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정의(周易正義)》는 왕필(王弼, 226~249)의 주역 주(注)를 채용하여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주석(注釋)을 하여 지었다.
48. 정괘(井卦)[卦象:수풍정(井)]
☵ 坎上
☴ 巽下
손(巽)[風.바람]이 아래에 있고, 감(坎)[水.물]이 위에 있다.
井,改邑不改井, 정(井)은 고을이 바뀌어도 우물은 바뀌지 않으니, 【王弼 注】 井以不變為德者也。 【왕필 주】 우물은 변하지 않음을 가지고 덕(德)을 삼는 것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井」者,物象之名也。古者穿地取水,以瓶引汲,謂之為井。此卦明君子脩德養民,有常不變,終始無改,養物不窮,莫過乎井,故以修德之卦取譬名之「井」焉。「改邑不改井」者,以下明「井」有常德,此明「井」體有常,邑雖遷移而「井體」無改,故云「改邑不改井」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井]”라는 것은, 사물 모습[象]의 이름이며, 옛날에는 땅을 파서 물을 취하고 옹기병[甁]으로써 물을 끌어 올림을 말하기를 ‘우물[井]’이라 하였다. 이 괘(卦)는 군자(君子)가 덕(德)을 닦아 백성을 기름이 항상 변하지 않으며 시종 바뀜이 없음을 밝혔으니, 남[사물]을 길러주기를 다하지 않음이 우물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에 덕(德)을 닦는 괘(卦)를 가지고 비유하여 이름을 ‘정(井)’으로 취한 것이다. “고을이 바뀌어도 우물은 바뀌지 않으니[改邑不改井]”라는 것은, 이하는 우물[井]은 떳떳한 덕(德)이 있음을 밝혔는데, 이는 우물[井]의 몸[體]이 떳떳함이 있음을 밝힌 것이며, 고을은 비록 옮겨가고 바뀌지만 우물[井]의 몸[體]은 바뀜이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邑은 바뀌어도 우물은 바뀌지 않는다[改邑不改井]”라고 한 것이다.」 |
无喪无得,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으며, 【王弼 注】 德有常也。 【왕필 주】 덕(德)은 항상함이 있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此明井用有常德,終日引汲,未嘗言損;終日泉注,未嘗言益,故曰「無喪無得」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우물[井]의 쓰임에 떳떳한 덕(德)이 있음을 밝힌 것이며, 종일토록 물을 퍼 올려도 일찍이 줄어듦을 말하지 않고, 종일토록 샘물이 주입되어도 일찍이 더해짐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잃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無喪無得]”라고 말한 것이다.」 |
往來井井。 오고 가며 우물 물을 먹는다. 【王弼 注】 不渝變也。 【왕필 주】 바뀌어 변하지 않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此明性常。「井井」,絜靜之貌也。往者來者,皆使潔靜,不以人有往來,改其洗濯之性,故曰「往來井井」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본성이 떳떳함을 밝힌 것이다. ‘정정(井井)’은 깨끗하고 고요한 모양이다. 가고 오는 자가 모두 깨끗하고 고요하게 하여서 사람이 왕래함이 있음을 가지고 그 깨끗이 씻는 본성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오고 가며 우물 물을 먹는다[往來井井]”라고 말한 것이다.」 |
汔至亦未繘井, 거의 이르렀지만 또한 우물에서 두레박줄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王弼 注】 已來至而未出井也。 【왕필 주】 이미 와서 이르렀지만 우물에서 나오지는 못했음이다. |
羸其瓶,凶。 그 두레박을 가로채면 흉하다. 【王弼 注】 井道以已出為功也,幾至而覆,與未汲同也。 【왕필 주】 우물의 도(道)는 이미 나옴을 가지고 공(功)을 삼는데 거의 이르러서 엎어졌음과 긷지 못했음은 같은 것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此下明井誡,言井功難成也。汔,幾也。幾,近也。繘,綆也。雖汲水以至井上,然綆出猶未離井口,而鉤羸其瓶而覆之也。棄其方成之功,雖有出井之勞,而與未汲不異,喻今人行常德,須善始令終。若有初無終,則必致凶咎,故曰「汔至亦未繘井,羸其瓶,凶」。言「亦」者,不必之辭,言不必有如此不克終者。計獲一瓶之水,何足言凶?以喻人之修德不成,又云但取喻人之德行不恒,不能慎終如始,故就人言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아래는 우물[井]이 경계(警戒)함을 밝혔으며, 우물[井]의 공(功)은 이루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흘(汔, 거의 흘)’은 거의[幾]이며, ‘기(幾)’는 가까움이다. ‘율(繘, 두레박줄 율)’은 두레박의 끈이다. 비록 물을 길어 그로써 우물 위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두레박 끈이 나와 오히려 아직 우물 입구를 떠나지 않았는데도 그 두레박[甁]을 갈고리로 가로채서 뒤엎은 것이다. 바야흐로 이루어지려는 공(功)을 버리면 비록 우물에서 끌어올리는 수고로움이 있었더라도 물을 긷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며, 지금 사람들이 떳떳한 덕(德)을 행할 적에 모름지기 시작을 잘해야 끝을 잘 함을 비유한 것이다. 만약 처음은 있고 마침이 없으면 반드시 흉함과 허물을 부르기 때문에 “거의 이르렀지만 또한 우물에서 두레박줄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그 두레박을 가로채면 흉하다[汔至亦未繘井,羸其瓶,凶]”라고 말한 것이다. ‘또[亦]’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그러한 말은 아님이며, 이와 같이 이기지 못해 끝마치는 자가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한 것이다. 한 두레박[甁]의 물을 얻음을 계산하여 어찌 흉함을 말하기에 넉넉하겠는가? 이로써 사람이 덕(德)을 닦아 이루지 못함을 비유하였고, 또 이르기를 다만 사람의 덕(德)을 행함이 항상하지 않음을 비유하여 마침을 시작 같이 잘 삼가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가지고 ‘흉함[凶]’을 말하였다.」 |
[孔穎達 疏] 正義曰:此下明井誡,言井功難成也。汔,幾也。幾,近也。繘,綆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아래는 우물[井]이 경계(警戒)함을 밝혔으며, 우물[井]의 공(功)은 이루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흘(汔, 거의 흘)’은 거의[幾]이며, ‘기(幾)’는 가까움이다. ‘율(繘, 두레박줄 율)’은 두레박의 끈이다.
