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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孟子)』

◎ 3.등문공(滕文公)-下

1章

○陳代曰: “不見諸侯,宜若小然,今一見之,大則以王,小則以霸。且志曰: ‘枉尺而直尋。’ 宜若可爲也。”
◁孟子曰: “昔齊景公田,招虞人以旌,不至,將殺之。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孔子奚取焉? 取非其招不往也。如不待其招而往,何哉?
◁且夫枉尺而直尋者,以利言也。如以利,則枉尋直尺而利,亦可爲與?
◁昔者趙簡子使王良與嬖奚乘,終日而不獲一禽。嬖奚反命曰: ‘天下之賤工也。’ 或以告王良。良曰: ‘請復之。’ 强而後可,一朝而獲十禽。嬖奚反命曰: ‘天下之良工也。’ 簡子曰: ‘我使掌與女乘。’ 謂王良。良不可,曰: ‘吾爲之範我馳驅,終日不獲一,爲之詭遇,一朝而獲十。《詩》云: ‘不失其馳,舍矢如破。’我不貫與小人乘,請辭’
◁御者且羞與射者比,比而得禽獸,雖若丘陵,弗爲也。如枉道而從彼,何也? 且子過矣,枉己者,未有能直人者也。”
[맹자(孟子)의 제자] 진대(陳代)가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만나지 않으시니 마땅히 [덕이] 작은 듯 합니다. 이제 한 번 만나보시면 크게는 곧 그로써 왕업(王業)을 이루고, 작게는 패업(霸業)을 이룹니다. 또 《옛 기록[誌]》에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라고 했는데, 실천 할 수 있을 듯 합니다.”라고 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사냥할 적에, 정(旌)으로 우인(虞人; 사냥터 관리인)을 불렀으나 오지 않자,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네. ‘지사(志士)는 시신(屍身)이 도랑에 버려지더라도 [의리(義理)를] 잊지 않으며, 용사(勇士)는 자기 머리를 잃더라도 [의리(義理)를] 잊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공자(孔子)께서 어찌 그것을 취하셨겠는가? 취하심은, 그 [격에 맞는]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았음일세. 만약 그[바른]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간다면, 어찌 되겠는가?
또 그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것은 이익으로써 말함인데, 만약 이익으로써 라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펴더라도 이롭다면 또한 실천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진(晉)나라 대부] 조간자(趙簡子)가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폐해(嬖奚)와 함께 [사냥하는] 수레를 탓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고서, 폐해(嬖奚)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왕량은] 천하에 형편없는 마부입니다.’라고 하였다네.
어떤이가 그[말]로써 왕량에게 전하자, 왕량이 말하기를 "그것[사냥]을 다시하도록 청합니다."라고 하면서 강요한 뒤에야 승낙을 받았는데, 하루 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다네. 폐해(嬖奚)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왕량은] 천하의 훌륭한 마부입니다.’라고 하니, 조간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王良]에게 수레 모는 일을 관장(管掌)하도록 하겠소.’ 라고 하였는데,
왕량(王良)이 일컫기를 '저는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것[사냥]을 하는데 나의 말 모는 법대로 했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나, 그것[사냥]을 하는데 속이고서 잡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았습니다.
《시(詩).거공(車攻)篇》에 이르기를 {그 말달리는 [법도를] 잃지 않으니 쏜 화살이 깨뜨리는 듯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저는 소인(小人)과 함께 수레 타는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청하건데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네.
말 모는 자가 또 활 쏘는 자에게 더블어 친해짐이 부끄러움인데, 친해져서 날짐승 길짐승을 비록 산더미 같이 잡더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네. 만약 도(道)를 굽혀서 저[제후]를 따른다면 어찌되며, 또 자네의 잘못이 된다네. 자기를 굽힌 자가 남을 바르게 한 자는 없었다네.”

◎ 등문공(滕文公)-下 1

陳代曰:「不見諸侯,宜若小然。今一見之,大則以王,小則以霸。且《誌》曰『枉尺而直尋』,宜若可為也。」

<[맹자(孟子)의 제자] 진대(陳代)가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만나지 않으시니 마땅히 [덕이] 작은 듯 합니다. 이제 한 번 만나보시면 크게는 곧 그로써 왕업(王業)을 이루고, 작게는 패업(霸業)을 이룹니다. 또 《옛 기록[誌]》에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라고 했는데, 실천할 수 있을 듯 합니다.”라고 했다.>

 

孟子曰:「昔齊景公田,招虞人以旌,不至,將殺之。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사냥할 적에, 정(旌)으로 우인(虞人; 사냥터 관리인)을 불렀으나 오지 않자,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네. >

譯註 1: 『孟子』 萬章下-2篇⇒曰: “敢問招虞人何以?” 曰: “以皮冠,庶人以旃,士以旂,大夫以旌。以大夫之招招虞人,虞人死不敢往,以士之招招庶人,庶人豈敢往哉?

『맹자』 만장下-2篇⇒[제자 만장이] 말했다. “감히 우인을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지 묻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냥할 때 쓰는] 가죽관[皮冠]으로써 [불러야] 하고, 보통 사람은 [무늬 없는 모직] 깃발로써 부르며, 관리는 [용을 그린] 붉은 깃발로써 부르고, 대부는 [깃털로 장식된] 깃발로 불러야 한다. 대부를 부름[깃발] 으로써 우인(虞人)을 부르니 우인은 죽더라도 감히 가지 못한 것이다. 관리를 부르는데 어찌 보통 사람이 감히 갈 수 있겠는가?

『誌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孔子奚取焉?取非其招不往也。如不待其招而往,何哉?

<‘지사(志士)는 시신(屍身)이 도랑에 버려지더라도 [의리(義理)를] 잊지 않으며, 용사(勇士)는 자기 머리를 잃더라도 [의리(義理)를] 잊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공자(孔子)께서 어찌 그것을 취하셨겠는가? 취하심은, 그 [격에 맞는]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았음일세. 만약 그[바른]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간다면, 어찌 되겠는가?>

 

且夫枉尺而直尋者,以利言也。如以利,則枉尋直尺而利,亦可為與?

<또 그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것은 이익으로써 말함인데, 만약 이익으로써 라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펴더라도 이롭다면 또한 실천 할 수 있겠는가?>

 

昔者趙簡子使王良與嬖奚乘,終日而不獲一禽,嬖奚反命曰:『天下之賤工也。』

<옛날에 [진(晉)나라 대부] 조간자(趙簡子)가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폐해(嬖奚)와 함께 [사냥하는] 수레를 탓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고서, 폐해(嬖奚)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왕량은] 천하에 형편없는 마부입니다.’라고 하였다네. >

 

或以告王良,良曰:『請複之。』

<어떤이가 그[말]로써 왕량에게 전하자, 왕량이 말하기를 "그것[사냥]을 다시하도록 청합니다."라고 하면서 >

 

強而後可,

<강요한 뒤에야 승낙을 받았는데, >

 

一朝而獲十禽。嬖奚反命曰:『天下之良工也。』

<하루 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다네. 폐해(嬖奚)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왕량은] 천하의 훌륭한 마부입니다.’라고 하니, >

 

簡子曰:『我使掌與女乘。』

<조간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王良]에게 수레 모는 일을 관장(管掌)하도록 하겠소.’ 라고 하였는데, >

 

謂王良,良不可,

<왕량(王良)이 일컫기를 '저는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曰:『吾為之範我馳驅,終日不獲一;為之詭遇,一朝而獲十。

<말하기를 ‘내가 그것[사냥]을 하는데 나의 말 모는 법대로 했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나, 그것[사냥]을 하는데 속이고서 잡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았습니다. >

 

《詩》云:不失其馳,舍矢如破。我不貫與小人乘,請辭。』

<《시(詩).거공(車攻)篇》에 이르기를 {그 말달리는 [법도를] 잃지 않으니 쏜 화살이 깨뜨리는 듯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저는 소인(小人)과 함께 수레 타는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청하건데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네.>

 

禦者且羞與射者比,比而得禽獸,雖若丘陵,弗為也。如枉道而從彼,何也?

<말 모는 자가 또 활 쏘는 자에게 더블어 친해짐이 부끄러움인데, 친해져서 날짐승 길짐승을 비록 산더미 같이 잡더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네. 만약 도(道)를 굽혀서 저[제후]를 따른다면 어찌되며, >

 

且子過矣!枉己者,未有能直人者也。」

<또 자네의 잘못이 된다네. 자기를 굽힌 자가 남을 바르게 한 자는 없었다네.”>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2章

○景春曰: “公孫衍、張儀豈不誠大丈夫哉? 一怒而諸侯懼,安居而天下熄。”
◁孟子曰: “是焉得爲大丈夫乎? 子未學禮乎? 丈夫之冠也,父命之,女子之嫁也,母命之,往送之門,戒之曰: ‘往之女家,必敬必戒,無違夫子!’ 以順爲正者,妾婦之道也。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
[종횡가(縱橫家)] 경춘(景春)이 말하였다.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는 어찌 진실한 대장부(大丈夫)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노하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조용히 살면 천하 [전란(戰亂)]의 불이 꺼집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들을 어찌 대장부라 하겠소? 그대는 예(禮)를 배우지 않았소? 남자의 관례(冠禮)는 아버지가 가르침을 주시고, 여자가 시집갈 적에는 어머니가 가르침을 주시는데, 갈적에 문에서 보내며 훈계(訓戒)를 하면서 말하기를 ‘가거든 너의 집안에서 반드시 공경(恭敬)하고 반드시 경계(警戒)하여 남편을 어기지 말라.'하시니, 따름으로써 바름을 삼는 것이 아녀자의 도리이며,
천하의 넓은 집[仁]에 살고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큰 도(道)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블어 말미암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며, 부유하고 귀하더라도 능히 음탕(淫蕩)하지 않고, 가난하고 천(賤)해져도 [의리(義理)를] 잘 옮기지 않으며, 위협(威脅)하는 무력(武力)에 잘 굽히지 않으니, 이러함을 일컬어서 대장부(大丈夫)라 하는 것이오.”

