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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聖學十圖)[李滉]

◎ 제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성학십도(聖學十圖)

by 석담 김한희 2024.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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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1568년(선조 1)에 퇴계 이황(李滉)이 왕(王:宣祖)에게 올린 상소문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의 여섯 번째 그림인데 원나라 정복심(程復心,1260~1368)이 그린 상도(上圖)에 퇴계가 중도(中圖)와 하도(下圖)를 그려 붙이고 정복심의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에 퇴계가 설명을 덛붙였다.

퇴계가 그린 그림은 젊은 후학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과 8년에 걸친 서신으로 토론한 왕복서의 산물로 볼 수 있는데 맹자의 4단과 중용의 정(情)이 발하기 전의 중과 발하여 중에 들어 맞은 화와 예기 예운의 칠정을 모두 담아서 그렸다.

◎ 第六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 상도(上圖)의 원 안에

“[心統性情(마음이 성과 정을 거느린다)]”이고, 우측은 “[寂然不動爲性(고요 하여서 움직이지 않으면 성이 된다)]”, 좌측은 “[感而遂通爲情(느껴서 드디어 통하면 정이 된다)]”이다. 그 의미는 사람의 마음은 성과 정을 모두 거느리고 있는데 고요하여 부동한 것이 성이고 마음이 느껴서 통한것이 정이라 하였다.

 

○ 상도(上圖)의 아래에

“[未發之性(아래에 아직 발하지 않은 성)]은 [爲心之體(마음의 본체가 된다)]”, 이것을 오성(五性)이라 하는데

稟木之秀 具愛之理曰仁

나무의 빼어남을 받아서 사랑함의 이치를 갖춤을 인(仁)이라 말하고,

稟火之秀 具敬之理曰禮

불의 빼어남을 받아서 공경함의 이치를 갖춤을 예(禮)라 말하며,

稟金之秀 具宜之理曰義

쇠의 빼어남을 받아서 마땅함의 이치를 갖춤을 의(義)라 말하고,

稟水之秀 具別之理曰智

물의 빼어남을 받아서 분별함의 이치를 갖춤을지(智)라고 말하며,

稟土之秀 具實之理曰信

흙의 빼어남을 받아서 알참의 이치를 갖춤을 신(信)이라 말한다.

 

○ 오성(五性)의 아래에

“[已發之性(이미 발한 성)]은 [爲心之用(마음의 쓰임이 된다)]“, 이것을 오정(五情)이라 하는데

惻隱之心 仁之端

아파하고 막으려 하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고,

辭讓之心 禮之端

주장하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이며,

羞惡之心 義之端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가 되고,

是非之心 智之端

옳게하고 그르게 하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가 되며,

誠實之心 信之端

이루고자함을 알차게 하는 마음은 신(信)의 단서가 된다.

 

< 퇴계(退溪)가 그린 중도(中圖)와 하도(下圖)는 아래 심통성정설 (心統性情圖說)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

林隱程氏曰。所謂心統性情者。言人稟五行之秀以生。於其秀而五性具焉。於其動而七情出焉。凡所以統會其性情者則心也。故其心寂然不動爲性。心之體也。感而遂通爲情。心之用也。張子曰。心統性情。斯言當矣。心統性。故仁義禮智爲性。而又有言仁義之心者。心統情。故惻隱羞惡辭讓是非爲情。而又有言惻隱之心。羞惡辭讓是非之心者。心不統性。則無以致其未發之中。而性易鑿。心不統情。則無以致其中節之和。而情易蕩。學者知此。必先正其心。以養其性。而約其情。則學之爲道得矣。臣謹按程子好學論。約其情在正心養性之前。此反居後者。此以心統性情言故也。然究其理而言之。當以程論爲順。○圖有未穩處。稍有更定。

 

○右三圖。上一圖。林隱程氏作。自有其說矣。其中下二圖。臣妄竊推原聖賢立言垂敎之意而作。其中圖者。就氣稟中指出本然之性不雜乎氣稟而爲言。子思所謂天命之性。孟子所謂性善之性。程子所謂卽理之性。張子所謂天地之性。是也。其言性旣如此。故其發而爲情。亦皆指其善者而言。如子思所謂中節之情。孟子所謂四端之情。程子所謂何得以不善名之之情。朱子所謂從性中流出。元無不善之情。是也。其下圖者。以理與氣合而言之。孔子所謂相近之性。程子所謂性卽氣氣卽性之性。張子所謂氣質之性。朱子所謂雖在氣中。氣自氣性自性。不相夾雜之性。是也。其言性旣如此。故其發而爲情。亦以理氣之相須或相害處言。如四端之情。理發而氣隨之。自純善無惡。必理發未遂。而掩於氣。然後流爲不善。七者之情。氣發而理乘之。亦無有不善。若氣發不中。而滅其理。則放而爲惡也。夫如是。故程夫子之言曰。論性不論氣不備。論氣不論性不明。二之則不是。然則孟子,子思所以只指理言者。非不備也。以其幷氣而言。則無以見性之本善故爾。此中圖之意也。要之。兼理氣統性情者。心也。而性發爲情之際。乃一心之幾微。萬化之樞要。善惡之所由分也。學者誠能一於持敬。不昧理欲。而尤致謹於此。未發而存養之功深。已發而省察之習熟。眞積力久而不已焉。則所謂精一執中之聖學。存體應用之心法。皆可不待外求而得之於此矣。

