]

☳ 震上

☱ 兌下

태(兌)[澤.못]가 아래에 있고, 진(震)[雷.우뢰]이 위에 있다.

【卦辭(괘사)】

歸妹 征 凶 无攸利.

귀매(歸妹)는, 바로잡으러가면 흉하고, 다스려[攸]도 이로움이 없다.

 

【爻辭(효사)】

上六,女承筐无實,士刲羊无血,无攸利。

상육(上六)은 여자가 광주리를 받지만 담긴 과실이 없고, 관리가 양을 베었는데 피가 없으며, 다스려[攸]도 이로움이 없다.

 

【序卦傳(서괘전)】 공자作

進必有所歸, 故受之以歸妹.

나아가면 반드시 돌아가는 곳이 있기 때문에 귀매괘(歸妹卦)로 받는다.

 

38. 규괘(睽卦)[卦象:화택규]

☲ 離上

☱ 兌下

태(兌)[澤.못]가 아래에 있고, 리(離)[火.불]가 위에 있다.

【卦辭(괘사)】

睽,小事吉。

규(睽)는 작은 일은 길하다.

 

【序卦傳(서괘전)】

家道窮必乖, 故受之以睽. 睽者乖也.

가문의 도는 다하면 반드시 어그러지기 때문에 “규” 괘로 받는다. 규(睽)라는 것은 어그러짐이다.

◪ 못[] 위에 우레[]가 불[]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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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論語)』

        卷​ 5

◎ 《공야장(公冶長)》-19

◆ 5-19) 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장문왈: "령윤자문, 삼사위령윤, 무희색, 삼이지, 무온색, 구영윤지정, 필이고신령윤, 하여?" 자왈: "충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최자시제군, 진문자유마십승, 기이위지, 지어타방, 즉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지일방, 즉우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하여?" 자왈: "청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자장(子張)이 여쭈었다. “영윤인 자문(子文)은 세 번의 영윤 벼슬을 하였으나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을 그만두어도 성난 기색이 없었으며, 옛 영윤의 정사를 반드시 새 영윤에게 일러주었는데,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신이구나.” 여쭈었다. “어질었습니까?” 말씀하셨다. “알지 못하겠으나 어찌 어짊이 있겠느냐?”

여쭈었다. “최자(崔子)가 제(齊)나라 군주를 시해하자, 진문자(陳文子)는 말 십승(十乘≒사십 匹)이 있었는데 버리고서 <제나라를> 어기고 떠나 다른 나라에 이르러 곧 말하기를 ‘우리 대부 최자와 같구나’하고서 어기고 떠났으며, 다른 나라에 가서 곧 말하기를 ‘우리 대부 최자와 같다’하며 어기고 떠났는데,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청렴(淸潔)하구나.” 여쭈었다. “어질었습니까?” 말씀하셨다. “알지 못하겠으나 어찌 어짊이 있겠느냐?”

◎《논어집해(論語集解)》

 
『논어집해(論語集解)』는 중국 위(魏)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하안(何晏, 193~ 249)이 당시까지 전해지던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대한 주석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논어집해(論語集解)』에는 공안국(孔安國, BC156?~BC74), 정현(鄭玄, 127~200), 마융(馬融, 79~166), 왕숙(王肅, 195~256), 포함(包咸, BC6~65), 주생렬(周生烈, ?~220) 등의 주석이 실려있으며, 하안(何晏)의 견해 역시 수록되어 있다.

【集解】 子張問曰:「令尹子文,(孔曰:「令尹子文,楚大夫,姓鬪名穀,字於菟。」 ◎공안국이 말하였다:영윤 자문(子文)은 초(楚)나라 대부인데, 성은 투(鬪)이고 이름은 곡(穀)이며, 자는 어도(於菟)이다.)三仕為令尹,無喜色。三已之,無慍色。舊令尹之政,必以告新令尹。何如?」子曰:「忠矣。」曰:「仁矣乎?」 曰:「未知。焉得仁?」(但聞其忠事,未知其仁也。◎何晏 注 : 단지 그 충심으로 섬김을 들었지만, 그가 어진지는 알지 못하겠다.)「崔子弒齊君,陳文子有馬十乘,棄而違之。(孔曰:「皆齊大夫。崔杼作亂,陳文子惡之,捐其四十匹馬,違而去之。」 ◎공안국이 말하였다:모두 제(齊)나라 대부이다. 최저(崔杼)가 난리를 일으키자, 진문자(陳文子)가 그를 미워하여 그의 말 40필을 버리고 <제나라를> 어기고 떠나 갔다.)至於他邦,則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之一邦,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何如?」子曰:「清矣。」曰:「仁矣乎?」曰:「未知。焉得仁?」(孔曰:「文子惡逆,去無道,求有道。當春秋時,臣陵其君,皆如崔子,無有可止者。」 ◎공안국이 말하였다:진문자가 반역을 미워하여, 도(道)가 없음을 버리고 도가 있는 나라를 찾았다. 춘추 당시에 신하가 군주를 능멸함이 모두 최자(崔子)와 같았지만 그치게 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논어주소(論語註疏)》

 

『논어주소(論語註疏)』는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하안(何晏, 193~249 魏)이 주(註)를 달아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지었으며, 북송(北宋)의 형병(邢昺, 932~1010)이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소(疏)를 붙여서 논어주소(論語註疏)를 지었다.