◎ 등문공(滕文公)-下 2

景春曰:「公孫衍、張儀豈不誠大丈夫哉,一怒而諸侯懼,安居而天下熄。」

<[종횡가(縱橫家)] 경춘(景春)이 말하였다.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는 어찌 진실한 대장부(大丈夫)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노하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조용히 살면 천하 [전란(戰亂)]의 불이 꺼집니다.”>

 

孟子曰:「是焉得為大丈夫乎?子未學禮乎?丈夫之冠也,父命之;女子之嫁也,母命之。往送之門,戒之曰:『往之女家,必敬必戒,無違夫子。』以順為正者,妾婦之道也。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들을 어찌 대장부라 하겠소? 그대는 예(禮)를 배우지 않았소? 남자의 관례(冠禮)는 아버지가 가르침을 주시고, 여자가 시집갈 적에는 어머니가 가르침을 주시는데, 갈적에 문에서 보내며 훈계(訓戒)를 하면서 말하기를 ‘가거든 너의 집안에서 반드시 공경(恭敬)하고 반드시 경계(警戒)하여 남편을 어기지 말라.'하시니, 따름으로써 바름을 삼는 것이 아녀자의 도리이며,>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誌與民由之,不得誌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

<천하의 넓은 집[仁]에 살고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큰 도(道)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블어 말미암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며, 부유하고 귀하더라도 능히 음탕(淫蕩)하지 않고, 가난하고 천(賤)해져도 [의리(義理)를] 잘 옮기지 않으며, 위협(威脅)하는 무력(武力)에 잘 굽히지 않으니, 이러함을 일컬어서 대장부(大丈夫)라 하는 것이오.”>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3章

○周霄問曰: “古之君子仕乎?” 孟子曰: “仕。《傳》曰: ‘孔子三月無君,則皇皇如也,出疆必載質【贄同】。’ 公明儀曰: ‘古之人三月無君,則弔。’”
◁“三月無君則弔,不以急乎?”
◁曰: “士之失位也,猶諸侯之失國家也。《禮》曰: ‘諸侯耕助以供粢盛,夫人蠶繅,以爲衣服。犧牲不成,粢盛不潔,衣服不備,不敢以祭。惟士無田,則亦不祭。’ 牲殺、器皿、衣服不備,不敢以祭,則不敢以宴,亦不足弔乎?”
◁“出疆必載質,何也。”
◁曰: “士之仕也。猶農夫之耕也,農夫豈爲出疆舍其耒耜哉?” 曰: “晉國亦仕國也,未嘗聞仕如此其急。仕如此其急也,君子之難仕,何也?” 曰: “丈夫生而願爲之有室,女子生而願爲之有家,父母之心,人皆有之。不待父母之命、媒妁之言,鑽穴隙相窺,踰牆相從,則父母國人皆賤之。古之人未嘗不欲仕也,又惡不由其道。不由其道而往者,與鑽穴隙之類也。”
[위(魏)나라 사람] 주소(周霄)가 물었다. “옛날의 군자(君子)는 벼슬을 하였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벼슬했소. 《전(傳)》에 이르기를 ‘공자(孔子)께서는 군주가 3달 없으면 급한 듯 허둥지둥[황황(遑遑)] 하셨고, 국경을 나가실 적에는 반드시 폐백[贄, 폐백 지]을 실으셨다.’라고 하셨고,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옛사람은 군주가 3달 없으면 위문했다.’라고 하였소.”
[주소(周霄)가 물었다.] “군주가 3달 없으면 위문함은 급함으로서가 아닙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관리[士]가 지위를 잃음은 제후(諸侯)가 나라와 집안을 잃음과 같소. 《예(禮)》에 이르기를 ‘제후는 도움받아[조법(助法)으로] 농사 지으며 그로써 제사[자(粢;기장)]를 성대하게 받들고, 부인(夫人)은 누에 고치를 켜서 그로써 의복(衣服)을 만드는데, 희생(犧牲)이 자라지 않고 제사 곡식[자성(粢盛)]이 정결하지 않으며, 의복(衣服)을 갖추지 못하면 감히 그로써는 제사 지내지 못한다.'하였고, '오직 관리가 제전(祭田)이 없으면 또한 제사 지내지 못한다.’라고 하였소. 희생(犧牲)을 잡고 제사 그릇[器皿]과 의복(衣服)을 갖추지 못하여 감히 그로써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감히 그로써는 잔치도 못하니, 또한 위문함에 넉넉하지 않겠소?”
[주소(周霄)가 물었다.] “국경을 나갈 적에 반드시 폐백[贄, 폐백 지]을 실음은 어째서 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관리[士]의 벼슬함은 농부의 농사 지음과 같은데, 농부가 어찌 쟁기와 보습을 버리고 국경을 나가려고 하겠소?”
[주소(周霄)가] 말했다. “진(晉)의 나라도 또한 나라에 벼슬하지만, 아직 벼슬함이 이와 같이 급하다 함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벼슬함이 이와 같이 급하다면 군자가 벼슬을 어려워 함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부(丈夫)가 태어나면 그를 위하여 아내[室]가 있기를 원하고, 여자(女子)가 태어나면 그를 위하여 남편[家]이 있기를 원함은 부모의 마음이어서, 사람은 모두 그것[원하는 마음]이 있는데, 부모의 명령과 중매쟁이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을 뚫고 틈으로 서로 엿보며 담을 넘어가서 서로 따른다면, 부모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길 것이오. 옛 사람들이 벼슬을 바라지 않음은 아니지만, 또 그[바른] 도(道)를 말미암지 않음을 미워하였으니, 그 도를 말미암지 않으면서 찾아가는 것은 구멍을 뚫고 틈으로 더블어 엿보는 부류[類]요.”

◎ 등문공(滕文公)-下 3

周霄問曰:「古之君子仕乎?」

<[위(魏)나라 사람] 주소(周霄)가 물었다. “옛날의 군자(君子)는 벼슬을 하였습니까?”>

 

孟子曰:「仕。《傳》曰:『孔子三月無君,則皇皇如也,出疆必載質。』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벼슬했소. 《전(傳)》에 이르기를 ‘공자(孔子)께서는 군주가 석달[三月] 없으면 급한 듯 허둥지둥[황황(遑遑)] 하셨고, 국경을 나가실 적에는 반드시 폐백[贄, 폐백 지]을 실으셨다.’라고 하셨고, >

 

公明儀曰:『古之人三月無君則吊。』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옛사람은 군주가 석달[三月] 없으면 위문했다.’라고 하였소.”>

 

「三月無君則吊,不以急乎?」

<[주소(周霄)가 물었다.] “군주가 석달[三月] 없으면 위문함은 급함으로서가 아닙니까?”>

 

曰:「士之失位也,猶諸侯之失國家也。《禮》曰:『諸侯耕助,以供粢盛;夫人蠶繅,以為衣服。犧牲不成,粢盛不絜,衣服不備,不敢以祭。』『惟士無田,則亦不祭。』牲殺、器皿、衣服不備,不敢以祭,則不敢以宴,亦不足吊乎?」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관리[士]가 지위를 잃음은 제후(諸侯)가 나라와 집안을 잃음과 같소. 《예(禮)》에 이르기를 ‘제후는 도움받아[조법(助法)으로] 농사 지으며 그로써 제사[자(粢;기장)]를 성대하게 받들고, 부인(夫人)은 누에 고치를 켜서 그로써 의복(衣服)을 만드는데, 희생(犧牲)이 자라지 않고 제사 곡식[자성(粢盛)]이 정결하지 않으며, 의복(衣服)을 갖추지 못하면 감히 그로써는 제사 지내지 못한다.'하였고, '오직 관리가 제전(祭田)이 없으면 또한 제사 지내지 못한다.’라고 하였소. 희생(犧牲)을 잡고 제사 그릇[器皿]과 의복(衣服)을 갖추지 못하여 감히 그로써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감히 그로써는 잔치도 못하니, 또한 위문함에 넉넉하지 않겠소?”>

 

「出疆必載質,何也?」

<[주소(周霄)가 물었다.] “국경을 나갈 적에 반드시 폐백[贄, 폐백 지]을 실음은 어째서 입니까?”>

 

曰:「士之仕也,猶農夫之耕也。農夫豈為出疆舍其耒耜哉!」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관리[士]의 벼슬함은 농부의 농사 지음과 같은데, 농부가 어찌 쟁기와 보습을 버리고 국경을 나가려고 하겠소?”>

 

