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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卷​ 14

◎ 《헌문(憲問)》篇

◆ 14 - 40) 子張曰: "『書』云: '高宗諒陰, 三年不言.' 何謂也?" 子曰: "何必高宗? 古之人皆然. 君薨, 百官總己以聽於冢宰三年."

(자장왈: "『서』운: '고종량음, 삼년불언.' 하위야?" 자왈: "하필고종? 고지인개연. 군훙, 백관총기이청어총재삼년.")

자장(子張)이 말하였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고종(高宗)이 량음(諒陰) 3년 동안 말하지 않았다’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자(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반드시 고종뿐이겠는가? 옛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다. 임금이 훙서(薨逝)하면 백관(百官)이 자기 <직무(職務)를> 총괄하여서 삼년 동안 총재(冢宰)에게 <명령을> 들었다.”

◎《논어집해(論語集解)》

『논어집해(論語集解)』는 중국 위(魏)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하안(何晏, 193~ 249)이 당시까지 전해지던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대한 주석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논어집해(論語集解)』에는 공안국(孔安國, BC156?~BC74), 정현(鄭玄, 127~200), 마융(馬融, 79~166), 왕숙(王肅, 195~256), 포함(包咸, BC6~65), 주생렬(周生烈, ?~220) 등의 주석이 실려있으며, 하안(何晏)의 견해 역시 수록되어 있다.

【集解】 子張曰:「《書》云:『高宗諒陰,三年不言。』何謂也?」(孔曰:「高宗,殷之中興王武丁也。諒,信也。陰,猶默也。」 ◎공안국이 말하였다:고종(高宗)은 은(殷)나라의 중흥 왕인 무정(武丁)이다. “량(諒)”은 믿음이다. “음(陰)”은 침묵함과 같다.)子曰:「何必高宗,古之人皆然。君薨,百官總己,(馬曰:「己,百官。」 ◎마융이 말하였다:“기(己)”는 백관(百官)이다.)以聽於塚宰三年。」(孔曰:「塚宰,天官卿,佐王治者,三年喪畢,然後王自聽政。」 ◎공안국이 말하였다:총재(塚宰)는 천관(天官)의 <작위(爵位)가> 경(卿)이며, 왕을 보좌하여 정치하는 자인데, 삼년 상(喪)을 마친 연후에야 왕(王)이 스스로 정책을 편다.)

◎《논어주소(論語註疏)》

『논어주소(論語註疏)』는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하안(何晏, 193~249 魏)이 주(註)를 달아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지었으며, 북송(北宋)의 형병(邢昺, 932~1010)이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소(疏)를 붙여서 논어주소(論語註疏)를 지었다.

【註疏】 “子張”至“三年”。

○ 【註疏】 <경문(經文)의> “[자장(子張)]에서 [삼년(三年)]까지"

○正義曰:此章論天子諸侯居喪之禮也。

○正義曰 : 이 장(章)은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상(喪)을 치르는 예(禮)를 논한 것이다.

“子張曰:《書》云:‘高宗諒陰,三年不言。’何謂也”者,“高宗諒陰,三年不言”,《周書·無逸篇》文也。高宗,殷王武丁也。

<경문(經文)에서> "자장(子張)이 말하였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고종(高宗)이 량음(諒陰) 3년 동안 말하지 않았다’하는데 무슨 말입니까?'[子張曰 書云 高宗諒陰 三年不言 何謂也]"라는 것의 “고종(高宗)이 량음(諒陰) 3년 동안 말하지 않았다[高宗諒陰 三年不言]”은 《상서(尙書)》 〈주서(周書) 무일(無逸)〉편의 글이다. 고종(高宗)은 은왕(殷王) 무정(武丁)이다.

諒,信也。陰,默也。言武丁居父憂,信任塚宰,默而不言三年矣。子張未達其理,而問於夫子也。

량(諒)은 믿음이고 음(陰)은 침묵함과 같으며, 무정(武丁)이 아버지 상(喪)을 치를적에 총재(冢宰)를 신임하여 묵묵히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장(子張)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부자(夫子)께 물은 것이다.