 

○ 【註疏】 “子曰”至“知也”。

○ 【註疏】 <경문(經文)의> "[자장(子張)]에서 [득인(得仁)]까지"

○正義曰:此章明仁之難成也。

○正義曰:이 장(章)은 어짊이 이루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다.

“子張問曰:令尹子文,三仕為令尹,無喜色。三已之,無慍色。舊令尹之政,必以告新令尹。何如”者,弟子子張問於孔子曰:“楚大夫令尹子文,三被任用,仕為令尹之官,而無喜見於顏色。三被已退,無慍懟之色。舊令尹之政令規矩,必以告新令尹,慮其未曉也。”

<경문(經文)에서> "자장(子張)이 여쭈었다. '영윤인 자문(子文)은 세 번의 영윤 벼슬을 하였으나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을 그만두어도 성난 기색이 없었으며, 옛 영윤의 정사를 반드시 새 영윤에게 일러주었는데, 어떻습니까?'[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라는 것은, 제자 자장(子張)이 공자께 묻기를 “초(楚)나라 대부 영윤 자문(子文)이 세 차례 임용(任用)이 되어 영윤(令尹)의 관직에 벼슬 하는데도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보임이 없었고,세 차례 그만두고 물러나게 되었으되 원망하여 성내는 기색이 없었으며, 옛 영윤의 정책과 법칙을 반드시 새 영윤에게 일러주었으니, 그가 밝게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입니다.”라고 하였다.

子文有此美行,子張疑可謂仁,故問曰:“何如?”

자문(子文)에게 이런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니, 자장(子張)이 그를 어진자로 평(評)할 수 있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묻기를 “어떠하냐?”고 하였다.

“子曰:忠矣”者,孔子答之,為行如此,是忠臣也。

<경문(經文)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신이구나.'[子曰 忠矣]"라는 것은,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행실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曰:仁矣乎”者,子張複問子文此德可謂仁矣乎?

<경문(經文)에서> "여쭈었다. '어질었습니까?'[曰 仁矣乎]"라는 것은, 자장이 자문의 이러한 덕(德)을 어짊이라 평(評)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물은 것이다.

“曰:未知。焉得仁”者,孔子答言,如其所說,但聞其忠事,未知其仁也。

<경문(經文)에서> "말씀하셨다. '알지 못하겠으나 어찌 어짊이 있겠느냐?'[曰 未知 焉得仁]"라는 것은, 공자께서 답하시기를 “설명한 바와 같다면 단지 그의 충성스러운 일만을 들었을 뿐이니,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崔子弑齊君,陳文子有馬十乘,棄而違之。至於他邦,則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之一邦,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何如”者,此子張又舉齊大夫陳文子之行而問孔子也。

<경문(經文)에서> "여쭈었다. '최자(崔子)가 제(齊)나라 군주를 시해하자, 진문자(陳文子)는 말 십승(十乘≒사십 匹)이 있었는데 버리고서 <제나라를> 어기고 떠나 다른 나라에 이르러 곧 말하기를 ‘우리 대부 최자와 같구나’하고서 어기고 떠났으며, 다른 나라에 가서 곧 말하기를 ‘우리 대부 최자와 같다’하며 어기고 떠났는데, 어떻습니까?'[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라는 것은, 이것은 자장(子張)이 또 제(齊)나라 대부 진문자(陳文子)의 행실을 들어서 공자께 물은 것이다.

崔子,崔杼也,為齊大夫,作亂弑其君光。陳文子惡之,故家雖富有馬十乘(謂四十匹也),而輒捐棄,違去之。

최자(崔子)는 최저(崔杼)이며, 제(齊)나라 대부를 하면서 변란을 일으켜 그 군주 광(光莊公)을 시해하였는데, 진문자가 그것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집안이 비록 부유하여 말 10승(10乘40필)을 소유하였지만, 즉시 말들을 버리고 <제나라를> 어기고 떠나 갔다.

至於他國,亦遇其亂,陳文子則曰,“猶吾齊大夫崔子也”,而違去之。複往一他邦,則又曰,“猶吾齊大夫崔子也”,而違去之。為行若此,其人何如?