曰:「晉國亦仕國也,未嚐聞仕如此其急,仕,如此其急也。君子之難仕,何也?」

<[주소(周霄)가] 말했다. “진(晉)의 나라도 또한 나라에 벼슬하지만, 아직 벼슬함이 이와 같이 급하다 함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벼슬함이 이와 같이 급하다면 군자가 벼슬을 어려워 함은 어째서입니까?” >

 

曰:「丈夫生而願為之有室,女子生而願為之有家。父母之心,人皆有之。不待父母之命、媒妁之言,鑽穴隙相窺,逾牆相從,則父母國人皆賤之。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부(丈夫)가 태어나면 그를 위하여 아내[室]가 있기를 원하고, 여자(女子)가 태어나면 그를 위하여 남편[家]이 있기를 원함은 부모의 마음이어서, 사람은 모두 그것[원하는 마음]이 있는데, 부모의 명령과 중매쟁이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을 뚫고 틈으로 서로 엿보며 담을 넘어가서 서로 따른다면, 부모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길 것이오. >

 

古之人未嚐不欲仕也,又惡不由其道。不由其道而往者,與鑽穴隙之類也。」

<옛 사람들이 벼슬을 바라지 않음은 아니지만, 또 그[바른] 도(道)를 말미암지 않음을 미워하였으니, 그 도를 말미암지 않으면서 찾아가는 것은 구멍을 뚫고 틈으로 더블어 엿보는 부류[類]요.”>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4章

○彭更問曰: “後車數十乘,從者數百人,以傳食於諸侯,不以泰乎?” 孟子曰: “非其道,則一簞食不可受於人,如其道,則舜受堯之天下,不以爲泰,子以爲泰乎?”
◁曰: “否。士無事而食,不可也。”
◁曰: “子不通功易事,以羨補不足,則農有餘粟,女有餘布,子如通之,則梓匠輪輿皆得食於子。於此有人焉,入則孝,出則悌,守先王之道,以待後之學者,而不得食於子,子何尊梓匠輪輿而輕爲仁義者哉?”
◁曰: “梓匠輪輿,其志將以求食也,君子之爲道也。其志亦將以求食與?” 曰: “子何以其志爲哉? 其有功於子,可食而食之矣。且子食志乎? 食功乎?” 曰: “食志。”
◁曰: “有人於此,毁瓦畫墁,其志將以求食也。則子食之乎?” 曰: “否。”
◁曰: “然則子非食志也,食功也。”
[맹자의 제자] 팽경(彭更)이 여쭈었다.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이고 따르는 자가 수백 명인데, [역참(驛站)을] 전함으로써 제후들에게 밥 얻어먹기에는 너무 과하[지나치]지 않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정당한 도리(道理)가 아니라면 한 그릇의 밥이라도 남에게 받아서는 안 되지만, 만일 [정당한] 도리라면 순(舜)임금께서 요(堯)임금의 천하를 받으신 것도 과하다 여기지 않는데, 자네는 이것을 과하[지나치]다고 여기는가?”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관리가 하는 일 없으면서 밥먹으면 불가함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네가 공로(功勞)를 통하여 일을 바꾸고, 남음을 가지고 부족함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농부는 남는 곡식이 있고, 여자는 남는 베가 있다네. 자네가 만약 그것[교역]에 통한다면 목수들과 수레 기술자들이 모두 자네 덕에 밥 얻어 먹게 된다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면 공손하며, 선왕(先王)의 도를 지키고 그로써 후세의 학자를 기다리는데도 자네에게서 밥을 얻어먹지 못할 것이니, 자네는 어찌 목수들과 수레 기술자들은 높이면서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자를 가벼이 하는가?”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목수들과 수레 기술자들은 그[일 하는] 뜻이 장차 그로써 밥을 구함이지만,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이는 그 뜻이 또한 장차 그로써 밥을 구함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는 어찌 그로써 그 뜻을 따지는가? 그 자네에게 공(功)이 있음으로 밥 먹을 수 있으니 밥을 먹인 것이네. 또 자네는 뜻[誌]을 따져서 밥 먹이는가? 공(功)을 따져서 밥 먹이는가?”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뜻[誌]을 따져서 밥먹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기와를 깨뜨리고 [담에] 흙손으로 낙서하며 장차 그 뜻[誌]으로써 밥을 구한다면, 자네는 밥을 먹여주겠는가?”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네는 뜻[誌]을 따져서 밥먹여 줌이 아니라, 공(功)을 따져서 밥먹여 주었네.”

◎ 등문공(滕文公)-下 4

彭更問曰:「後車數十乘,從者數百人,以傳食於諸侯,不以泰乎?」

<[맹자의 제자] 팽경(彭更)이 여쭈었다.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이고 따르는 자가 수백 명인데, [역참(驛站)을] 전함으로써 제후들에게 밥 얻어먹기에는 너무 과하[지나치]지 않습니까?” >

 

孟子曰:「非其道,則一簞食不可受於人。如其道,則舜受堯之天下,不以為泰。子以為泰乎?」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정당한 도리(道理)가 아니라면 한 그릇의 밥이라도 남에게 받아서는 안 되지만, 만일 [정당한] 도리라면 순(舜)임금께서 요(堯)임금의 천하를 받으신 것도 과하다 여기지 않는데, 자네는 이것을 과하[지나치]다고 여기는가?”>

 

曰:「否!士無事而食,不可也。」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관리가 하는 일 없으면서 밥먹으면 불가함입니다.”>

 

曰:「子不通功易事,以羨補不足,則農有餘粟,女有餘布。子如通之,則梓、匠、輪、輿,皆得食於子。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네가 공로(功勞)를 통하여 일을 바꾸고, 남음을 가지고 부족함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농부는 남는 곡식이 있고, 여자는 남는 베가 있다네. 자네가 만약 그것[교역]에 통한다면 목수들과 수레 기술자들이 모두 자네 덕에 밥 얻어 먹게 된다네. >

譯註 1: 『周禮』 <冬官 考工記>⇒凡攻木之工七,攻金之工六,攻皮之工五,設色之工五,刮摩之工五,搏埴之工二。攻木之工:輪、輿、弓、廬、匠、車、梓。

『주례(周禮)』 <동관 고공기(冬官 考工記)>⇒무릇 나무를 다스리는 공(工: 기술자)은 7가지가 있고, 쇠를 다스리는 공(工)은 6가지가 있으며, 가죽을 다스리는 공(工)은 5가지가 있고, 빛깔인 색을 만드는 공(工)은 5가지가 있으며, 갈아서 윤이 나게 하는 공(工)은 5가지가 있고, 찰흙을 짓이겨서 만드는 공(工)은 2가지 [직업이] 있다. 나무를 다스리는 공인(工人)은, 윤인(輪人), 여인(輿人). 궁인(弓人), 여인(廬人)과 장인(匠人), 거인(車人), 재인(梓人)이다.

 

於此有人焉,入則孝,出則悌,守先王之道,以待後之學者,而不得食於子。子何尊梓、匠、輪、輿而輕為仁義者哉?」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면 공손하며, 선왕(先王)의 도를 지키고 그로써 후세의 학자를 기다리는데도 자네에게서 밥을 얻어먹지 못할 것이니, 자네는 어찌 목수들과 수레 기술자들은 높이면서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자를 가벼이 하는가?”>

 

曰:「梓、匠、輪、輿,其誌將以求食也。君子之為道也,其誌亦將以求食與?」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목수들과 수레 기술자들은 그[일 하는] 뜻이 장차 그로써 밥을 구함이지만,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이는 그 뜻이 또한 장차 그로써 밥을 구함입니까?”>

 

曰:「子何以其誌為哉?其有功於子,可食而食之矣。且子食誌乎,食功乎?」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는 어찌 그로써 그 뜻을 따지는가? 그 자네에게 공(功)이 있음으로 밥 먹을 수 있으니 밥을 먹인 것이네. 또 자네는 뜻[誌]을 따져서 밥 먹이는가? 공(功)을 따져서 밥 먹이는가?” >

 

曰:「食誌。」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뜻[誌]을 따져서 밥먹입니다.”>

 

曰:「有人於此,毀瓦畫墁,其誌將以求食也,則子食之乎?」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기와를 깨뜨리고 [담에] 흙손으로 낙서하며 장차 그 뜻[誌]으로써 밥을 구한다면, 자네는 밥을 먹여주겠는가?” >

 

曰:「否。」

<[팽경(彭更)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曰:「然則子非食誌也,食功也。」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네는 뜻[誌]을 따져서 밥먹여 줌이 아니라, 공(功)을 따져서 밥먹여 주었네.”>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5章