“子曰:何必高宗,古之人皆然。君薨,百官總己,以聽於塚宰三年”者,孔子答言:“何必獨高宗,古之人皆如是。”諸侯死曰薨。

<경문(經文)에서> "자(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반드시 고종뿐이겠는가? 옛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다. 임금이 훙서(薨逝)하면 백관(百官)이 자기 <직무(職務)를> 총괄하여서 삼년 동안 총재(冢宰)에게 <명령을> 들었다.'[子曰 何必高宗 古之人皆然 君薨 百官總己 以聽於冢宰三年]"라는 것은, 공자(孔子)께서 “어찌 반드시 고종(高宗)뿐이었겠느냐? 옛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제후(諸侯)의 죽음을 ‘훙(薨: 훙서할 훙)’이라 한다.

言君既薨,新君即位,使百官各總己職,以聽使於塚宰,三年喪畢,然後王自聽政。

임금이 이미 훙서(薨逝)하였으면 새 임금은 즉위(卽位)하여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직무(職務)를 모두 총재(冢宰)에게 명을 듣게 하였다가 3년의 상(喪)을 마친 뒤에야 왕(王新王)이 직접 정무(政務)를 처리한다.

○注“ 孔曰”至“默也”。

○ <집해(集解)> 주(注)의 “[공왈(孔曰)]에서 [묵야(默也)]"까지

○正義曰:云“高宗,殷之中興王武丁也”者,孔安國云:“ 盤庚弟小乙子名武丁,德高可尊,故號高宗。”

○正義曰 :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고종(高宗)은 은(殷)나라의 중흥 왕인 무정(武丁)이다[高宗 殷之中興王武丁也]"라는 것은, 공안국(孔安國)이 이르기를 “반경(盤庚)의 아우 소을(小乙)의 아들 이름이 무정(武丁)인데, 덕(德)이 높아 존경할 만하였기 때문에 호(號)를 고종(高宗)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喪服四製》引《書》云:“高宗諒陰,三年不言,善之也。王者莫不行此禮,何以獨善之也?曰:高宗者,武丁。武丁者,殷之賢王也,繼世即位,而慈良於喪。當此之時,殷衰而複興,禮廢而複起,故載之於書中而高之,故謂之高宗。三年之喪,君不言也。”是說不言之意也。

《예기(禮記)》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상서(尙書)》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고종(高宗)이 량음(諒陰)하는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고종(高宗)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왕자(王者) 중에 이 예(禮)를 행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어째서 유독 <고종(高宗)만을> 훌륭하게 여긴 것인가? 고종(高宗)이라 말한 것은 무정(武丁)이고, 무정(武丁)은 은(殷)나라의 현명한 왕(王)이며, <선왕(先王)의> 세(世)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라 <부친(父親)의> 상(喪)에 자비(慈悲≒慈良≒孝誠)을 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쇠(衰)하였던 은(殷)나라가 다시 일어나고 폐하였던 예(禮)가 다시 일어났었기 때문에 《상서(尙書)》 안에 기재(記載)하여 높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고종(高宗)이라 한 것이다. 3년의 상중(喪中)에 임금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말을 하지 않는 뜻을 설명한 것이다.

云“諒,信也。陰,默也”者,謂信任塚宰,默而不言也。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량(諒)은 믿음이다. 음(陰)은 침묵함과 같다[諒 信也 陰 默也]"라는 것은, 총재(冢宰)를 신임(信任)하여 묵묵히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禮記》作“諒闇”,鄭玄以為凶廬,非孔義也,今所不取。

《예기(禮記)》에는 ‘량암(諒闇)’으로 되어있는데, 정현(鄭玄)은 〈량암(諒闇)을〉 흉려(凶廬居喪하는 房室)로 여겼으며, 공안국(孔安國)의 뜻이 아니어서 지금 〈정현(鄭玄)의 설(說)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注“孔曰”至“聽政”。

○ <집해(集解)> 주(注)의 “[공왈(孔曰)]에서 [청정(聽政)]"까지

○正義曰:云“塚宰,天官卿,佐王治者”者,案《周禮·天官》:“大宰之職,掌建邦之六典,以佐王治邦國。”

○正義曰 :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총재(塚宰)는 천관(天官)의 <작위(爵位)가> 경(卿)이며, 왕을 보좌하여 정치하는 자인데,[冢宰 天官卿 佐王治者]"라는 것은, 《주례(周禮)》 〈천관(天官)〉을 살펴보건대, “태재(大宰)의 직책(職責)은 나라의 6전(六典)을 세워 그로써 왕(王)을 보좌해 방국(邦國)을 다스리는 일을 맡는다.”라고 하였다.