다른 나라에 이르러서 또 시해하는 변란을 만나자, 진문자는 곧 말하기를 “우리 제(齊)나라 대부 최자와 같구나.”라고 하고서 그곳을 어기고 떠났으며, 다시 한 다른 나라로 가서 곧 또 말하기를 “우리 제(齊)나라 대부 최자와 같구나.”라고 하고서 그곳을 떠났다. 행실을 이와 같이 하였는데, 그 사람이 어떠하냐고 물은 것이다.

“子曰:清矣”者,孔子答言,文子辟惡逆,去無道,求有道。當春秋時,臣陵其君,皆如崔子,無可止者,可謂清潔矣。

<경문(經文)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청렴(淸潔)하구나.'[子曰 淸矣]"라는 것은,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진문자가 간악한 역적을 피하여 도가 없는 나라를 버리고 도가 있는 나라를 찾아갔으나, 춘추(春秋) 시대에는 신하가 그 군주를 능멸함이 당연하고, 모두 최자와 같아서 머물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 청렴(淸潔)을 칭(稱)할 수 있을 만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曰:仁矣乎”者,子張意其為仁,故複問之曰:“可以為仁矣乎?”

<경문(經文)에서> "여쭈었다. '어질었습니까?'[曰 仁矣乎]"라는 것은, 자장은 그 행실이 어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묻기를 “어짊으로 여길 수 있을 만하냐?”고 말한 것이다.

“曰:未知。焉得仁”者,孔子答言:“據其所聞,但是清耳,未知他行,安得仁乎?”

<경문(經文)에서> "말씀하셨다. '알지 못하겠으나 어찌 어짊이 있겠느냐?'[曰 未知 焉得仁]"라는 것은, 공자께서 답하시기를 “그 들은 바에 의하면 단지 청렴(淸潔)할 뿐이고, 다른 행실은 알 수 없으니, 어찌 어짊을 얻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注“孔曰” 至“於菟”。

○ 【집해(集解)】 주(注)의 "[공왈(孔曰)]에서 [어도(於菟)]까지"

○正義曰:案宣四年《左傳》云:“初,若敖娶於邧,生鬭伯比。

○正義曰: 상고해보니, 선공(宣公) 4년 《춘추좌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처음에 약오(若敖)가 운(䢵)나라에서 아내로 맞아 투백비(鬥伯比)를 낳았다.

若敖卒,從其母畜於邧,淫於邧子之女,生子文焉。邧夫人使棄諸夢中。虎乳之。邧子田,見之,懼而歸。夫人以告,遂使收之。

약오(若敖)가 죽은 뒤에 투백비(鬥伯比)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운(䢵)나라에서 자랐으며, 운자(䢵子)의 딸을 사통(私通)하여 자문(子文)을 낳았는데, 운부인(䢵夫人)이 사람을 시켜 이 아이를 운몽(雲夢)의 늪에 버리게 하였지만, 호랑이가 아이에게 젖을 먹였으며 운자(䢵子)가 사냥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겁을 먹고서 돌아왔는데, 부인(夫人)이 사실대로 고하니, 드디어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楚人謂乳穀,謂虎於菟,故命之曰鬥穀於菟。實為令尹子文。”是也。

초(楚)나라 사람들은 ‘젖’을 ‘누(穀)’라 말하고, ‘호랑이’를 ‘어도(於菟)’라 말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투누어도(鬥穀於菟)’라고 하였으며, 실로 영윤(令尹) 자문(子文)이 되었다.”라 하였는데 이것이다.

令尹,宰也。《周禮》六卿,太宰為長,遂以宰為上卿之號。楚臣令尹為長,從他國之言,或亦謂之宰。宣十二年《左傳》云“蒍敖為宰”是也。

영윤(令尹)은 재(宰)이다. 《주례(周禮)》의 6경(六卿)에 태재(太宰)가 우두머리가 되므로 따라서 재宰)를 상경(上卿)의 호칭으로 삼은 것이다. 초(楚)나라 신하는 영윤을 장(長)으로 하였지만, 다른 나라의 말을 따르면 혹 재(宰)로 말하기도 하였으며, 선공(宣公) 12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위오(蔿敖)가 재(宰)가 되었다[蔿敖爲宰]”고 한 것이 이것이다.

令,善也;尹,正也,言用善人正此官也。楚官多以尹為名,皆取其正直也。

령(令)은 착함이고 윤(尹)은 바름이니, 착한 사람을 등용하여 관원들을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초나라 관직에는 ‘윤(尹)’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 많은데, 모두 정직을 취한 것이다.