雖汲水以至井上,然綆出猶未離井口,而鉤羸其瓶而覆之也。
비록 물을 길어 그로써 우물 위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두레박 끈이 나와 오히려 아직 우물 입구를 떠나지 않았는데도 그 두레박[甁]을 갈고리로 가로채서 뒤엎은 것이다.
棄其方成之功,雖有出井之勞,而與未汲不異,喻今人行常德,須善始令終。
바야흐로 이루어지려는 공(功)을 버리면 비록 우물에서 끌어올리는 수고로움이 있었더라도 물을 긷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며, 지금 사람들이 떳떳한 덕(德)을 행할 적에 모름지기 시작을 잘해야 끝을 잘 함을 비유한 것이다.
若有初無終,則必致凶咎,故曰「汔至亦未繘井,羸其瓶,凶」。
만약 처음은 있고 마침이 없으면 반드시 흉함과 허물을 부르기 때문에 “거의 이르렀지만 또한 우물에서 두레박줄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그 두레박을 가로채면 흉하다[汔至亦未繘井,羸其瓶,凶]”라고 말한 것이다.
言「亦」者,不必之辭,言不必有如此不克終者。計獲一瓶之水,何足言凶?
‘또[亦]’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그러한 말은 아님이며, 이와 같이 이기지 못해 끝마치는 자가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한 것이다. 한 두레박[甁]의 물을 얻음을 계산하여 어찌 흉함을 말하기에 넉넉하겠는가?
以喻人之修德不成,又云但取喻人之德行不恒,不能慎終如始,故就人言凶也。
이로써 사람이 덕(德)을 닦아 이루지 못함을 비유하였고, 또 이르기를 다만 사람의 덕(德)을 행함이 항상하지 않음을 비유하여 마침을 시작 같이 잘 삼가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가지고 ‘흉함[凶]’을 말하였다.」
《彖》曰:巽乎水而上水,井。 《단전(彖傳)》에서 말하였다. "물에 들어가[巽]서 물을 올림이 우물[井]인데, ※ 『주역』 說卦傳 七章 : 巽, 入也. 【王弼 注】 音舉上之上。 【왕필 주】 음(音)은 거상(舉上)의 상(上)이다. |
[孔穎達 疏]「《彖》曰」至「水井」。 ○正義曰:此就二體釋「井」之名義。此卦坎為水在上,巽為木在下,又巽為入,以木入於水而又上水,井之象也。 ○注「音舉上之上」。 ○正義曰:嫌讀為去聲,故音之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단왈(彖曰)에서 수정(水井)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두 몸[體]을 가지고 정(井)괘의 이름과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괘(卦)는 감(坎)은 물이 되어 위에 있고 손(巽)은 나무가 되어 아래에 있으며 또 손(巽)은 들어감이 되니, 나무를 가지고 물에 들여보내고 또 물을 퍼올림이 정(井)괘의 모습[象]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음거상지상(音擧上之上)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上을] 거성(去聲)으로 하여 읽을까 혐의(嫌疑)하였기 때문에 음(音)을 단 것이다.」 |
井養而不窮也。 改邑不改井,乃以剛中也。 우물[井]이 길러주어서 다하지 않는다. 고을이 바뀌어도 우물은 바뀌지 않음은, 이에 그로써 굳셈이 가운데[中] 함이고, 【王弼 注】 以剛處中,故能定居其所而不變也。 【왕필 주】 굳셈을 가지고 가운데[中]에 처했기 때문에 그 곳을 정하여 거주하면서 변하지 않음을 잘 한다. |
[孔穎達 疏]正義曰:「井養而不窮」者,歎美井德,愈汲愈生,給養於人,無有窮巳也。「改邑不改井,乃以剛中也」者,此釋井體有常,由於二五也。二五以剛居中,故能定居其所而不改變也。不釋「往來」二德者,無喪無得,「往來井井」,皆由此剛居中,更無他義,故不具舉《經》文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이 길러주어서 다하지 않는다[井養而不窮]”라는 것은, 우물[井]의 덕(德)은 퍼 올릴수록 더욱 생겨나서 사람에게 공급하여 길러줌이 다하고 그침이 없음을 감탄하여 찬미한 것이다. “고을이 바뀌어도 우물은 바뀌지 않음은, 이에 그로써 굳셈이 가운데 함이고[改邑不改井 乃以剛中也]”라는 것은, 이는 우물[井]의 몸[體]이 떳떳함이 있음은 구2(九二)와 구5(九五)를 말미암음을 해석한 것이다. 구2(九二)와 구5(九五)가 굳셈으로써 가운데[中]에 거주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잘 정해 거주하여서 고치거나 변치 않는 것이다. ‘가고 옴[往來]’의 두 덕(德)을 해석하지 않은 것은, 줄어듬이 없고 불어남이 없어서 오고 가며 우물 물을 먹는데, 모두 이 굳셈이 가운데[中]에 거주함을 말미암아 다시 다른 뜻이 없기 때문에 경문(經文)을 모두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