《敘官》云:“乃立天官塚宰,使帥其屬,而掌邦治,以佐王均邦國。治官之屬,大宰卿一人。”

서관(敍官)에 이르기를 “비로소 천관(天官) 총재(冢宰)를 세워 그 하속(下屬)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아 그로써 왕(王)을 보좌하여 방국(邦國)을 고르게 다스리게 한다. 치관(治官≒天官의 官員 이름)의 소속(所屬)에 태재(大宰)는 경(卿)이 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鄭注引此文云:“君薨,百官總己以聽於塚宰。言塚宰於百官無所不主。”

정현(鄭玄)의 주(注)에 이 《논어(論語)》의 글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임금이 훙서(薨逝)하면 백관(百官)이 자기 <직무(職務)를> 총괄하여서 총재(冢宰)에게 <명령을> 들었다[君薨 百官總己 以聽於冢宰]라고 했는데, 총재(冢宰)는 백관(百官)의 일을 주재(主宰)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爾雅》曰:“塚,大也。塚宰,大宰也。”變塚言大,進退異名也。百官總焉,則謂之塚;列職於王,則稱大。塚,大之上也。山頂曰塚,故云“塚宰,天官卿,佐王治者也”。

《이아(爾雅)》에 말하기를 “총(冢)은 대(大)이니 총재(冢宰)는 태재(大宰)이다.”라고 하였다. 총(冢)을 고쳐 대(大)로 말한 것은 나아가고 물러남에서 명칭(名稱)을 달리한 것이다. 백관(百官)을 모두 <주재(主宰)> 하면 총(冢)이라 말하고, 왕(王)에게 직책(職責)을 나열하면 대(大)를 칭한다. 총(冢)이 대(大)보다 위 이며, 산(山)의 정상(頂上)을 총(冢)이라 말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총재(冢宰)는 천관(天官)의 경(卿)이며 왕(王)을 보좌해 정치를 하는 자이다.”라고 한 것이다.

云“三年喪畢,然後王自聽政”者,謂卒哭除服之後,三年心喪已畢,然後王自聽政也。知非衰麻三年者,《晉書·杜預傳》云:“大始十年,元皇後崩,依漢、魏舊製,既葬,帝及群臣皆除服。疑皇太子亦應除否,詔諸尚書會仆射盧欽論之。唯預以為,古者天子諸侯三年之喪始服齊斬,既葬,除喪服,諒闇以居,心喪終製,不與士庶同禮。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삼년 상(喪)을 마친 연후에야 왕(王)이 스스로 정책을 편다[三年喪畢 然後王自聽政]"라는 것은, 졸곡(卒哭)하고 복(服)을 벗은 뒤에 3년의 심상(心喪)을 다 마치고 난 뒤에 왕(王)이 직접 정사를 듣는 것을 말함이다. 〈이곳의 3년이〉 최마(衰麻) 3년(三年)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진서(晉書)》 〈예지(禮志)〉에 이르기를 “태시(泰始) 10년에 원황후(元皇后)가 붕어(崩御)하니,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옛 제도에 따라 장사(葬事)를 마친 뒤에 황재(皇帝) 및 군신(群臣)이 모두 복(服)을 벗었다. 황태자(皇太子)도또한 복(服)을 벗는 것이 마땅한지가 의심스러워 여러 상서(尙書)들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복사(僕射) 노흠(盧欽)과 회합(會合)하여 논의(論議)하게 하였다. 오직 두예(杜預)만이 ‘옛날에 천자(天子)와 재후(諸侯)는 3년상(三年喪)에 처음에는 재최복(齊衰服)이나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가 장사(葬事)를 지내고는 상복(喪服)을 벗고서 량암(諒闇)에 거처하면서 심상(心喪)하여 상제(喪制)를 마쳤으니, <황재(皇帝)는> 사서인(士庶人)과 예(禮)가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於是盧欽、魏舒問預證據。預曰:“《春秋》,晉侯享諸侯,子產相鄭伯,時簡公未葬,請免喪以聽命,君子謂之得禮。宰咺歸惠公仲子之賵,《傳》曰吊生不及哀。此皆既葬除服諒陰之證也。書傳之說既多,學者未之思耳。《喪服》,諸侯為天子亦斬衰,豈可謂終服三年也?”

