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봉책(彌縫策)
<느슨한데를 꿰매는 계책(計策)>
ㅡ 출전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先偏後伍, 伍承彌縫”
'전차 편대(編隊)를 앞세우고 보병 대오(隊伍)를 뒤에 세우면 대오가 느슨한데를 꿰매어 이어준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미봉책(彌縫策)”
<미봉책(彌縫策)>은
『춘추(春秋)』의 해석서(解釋書)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환공(桓公) 5年】편에 나오는데, 주(周)나라 환왕(桓王) 13년(BC 707)에 기울어져 가는 주나라 왕실(王室)의 세력(勢力)을 일으킬 방도를 모색(摸索)하다가 왕실을 무시하는 정(鄭)나라 장공(莊公)을 공격(功擊)하기로 했다.
주(周)나라 환왕(桓王)은 공격(功擊)에 앞서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경사 자격을 박탈했는데 이에 장공(莊公)이 조견(朝見)을 중단했다. 이를 빌미로 환왕(桓王)이 제후국인 괵(虢)·채(蔡)·위(衛)·진(陳)나라의 군사(軍士)를 모아 자신(自身)이 직접 총사령관이 되어 정(鄭)나라 정벌(征伐)에 나섰다.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방어 대책을 논의하는데, 신하(臣下) 자원(子元)이 말하기를 “陳亂,民莫有鬬心,若先犯之,必奔。<진(陳)나라는 내란으로 백성들이 싸울 마음이 없으니 만일 그들을 먼저 공격하면 반드시 달아 납니다.>라고 청하여 장공(莊公)이 그대로 따르며 ”曼伯為右拒,祭仲足為左拒,原繁、高渠彌以中軍奉公,為魚麗之陳,先偏後伍,伍承彌縫。戰于繻葛,命二拒曰:「旝動而鼓。」蔡、衛、陳皆奔.<만백(曼伯)이 오른쪽 방어군이 되고 채중족(祭仲足)이 왼쪽 방어군이 되어, 원번(原繁)과 고거미(高渠彌)가 중군을 거느리고 공[장공(莊公)]을 모시고 어리진(魚麗陳)을 만들어 편[偏:戰車]을 앞에 오[伍:步兵]를 뒤에 세우고 보병[伍]이 느슨한데를 꿰매어 이어주게 하였다. 수갈(繻葛)의 싸움에서 두 방어군에 명하기를 ”대장기(旝)가 움직이면 북을 쳐 진격하라”하였는데, 채(蔡)·위(衛)·진(陳)나라가 모두 달아났다.>“라고 하여 제후국 정(鄭)나라가 천자국 주(周)나라에게 크게 승리한 글 중에 “미봉(彌縫)”이란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미봉(彌縫)의 '미(彌)'자는 불교의 용어 '미륵 미 [彌]'자가 아니고 전쟁용어인 '활 부릴 미[㣆]'자 이며 활의 시위가 벗겨져 느슨해졌다는 뜻이며, 글의 의미는 전차(戰車)를 앞에 보병(步兵)을 뒤에 세워 보병이 전차(戰車)의 느슨한데를 꿰매어[彌縫] 이어주게 한다는 뜻이다.
전투에서 크게 대승을 한 성공한 군사(軍事) 작전과 관련된 용어인데, 어리석은 인사들이 실패한 작전으로 글을 잘못 해석하여 근본(根本)을 해결하지 않고 빈곳의 결함(缺陷)을 임시변통(臨時變通)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할 때 사용하여 부정적인 말로 변질되어 많이 쓰이게 되었다.
【石潭 案】 : 미봉(彌縫)의 '미(彌)'자는 불교의 용어 '미륵 미 [彌]'자가 아니고 전쟁용어인 '활 부릴 미[㣆]'자 이며 활의 시위가 벗겨져 느슨해졌다는 뜻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기원전 2년 보다 700년 이전의 역사이기에 '미륵 미 [彌]'자가 아니고 '활 부릴 미[㣆]'자로 해석해야 합당하다.
이 글은 주(周)나라 천자인 환왕(桓王)이 기원전 707년에 괵(虢)·채(蔡)·위(衛)·진(陳)나라의 군사(軍士)를 모아 연합하여 자신(自身)이 직접 총사령관이 되어 정(鄭)나라 장공(莊公)을 벌하려고 공격(功擊)한 수갈(繻葛)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창피를 당한 고사이며, 약소국 정(鄭)나라가 천자의 연합군에 맞서 승리한 뛰어난 책략이 '미봉책(彌縫策)'인데 어리석은 인사들이 글을 잘못 해석하고 '미봉책(彌縫策)'이 주(周)나라 환왕(桓王)의 실패한 책략으로 생각하여 '결함(缺陷)을 임시변통(臨時變通)'하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을 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원문
○ 《桓公, 傳五年》
夏,齊侯、鄭伯朝于紀,欲以襲之。紀人知之。王奪鄭伯政,鄭伯不朝。
[노(魯)나라] 환공(桓公) 5年 여름에, 제(齊)나라 제후와 정(鄭)나라 백(伯)이 기(紀)나라에 조현하였는데, 그로써 [기 나라를] 습격하려 했는데 기(紀)나라가 그것을 알았다. [주 나라] 왕이 정백(鄭伯)의 정권을 빼앗으니 정백이 조현[朝]을 안 했다.