○萬章問曰: “宋,小國也,今將行王政,齊、楚惡而伐之,則如之何?”
◁孟子曰: “湯居亳,與葛爲鄰,葛伯放而不祀。湯使人問之曰: ‘何爲不祀?’ 曰: ‘無以供犧牲也。’ 湯使遺之牛羊。葛伯食之,又不以祀。湯又使人問之曰: ‘何爲不祀?’ 曰: ‘無以供粢盛也。’ 湯使亳衆往爲之耕,老弱饋食,葛伯帥其民,要其有酒食黍稻者奪之,不授者殺之。有童子以黍肉餉,殺而奪之。《書》曰: ‘葛伯仇餉。’ 此之謂也。
◁爲其殺是童子而征之,四海之內皆曰: ‘非富天下也,爲匹夫匹婦復讎也。’
◁‘湯始征,自葛載,’ 十一征而無敵於天下。東面而征,西夷怨,南面而征,北狄怨,曰: ‘奚爲後我?’ 民之望之,若大旱之望雨也。歸市者弗止,芸者不變,誅其君,弔其民,如時雨降。民大悅。《書》曰: ‘徯我后,后來其無罰!’【見前篇。】
◁‘有攸不爲臣,東征,綏厥士女,篚厥玄黃,紹我周王見休,惟臣附于大邑周。’【與《書》文不類。】 其君子實玄黃于篚以迎其君子,其小人簞食壺漿以迎其小人,救民於水火之中,取其殘而已矣。
◁《太誓》曰: ‘我武惟揚,侵于之疆,則取于殘,殺伐用張,于湯有光。’
◁不行王政云爾,苟行王政,四海之內,皆擧首而望之,欲以爲君,齊、楚雖大,何畏焉?”
[맹자의 제자] 만장(萬章)이 여쭈었다. “송(宋)나라는 작은 나라이고, 지금 왕도정치를 행하려 하는데,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미워하여 공격을 하면 어찌합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탕왕(湯王)께서 박읍(亳邑)에 사실적에 갈(葛)나라와 더블어 이웃을 하였는데, 갈나라 군주가 방탕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탕왕께서 사람을 보내시어 그것을 물으시기를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가?’라고 하시니, [갈나라 군주가] 대답하기를 ‘희생(犧牲)을 바칠 수 없어서 입니다.’라고 하니, 탕왕께서 소와 양을 보내주게 하셨는데, 갈나라 군주가 그것을 잡아먹고 또 그로써 제사 지내지 않았다네.
탕왕께서 또 사람을 시켜 그것을 물으시기를 ‘무엇 하느라고 제사 지내지 않았는가?’ 하시니, [갈나라 군주가] 대답하기를 ‘[제사에] 바칠 곡식이 없어서 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탕왕께서 박읍의 여럿을 시켜 [갈나라에] 가서 밭을 갈아주게 하시니, 노약자들이 밥을 내다 먹였는데, 갈(葛)나라 군주가 그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술과 밥과 기장과 벼가 있는 자에게 요구하여 그것을 빼앗았는데 주지 않는 자는 죽였으며, 기장밥과 고기로써 건량[들밥]을 내온 아이가 있었는데 죽이고서 그것을 빼앗았다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갈(葛)나라 군주가 들밥을 [내온 자를] 원수로 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가리킴일세.
[탕왕께서] 그[갈나라 군주]가 이 어린아이를 죽임으로 하여서 [갈나라를] 정벌하셨는데, 온 천하 안에서 모두 말하기를 ‘[탕왕께서] 천하를 탐내서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복수(復讐)해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네.
탕왕께서 갈(葛)나라로 부터 정벌을 시작하여 거듭 열한 번을 정벌하면서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었으며, 동쪽을 향하여 정벌하면 서쪽 오랑캐가 원망하고, 남쪽을 향하여 정벌하면 북쪽 오랑캐가 원망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나라]를 뒤에 [정벌]하시는가.’라고 하였으며, 백성들의 바라는 것이 큰 가뭄에 비를 바람과 같았고, 시장에 돌아가는 자들이 그치지 않았으며, 김매는 자들이 변하지 않았는데, [탕왕께서] 그[포악한] 군주를 주벌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시니, 때맞은 비가 내린 듯이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네.
《서경》 〈중훼지고〉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님을 기다리는데, 우리 임금님께서 오시면 형벌이 없으시겠지.’라고 하였으며, [서경 무성에] ‘복종하지 않으며 오직 신하되지 않은 이가 있으면 동쪽을 정벌하시어 그[나라]의 관리와 여사들을 편안하게 해주시니, 그들이 검은색과 황색[비단]을 광주리에 담고, 우리 주(周)나라 왕의 휴덕(休德)을 보고 이으려고 오직 신하로서 큰 도읍[大邑] 주(周)나라에 붙었다.’라고 하였는데, 그[갈나라] 군자(君子)들이 광주리에 검은색과 황색[비단]을 가득 담아서 그로써 그[주나라]의 군자들을 맞이하였으며, 그 소인(小人)들은 대그릇 밥과 병의 음료를 담아서 그로써 그[주나라]의 군자들을 맞이하였으니, 물과 불의 재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여 그 잔인한 이만 벌줬[취했]을 뿐이었다네.
《서경.태서(太誓)》에 이르기를 ‘우리 무(武)왕께서 떨쳐 저[주왕(紂王)]의 국경을 침략하여, 곧 잔악한 이만 취해서 죽이고 벌함을 베풀어 쓰니, 탕(湯)왕보다 빛남이 있었다.’라고 하였네.
왕도정치를 행하지 않았음을 일러줌인데, 진실로 왕도정치를 행한다면, 온 천하 안의 모두가 머리를 들고서 그를 바라보며 군주로 여기기를 바라는데,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비록 크더라도 어찌 그들이 두려워 하겠는가?”

◎ 등문공(滕文公)-下 5

萬章問曰:「宋,小國也,今將行王政,齊、楚惡而伐之,則如之何?」

<[맹자의 제자] 만장(萬章)이 여쭈었다. “송(宋)나라는 작은 나라이고, 지금 왕도정치를 행하려 하는데,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미워하여 공격을 하면 어찌합니까?”>

 

孟子曰:「湯居亳,與葛為鄰。葛伯放而不祀,湯使人問之,曰:『何為不祀?』曰:『無以供犧牲也。』湯使遺之牛羊,葛伯食之,又不以祀。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탕왕(湯王)께서 박읍(亳邑)에 사실적에 갈(葛)나라와 더블어 이웃을 하였는데, 갈나라 군주가 방탕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탕왕께서 사람을 보내시어 그것을 물으시기를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가?’라고 하시니, [갈나라 군주가] 대답하기를 ‘희생(犧牲)을 바칠 수 없어서 입니다.’라고 하니, 탕왕께서 소와 양을 보내주게 하셨는데, 갈나라 군주가 그것을 잡아먹고 또 그로써 제사 지내지 않았다네.>

 

湯又使人問之曰:『何為不祀?』曰:『無以供粢盛也。』湯使亳眾往為之耕,老弱饋食。葛伯率其民,要其有酒食黍稻者奪之,不授者殺之。有童子以黍肉餉,殺而奪之。《書》曰:『葛伯仇餉。』此之謂也。

<탕왕께서 또 사람을 시켜 그것을 물으시기를 ‘무엇 하느라고 제사지내지 않았는가?’ 하시니, [갈나라 군주가] 대답하기를 ‘[제사에] 바칠 곡식이 없어서 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탕왕께서 박읍의 여럿을 시켜 [갈나라에] 가서 밭을 갈아주게 하시니, 노약자들이 밥을 내다 먹였는데, 갈(葛)나라 군주가 그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술과 밥과 기장과 벼가 있는 자에게 요구하여 그것을 빼앗았는데 주지 않는 자는 죽였으며, 기장밥과 고기로써 건량[들밥]을 내온 아이가 있었는데 죽이고서 그것을 빼앗았다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갈(葛)나라 군주가 들밥을 [내온 자를] 원수로 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가리킴일세.>

 

為其殺是童子而征之,四海之內皆曰:『非富天下也,為匹夫匹婦複讎也。』

<[탕왕께서] 그[갈나라 군주]가 이 어린아이를 죽임으로 하여서 [갈나라를] 정벌하셨는데, 온 천하 안에서 모두 말하기를 ‘[탕왕께서] 천하를 탐내서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복수(復讐)해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네.>

 

湯始征,自葛載,十一征而無敵於天下。東麵而征,西夷怨;南麵而征,北狄怨。曰:『奚為後我?』民之望之,若大旱之望雨也。歸市者弗止,芸者不變,誅其君,吊其民,如時雨降,民大悅。《書》曰:『徯我後,後來其無罰!』

<탕왕께서 갈(葛)나라로 부터 정벌을 시작하여 거듭 열한 번을 정벌하면서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었으며, 동쪽을 향하여 정벌하면 서쪽 오랑캐가 원망하고, 남쪽을 향하여 정벌하면 북쪽 오랑캐가 원망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나라]를 뒤에 [정벌]하시는가.’라고 하였으며, 백성들의 바라는 것이 큰 가뭄에 비를 바람과 같았고, 시장에 돌아가는 자들이 그치지 않았으며, 김매는 자들이 변하지 않았는데, [탕왕께서] 그[포악한] 군주를 주벌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시니, 때맞은 비가 내린 듯이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네. 《서경》 〈중훼지고〉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님을 기다리는데, 우리 임금님께서 오시면 형벌이 없으시겠지.’라고 하였으며,>

 