汔至亦未繘井,未有功也。 거의 이르렀지만 또한 우물에서 두레박줄이 올라오지 않았음은 아직 공(功)이 있지 않음이다. 【王弼 注】 井以已成為功。 【왕필 주】 우물[井]은 이미 이룸을 가지고 공(功)을 삼는다. |
[孔穎達 疏]正義曰:水未及用,則井功未成,其猶人德事被物,亦是功德未就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물이 쓰임에 미치지 못하면 우물[井]의 공(功)이 오히려 사람의 덕(德)을 남[사물]에게 입히는 일을 아직 이루지 못함이니, 또한 이는 공덕(功德)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음이다.」 |
羸其瓶,是以凶也。 그 두레박을 엎지르면, 이로써 흉함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汲水未出而覆,喻脩德未成而止,所以致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물을 퍼 올려 아직 올라오지 않았는데 엎어짐은, 덕(德)을 닦음이 이루지 못하고서 그침을 비유하였으며, 흉함을 불러들이는 까닭이다.」 |
《象》曰:木上有水,井,君子以勞民勸相。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나무 위에 물이 있음이 정(井)괘안데, 군자가 그로써 백성들을 위로(慰勞)하고 도와서 권면함이다." 【王弼 注】 木上有水,井之象也。上水以養,養而不窮者也。相猶助也,可以勞民勸助,莫若養而不窮也。 【왕필 주】 나무 위에 물이 있음이 우물[井]의 모습[象]이다. 물을 퍼 올림으로써 길러주는데 길러주어서 다하지 않는 것이다. ‘상(相)’은 돕다와 같으며, 백성을 위로하고 도와서 권면할 수 있음은 길러주기를 다하지 않음 보다 더한 것이 없다. |
[孔穎達 疏]正義曰:「木上有水」,則是上水之象,所以為井。「君子以勞民勸相」者,勞謂勞賚,相猶助也。井之為義,汲養而不窮,君子以勞來之恩,勤恤民隱,勸助百姓,使有成功,則此養而不窮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나무[木] 위에 물[水]이 있으니, 바로 물을 퍼 올리는 모습[象]이며, ‘우물[井]’이 되는 까닭이다. “군자가 그로써 백성들을 위로(慰勞)하고 도와서 권면함이다[君子以勞民勸相]”라는 것은, ‘로(勞, 일할 로)’는 위로해줌[勞賚]을 말하고, ‘상(相)’은 도움과 같다. 우물[井]의 뜻이 됨은, 물을 퍼 올려 길러주면서 다하지 않으니, 군자(君子)가 와서 위로함[勞來]의 은혜로써 백성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보고 여러 성[百姓]들을 권면하고 도와서 [백성들로] 하여금 공(功)을 이룸이 있게 하면, 이는 길러주면서 다하지 않는 것이다.」 |
初六,井泥不食,舊井无禽。 초육(初六)은 우물이 진흙이니 먹지 않고, 옛 우물은 짐승이 없다. 【王弼 注】 最在井底,上又无應,沈滯滓穢,故曰井泥不食也。井泥而不可食,則是久井不見渫治者也。久井不見渫治,禽所不嚮,而況人乎?一時所共棄舍也。井者不變之物,居德之地。恒德至賤,物无取也。 【왕필 주】 우물의 가장 밑에 있고 위에 또 응(應)이 없으며 잠기고 막혀서 더러운 찌꺼기이기 때문에 “우물이 진흙이니 먹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우물이 진흙이어서 먹을 수 없음은, 바로 오랫동안 우물 준설(浚渫)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며, 오랫동안 우물 준설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새가 향하지 않는 곳인데,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동시에 함께 버리는 바이다. 우물[井]이라는 것은, 변하치 않는 물건이고 덕(德)이 거주하는 땅인데, 떳떳한 덕(德)이 지극히 천함에 이르러 남[사물]이 취함이 없음이다. |
[孔穎達 疏]「初六並泥」至「無禽」。 ○正義曰:初六「最處井底,上又無應,沈滯滓穢」,即是井之下泥汙,不堪食也,故曰「井泥不食」也。井泥而不可食,即是「久井不見渫治,禽所不向,而況人乎?故曰「舊井無禽」也。 ○注「井者不變之物」。 ○正義曰:「井者不變之物,居德之地」者,《繇》辭稱「改邑不改井」,故曰「井者,不變之物,居德」者,《系辭》又云:「井,德之地」,故曰「居德之地」也。《注》言此者,明井既有不變,即是有恆,既居德地,即是用德也。今居窮下,即是恒德至賤,故物無取也,禽之與人,皆共棄舍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초육병니(初六幷泥)에서 무금(无禽)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초육(初六)은 우물의 가장 밑에 처하고 위에 또 응(應)이 없어서 침채되어 탁하고 더러우며, 바로 우물 아래가 더러운 진흙이니 먹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물이 진흙이니 먹지 않는다[井泥不食]”라고 말한 것이다. 