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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聖學十圖)[李滉]

◎ 제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성학십도(聖學十圖)

by 석담 김한희 2024.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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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1)이 1568년(선조 1)에 왕(王)에게 올린 상소문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의 다섯 번째 그림이다.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의 첫 부분의 ○동규후서(洞規後敍)는 주자(朱子)가 지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도에게 게시하였던 백록동규(白鹿洞規)인데, 조선조(朝鮮朝) 서원(書院)에서 학규(學規)의 모범으로 중요시하여 왔다.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는 퇴계가 동규후서(洞規後敍)의 규문(規文)에 의하여 그린 그림인데, 이 도(圖)는 제 1층에 오륜(五倫)을 배치하고 제 2층은 중용(中庸) 20장에 나오는 “선을 선택하여 굳게 잡아 자신은 성실하게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며, 제 3층에서는 제2층의 내용을 각각 요체(要體)로 묶었다.

◎ 第五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 洞規後敍

熹竊觀古昔聖賢所以敎人爲學之意。莫非講明義理。以修其身。然後推以及人。非徒欲其務記覽爲詞章。以釣聲名取利祿而已。今之爲學者。旣反是矣。然聖賢所以敎人之法。具存於經。有志之士固當熟讀深思而問辨之。苟知理之當然。而責其身以必然。則夫規矩禁防之具。豈待他人設之。而後有所持循哉。近世於學有規。其待學者爲已淺矣。而其爲法。又未必古人之意也。故今不復施於此堂。而特取凡聖賢所以敎人爲學之大端。條列如右。而揭之楣間。諸君相與講明遵守。而責之於身焉。則夫思慮云爲之際。其所以戒謹恐懼者。必有嚴於彼者矣。其有不然。而或出於禁防之外。則彼所謂規者。必將取之。固不得而略也。諸君其念之哉。

 

○右規。朱子所作以揭示白鹿洞書院學者。洞在南康軍北匡廬山之南。有唐李渤隱于此。養白鹿以自隨。因名其洞。南唐建書院。號爲國庠。學徒常數百人。宋太宗頒書籍。官洞主以寵勸之。中間蕪廢。朱子知南康軍。請于朝重建。聚徒設規。倡明道學。書院之敎。遂盛于天下。臣今謹依規文本目。作此圖以便觀省。蓋唐虞之敎在五品。三代之學。皆所以明人倫。故規之窮理力行。皆本於五倫。且帝王之學。其規矩禁防之具。雖與凡學者有不能盡同者。然本之彝倫。而窮理力行。以求得夫心法切要處。未嘗不同也。故幷獻是圖。以備朝夕 暬御之箴。

○以上五圖。本於天道。而功在明人倫懋德業。

◯ 동규후서(洞規後敍)

내가 보건대 옛날 성현이 사람에게 공부하는 것을 가르친 뜻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하여 그 몸을 닦은 뒤에 이를 미루어 사람에게 미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그것을 기억하고 두루 보아 사장(詞章)을 짓기에 힘써 명성을 구하고 이록(利祿)을 취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부하는 이들은 이와는 상반된다. 성현이 사람 가르치는 법은 경(經)에 갖추어져 있으니,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숙독(熟讀)하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분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이(理)의 당연함을 알아서 자신에게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책려한다면, 그 일상생활의 법도와 금지 규정을 어찌 다른 사람이 베풀어 주기를 기다린 뒤에 준수하고 좇을 필요가 있겠는가. 요즈음에도 학교에 규정은 있지만 학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천박하고, 그 규정도 딱히 고인(古人)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당(堂)에는 더 이상 그 규정을 쓰지 않고, 특별히 성현들이 사람들에게 학문하는 것을 가르친 바의 큰 근본을 취하여 위와 같이 조목조목 열거하여 현판에 게시한다. 제군들은 서로 강명하고 준수하여 이것을 몸에 실행하기를 기한다면,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바가 반드시 저 규정보다 엄격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고 혹 금지 규정의 범위를 벗어남이 있다면 이른바 규정이란 것은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요 실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니, 제군들은 명심할지어다.

 

○ 위의 백록동규는 주자가 지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도에게 게시한 것입니다. 백록동은 남강군(南康軍) 북쪽 광려산(匡廬山) 남쪽에 있는데, 당(唐)나라 이발(李渤)이 여기에 은거하여 흰 사슴을 길러 데리고 다녔으므로, 이에 따라 백록동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남당(南唐) 때에 서원을 세워 국상(國庠)이라고 불렀는데 학도가 항상 수백 명이었으며, 송나라 태종이 서적을 나누어 주고 동주(洞主)에게 관직을 주어 권장하였습니다. 중간에 황폐해지자 주자가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 청하여 중건하고 학도를 모아서 규정을 만들어 도학(道學)을 앞장서서 밝히니, 서원의 교육이 드디어 천하에 성행하였습니다. 신이 이제 삼가 규문(規文)의 본조목에 의거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서 보고 살피기에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대개 당우(唐虞) 시대의 교육은 오품(五品)에 있고, 삼대(三代)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동규(洞規)의 궁리와 역행(力行)이 모두 오륜에 기본을 둔 것입니다. 또 제왕의 학문이 갖추어야 할 준칙과 금지의 조목은 일반 학자들과 다 같을 수는 없지만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에 기본을 두고 이치를 규명하고 실행에 힘써서 심법(心法)의 절실하고 요긴한 것을 구하는 면에서는 같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이 그림을 헌상하여 아침저녁으로 시종하는 이가 아뢰는 잠언(箴言)에 충당하옵니다.

 

○ 이상 다섯 도(圖)는 천도(天道)에 기본을 두었는데, 공부는 인륜을 밝히고 덕업(德業)을 힘쓰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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