『有攸不惟臣,東征,綏厥士女,匪厥玄黃,紹我周王見休,惟臣附於大邑周。』其君子實玄黃於匪,以迎其君子;其小人簞食壺漿,以迎其小人。救民於水火之中,取其殘而已矣。

<[서경 무성에] ‘복종하지 않으며 오직 신하되지 않은 이가 있으면 동쪽을 정벌하시어 그[나라]의 관리와 여사들을 편안하게 해주시니, 그들이 검은색과 황색[비단]을 광주리에 담고, 우리 주(周)나라 왕의 휴덕(休德)을 보고 이으려고 오직 신하로서 큰 도읍[大邑] 주(周)나라에 붙었다.’라고 하였는데, 그[갈나라] 군자(君子)들이 광주리에 검은색과 황색[비단]을 가득 담아서 그로써 그[주나라]의 군자들을 맞이하였으며, 그 소인(小人)들은 대그릇 밥과 병의 음료를 담아서 그로써 그[주나라]의 군자들을 맞이하였으니, 물과 불의 재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여 그 잔인한 이만 벌줬[취했]을 뿐이었다네.>

 

《太誓》曰:『我武惟揚,侵於之疆,則取於殘,殺伐用張,於湯有光。』

<《서경.태서(太誓)》에 이르기를 ‘우리 무(武)왕께서 떨쳐 저[주왕(紂王)]의 국경을 침략하여, 곧 잔악한 이만 취해서 죽이고 벌함을 베풀어 쓰니, 탕(湯)왕보다 빛남이 있었다.’라고 하였네.>

 

不行王政云爾;苟行王政,四海之內皆舉首而望之,欲以為君,齊、楚雖大,何畏焉?」

<왕도정치를 행하지 않았음을 일러줌인데, 진실로 왕도정치를 행한다면, 온 천하 안의 모두가 머리를 들고서 그를 바라보며 군주로 여기기를 바라는데,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비록 크더라도 어찌 그들이 두려워 하겠는가?”>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6章

○孟子謂戴不勝曰: “子欲子之王之善與? 我明告子。有楚大夫於此,欲其子之齊語也,則使齊人傅諸? 使楚人傅諸?” 曰: “使齊人傅之。” 曰: “一齊人傅之。衆楚人咻之,雖日撻而求其齊也,不可得矣,引而置之莊嶽之間數年,雖日撻而求其楚,亦不可得矣。
◁子謂薛居州,善士也,使之居於王所。在於王所者,長幼卑尊皆薛居州也,王誰與爲不善? 在王所者,長幼卑尊皆非薛居州也,王誰與爲善? 一薛居州,獨如宋王何?”
맹자께서 [송(宋)나라 신하] 대불승(戴不勝)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그대의 왕이 선(善)해지기를 바라는가? 나는 그대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겠소.
여기에 초(楚)나라 대부(大夫)가 있는데, 그 아들이 제(齊)나라 말을 하기 바란다면, 제(齊)나라 사람에게 스승을 시키겠소? 초(楚)나라 사람에게 스승을 시키겠소?”
[대불승이] 대답하였다. “제(齊)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을 시키겠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한 명의 제(齊)나라 사람이 가르치는데, 여러 명의 초(楚)나라 사람들이 떠들어댄다면, 비록 날마다 종아리 치면서 제(齊)나라 [말하기를] 요구하더라도 될 수 없을 것이오. [그를] 데려다가 [제나라의 번화한 거리] 장악(莊嶽) 사이에 여러 해 놓아 두면, 비록 날마다 종아리를 치면서 초(楚)나라 [말하기를] 요구하더라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이오.
그대가 [송나라 신하] 설거주(薛居州)를 선(善)한 관리라 일컬으며 왕의 행재소[所]에 살도록 하였는데, 왕의 행재소[所]에 있는 자가 나이가 많든 어리든 [지위가] 높든 낮든 모두 설거주 같으면 왕이 누구와 함께 불선(不善)을 하겠으며, 왕의 행재소[所]에 있는 자들이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모두 설거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왕이 누구와 함께 선(善)한 일을 하겠소? 한 명의 설거주(薛居州)가 혼자였다면 송(宋)나라가 왕을 어찌 했겠소?”

◎ 등문공(滕文公)-下 6

孟子謂戴不勝曰:「子欲子之王之善與?我明告子

<맹자께서 [송(宋)나라 신하] 대불승(戴不勝)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그대의 왕이 선해지기를 바라는가? 나는 그대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겠소. >

 

有楚大夫於此,欲其子之齊語也,則使齊人傅諸?使楚人傅諸?」

<여기에 초(楚)나라 대부(大夫)가 있는데, 그 아들이 제(齊)나라 말을 하기 바란다면, 제(齊)나라 사람에게 스승을 시키겠소? 초(楚)나라 사람에게 스승을 시키겠소?” >

 

曰:「使齊人傅之。」

<[대불승이] 대답하였다. “제(齊)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을 시키겠습니다.”>

 

曰:「一齊人傅之,眾楚人咻之,雖日撻而求其齊也,不可得矣。引而置之莊嶽之間數年,雖日撻而求其楚,亦不可得矣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한 명의 제(齊)나라 사람이 가르치는데, 여러 명의 초(楚)나라 사람들이 떠들어댄다면, 비록 날마다 종아리 치면서 제(齊)나라 [말하기를] 요구하더라도 될 수 없을 것이오. [그를] 데려다가 [제나라의 번화한 거리] 장악(莊嶽) 사이에 여러 해 놓아 두면, 비록 날마다 종아리를 치면서 초(楚)나라 [말하기를] 요구하더라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이오.>

 

子謂薛居州善士也,使之居於王所。在於王所者,長幼卑尊皆薛居州也,王誰與為不善?

<그대가 [송나라 신하] 설거주(薛居州)를 선(善)한 관리라 일컬으며 왕의 행재소[所]에 살도록 하였는데, 왕의 행재소[所]에 있는 자가 나이가 많든 어리든 [지위가] 높든 낮든 모두 설거주 같으면 왕이 누구와 함께 불선(不善)을 하겠으며, >

 

在王所者,長幼卑尊皆非薛居州也,王誰與為善?一薛居州,獨如宋王何!」

<왕의 행재소[所]에 있는 자들이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모두 설거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왕이 누구와 함께 선(善)한 일을 하겠소? 한 명의 설거주(薛居州)가 혼자였다면 송(宋)나라가 왕을 어찌 했겠소?”>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7章

○公孫丑問曰: “不見諸侯何義?” 孟子曰: “古者不爲臣不見。
◁段干木踰垣而辟【避同】之,泄柳閉門而不內,是皆已甚,迫,斯可以見矣。
◁陽貨欲見孔子而惡無禮,大夫有賜於士,不得受於其家,則往拜其門。陽貨矙孔子之亡也,而饋孔子蒸豚,孔子亦矙其亡也,而往拜之。當是時,陽貨先,豈得不見?
◁曾子曰: ‘脅肩諂笑,病于夏畦。’ 子路曰: ‘未同而言,觀其色赧赧然,非由之所知也。’ 由是觀之,君子之所養,可知已矣。”
공손추(公孫丑)가 여쭈었다. “제후를 만나지 않으시는데 무슨 이유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는 신하를 하지 않았으면 [군주를] 만나지 않았다네.
단간목(段干木)은 담을 넘어가서 그[만나러 온 위(魏)나라 문후(文侯)]를 피하였고, 설류(泄柳)는 문을 닫고서 [만나러 온 노(魯)나라 목공(繆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너무 심하였으며, 다급(多急)하면 이를 만나볼 수 있다네.
양화(陽貨)는 공자(孔子)께서 [자신을] 뵙기를 바랐으나, 무례(無禮)함을 미워하였다네. 대부(大夫)가 사(士)에게 하사할 것이 있는데, 그[士]가 집안에서 [직접] 받지 못했으면, 가서 그[大夫]의 집 문에 절을 한다네.
양화(陽貨)가 공자께서 없는 틈을 엿보고서 공자께 삶은 돼지고기를 보냈는데, 공자께서도 또한 그[陽貨]가 집에 없는 틈을 엿보아 찾아가서 절을 하셨다네. 마땅히 이 시절에 양화가 먼저 찾아왔으니, [공자께서] 어찌 만나보지 않으셨겠는가?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깨를 움츠리고 웃으며 아첨함이 여름철 밭일 보다 더 고달프다.’라고 하셨으며, 자로(子路)가 말하기를 "[뜻이] 같지 않은데도 말하면 그 얼굴색이 매우 부끄러운것 처럼 보이는데, 내[由]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면 군자의 기른 바를 알 수 있을 뿐이라네.”

◎ 등문공(滕文公)-下 7

公孫丑問曰:“不見諸侯,何義?”

<공손추(公孫丑)가 여쭈었다. “제후를 만나지 않으시는데 무슨 이유입니까?”>

 

孟子曰:“古者不為臣不見。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는 신하를 하지 않았으면 [군주를] 만나지 않았다네.>

 

段干木逾垣而辟之,泄柳閉門而不內,是皆已甚。迫,斯可以見矣。

<단간목(段干木)은 담을 넘어가서 그[만나러 온 위(魏)나라 문후(文侯)]를 피하였고, 설류(泄柳)는 문을 닫고서 [만나러 온 노(魯)나라 목공(繆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너무 심하였으며, 다급(多急)하면 이를 만나볼 수 있다네.>

 

陽貨欲見孔子,而惡無禮。大夫有賜於士,不得受於其家,則往拜其門。

<양화(陽貨)는 공자(孔子)께서 [자신을] 뵙기를 바랐으나, 무례(無禮)함을 미워하였다네. 대부(大夫)가 사(士)에게 하사할 것이 있는데, 그[士]가 집안에서 [직접] 받지 못했으면, 가서 그[大夫]의 집 문에 절을 한다네.>

 

陽貨瞰孔子之亡也,而饋孔子蒸豚。孔子亦瞰其亡也而往拜之。當是時,陽貨先,豈得不見?