우물[井]이 진흙이어서 먹을 수가 없음은 바로 오랫동안 우물 준설(浚渫)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며, 오랫동안 우물 준설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새가 향하지 않는 곳인데,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오래된 우물은 짐승이 없다[舊井無禽]”라고 말한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정자불변지물(井者不變之物)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井]이라는 것은, 변하치 않는 물건이고 덕(德)이 거주하는 땅[井者 不變之物 居德之地]”라는 것은, 주사[繇辭(卦辭)]에 “고을은 바뀌어도 우물은 바뀌지 않는다[改邑不改井]”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물[井]이라는 것은, 변하치 않는 물건이고 덕(德)이 거주함[井者,不變之物,居德]”라고 칭한 것이다. 〈계사전(繫辭傳)〉에 또 이르기를 “우물은 덕(德)의 땅이다[井,德之地]”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德)이 거주하는 땅이다[居德之地]”라고 말한 것이다. 주(注)에 이를 말한 것은, 우물이 이미 변치 않음이 있으니 바로 떳떳함이 있고, 이미 덕(德)이 거주하는 땅이면 바로 덕(德)을 사용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지금 맨 아래에 거주하니, 바로 떳떳한 덕(德)이 지극히 천(賤)하기 때문에 남[사물]이 취함이 없어서 새와 사람이 모두 함께 버리는 것이다.」 |
《象》曰:井泥不食,下也。舊井无禽,時舍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우물이 진흙이니 먹지 않음은, [우물의] 아래이다. 오래된 우물에 짐승이 없음은, 버리는 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下也」者,以其最在井下,故為井泥也。「時舍也」者,以既非食,禽又不向,即是一時共棄舍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아래[下也]”라는 것은, 그 우물의 가장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물의 진흙이 되는 것이다. “버리는 때이다[時舍也]”라는 것은, 이미 먹지 않음으로써 새도 또한 향해 오지 않으니 바로 일시에 함께 버리는 것이다.」 |
[孔穎達 疏] 「初六並泥」至「無禽」。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초육병니(初六幷泥)에서 무금(无禽)까지.}
○正義曰:初六「最處井底,上又無應,沈滯滓穢」,即是井之下泥汙,不堪食也,故曰「井泥不食」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초육(初六)은 우물의 가장 밑에 처하고 위에 또 응(應)이 없어서 침채되어 탁하고 더러우며, 바로 우물 아래가 더러운 진흙이니 먹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물이 진흙이니 먹지 않는다[井泥不食]”라고 말한 것이다.
井泥而不可食,即是「久井不見渫治,禽所不向,而況人乎?故曰「舊井無禽」也。
우물[井]이 진흙이어서 먹을 수가 없음은 바로 오랫동안 우물 준설(浚渫)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며, 오랫동안 우물 준설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새가 향하지 않는 곳인데,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오래된 우물은 짐승이 없다[舊井無禽]”라고 말한 것이다.」
○注「井者不變之物」。
○ 【왕필 주(王弼 注)】의 “정자불변지물(井者不變之物)까지”
○正義曰:「井者不變之物,居德之地」者,《繇》辭稱「改邑不改井」,故曰「井者,不變之物,居德」者,《系辭》又云:「井,德之地」,故曰「居德之地」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井]이라는 것은, 변하치 않는 물건이고 덕(德)이 거주하는 땅[井者 不變之物 居德之地]”라는 것은, 주사[繇辭(卦辭)]에 “고을은 바뀌어도 우물은 바뀌지 않는다[改邑不改井]”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물[井]이라는 것은, 변하치 않는 물건이고 덕(德)이 거주함[井者,不變之物,居德]”라고 칭한 것이다.
〈계사전(繫辭傳)〉에 또 이르기를 “우물은 덕(德)의 땅이다[井,德之地]”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德)이 거주하는 땅이다[居德之地]”라고 말한 것이다.