이에 노흠(盧欽)과 위서(魏舒)가 두예(杜預)에게 증거(證據)를 물으니, 두예(杜預)가 말하기를 "《춘추(春秋)》 소공(昭公) 12년에 진후(晉侯)가 연회(宴會)를 열어 제후(諸侯)를 접대(接待)할 때에 자산(子産)이 정백(鄭伯:鄭 定公)을 보좌(輔佐)했는데, 이때 아직 간공(簡公:定公의 父親)의 장사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향연(宴享)을 사양하고〉 상(喪)을 벗은 뒤에 <진군(晉君)의> 명(命)을 따르겠다고 청(請)한 일에 대해 군자(君子)가 「예(禮)에 맞았다.」고 말하였고, 은공(隱公) 원년(元年)에 천왕(天王)이 재(宰) 훤(咺)을 보내어 혜공(惠公)과 중자(仲子)의 봉(賵: 부의할 봉)을 준 데 대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산 사람에 대한 조위(弔慰)를 슬퍼할 때에 미처 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장사(葬事)를 마치면 복(服)을 벗고 량음(諒陰)한 증거이다. 서(書)와 전(傳)의 설(說)이 이미 많은데, 학자(學者)들이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의례(儀禮)》 〈상복(喪服)〉 주(注)에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위해서도 참최(斬衰) 3년복(三年服)을 입는다.」라고 한 것이 어찌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서 상기(喪期)를 마치는 것을 말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預又作議曰:“周景王有後、世子之喪,既葬,除喪而宴樂。 "晉叔向譏之曰:‘三年之喪,雖貴遂服,禮也。王雖不遂,宴樂以早。’此皆天子喪事見於古也。

두예(杜預)는 또 주의문(奏議文)을 지어 말하기를 "주(周)나라 경왕(景王)이 왕후(王后)와 세자(世子)의 상(喪)을 당하여, 장사(葬事)를 마치고 복(服)을 벗고서 연회(宴會)를 열어 즐겼다."라고 했느데, 진(晉)나라숙향( 叔)向이 비난하여 말하기를 「3년상(三年喪)은 비록 존귀(尊貴)한 〈천자(天子)라 해도〉 수복(遂服)하는 것이 예(禮)인데, 주왕(周王)이 비록 수복(遂服)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연회(宴會)를 열어 즐긴 것이 너무 일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고문(古文)에 보이는 천자(天子)의 상복(服喪)에 관한 일이다.

稱高宗不言喪服三年,而云諒闇三年,此釋服心喪之文也。譏景王不譏其除喪,而譏其宴樂已早,則既葬應除,而違諒闇之節也。

고종(高宗)이 「복상(服喪) 삼년(三年)」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르기를 「량음(諒陰) 삼년(三年)」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심상(心喪)의 복을 입었음을 해석한 글이다. 경왕(景王)을 비난한 것은 그가 복을 벗은 것을 비난한 것이 아니고, 그가 연회를 열어 즐긴 것이 너무 일렀음을 비난한 것이니, 장사(葬事)를 마치고서 복을 벗는 것은 마땅하고, 량암(諒闇)의 예절(禮節)을 어긴 것이 분명하다.

堯崩,舜諒闇三年,故稱遏密八音。由此言之,天子居喪,齊斬之製,非杖絰帶,當遂其服。既葬而除,諒闇以終之,三年無改於父之道,故曰:百官總己以聽塚宰。喪服既除,故更稱不言之美,明不複寢苫枕塊,以荒大政也。

요(堯)임금이 붕어(崩御)하자 순(舜)임금이 량암(諒闇) 삼년(三年)하였기 때문에 "음악을 그치고 조용히 하였다[遏密八音」"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말하면 천자(天子)의 거상(居喪)에 재최(齊衰)‧참최(斬衰)의 복제(服制)는 짚신‧상장(喪杖)‧수질(首絰)‧마대(麻帶)를 갖추어 입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장사(葬事)를 지낸 뒤에는 복(服)을 벗고 량암(諒闇)으로서 상(喪)을 마치고, 3년 동안 아버지의 도(道)를 고침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백관(百官)이 자기의 직책을 모두 총재(冢宰)에게 명을 듣는다.」라고 한 것이다.