<양화(陽貨)가 공자께서 없는 틈을 엿보고서 공자께 삶은 돼지고기를 보냈는데, 공자께서도 또한 그[陽貨]가 집에 없는 틈을 엿보아 찾아가서 절을 하셨다네. 마땅히 이 시절에 양화가 먼저 찾아왔으니, [공자께서] 어찌 만나보지 않으셨겠는가?>

 

曾子曰:‘脅肩諂笑,病於夏畦。’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깨를 움츠리고 웃으며 아첨함이 여름철 밭일 보다 더 고달프다.’라고 하셨으며,>

 

子路曰:‘未同而言,觀其色赧赧然,非由之所知也。’

<자로(子路)가 말하기를 "[뜻이] 같지 않은데도 말하면 그 얼굴색이 매우 부끄러운것 처럼 보이는데, 내[由]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由是觀之,則君子之所養,可知已矣。”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면 군자의 기른 바를 알 수 있을 뿐이라네.”>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8章

○戴盈之曰: “什一,去關市之征,今玆未能,請輕之,以待來年,然後已,何如?”
◁孟子曰: “今有人日攘其鄰之雞者,或告之曰: ‘是非君子之道。’ 曰: ‘請損之,月攘一雞,以待來年,然後已。’
◁如知其非義,斯速已矣,何待來年?”
대영지(戴盈之)가 말하였다. “관문 시장의 세금을 덜어서 10분의 1로 하려는데, 금년에는 [세금을] 잘 불릴 수 없으니, 청컨데 금년에는 그것[세금]을 가볍게 하고 그로써 내년을 기다린 연후에 그만두는게 어떻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어떤 사람이 날마다 이웃의 닭을 취하는 자가 있는데, 어떤이가 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군자의 도(道)가 아니다.’고 하자, 대답하기를 ‘그것[닭]이 줄기를 바라는데, 달마다 닭 한 마리씩 취하고 그로써 내년을 기다린 뒤에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만약 의로움[義]이 아님을 알았으면 이를 속히 그만두어야지 어찌 내년을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셨다.

◎ 등문공(滕文公)-下 8

戴盈之曰:“什一,去關市之征,今茲未能,請輕之,以待來年然後, 已,何如?”

<대영지(戴盈之)가 말하였다. “관문 시장의 세금을 덜어서 10분의 1로 하려는데, 금년에는 [세금을] 잘 불릴 수 없으니, 청컨데 금년에는 그것[세금]을 가볍게 하고 그로써 내년을 기다린 연후에 그만두는게 어떻습니까?”>

【石潭 案】 : 대영지(戴盈之)가 말한 “什一,去關市之征”은 조기(趙岐)가 도치법(倒置法)으로 주(注)를 달았다. 그러므로 조기(趙岐)의 주(注)를 따라서 “去關市之征 什一”로 앞 뒤를 바꾸어 해석하여 “관문 시장의 세금을 덜어서 10분의 1로 한다.”로 해석을 했다.

孟子曰:“今有人日攘其鄰之雞者,或告之曰:‘是非君子之道。’曰:‘請損之,月攘一雞,以待來年然後已。’如知其非義,斯速已矣,何待來年?”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어떤 사람이 날마다 이웃의 닭을 취하는 자가 있는데, 어떤이가 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군자의 도(道)가 아니다.’고 하자, 대답하기를 ‘그것[닭]이 줄기를 바라는데, 달마다 닭 한 마리씩 취하고 그로써 내년을 기다린 뒤에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만약 의로움[義]이 아님을 알았으면 이를 속히 그만두어야지 어찌 내년을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셨다.>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9章

○公都子曰: “外人皆稱夫子好辯,敢問何也?” 孟子曰: “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天下之生久矣,一治一亂。
◁當堯之時,水逆行,氾濫於中國,蛇龍居之,民無所定,下者爲巢,上者爲營窟。《書》曰: ‘洚水警余。’ 洚水者,洪水也。
◁使禹治之。禹掘地而注之海,驅蛇龍而放之菹,水由地中行,江、淮、河、漢是也。險阻旣遠,鳥獸之害人者消,然後人得平土而居之。
◁堯、舜旣沒,聖人之道衰,暴君代作,壞宮室以爲汙池,民無所安息,棄田以爲園囿,使民不得衣食。邪說暴行又作,園囿、汙池、沛澤多而禽獸至。及紂之身,天下又大亂。
◁周公相武王誅紂,伐奄三年討其君,驅飛廉於海隅而戮之,滅國者五十,驅虎、豹、犀、象而遠之,天下大悅。《書》曰: ‘丕顯哉,文王謨! 丕承者,武王烈! 佑啓我後人,咸以正無缺。’
◁世衰道微,邪說暴行有作,臣弑其君者有之,子弑其父者有【又通】之。
◁孔子懼,作《春秋》。《春秋》,天子之事也,是故孔子曰: ‘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
◁聖王不作,諸侯放恣,處士橫議,楊朱、墨翟之言盈天下。天下之言不歸楊,則歸墨。楊氏爲我,是無君也,墨氏兼愛,是無父也。無父無君,是禽獸也。公明儀曰: ‘庖有肥肉,廏有肥馬,民有饑色,野有餓莩,此率獸而食人也。’ 楊、墨之道不息,孔子之道不著,是邪說誣民,充塞仁義也。仁義充塞,則率獸食人,人將相食。
◁吾爲此懼,閑先聖之道,距楊、墨,放淫辭,邪說者不得作。作於其心,害於其事,作於其事,害於其政。聖人復起,不易吾言矣。
◁昔者禹抑洪水而天下平,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詩》云: ‘戎狄是膺,荊、舒是懲,則莫我敢承。’ 無父無君,是周公所膺也。【見前篇。】
◁我亦欲正人心,息邪說,距詖行,放淫辭,以承三聖者,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聖人之徒也。”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가 말하였다. “외부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더러 논쟁(論爭)하기를 좋아한다고 일컫는데, 감히 문제(問題)가 무엇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부득이해서일세.
천하의 삶이 오래되었지만,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은 어지러워진다네. 요(堯)임금 당시에는 물이 거꾸로 흘러 나라 안에 범람하여 뱀과 용이 서식을 하니, 사람들이 정착할 곳이 없어서 낮은데 [사는] 자들은 나무에 둥지를 만들었고, 높은데 사는 자들은 굴을 파고 살았네.
《서경[書]》 [대우모(大禹謨)]에 말하기를 ‘홍수(洚水)가 나를 경계하였다.’ 하였는데, 홍수(洚水)라는 것은 홍수(洪水)일세.
[순(舜)임금께서] 우(禹)로 하여금 그것[홍수]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우(禹)가 땅을 파고 물을 대어 바다로 가게하고 뱀과 용을 몰아서 늪으로 쫓아 냈으며, 물이 땅을 말미암아 가운데로 흘러 갔는데, 양자강(楊子江)과 회수(淮水)‧하수(河水)‧한수(漢水)가 이것이라네. 험하고 막힌데가 나아가 멀어지고 짐승[禽獸]들이 사람 해치는 것이 사라진 연후에, 사람들이 넓은 땅을 얻어서 살아 갔다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께서 이미 돌아가시고, 성인(聖人)의 도가 쇠퇴하니 사나운 군주가 대를 이었으며, 궁과 집을 무너트리고 그로써 웅덩이와 못을 만들어 백성들이 편안히 쉴 곳이 없었으며, 농지(農地)를 폐하여 동산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옷과 먹거리[衣食]를 얻을 수 없도록 하였으며, 사악한 학설과 사나운 행실이 또 일어나고, 동산과 더러운 웅덩이 습지와 못이 많아지면서 새와 짐승[禽獸]들이 이르렀다네,
[폭군] 주왕(紂王)의 몸[시절]에 미쳐서 천하가 또다시 크게 어지러워 졌는데, 주공(周公)께서 무왕(武王)을 도와 주왕(紂王)을 죽이시고 엄(奄)나라를 정벌하신 지 3년 만에 그 군주를 토벌하고, 비렴(飛廉, 주왕의 신하)을 바다 모퉁이로 몰아내어 죽이시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0개국이었고, 범과 표범,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내어서 멀리 쫓으시니, 천하가 크게 기뻐하였다네.
《서경(書)》 〈군아(君牙)〉에 이르기를 ‘크게 드러났도다, 문왕의 계책이여! 크게 계승하였도다, 무왕의 공적이여! 우리 후인(後人)들을 도와 계도해 주시되, 모두 정도(正道)로써 결함이 없게 하셨다.’고 하였네.
세상[풍속]이 쇠퇴하고 도리가 미약해져서 사악(邪惡)한 학설과 사나운 행실을 지어냄이 있었는데,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가 있었으며,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시해하는 자가 있었다네. 공자(孔子)께서 이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으셨는데, 《춘추》는 천자(天子)가 하는 일이며, 이 때문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셨네.
왕(王)이 성스러움을 지어내지 않으니 제후들이 방자하고, 관리는 의논을 멋대로 처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차서, 천하의 말씀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갔다네. 양씨(楊氏)는 나 만을 위하자[爲我說] 하였으니 이는 군주를 없앰이요, 묵씨(墨氏)는 다같이 사랑하자[兼愛說] 하였으니 이는 아버지를 없앰인데, 아버지를 없애고 군주를 없앰[無父無君]은 바로 짐승[禽獸]들이라네.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임금의]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 살찐 말이 있는데도, 백성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으며 들에 굶주려 굶어죽어 있다면, 이는 짐승을 몰고가서 사람을 잡아먹게 함이다.’고 하였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도가 종식(終熄)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으니, 이는 사악한 학설이 백성들을 속이고 인의(仁義)를 [사설이] 가득채워 막으며, 인의(仁義)를 완전히 막으면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다가, 사람이 장차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네.
내가 이를 두려워하여 선성(先聖)의 도(道)를 수호하고, 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방탕한 말을 추방하여 부정한 학설을 하는 자가 지어내지 못하게 함이라네.
[부정한 학설은] 마음에서 지어내서 그 일을 해치며, 일에서 지어져서 정사를 해치는데, 성인이 다시 나오시더라도 내 말을 바꾸지는 않으실 것이네.
옛적에 우(禹)임금께서 홍수(洪水)를 막고서 천하가 정리됐고, 주공께서 이적(夷狄)을 아우르고 맹수(猛獸)를 몰아내시자 모든 성[百姓]들이 편안해졌으며,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시면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 하였다네.
《시경》[비궁(閟宮)]에 이르기를 ‘[오랑캐] 융(戎)과 적(狄)을 공격하니, [남쪽의] 초[형산(荊山)]나라와 서(舒)나라가 징계되었으며 곧 나를 감히 계승함이 없으랴!’고 하였으니, 아버지를 없애고 군주를 없앰은 이를 주공(周公)께서도 응징하신 바일세.
나는 또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 부정한 학설을 종식시키고, 비뚤어진 행실을 막아서 방탕한 말을 추방하기를 바라는데, 그로써 세 성인[우임금, 주공,공자]을 계승하려는 것이니, 어찌 논쟁을 좋아하겠는가? 내가 부득이해서 이라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잘 말하는 이는 성인(聖人)의 무리 이라네.”