《注》言此者,明井既有不變,即是有恆,既居德地,即是用德也。
주(注)에 이를 말한 것은, 우물이 이미 변치 않음이 있으니 바로 떳떳함이 있고, 이미 덕(德)이 거주하는 땅이면 바로 덕(德)을 사용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今居窮下,即是恒德至賤,故物無取也,禽之與人,皆共棄舍也。
지금 맨 아래에 거주하니, 바로 떳떳한 덕(德)이 지극히 천(賤)하기 때문에 남[사물]이 취함이 없어서 새와 사람이 모두 함께 버리는 것이다.」
九二,井谷射鮒,甕敝漏。 구이(九二)는 우물[井]이 골짜기 붕어에게 쏟아지고, 옹기병이 깨져서 물이 샌다. 【王弼 注】 谿谷出水,從上注下,水常射焉。井之為道,以下給上者也。而无應於上,反下與初,故曰井谷射鮒。鮒,謂初也。失井之道,水不上出,而反下注,故曰甕敝漏也。夫處上宜下,處下宜上。井已下矣,而復下注,其道不交,則莫之與也。 【왕필 주】 계곡(谿谷)에서 나오는 물은 위에서 부터 아래로 주입되어 물이 항상 쏟아진다. 우물[井]이 도(道)가 됨은 그로써 아래가 위로 공급하는 것인데, 위에 응(應)이 없어서 도리어 아래 초육(初六)과 함께하기 때문에 “우물[井]이 골짜기 붕어에게 쏟아지고”라고 말한 것이다. ‘부(鮒, 붕어 부)’는 초육(初六)을 말한다. 우물[井]의 도(道)를 잃어서 물이 위로 나가지 못하고서 도리어 아래로 주입하기 때문에 “옹기병이 깨져 물이 샌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저 위에 처하면 마땅히 내려가고 아래에 처하면 마땅히 올라가는데, 우물이 이미 아래에 있으면서 다시 아래로 주입하여 그 도(道)가 사귀지 못하면 함께하는 이가 없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井穀射鮒」者,井之為德,以下汲上。九二上無其應,反下比初,施之於事,正似谷中之水,下注敝鮒,井而似穀,故曰「井穀射鮒」也。鮒謂初也。子夏《傳》云:「井中蝦䗫,呼為鮒魚也。」「甕敝漏」者,井而下注,失井之道,有似甕敝漏水,水漏下流,故曰「甕敝漏」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이 골짜기 잉어에게 쏟아지고[井谷射鮒]”라는 것은, 우물[井]의 덕(德)은 아래에서 위로 퍼 올리는데 구2(九二)가 위에 그 응(應)이 없어서 도리어 아래로 초육(初六)과 친하니, 일에 베풀어 보면 바로 골짜기 가운데의 물이 아래로 주입되어 붕어에게 버려짐을 닮았으니 우물인데 골짜기를 닮았기 때문에 “우물이 골짜기 붕어에게 쏟아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부(鮒, 붕어 부)’는 초육(初六)을 말한다. ≪자하역전(子夏易傳)≫에 이르기를 “우물 가운데의 두꺼비[蝦䗫]를 ‘부어(鮒魚)’라고 하여 부른다.”라고 하였다. “옹기병이 깨져 물이 샌다[甕敝漏]”라는 것은, 우물이면서 아래로 주입하면 우물의 도(道)를 잃어서 옹기병이 깨져 물이 새고 물이 샌 것이 아래로 흐름을 닮았기 때문에 “옹기병이 깨져서 물이 샌다.”라고 말한 것이다.」 |
《象》曰:井谷射鮒,无與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우물[井]이 골짜기 붕어에게 쏟아짐은, 함께 함이 없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無與也」者,井既處下,宜應汲上。今反養下,則不與上交,物莫之與,故曰「無與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함께 함이 없음이다[无與也]”라는 것은, 우물[井]이 이미 아래에 처하였으니 마땅히 응당 위로 퍼 올리는데 지금 도리어 아래를 길러주니, 그러면 위와 더불어 사귀지 못하여 남[사물]이 함께함이 없기 때문에 “함께 함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
九三,井渫不食,為我心惻,可用汲。王明,並受其福。 구삼(九三)은 우물이 준설(浚渫)됐는데 먹히지 않아서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만 물 긷는데 쓸 수는 있으니, 왕이 밝으면 함께 그 복을 받는다. 【王弼 注】 渫,不停污之謂也。處下卦之上,履得其位,而應於上,得井之義也。當井之義,而不見食,脩己全絜,而不見用,故為我心惻也。為,猶使也。不下注而應上,故可用汲也。王明,則見照明。既嘉其行,又欽其用,故曰「王明,並受其福」也。 【왕필 주】 설(渫, 파낼 설)은 더러움이 머물지 못하게 함을 말한다. 아래 괘(卦)의 위에 처하고 그 지위를 얻어 밟고서 위쪽에 응(應)하니, 우물[井]의 뜻을 얻은 것이다. 우물[井]의 뜻에 합당하지만 먹히지 않음은 자기를 닦아 온전히 깨끗이 하였는데도 쓰임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이다. ‘위(爲)’는 하여금과 같다. 아래로 주입하면서 위에 응(應)하지 않기 때문에 물 긷는데 쓸 수는 있다. 왕이 밝으면 밝음을 비춰 주어서 나아가 그 행실이 아름답고 또 그 쓰임을 공경하가 때문에 “왕이 밝으면 함께 그 복을 받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