상복(喪服)을 이미 벗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은 미덕(美德)을 다시 칭찬하였으니, 다시 거적자리 위에 흙덩이를 베고 자며 〈상제 노릇을 하여, 나라의〉 큰 정치를 폐기(廢棄)하지 않은 것을 밝힌 것이다.

《禮記》云:‘三年之喪,自天子達。’又云:‘父母之喪,無貴賤一也。’又云:‘端衰喪車皆無等。’此通謂天子居喪,衣服之製同於凡人,心喪之禮終於三年,亦無服喪三年之文。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3년의 복상(服喪)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통행한다.」라고 하고, 또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부모(父母)의 상(喪)에 〈3년을 복상(服喪)〉하는 것은 귀천(貴賤)의 구분 없이 모두 같다.」라고 하고, 또 〈잡기(雜記) 上〉에 「단쇠(端衰≒喪服의 上衣)와 상거(喪車)는 모두 〈귀천(貴賤)의〉 차등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천자(天子)가 거상(居喪)할 때에 입는 의복(衣服)의 제도는 보통 사람들과 같고, 심상(心喪)의 예(禮)는 3년에 끝난다는 것을 이른 것이니, 역시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는다는 글은 없다.

天子之位至尊,萬機之政至大,群臣之眾至廣,不得同之於凡人。故大行既葬,祔祭於廟,則因疏而除之。己不除則群臣莫敢除,故屈已以除之,而諒闇以終製,天下之人皆曰我王之仁也。屈已以從宜,皆曰我王之孝也。

천자(天子)의 지위는 지극히 높고 만기(萬機)의 정사(政事)는 지극히 크며, 군신(群臣)의 무리는 지극히 많으니 상복(喪服) 입는 기간이 보통 사람들과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대행왕(大行王)을 장사 지내고서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한 뒤에는 〈신하들의〉 상소(上疏)에 따라 복(服)을 벗으니, 이는 자기가 복을 벗지 않으면 신하들이 감히 복을 벗을 수 없다. 그러므로 뜻을 굽혀 복을 벗고서 량암(諒闇)하며 상제(喪制)를 마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우리 임금님은 인자(仁慈)하시다.」라고 하고, 뜻을 굽혀 마땅히 따르면 모두 「우리 임금님은 효성(孝誠)스러우시다.」라고 하였다.

既除而心喪,我王猶若此之篤也。凡我臣子,亦安得不自勉以崇禮。此乃聖製移風易俗之本也。”議奏,皇太子遂除衰麻而諒闇喪終。是知三年喪畢,謂心喪畢,然後王自聽政也。

복을 벗은 뒤에 심상(心喪)하면 「우리 임금님은 이처럼 독실하시다.」라고 할 것이니, 모든 우리의 신자(臣子)들 또한 어찌 스스로 노력해 예(禮)을 숭상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성인(聖人)이 〈예(禮)를〉 제정(制定)하여 풍속을 개선(改善)한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이 의논(議論)을 아뢰니, 황태자(皇太子)가 마침내 최마(衰麻)를 벗고 량암(諒闇)하며 상기(喪期)를 마쳤다.” 이에서 삼년상(三年喪)을 마친다는 것은 심상(心喪)을 마침을 이른 것이고, 그런 뒤에 왕(王)이 직접 정사를 처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論語』 원문

◎ 《鄕黨》篇 ​ 14 - 40

◆ 子張曰: "『書』云: '高宗諒陰, 三年不言.' 何謂也?" 子曰: "何必高宗? 古之人皆然. 君薨, 百官總己以聽於冢宰三年."

◎《논어집해(論語集解)》

【集解】 子張曰:「《書》云:『高宗諒陰,三年不言。』何謂也?」(孔曰:「高宗,殷之中興王武丁也。諒,信也。陰,猶默也。」 )子曰:「何必高宗,古之人皆然。君薨,百官總己,(馬曰:「己,百官。」 )以聽於塚宰三年。」(孔曰:「塚宰,天官卿,佐王治者,三年喪畢,然後王自聽政。」 )

◎《논어주소(論語註疏)》

疏“子張”至“三年”。

○正義曰:此章論天子諸侯居喪之禮也。

“子張曰:《書》云:‘高宗諒陰,三年不言。’何謂也”者,“高宗諒陰,三年不言”,《周書·無逸篇》文也。高宗,殷王武丁也。諒,信也。陰,默也。言武丁居父憂,信任塚宰,默而不言三年矣。子張未達其理,而問於夫子也。