◎ 등문공(滕文公)-下 9

公都子曰:“外人皆稱夫子好辯,敢問何也?”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가 말하였다. “외부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더러 논쟁(論爭)하기를 좋아한다고 일컫는데, 감히 문제(問題)가 무엇입니까?”>

 

孟子曰:“予豈好辯哉,予不得已也。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부득이해서일세. >

 

天下之生久矣,一治一亂。當堯之時,水逆行,泛濫於中國,蛇龍居之,民無所定,下者為巢,上者為營窟。

<천하의 삶이 오래되었지만,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은 어지러워진다네. 요(堯)임금 당시에는 물이 거꾸로 흘러 나라 안에 범람하여 뱀과 용이 서식을 하니, 사람들이 정착할 곳이 없어서 낮은데 [사는]자들은 나무에 둥지를 만들었고, 높은데 사는 자들은 굴을 파고 살았네.>

 

《書》曰:‘洚水警余。’洚水者,洪水也。

<《서경[書]》 [대우모(大禹謨)]에 말하기를 ‘홍수(洚水)가 나를 경계하였다.’ 하였는데, 홍수(洚水)라는 것은 홍수(洪水)일세.>

 

使禹治之,禹掘地而注之海,驅蛇龍而放之菹。水由地中行,江、淮、河、漢是也。險阻既遠,鳥獸之害人者消,然後人得平土而居之。

<[순(舜)임금께서] 우(禹)로 하여금 그것[홍수]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우(禹)가 땅을 파고 물을 대어 바다로 가게하고 뱀과 용을 몰아서 늪으로 쫓아 냈으며, 물이 땅을 말미암아 가운데로 흘러 갔는데, 양자강(楊子江)과 회수(淮水)‧하수(河水)‧한수(漢水)가 이것이네. 험하고 막힌데가 나아가 멀어지고 새와 짐승의 사람 해치는 것이 사라진 연후에, 사람들이 넓은 땅을 얻어서 살아 갔다네.>

 

堯、舜既沒,聖人之道衰,暴君代作。壞宮室以為汙池,民無所安息;棄田以為園囿,使民不得衣食;邪說暴行又作。園囿汙池,沛澤多而禽獸至。

<요(堯)임금과 순(舜)임금께서 이미 돌아가시고, 성인(聖人)의 도가 쇠퇴하니 사나운 군주가 대를 이었으며, 궁과 집을 무너트리고 그로써 웅덩이와 못을 만들어 백성들이 편안히 쉴 곳이 없었으며, 농지(農地)를 폐하여서 동산을 만들어 백성들이 옷과 먹거리[衣食]를 얻을 수 없도록 하였으며, 사악한 학설과 사나운 행실이 또 일어났으며, 동산과 더러운 웅덩이 습지와 못이 많아지면서 새와 짐승[禽獸]들이 이르렀다네,>

 

及紂之身,天下又大亂。周公相武王,誅紂伐奄,三年討其君,驅飛廉於海隅而戮之;滅國者五十;驅虎豹犀象而遠之:天下大悅。

<[폭군] 주왕(紂王)의 몸[시절]에 미쳐서 천하가 또다시 크게 어지러워 졌는데, 주공(周公)께서 무왕(武王)을 도와 주왕(紂王)을 죽이시고 엄(奄)나라를 정벌하신 지 3년 만에 그 군주를 토벌하는데, 비렴(飛廉, 주왕의 신하)을 바다 모퉁이로 몰아내어 죽이시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0개국이었고, 범과 표범,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내어서 멀리 쫓으시니, 천하가 크게 기뻐하였다네.>

 

《書》曰:‘丕顯哉!文王謨。丕承哉!武王烈。佑啟我後人,鹹以正無缺。’

< 《서경(書)》 〈군아(君牙)〉에 이르기를 ‘크게 드러났도다, 문왕의 계책이여! 크게 계승하였도다, 무왕의 공적이여! 우리 후인(後人)들을 도와 계도해주시되, 모두 정도(正道)로써 결함이 없게 하셨다.’고 하였네.>

 

世衰道微,邪說暴行有作,臣弑其君者有之,子弑其父者有之,孔子懼,作《春秋》。《春秋》,天子之事也。是故孔子曰:‘知我者其惟《春秋》乎!罪我者其惟《春秋》乎!’

<세상[풍속]이 쇠퇴하고 도리가 미약해져서 사악(邪惡)한 학설과 사나운 행실을 지어냄이 있었는데,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가 있으며,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시해하는 자가 있었다네. 공자(孔子)께서 이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으셨는데, 《춘추》는 천자(天子)가 하는 일이며, 이 때문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셨네.>

 

聖王不作,諸侯放恣,處士橫議,楊朱、墨翟之言盈天下,天下之言,不歸楊則歸墨。楊氏為我,是無君也。墨氏兼愛,是無父也。無父無君,是禽獸也。

<왕(王)이 성스러움을 지어내지 않으니 제후들이 방자하고, 관리는 의논을 멋대로 처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차서, 천하의 말씀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갔다네. 양씨(楊氏)는 나 만을 위하자[爲我說] 하였으니 이는 군주를 없앰이요, 묵씨(墨氏)는 다같이 사랑하자[兼愛說] 하였으니 이는 아버지를 없앰인데, 아버지를 없애고 군주를 없앰[無父無君]은 바로 짐승[禽獸]들이라네.>

 

公明儀曰:‘庖有肥肉,廄有肥馬,民有饑色,野有餓莩,此率獸而食人也。’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임금의]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 살찐 말이 있는데도, 백성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으며 들에 굶주려 굶어죽어 있다면, 이는 짐승을 몰고가서 사람을 잡아먹게 함이다.’고 하였네.>

 

楊、墨之道不息,孔子之道不著,是邪說誣民,充塞仁義也。仁義充塞,則率獸食人,人將相食。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도가 종식(終熄)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으니, 이는 사악한 학설이 백성들을 속이고 인의(仁義)를 [사설이] 가득채워 막으며, 인의(仁義)를 완전히 막으면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다가, 사람이 장차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네.>

 

吾為此懼,閑先聖之道,距楊墨,放淫辭,邪說者不得作。

<내가 이를 두려워하여 선성(先聖)의 도(道)를 수호하고, 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방탕한 말을 추방하여 부정한 학설을 하는 자가 지어내지 못하게 함이라네.>

 

作於其心,害於其事;作於其事,害於其政。聖人複起,不易吾言矣。

<[부정한 학설은] 마음에서 지어내서 그 일을 해치며, 일에서 지어져서 정사를 해치는데, 성인이 다시 나오시더라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네.>

 

昔者禹抑洪水而天下平,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옛적에 우(禹)임금께서 홍수(洪水)를 막고서 천하가 정리됐고, 주공께서 이적(夷狄)을 아우르고 맹수(猛獸)를 몰아내시자 모든 성[百姓]들이 편안해졌으며,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시면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 하였다네.>

 

《詩》云:‘戎狄是膺,舒是懲,則莫我敢承。’