[孔穎達 疏]「九三井渫不食」至「王明並受其福」。 ○正義曰:「井渫不食」者,渫,治去穢汙之名也。井被渫治,則清潔可食。九三處下卦之上,異初六「井泥」之時,得位而有應於上,非「射鮒」之象。但井以上出為用,猶在下體,未有成功。功既未成,井雖渫治,未食也。故曰「井渫不食」也。「為我心惻」者,為,猶使也。井渫而不見食,猶人脩巳全潔而不見用,使我心中惻愴,故曰「為我心惻」也。「可用汲,王明,並受其福」者,不同九二下注而不可汲也,有應於上,是可汲也。井之可汲,猶人可用。若不遇明王,則滯其才用。若遭遇賢主,則申其行能賢主既嘉其行,又欽其用,故曰「可用汲,王明,並受其福」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삼정설불식(九三井渫不食)에서 왕명병수기복(王明並受其福)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이 준설(浚渫)됐는데 먹히지 않아서[井渫不食]”라는 것의, ‘설(渫, 파낼 설)’은 오염된 더러움을 다스려 제거하는 이름이며, 우물이 다스려 준설(浚渫)을 했으면 맑고 깨끗하여 먹을 수 있다. 구3(九三)이 하괘(下卦)의 위에 처하여 초육(初六)의 ‘우물이 진흙’의 때와 다르고, 지위를 얻어서 위에 응(應)이 있으니 ‘붕어[鮒]에 쏟아짐’의 모습[象]이 아니다. 다만 우물은 그로써 위로 나가서 쓰임을 되는데 오히려 하체(下體)에 있어서 공(功)을 이루지 못하며, 공(功)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우물이 비록 준설하여 다스리더라도 먹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물이 준설되었으나 먹히지 않는다[井渫不食]”라고 말한 것이다.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만[爲我心惻]”라는 것의, ‘위(爲)’는 하여금과 같으며, 우물이 준설되었는데도 먹히지 못함은 사람이 자기를 온전히 깨끗하게 닦았는데도 등용받지 못함과 같으니, 나로 하여금 마음 안을 괘롭고 서글프게 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為我心惻]”라고 말한 것이다. “물 긷는데 쓸 수는 있으니, 왕이 밝으면 함께 그 복을 받는다[可用汲 王明 並受其福]”라는 것은, 구2(九二)가 아래로 주입하여서 물을 길을 수 없음과는 같지 않고, 위에 응(應)이 있어서 이는 물을 길을 수 있다. 우물이 물을 길을 수 있음은 사람이 쓸 수 있음과 같은데, 만약 밝은 왕을 만나지 못하면 그 재주의 쓰임이 침체되지만, 만약 현명한 주인을 만나면 그 행실을 잘 펼쳐서 현명한 주인이 이미 그 행실을 아름답게 하고 또 그를 등용하여 공경하기 때문에 “물 긷는데 쓸 수는 있으니, 왕이 밝으면 함께 그 복을 받는다[可用汲,王明,並受其福]”라고 말한 것이다.」 |
《象》曰:井渫不食,行惻也。求王明,受福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우물을 준설(浚渫)했는데 먹지 않음은, 행함을 슬퍼함이다. 왕의 밝음을 구함은, 복을 받음이다.” 【王弼 注】 行感於誠,故曰惻也。 【왕필 주】 행함은 성실함을 느끼기 때문에 “서글프다.”라고 말했다. |
[孔穎達 疏] 「九三井渫不食」至「王明並受其福」。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삼정설불식(九三井渫不食)에서 왕명병수기복(王明並受其福)까지.}
○正義曰:「井渫不食」者,渫,治去穢汙之名也。井被渫治,則清潔可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이 준설(浚渫)됐는데 먹히지 않아서[井渫不食]”라는 것의, ‘설(渫, 파낼 설)’은 오염된 더러움을 다스려 제거하는 이름이며, 우물이 다스려 준설(浚渫)을 했으면 맑고 깨끗하여 먹을 수 있다.
九三處下卦之上,異初六「井泥」之時,得位而有應於上,非「射鮒」之象。
구3(九三)이 하괘(下卦)의 위에 처하여 초육(初六)의 ‘우물이 진흙’의 때와 다르고, 지위를 얻어서 위에 응(應)이 있으니 ‘붕어[鮒]에 쏟아짐’의 모습[象]이 아니다.
但井以上出為用,猶在下體,未有成功。功既未成,井雖渫治,未食也。故曰「井渫不食」也。
다만 우물은 그로써 위로 나가서 쓰임을 되는데 오히려 하체(下體)에 있어서 공(功)을 이루지 못하며, 공(功)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우물이 비록 준설하여 다스리더라도 먹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물이 준설되었으나 먹히지 않는다[井渫不食]”라고 말한 것이다.
「為我心惻」者,為,猶使也。井渫而不見食,猶人脩巳全潔而不見用,使我心中惻愴,故曰「為我心惻」也。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만[爲我心惻]”라는 것의, ‘위(爲)’는 하여금과 같으며, 우물이 준설되었는데도 먹히지 못함은 사람이 자기를 온전히 깨끗하게 닦았는데도 등용받지 못함과 같으니, 나로 하여금 마음 안을 괘롭고 서글프게 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為我心惻]”라고 말한 것이다.
