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정의(周易正義)》는 왕필(王弼, 226~249)의 주역 주(注)를 채용하여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주석(注釋)을 하여 지었다.
27. 이괘(頤卦)[卦象:산뢰이]
☶ 艮上
☳ 震下
진[雷.우뢰]이 아래에 있고, 간[山.산]이 위에 있다.
頤,貞吉。觀頤,自求口實。 이(頤)는 곧아야 길하며, 턱[頤]이 보고서 스스로 입에 채울 것[음식]을 구한다. |
[孔穎達 疏] 正義曰:「頤貞吉」者,於頤養之世,養此貞正,則得吉也。「觀頤」者,頤,養也,觀此聖人所養物也。「自求口實」者,觀其自養,求其口中之實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頤)는 곧아야 길하며[頤 貞吉]”라는 것은, 턱[頤]에서 길러짐의 세상은 이 기름이 곧고 바르면 길함을 얻는 것이다. “턱이 보고서[觀頤]”라는 것은, ‘이(頤, 턱 이)’는 길러줌이며, 이를 보고 성인(聖人)이 사물을 길러주는 바이다. “스스로 입에 채울 것[음식]을 구한다[自求口實]”라는 것은, 그 스스로 길러짐을 보고 그 입안에 물건[음식]을 구하는 것이다.」 |
《彖》曰:頤貞吉,養正則吉也。觀頤,觀其所養也。自求口實,觀其自養也。天地養萬物,聖人養賢以及萬民,頤之時大矣哉! 《단전(彖傳)》에서 말하였다. “기름[頤]이 곧아야 길함은, 기름이 바르면 길함이다. 기름을 봄[觀頤]은, 그 길러지는 바를 보는 것이다. 스스로 채울 음식을 구함[自求口實]은 그 스스로 기름을 봄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르고, 성인이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치니, 기름[頤]의 때가 크도다!" |
[孔穎達 疏] 「《彖》曰」至「大矣哉」。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단왈(彖曰)에서 대의재(大矣哉)까지.} ○正義曰:「頤貞吉,養正則吉」者,釋「頤貞吉」之義。頤,養也。貞,正也。所養得正,則有吉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기름[頤]이 곧아야 길함은, 기름이 바르면 길함이다[頤貞吉 養正則吉]”라는 것은, ‘기름이 곧아야 길함[頤貞吉]’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頤, 턱 이)’는 기름이고, ‘정(貞, 곧을 정)’은 바름이며, 기르는 바가 바름을 얻으면 길함이 있는 것이다. 其養正之言,乃兼二義:一者養此賢人,是其「養正」,故下云「聖人養賢以及萬民」。 그 바름을 기른다는 말은, 이에 두 뜻을 겸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이는 현명한 사람을 기름이 바로 그 바름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아래에 이르기를 “성인이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친다[聖人養賢以及萬民]”라고 한 것이다. 二者謂養身得正,故《象》云「慎言語,節飲食」。以此言之,則「養正」之文,兼養賢及自養之義也。 두 번째는 자신을 기름에 바름을 얻음을 말하였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말의 논란함을 삼가하고 먹고 마심을 절제한다[慎言語,節飲食]”라고 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말을 한다면 바름을 기름의 글은 현명함을 기름과 스스로 길러짐의 뜻을 겸한 것이다. 「觀頤觀其所養也」者,釋「觀頤」之義也。言在下觀視在上頤養所養何人,故云「觀頤,觀其所養也」。 “기름을 봄은 그 길러지는 바를 보는 것이다[觀頤 觀其所養也]”라는 것은, ‘턱을 봄[觀頤]’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아래에 있으면서 위의 턱이 기름이 어떤 사람을 기르는 바에 있는가를 살펴 봄을 말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기름을 봄은 그 길러지는 바를 봄이다[觀頤 觀其所養也]”라고 한 것이다. 「自求口實,觀其自養」者,釋「自求口實」之義也。謂在下之人,觀此在上自求口中之實,是觀其自養,則是在下觀上,乃有二義:若所養是賢,及自養有節,則是其德盛也;若所養非賢,及自養乖度,則其德惡也。此卦之意,欲使所養得也,不欲所養失也。 “스스로 채울 음식을 구함은 그 스스로 기름을 봄이다[自求口實 觀其自養]”라는 것은, ‘스스로 채울 음식을 구함[自求口實]’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이 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입안에 채울 것을 구함을 봄은 바로 그 스스로 길러짐을 살핌이고, 이는 아래에 있으면서 위를 살핌이니 이에 두 뜻이 있음이다. 만약 기르는 바가 이에 현명하여 스스로 기름에 절제가 있으면 이는 그 덕(德)이 성함이고, 만약 기르는 바가 현명하지 않아서 마침내 스스로 기름에 법도를 어긴다면 그 덕(德)이 악한 것이다. 이 괘(卦)의 뜻은 기르는 바로 하여금 얻게 하고자 함이지 기르는 바를 없애려고 함이 아니다. 「天地養萬物」者,自此已下,廣言《頤卦》所養事大,故云「天地養萬物」也。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르고[天地養萬物]”라는 것은, 이로부터 이하는 이괘(頤卦)의 기르는 바의 일이 큼을 널리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른다[天地養萬物]”라고 한 것이다. 「聖人養賢以及萬民」者,先須養賢,乃得養民,故云「養賢以及萬民」也。 “성인이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치니[聖人養賢以及萬民]”라는 것은, 먼저 모름지기 현명함을 길러야 비로소 백성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친다[養賢以及萬民]”라고 한 것이다. 聖人但養賢人使治眾,眾皆獲安,有如虞舜五人,周武十人,漢帝張良,齊君管仲,此皆養得賢人以為輔佐,政治世康,兆庶咸說,此則「聖人養賢以及萬民」之養也。 성인(聖人)이 다만 현명한 사람을 길러서 무리를 다스리게 하여서 무리가 모두 편안함을 얻는데,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다섯 사람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열 사람과 한(漢)나라 고재(高帝)의 장량(張良)과 제(齊)나라 군주의 관중(管仲) 같음이 있으며, 이는 모두 현명한 사람을 얻어 길러서 보좌로 삼아 정사를 다스려서 세상이 편안하니 억조 백성들이 모두 기뻐함이며, 이는 곧 “성인이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침[聖人養賢以及萬民]”의 뜻이다. 「頤之時大矣哉」者,以《彖》釋「頤」義,於理既盡,更無餘意,故不云義,所以直言「頤之時大矣哉」。以所養得廣,故云「大矣哉」。 “기름[頤]의 때가 크도다![頤之時 大矣哉]”라는 것은, 〈단전(彖傳)〉을 가지고 이(頤)의 뜻을 해석하였는데, 이치에 이미 다하여 다시 남은 뜻이 없기 때문에 뜻을 일러주지 않았으며, 직접 “기름[頤]의 때가 크도다![頤之時 大矣哉]”라고 말한 까닭이다. 기르는 바가 넓음을 얻었기 때문에 이르기를 “크도다![大矣哉]”라고 한 것이다.」 |
[孔穎達 疏] 「《彖》曰」至「大矣哉」。
○正義曰:「頤貞吉,養正則吉」者,釋「頤貞吉」之義。頤,養也。貞,正也。所養得正,則有吉也。其養正之言,乃兼二義:一者養此賢人,是其「養正」,故下云「聖人養賢以及萬民」。二者謂養身得正,故《象》云「慎言語,節飲食」。以此言之,則「養正」之文,兼養賢及自養之義也。「觀頤觀其所養也」者,釋「觀頤」之義也。言在下觀視在上頤養所養何人,故云「觀頤,觀其所養也」。「自求口實,觀其自養」者,釋「自求口實」之義也。謂在下之人,觀此在上自求口中之實,是觀其自養,則是在下觀上,乃有二義:若所養是賢,及自養有節,則是其德盛也;若所養非賢,及自養乖度,則其德惡也。此卦之意,欲使所養得也,不欲所養失也。「天地養萬物」者,自此已下,廣言《頤卦》所養事大,故云「天地養萬物」也。「聖人養賢以及萬民」者,先須養賢,乃得養民,故云「養賢以及萬民」也。聖人但養賢人使治眾,眾皆獲安,有如虞舜五人,周武十人,漢帝張良,齊君管仲,此皆養得賢人以為輔佐,政治世康,兆庶咸說,此則「聖人養賢以及萬民」之養也。「頤之時大矣哉」者,以《彖》釋「頤」義,於理既盡,更無餘意,故不云義,所以直言「頤之時大矣哉」。以所養得廣,故云「大矣哉」。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단왈(彖曰)에서 대의재(大矣哉)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기름[頤]이 곧아야 길함은, 기름이 바르면 길함이다[頤貞吉 養正則吉]”라는 것은, ‘기름이 곧아야 길함[頤貞吉]’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頤, 턱 이)’는 기름이고, ‘정(貞, 곧을 정)’은 바름이며, 기르는 바가 바름을 얻으면 길함이 있는 것이다.