秋,王以諸侯伐鄭,鄭伯禦之。王為中軍;虢公林父將右軍,蔡人、衛人屬焉;周公黑肩將左軍,陳人屬焉。鄭子元請為左拒,以當蔡人、衛人;為右拒,以當陳人,曰:「陳亂,民莫有鬬心,若先犯之,必奔。王卒顧之,必亂。蔡、衛不枝,固將先奔,既而萃於王卒,可以集事。」從之。
가을에 [주 나라] 왕(王)이 제후[괵(虢)·채(蔡)·위(衛)·진(陳)]를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정벌하니, 정백(鄭伯)이 방어를 했다. 왕이 중군을 하고, 괵공(虢公) 임보가 우군을 거느리는데 채(蔡)나라와 위(衛)나라는 그곳[우군]에 소속되고, 주(周)나라 경대부 흑견(黑肩)이 좌군을 거느리는데 진(陳)나라가 좌군에 소속되었다. 정(鄭)나라 자원[突의 字, 厲公이 됨]이 왼쪽 방어군이 되어 채인(蔡人)과 위인(衛人)을 대항하고 오른쪽 방어군이 되어 그로써 진인(陳人)을 대항하자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진(陳)나라는 내란으로 백성들이 싸울 마음이 없으니 만일 그들을 먼저 공격하면 반드시 달아나며, 왕(王)이 갑자기 그것을 보면 반드시 혼란에 빠지고, 채(蔡)나라와 위(衛)나라가 지탱하지 못하면 반드시 장수가 먼저 달아날 것이니, 나아가서 왕의 군졸에게 달려들면 그로써 일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정백이] 그대로 따랐다.
曼伯為右拒,祭仲足為左拒,原繁、高渠彌以中軍奉公,為魚麗之陳,先偏後伍,伍承彌縫。戰于繻葛,命二拒曰:「旝動而鼓。」蔡、衛、陳皆奔,王卒亂,鄭師合以攻之,王卒大敗。祝聃射王中肩,王亦能軍。祝聃請從之。公曰:「君子不欲多上人,況敢陵天子乎!苟自救也,社稷無隕,多矣。」 夜,鄭伯使祭足勞王,且問左右。仍叔之子來聘,弱也。
[정(鄭)나라] 만백(曼伯)이 오른쪽 방어군이 되고 채중족(祭仲足)이 왼쪽 방어군이 되어, 원번(原繁)과 고거미(高渠彌)가 중군을 거느리고 공[鄭伯]을 모시며 어리진(魚麗陳)을 만들어 전차[偏]를 앞에 보병[伍]을 뒤에 세우고 보병[伍]이 느슨한데를 꿰매어 이어주게 하였다. 수갈(繻葛)의 전투에서 두 방어군에 명하기를 ”대장기(旝)가 움직이면 북을 쳐 진격하라”하였는데, 채(蔡)·위(衛)·진(陳)나라가 모두 달아나고, 왕의 군이 혼란에 빠지니, 정(鄭)나라 군대가 합하여 공격하니 왕 군대가 대패하였다. [정(鄭)나라] 축담(祝聃)이 왕을 쏘아 어께를 맞추었는데 왕이 그래도 군을 지휘하였다. 축담이 추격하자고 청하자 공(鄭伯:장공)이 말하기를 “군자는 남을 많이 능가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감히 천자를 능가하려 하는가? 만일 스스로 구원하여 사직이 떨어짐이 없다면 충분하다.”라고 했다. 밤에 정백(鄭伯)이 채족(祭足)을 보내어 왕을 위로하고 또 좌우에게도 위문하였다. 잉숙(仍叔)의 아들이 빙문(聘問)을 왔는데 나이가 어렸다.
註 1) : 《康熙字典》⇒“偏” 又【司馬法】車戰,二十五乗爲偏。詳前伍字註。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편(偏)”은, 또 『사마법(司馬法)』에서, 전쟁 수레는 25대[乗]를 편(偏)으로 하며, 앞 오(伍)자의 상세한 주석이다.
註 2) : 《康熙字典》⇒“伍” 【左傳·桓五年】 先偏後伍,伍承彌縫。【註】司馬法,車戰,二十五乗爲偏,以車居前,以伍次之,承偏之隙而彌縫闕漏也。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오(伍)”는, 【춘추좌전 환공 5년(左傳·桓五年)】에 '전차 편대(編隊)를 앞세우고 보병 대오(隊伍)를 뒤세우면 대오가 느슨한데를 꿰매어 이어준다.'라고 했다. 【주(註)】 사마법(司馬法)에 전차전은 25대가 편(偏)이 되는데, 전차를 가지고 앞에 세우고 보병 대오로써 그 다음에 세우면 전차 편대의 틈을 연결하여서 늘어져 부실한 허점을 꿰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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