○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

임은 정씨(林隱程氏)가 말하기를, “소위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섭한다.’는 것은, 사람이 오행(五行)의 빼어남을 받아서 태어남에 그 빼어난 것에서 오성(五性)이 갖추어지고, 오성이 동(動)하는 데서 칠정이 나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그 성ㆍ정을 통섭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아니함이 성이 되는 것은 마음의 본체요, 감통(感通)하여 정(情)이 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장자(張子)가 ‘마음이 성과 정을 통섭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합당하다. 마음이 성을 통섭하는 까닭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이 되고 또 ‘인의의 마음’이란 말도 있으며, 마음이 정을 통섭하는 까닭에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가 정이 되고 또 ‘측은한 마음ㆍ수오하는 마음ㆍ사양하는 마음ㆍ시비하는 마음’이란 말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성을 통섭하지 못하면 미발(未發)의 중(中)을 이룰 수 없어서 성이 천착되기 쉽고, 마음이 정을 통섭하지 못하면 절도에 맞는 화(和)를 이룰 수 없어서 정이 방탕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서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성을 기르고 그 정을 단속하면, 배우는 방법이 얻어질 것이다.” 하였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정자(程子)의 〈호학론(好學論)〉에는 그 정을 단속한다는 말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성을 기른다는 말의 앞에 놓여 있는데 여기에는 도리어 뒤에 있는 것은, 마음이 성과 정을 거느린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치를 따져 말하면 마땅히 정자가 논한 것이 순리라고 하겠습니다. ○ 그림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있기에 조금 고쳤습니다.

○ 위의 세 그림 중에 맨 위에 있는 그림은 임은 정씨가 그리고 직접 설명을 하였고, 아래에 있는 두 그림은 신이 외람되게 성현이 말씀을 남겨 가르침을 드리운 뜻을 미루어 만들었습니다. 중도(中圖)는 기품(氣稟) 가운데 나아가서 기품이 섞이지 않은 본연(本然)의 성(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자사(子思)의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과 맹자의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과 정자(程子)의 이른바 ‘즉리의 성[卽理之性]’과 장자(張子)의 이른바 ‘천지의 성[天地之性]’이 곧 이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은 까닭에 그것이 발현하여 정이 된 것도 모두 그 선한 것을 가리켜 말하였으니, 자사의 이른바 ‘중절의 정[中節之情]’과, 맹자의 이른바 ‘사단의 정[四端之情]’과 정자의 이른바 ‘어찌 선하지 않은 것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정과, 주자의 이른바 ‘성(性)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것이 본래 선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정과 같은 것이 이것입니다. 하도(下圖)는 이(理)와 기(氣)가 합한 것으로 말한 것이니, 공자의 이른바 ‘서로 유사하다’는 성과, 정자의 이른바 ‘성이 곧 기(氣)요, 기가 곧 성’이라는 성과, 장자의 이른바 ‘기질의 성[氣質之性]’과, 주자의 이른바 ‘기(氣) 가운데 있으나 기는 기요 성은 성이어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성이 곧 이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은 까닭에 그것이 발현하여 정이 된 것도 이(理)와 기(氣)가 서로 의지하거나 서로 방해하는 곳을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예컨대 사단(四端)의 정은 이(理)가 발현함에 기(氣)가 따르니 자연히 순선(純善)하여 악이 없지만, 이가 발현하여 미처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리어진 뒤에는 불선(不善)으로 흘러갑니다. 또 일곱 가지 정은 기가 발현함에 이가 타서 또한 불선함이 없지만, 기가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못하여 그 이를 멸하면 방탕하여 악이 되는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은 까닭에 정 부자(程夫子)는,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아니하면 갖추어지지 않으며,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아니하면 밝지 아니하니, 이것을 따로따로 분리하면 옳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맹자와 자사가 이(理)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불비한 것이 아니라 기를 아울러 말하면 성이 본래 선함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일 뿐이니, 이것이 중도(中圖)의 뜻입니다. 요약하면 이기(理氣)를 겸하고 성정(性情)을 통섭하는 것은 마음인데, 성이 발현하여 정이 되는 즈음이 곧 마음의 기미(幾微)요, 온갖 변화의 중추인 것이니, 선악이 여기에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진실로 경(敬)을 견지하는 데 오로지하여 이(理)와 욕(欲)의 분별에 어둡지 않고, 더욱 이에 삼가서 미발 상태에서 존양(存養)하는 공부가 깊고 이발 상태에서 성찰하는 습성이 익숙하여 참을 쌓고 오래 힘써 그 치지 아니하면, 이른바 ‘정밀하고 오로지하며[惟情惟一] 치우침이 없이 떳떳한 도리를 잡는[允執厥中]’ 성학(聖學)과 ‘체(體)를 보존하고 용(用)을 응(應)하는’ 심법을, 다른 데에서 구할 필요 없이 모두 여기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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