<《시경》[비궁(閟宮)]에 이르기를 ‘[오랑캐] 융(戎)과 적(狄)을 공격하니, [남쪽의] 초[형산(荊山)]나라와 서(舒)나라가 징계되었으며 즉 나를 감히 계승함이 없으랴!’하였으니, >

 

無父無君,是周公所膺也。

<아버지를 없애고 군주를 없앰은 이를 주공(周公)께서도 응징하신 바일세.>

 

我亦欲正人心,息邪說,距詖行,放淫辭,以承三聖者,豈好辯哉?予不得已也。

<나는 또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 부정한 학설을 종식시키고, 비뚤어진 행실을 막아서 방탕한 말을 추방하기를 바라는데, 그로써 세 성인[우임금, 주공,공자]을 계승하려는 것이니, 어찌 논쟁을 좋아하겠는가? 내가 부득이해서 이라네.>

 

能言距楊、墨者,聖人之徒也。”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잘 말하는 이는 성인(聖人)의 무리 이라네.”>

 

 

 

『맹자(孟子)』

◎ 등문공(滕文公)-下

10章

○匡章曰: “陳仲子豈不誠廉士哉? 居於陵,三日不食,耳無聞,目無見也。井上有李,螬食實者過半矣,匍匐往,將食之,三咽,然後耳有聞,目有見。”
◁孟子曰: “於齊國之士,吾必以仲子爲巨擘焉。雖然仲子惡能廉? 充仲子之操,則蚓而後可者也。
◁夫蚓,上食槁壤,下飮黃泉。仲子所居之室,伯夷之所築與? 抑亦盜跖之所築與? 所食之粟,伯夷之所樹與? 抑亦盜跖之所樹與? 是未可知也。”
◁曰: “是何傷哉? 彼身織屨,妻辟纑,以易之也。
◁曰: “仲子,齊之世家也,兄戴,蓋祿萬鍾,以兄之祿爲不義之祿而不食也,以兄之室爲不義之室而不居也,辟兄離母,處於於陵。他日歸,則有饋其兄生鵝者,己頻【顰同】顣曰: ‘惡用是鶃鶃者爲哉?’ 他日,其母殺是鵝也,與之食之。其兄自外至,曰: ‘是鶃鶃之肉也。’ 出而哇之。
◁以母則不食,以妻則食之,以兄之室則弗居,以於陵則居之,是尙爲能充其類也乎? 若仲子者,蚓而後充其操者也。”
[제(齊)나라 사람] 광장(匡章)이 말하였다. “진중자(陳仲子)는 어찌 참으로 청렴한 관리가 아니겠습니까? 오릉(於陵)에 살적에 사흘을 먹지 못하여 귀는 들리는게 없고 눈은 보이는게 없었습니다. 우물가에 벌레가 과실를 파먹은 것이 반이 넘는 오얏이 있었는데, 포복으로 기어가서 장차 그것을 먹어 세 번 삼킨 뒤에야 귀에 들리는게 있었고 눈에 보이는게 있었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제(齊)나라에 나라의 관리는 내가 반드시 중자(仲子)로써 제일 으뜸으로 여기는데, 비록 그렇지만 중자가 어찌 청렴함을 잘 하겠는가? 중자의 지조(志操)를 채우려면 지렁이가 된 뒤에나 할 수 있다네. 그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누런 물을 먹는데, 중자(仲子)가 사는 곳의 집은 백이(伯夷)가 지은 곳인가? 아니면 또한 도척(盜跖)이 지은 곳인가? [중자가] 먹는 곳의 곡식은 백이가 심은 곳인가? 아니면 또한 도척이 심은 곳인가? 이는 [청렴한지] 알 수가 없다네.”
[광장(匡章)이] 말하였다. “이를 어찌 해치[傷]십니까? 저[仲子]이는 자신이 신을 삼고 아내는 삼을 가공하여 길쌈하고 그로써 그것[곡식]을 바꾸었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자(仲子)는 제(齊)나라의 대대로 벼슬해온 집안이며, 형인 대(戴)가 합(蓋) 땅의 녹(祿)이 만종(萬鍾)인데도, 형의 녹을 가지고 의롭지 못한 녹이라고 하면서 먹지 않았고, 형의 집으로써 의롭지 못한 집이라 하면서 살지 않았으며, 형을 피하고 어머니를 떠나 오릉[於陵]에 머물렀소.
다른 날 [형의 집에] 돌아갔는데, 곧 그의 형에게 산 거위를 선물하는 자가 있자, [중자가] 자기 이마를 찌푸리며 말하기를 ‘이 꽥꽥거리는 것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가?’라고 하였소.
다른 날 그의 어머니가 이 거위를 잡아 그[중자]에게 주어 먹고 있었는데, 형이 밖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이것은 꽥꽥 거위의 고기이다.’라고 하자, [중자가] 나가서 그것을 토하였다고 하는데, 그로써 어머니가 하였으면 먹지 않고 그로써 아내가 주었으면 먹으며, 그로써 형의 집이라면 살지 않고 오릉[於陵]이라면 살았으니, 이를 오히려 그[자신]의 부류[지조]를 잘 채웠다고 하겠는가? 중자[仲子]와 같은 자는 지렁이가 된 뒤에야 그의 지조를 채울 것이오.”

◎ 등문공(滕文公)-下 10章

匡章曰:“陳仲子豈不誠廉士哉?居於陵,三日不食,耳無聞,目無見也。井上有李,螬食實者過半矣,匍匐往將食之,三咽,然後耳有聞,目有見。”

<[제(齊)나라 사람] 광장(匡章)이 말하였다. “진중자(陳仲子)는 어찌 참으로 청렴한 관리가 아니겠습니까? 오릉(於陵)에 살적에 사흘을 먹지 못하여 귀는 들리는게 없고 눈은 보이는게 없었습니다. 우물가에 벌레가 과실를 파먹은 것이 반이 넘는 오얏이 있었는데, 포복으로 기어가서 장차 그것을 먹어 세 번 삼킨 뒤에야 귀에 들리는게 있었고 눈에 보이는게 있었습니다.”>

 

孟子曰:“於齊國之士,吾必以仲子為巨擘焉。雖然,仲子惡能廉?充仲子之操,則蚓而後可者也。夫蚓,上食槁壤,下飲黃泉。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제(齊)나라에 나라의 관리는 내가 반드시 중자(仲子)로써 제일 으뜸으로 여기는데, 비록 그렇지만 중자가 어찌 청렴함을 잘 하겠는가? 중자의 지조(志操)를 채우려면 지렁이가 된 뒤에나 할 수 있다네. 그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누런 물을 먹는데, >

 

仲子所居之室,伯夷之所築與?抑亦盜蹠之所築與?所食之粟,伯夷之所樹與?抑亦盜蹠之所樹與?是未可知也。”

<중자(仲子)가 사는 곳의 집은 백이(伯夷)가 지은 곳인가? 아니면 또한 도척(盜跖)이 지은 곳인가? [중자가] 먹는 곳의 곡식은 백이가 심은 곳인가? 아니면 또한 도척이 심은 곳인가? 이는 [청렴한지] 알 수가 없다네.”>

 

曰:“是何傷哉?彼身織屨,妻辟纑,以易之也。”

<[광장(匡章)이] 말하였다. “이를 어찌 해치[傷]십니까? 저[仲子]이는 자신이 신을 삼고 아내는 삼을 가공하여 길쌈하고 그로써 그것[곡식]을 바꾸었습니다.”>

 

曰:“仲子,齊之世家也,兄戴,蓋祿萬鍾。以兄之祿為不義之祿而不食也,以兄之室為不義之室而不居也,避兄離母,處於於陵。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자(仲子)는 제(齊)나라의 대대로 벼슬해온 집안이며, 형인 대(戴)가 합(蓋) 땅의 녹(祿)이 만종(萬鍾)인데도, 형의 녹을 가지고 의롭지 못한 녹이라고 하면서 먹지 않았고, 형의 집으로써 의롭지 못한 집이라 하면서 살지 않았으며, 형을 피하고 어머니를 떠나 오릉[於陵]에 머물렀소. >

 

他日歸,則有饋其兄生鵝者,己頻顣曰:‘惡用是鶂鶂者為哉?’

<다른 날 [형의 집에] 돌아갔는데, 곧 그의 형에게 산 거위를 선물하는 자가 있자, [중자가] 자기 이마를 찌푸리며 말하기를 ‘이 꽥꽥거리는 것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가?’라고 하였소. >

 

他日,其母殺是鵝也,與之食之。其兄自外至,曰:‘是鶂鶂之肉也。’出而哇之。以母則不食,以妻則食之;以兄之室則弗居,以於陵則居之:是尚為能充其類也乎?若仲子者,蚓而後充其操者也。”

<다른 날 그의 어머니가 이 거위를 잡아 그[중자]에게 주어 먹고 있었는데, 형이 밖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이것은 꽥꽥 거위의 고기이다.’라고 하자, [중자가] 나가서 그것을 토하였다고 하는데, 그로써 어머니가 하였으면 먹지 않고 그로써 아내가 주었으면 먹으며, 그로써 형의 집이라면 살지 않고 오릉[於陵]이라면 살았으니, 이를 오히려 그[자신]의 부류[지조]를 잘 채웠다고 하겠는가? 중자[仲子]와 같은 자는 지렁이가 된 뒤에야 그의 지조를 채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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