「可用汲,王明,並受其福」者,不同九二下注而不可汲也,有應於上,是可汲也。
“물 긷는데 쓸 수는 있으니, 왕이 밝으면 함께 그 복을 받는다[可用汲 王明 並受其福]”라는 것은, 구2(九二)가 아래로 주입하여서 물을 길을 수 없음과는 같지 않고, 위에 응(應)이 있어서 이는 물을 길을 수 있다.
井之可汲,猶人可用。若不遇明王,則滯其才用。若遭遇賢主,則申其行能賢主既嘉其行,又欽其用,故曰「可用汲,王明,並受其福」也。
우물이 물을 길을 수 있음은 사람이 쓸 수 있음과 같은데, 만약 밝은 왕을 만나지 못하면 그 재주의 쓰임이 침체되지만, 만약 현명한 주인을 만나면 그 행실을 잘 펼쳐서 현명한 주인이 이미 그 행실을 아름답게 하고 또 그를 등용하여 공경하기 때문에 “물 긷는데 쓸 수는 있으니, 왕이 밝으면 함께 그 복을 받는다[可用汲,王明,並受其福]”라고 말한 것이다.」
六四,井甃无咎。 육사(六四)는 우물에 벽돌을 쌓아야 허물이 없다. 【王弼 注】 得位而无應,自守而不能給上,可以脩井之壞,補過而已。 【왕필 주】 지위를 얻었는데 응(應)이 없으니 스스로 지키지만 위에 잘 공급하지 못하고 우물이 무너짐을 수리는 할 수 있어서 잘못을 바로잡을 뿐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六四,井甃無咎」者,案:子夏《傳》曰:「甃亦治也,以磚壘井,脩井之壞,謂之為甃。」六四得位而無應,自守而巳,不能給上,可以脩井崩壞。施之於人,可以脩德補過,故曰「井甃無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육사(六四)는 우물에 벽돌을 쌓아야 허물이 없다[六四 井甃 无咎]”라는 것은, 살펴보건대, ≪자하역전(子夏易傳)≫에 “‘추(甃, 벽돌 추)’는 또한 다스림이며, 벽돌을 가지고 우물에 쌓아 올려 우물의 무너짐을 수리함을 일러서 ‘추(甃)’라 한다.”라고 말했는데, 육4(六四)가 지위를 얻었으나 응(應)이 없으니 스스로 지킬 뿐이며 위에 잘 공급하지 못하며 우물의 무너진 곳을 수리는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베풀어 보면 덕(德)을 닦고 허물을 고칠 수는 있기 때문에 “우물에 벽돌을 쌓아야 허물이 없다[井甃無咎]”라고 말한 것이다.」 |
《象》曰:井甃无咎,脩井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우물에 벽돌을 쌓아야 허물이 없음은, 우물을 수리함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脩井」者,但可脩井之壞,未可上給養人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물을 수리함이다[修井]”라는 것은, 다만 우물의 무너진데를 수리할 수 있지만, 위로 공급하여 사람을 기를 수는 없는 것이다.」 |
九五,井洌 寒泉食。 구오(九五)는 우물이 맑아지니 시원한 샘물을 먹는다. 【王弼 注】 冽,絜也。居中得正,體剛不橈,不食不義,中正高絜,故井冽寒泉,然後乃食也。 【왕필 주】 열(冽, 맑을 열)은 깨끗함이다. 바름을 얻어 가운데[中] 거주하고 몸[體]이 굳세어 굽히지 않으며 의롭지 않으면 먹지 않고 가운데 바르며 높고 깨끗하기 때문에 우물이 맑아지고 차가운 셈이 된 연후에 비로소 먹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餘爻不當貴位,但脩德以待用。九五為卦之主,擇人而用之。洌,絜也。九五居中得正,而體剛直。既體剛直,則不食污穢,必須井絜而寒泉,然後乃食。以言剛正之主,不納非賢,必須行絜才高,而後乃用,故曰「井洌寒泉,食」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나머지 효(爻)는 귀한 지위를 담당하지 않고, 다만 덕(德)을 닦음으로써 등용을 기다며, 구5(九五)는 괘(卦)의 주체가 되어 사람을 가려서 등용을 한다. ‘열(洌, 맑을 렬)’은 깨끗함이다. 구5(九五)가 가운데[中]에 거주하고 바름을 얻어서 몸[體]이 굳세고 곧으니, 이미 몸[體]이 굳세고 곧으면 더러운 것을 먹지 아니하여 반드시 모름지기 우물이 깨끗하고서 시원한 샘물인 연후에 비로소 먹는다. 그로써 굳세고 바름의 주체가 현명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음을 말하며, 반드시 모름지기 행실이 깨끗하고 재주가 높은 이후에야 비로소 등용하기 때문에 “우물이 맑아지니 시원한 샘물을 먹는다[井洌寒泉,食]”라고 말한 것이다.」 |
《象》曰:寒泉之食,中正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차가운 샘물을 먹음은, 가운데가 바름[中正]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以「中正」者,若非居中得正,則任用非賢,不能要待寒泉,然後乃食也。必言「寒泉」者,清而冷者,水之本性,遇物然後濁而溫,故言寒泉以表絜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가운데가 바르다[中正]”으로써 라는 것은, 만약 가운데[中]에 거주함이 아닌데 바름을 얻으면 현자(賢者)가 아닌데 임용함이니 시원한 샘물을 기다린 연후에 비로소 먹음을 잘 바라지 못한다. 반드시 “시원한 샘물[寒泉]”이라 말한 것은, 맑고서 차가운 것은 물의 본성이니, 사람[사물]을 만난 연후에 흐려져서 따뜻해지기 때문에 시원한 샘물을 말하여 그로써 깨끗함을 표현한 것이다.」 |