“子曰:何必高宗,古之人皆然。君薨,百官總己,以聽於塚宰三年”者,孔子答言:“何必獨高宗,古之人皆如是。”諸侯死曰薨。

言君既薨,新君即位,使百官各總己職,以聽使於塚宰,三年喪畢,然後王自聽政。

○注“ 孔曰”至“默也”。

○正義曰:云“高宗,殷之中興王武丁也”者,孔安國云:“ 盤庚弟小乙子名武丁,德高可尊,故號高宗。”《喪服四製》引《書》云:“高宗諒陰,三年不言,善之也。王者莫不行此禮,何以獨善之也?曰:高宗者,武丁。武丁者,殷之賢王也,繼世即位,而慈良於喪。當此之時,殷衰而複興,禮廢而複起,故載之於書中而高之,故謂之高宗。三年之喪,君不言也。”是說不言之意也。

云“諒,信也。陰,默也”者,謂信任塚宰,默而不言也。

《禮記》作“諒闇”,鄭玄以為凶廬,非孔義也,今所不取。

○注“孔曰”至“聽政”。

○正義曰:云“塚宰,天官卿,佐王治者”者,案《周禮·天官》:“大宰之職,掌建邦之六典,以佐王治邦國。”《敘官》云:“乃立天官塚宰,使帥其屬,而掌邦治,以佐王均邦國。治官之屬,大宰卿一人。”鄭注引此文云:“君薨,百官總己以聽於塚宰。言塚宰於百官無所不主。”

《爾雅》曰:“塚,大也。塚宰,大宰也。”變塚言大,進退異名也。百官總焉,則謂之塚;列職於王,則稱大。塚,大之上也。山頂曰塚,故云“塚宰,天官卿,佐王治者也”。

云“三年喪畢,然後王自聽政”者,謂卒哭除服之後,三年心喪已畢,然後王自聽政也。知非衰麻三年者,《晉書·杜預傳》云:“大始十年,元皇後崩,依漢、魏舊製,既葬,帝及群臣皆除服。疑皇太子亦應除否,詔諸尚書會仆射盧欽論之。唯預以為,古者天子諸侯三年之喪始服齊斬,既葬,除喪服,諒闇以居,心喪終製,不與士庶同禮。於是盧欽、魏舒問預證據。

預曰:“《春秋》,晉侯享諸侯,子產相鄭伯,時簡公未葬,請免喪以聽命,君子謂之得禮。宰咺歸惠公仲子之賵,《傳》曰吊生不及哀。此皆既葬除服諒陰之證也。書傳之說既多,學者未之思耳。《喪服》,諸侯為天子亦斬衰,豈可謂終服三年也?”預又作議曰:“周景王有後、世子之喪,既葬,除喪而宴樂。晉叔向譏之曰:‘三年之喪,雖貴遂服,禮也。王雖不遂,宴樂以早。’此皆天子喪事見於古也。稱高宗不言喪服三年,而云諒闇三年,此釋服心喪之文也。譏景王不譏其除喪,而譏其宴樂已早,則既葬應除,而違諒闇之節也。堯崩,舜諒闇三年,故稱遏密八音。由此言之,天子居喪,齊斬之製,非杖絰帶,當遂其服。既葬而除,諒闇以終之,三年無改於父之道,故曰:百官總己以聽塚宰。喪服既除,故更稱不言之美,明不複寢苫枕塊,以荒大政也。

《禮記》云:‘三年之喪,自天子達。’又云:‘父母之喪,無貴賤一也。’又云:‘端衰喪車皆無等。’此通謂天子居喪,衣服之製同於凡人,心喪之禮終於三年,亦無服喪三年之文。天子之位至尊,萬機之政至大,群臣之眾至廣,不得同之於凡人。故大行既葬,祔祭於廟,則因疏而除之。己不除則群臣莫敢除,故屈已以除之,而諒闇以終製,天下之人皆曰我王之仁也。屈已以從宜,皆曰我王之孝也。既除而心喪,我王猶若此之篤也。凡我臣子,亦安得不自勉以崇禮。

此乃聖製移風易俗之本也。”議奏,皇太子遂除衰麻而諒闇喪終。是知三年喪畢,謂心喪畢,然後王自聽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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