○注“ 孔曰”至“去之”。

○ 【집해(集解)】 주(注)의 "[공왈(孔曰)]에서 [거지(去之)]까지"

○正義曰:云“皆齊大夫”者,並見《春秋》,故知之。

○正義曰:<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모두 제(齊)나라 대부이다[皆齊大夫]"라는 것은, 모두 《춘추(春秋)》에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았다.

云“ 崔杼作亂”者,左襄二十五年。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최저(崔杼)가 난리를 일으키자[崔杼作亂]"라는 것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양공(襄公) 25년에 있었다.

云“四十匹馬”者,古以四馬其駕一車,因謂四匹為乘。《經》言十乘,故知四十匹也。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말 40필[四十匹馬]"라는 것은, 옛날에는 수레 한 대에 말 네 마리를 메웠으니 따라서 4필(匹)을 승(乘)으로 하여 말하였다. 경문에 10승(乘)을 말했기 때문에 40필임을 안 것이다.

▣ 『論語』 원문

◎《公冶長》卷​ 5 - 19

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논어집해(論語集解)》

子張問曰:「令尹子文,(孔曰:「令尹子文,楚大夫,姓鬪名穀,字於菟。」)三仕為令尹,無喜色。三已之,無慍色。舊令尹之政,必以告新令尹。何如?」子曰:「忠矣。」曰:「仁矣乎?」 曰:「未知。焉得仁?」(但聞其忠事,未知其仁也。) 「崔子弒齊君,陳文子有馬十乘,棄而違之。(孔曰:「皆齊大夫。崔杼作亂,陳文子惡之,捐其四十匹馬,違而去之。」)至於他邦,則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之一邦,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何如?」子曰:「清矣。」曰:「仁矣乎?」曰:「未知。焉得仁?」(孔曰:「文子惡逆,去無道,求有道。當春秋時,臣陵其君,皆如崔子,無有可止者。」)

◎《논어주소(論語註疏)》

疏“ 子張”至“得仁”。

○正義曰:此章明仁之難成也。

“子張問曰:令尹子文,三仕為令尹,無喜色。三已之,無慍色。舊令尹之政,必以告新令尹。何如”者,弟子子張問於孔子曰:“楚大夫令尹子文,三被任用,仕為令尹之官,而無喜見於顏色。三被已退,無慍懟之色。舊令尹之政令規矩,必以告新令尹,慮其未曉也。”子文有此美行,子張疑可謂仁,故問曰:“何如?”

“子曰:忠矣”者,孔子答之,為行如此,是忠臣也。

“曰:仁矣乎”者,子張複問子文此德可謂仁矣乎?

“曰:未知。焉得仁”者,孔子答言,如其所說,但聞其忠事,未知其仁也。

“崔子弑齊君,陳文子有馬十乘,棄而違之。至於他邦,則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

之一邦,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何如”者,此子張又舉齊大夫陳文子之行而問孔子也。

崔子,崔杼也,為齊大夫,作亂弑其君光。陳文子惡之,故家雖富有馬十乘(謂四十匹也),而輒捐棄,違去之。至於他國,亦遇其亂,陳文子則曰,“猶吾齊大夫崔子也”,而違去之。

複往一他邦,則又曰,“猶吾齊大夫崔子也”,而違去之。為行若此,其人何如?

“子曰:清矣”者,孔子答言,文子辟惡逆,去無道,求有道。當春秋時,臣陵其君,皆如崔子,無可止者,可謂清潔矣。

“曰:仁矣乎”者,子張意其為仁,故複問之曰:“可以為仁矣乎?”

“曰:未知。焉得仁”者,孔子答言:“據其所聞,但是清耳,未知他行,安得仁乎?”

○注“孔曰” 至“於菟”。

○正義曰:案宣四年《左傳》云:“初,若敖娶於邧,生鬭伯比。

若敖卒,從其母畜於邧,淫於邧子之女,生子文焉。邧夫人使棄諸夢中。虎乳之。邧子田,見之,懼而歸。夫人以告,遂使收之。

楚人謂乳穀,謂虎於菟,故命之曰鬭穀於菟。實為令尹子文。”是也。

令尹,宰也。《周禮》六卿,太宰為長,遂以宰為上卿之號。楚臣令尹為長,從他國之言,或亦謂之宰。宣十二年《左傳》云“蒍敖為宰”是也。

令,善也;尹,正也,言用善人正此官也。楚官多以尹為名,皆取其正直也。

○注“ 孔曰”至“去之”。

○正義曰:云“皆齊大夫”者,並見《春秋》,故知之。

云“ 崔杼作亂”者,左襄二十五年。

云“四十匹馬”者,古以四馬其駕一車,因謂四匹為乘。《經》言十乘,故知四十匹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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