上六,井收勿幕,有孚元吉。 상육(上六)은 우물을 거두어 덮지 말라, 믿음이 있어야 크게 길하다. 【王弼 注】 處井上極,水已出井,井功大成,在此爻矣,故曰井收也。群下仰之以濟,淵泉由之以通者也。幕,猶覆也。不擅其有,不私其利,則物歸之,往无窮矣,故曰「勿幕,有孚,元吉」也。 【왕필 주】 우물 위쪽 꼭대기에 처하고 물이 이미 우물에서 나가서 우물의 공(功)을 크게 이우어짐이 이 효(爻)에 있다. 그러므로 “우물을 거둔다.”라고 말했다. 아래 무리가 우러러 그로써 구제하니 셈이 넓리 말미암아 그로써 통하는 것이다. 막(幕, 장막 막)은 덮음과 같다. 그의 소유를 독점하지 않고 그 이익을 사사로이 하지 않으면 남[사물]이 귀의하여 감이 무궁하다. 그러므로 “덮지 말라, 믿음이 있어야 크게 길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收,式胄反。凡物可收成者,則謂之收,如五穀之有收也。上六,處井之極,「水巳出井,井功大成」者也,故曰「井收」也。「勿幕有孚,元吉」者,幕,覆也。井功巳成,若能不擅其美,不專其利,不自掩覆,與眾共之,則為物所歸,信能致其大功,而獲元吉,故曰「勿幕有孚,元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수(收, 거둘 수)’는, 식과 위의 반절음이다. 모든 사물이 수확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면 말하기를 ‘수(收)’라 하는데, 오곡(五穀)은 수확이 있는 것과 같다. 상육(上六)은 정(井)괘의 꼭대기에 처하여 물이 이미 우물에서 올라와 우물의 공(功)이 크게 이루어진 자이다. 그러므로 “우물을 거두었다[井收]”라고 말한 것이다. “덮지 말라, 믿음이 있어야 크게 길하다[勿幕 有孚元吉]”라는 것은, ‘막(幕, 장막 막)’은 덮음이며, 우물[井]의 공(功)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만약 그 아름다움을 잘 독점하지 않고 그 이익을 오로지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가리고 덮지 않으며 무리와 더블어 함께 쓰면 남[사물]이 귀의하는 바가 되어서 믿음이 큰 공(功)을 잘 이루어서 크게 길함을 얻기 때문에 “덮지 말라, 믿음이 있어야 크게 길하다[勿幕 有孚元吉]”고 말한 것이다.」 |
《象》曰:元吉 在上大成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크게 길함은, 위에 있어서 크게 이룸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上六所以能獲「元吉」者,只為居「井」之上,並功大成者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상육(上六)이 크게 길함을 잘 얻은 것의 까닭은, 단지 우물[井]의 위에 거주를 하여 아울러 공(功)이 크게 이루어진 것이다.」 |
[孔穎達 疏] 正義曰:收,式胄反。凡物可收成者,則謂之收,如五穀之有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수(收, 거둘 수)’는, 식과 위의 반절음이다. 모든 사물이 수확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면 말하기를 ‘수(收)’라 하는데, 오곡(五穀)은 수확이 있는 것과 같다.
上六,處井之極,「水巳出井,井功大成」者也,故曰「井收」也。
상육(上六)은 정(井)괘의 꼭대기에 처하여 물이 이미 우물에서 올라와 우물의 공(功)이 크게 이루어진 자이다. 그러므로 “우물을 거두었다[井收]”라고 말한 것이다.
「勿幕有孚,元吉」者,幕,覆也。井功巳成,若能不擅其美,不專其利,不自掩覆,與眾共之,則為物所歸,信能致其大功,而獲元吉,故曰「勿幕有孚,元吉」也。
“덮지 말라, 믿음이 있어야 크게 길하다[勿幕 有孚元吉]”라는 것은, ‘막(幕, 장막 막)’은 덮음이며, 우물[井]의 공(功)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만약 그 아름다움을 잘 독점하지 않고 그 이익을 오로지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가리고 덮지 않으며 무리와 더블어 함께 쓰면 남[사물]이 귀의하는 바가 되어서 믿음이 큰 공(功)을 잘 이루어서 크게 길함을 얻기 때문에 “덮지 말라, 믿음이 있어야 크게 길하다[勿幕 有孚元吉]”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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