그 바름을 기른다는 말은, 이에 두 뜻을 겸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이는 현명한 사람을 기름이 바로 그 바름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아래에 이르기를 “성인이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친다[聖人養賢以及萬民]”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을 기름에 바름을 얻음을 말하였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말의 논란함을 삼가하고 먹고 마심을 절제한다[慎言語,節飲食]”라고 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말을 한다면 바름을 기름의 글은 현명함을 기름과 스스로 길러짐의 뜻을 겸한 것이다.
“기름을 봄은 그 길러지는 바를 보는 것이다[觀頤 觀其所養也]”라는 것은, ‘턱을 봄[觀頤]’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아래에 있으면서 위의 턱이 기름이 어떤 사람을 기르는 바에 있는가를 살펴 봄을 말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기름을 봄은 그 길러지는 바를 봄이다[觀頤 觀其所養也]”라고 한 것이다.
“스스로 채울 음식을 구함은 그 스스로 기름을 봄이다[自求口實 觀其自養]”라는 것은, ‘스스로 채울 음식을 구함[自求口實]’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이 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입안에 채울 것을 구함을 봄은 바로 그 스스로 길러짐을 살핌이고, 이는 아래에 있으면서 위를 살핌이니 이에 두 뜻이 있음이다. 만약 기르는 바가 이에 현명하여 스스로 기름에 절제가 있으면 이는 그 덕(德)이 성함이고, 만약 기르는 바가 현명하지 않아서 마침내 스스로 기름에 법도를 어긴다면 그 덕(德)이 악한 것이다. 이 괘(卦)의 뜻은 기르는 바로 하여금 얻게 하고자 함이지 기르는 바를 없애려고 함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르고[天地養萬物]”라는 것은, 이로부터 이하는 이괘(頤卦)의 기르는 바의 일이 큼을 널리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른다[天地養萬物]”라고 한 것이다.
“성인이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치니[聖人養賢以及萬民]”라는 것은, 먼저 모름지기 현명함을 길러야 비로소 백성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친다[養賢以及萬民]”라고 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다만 현명한 사람을 길러서 무리를 다스리게 하여서 무리가 모두 편안함을 얻는데,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다섯 사람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열 사람과 한(漢)나라 고재(高帝)의 장량(張良)과 제(齊)나라 군주의 관중(管仲) 같음이 있으며, 이는 모두 현명한 사람을 얻어 길러서 보좌로 삼아 정사를 다스려서 세상이 편안하니 억조 백성들이 모두 기뻐함이며, 이는 곧 “성인이 현명함을 길러서 그로써 만민에 미침[聖人養賢以及萬民]”의 뜻이다.
“기름[頤]의 때가 크도다![頤之時 大矣哉]”라는 것은, 〈단전(彖傳)〉을 가지고 이(頤)의 뜻을 해석하였는데, 이치에 이미 다하여 다시 남은 뜻이 없기 때문에 뜻을 일러주지 않았으며, 직접 “기름[頤]의 때가 크도다![頤之時 大矣哉]”라고 말한 까닭이다. 기르는 바가 넓음을 얻었기 때문에 이르기를 “크도다![大矣哉]”라고 한 것이다.」
《象》曰:山下有雷,頤,君子以慎言語,節飲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산 아래에 우레가 있음이 이(頤)이며, 군자가 그로써 말의 논란함을 삼가하고 먹고 마심을 절제한다." 【王弼 注】 言語、飲食猶慎而節之,而況其餘乎。 【왕필 주】 말하고 논의함[言語]과 마시고 먹음[飲食]은 오히려 신중하면서 절제를 함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는 어떠하겠는가? |
[孔穎達 疏] 正義曰:山止於上,雷動於下。頤之為用,下動上止,故曰「山下有雷,頤。」人之開發言語、咀嚼、飲食,皆動頤之事,故君子觀此頤象,以謹慎言語,裁節飲食。先儒云:「禍從口出,患從口入。」故於頤養而慎節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산이 위에서 그치고 우레가 아래에서 움직이니, 턱[頤]의 쓰임이 아래가 움직이고 위가 그치기 때문에 “산 아래에 우레가 있음이 이(頤)이며[山下有雷,頤]”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의 말을 토론하여 [입을] 열어 말하고, 음식을 씹어서 맛봄이 모두 턱이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에 君子가 이 턱의 모습[象]을 보고서 그로써 말을 논의함을 신중히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다. 앞선 유학자[先儒]가 이르기를 “재앙은 입에서 나오고 근심은 입을 따라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턱에는 기르면서도 삼가고 절제하는 것이다.」 |
初九,舍爾靈龜,觀我朵頤,凶。 초구(初九)는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버리고, 나의 움직이는 턱을 보니 흉하다. 【王弼 注】 朵頤者,嚼也。以陽處下,而為動始,不能令物由己養,動而求養者也。夫安身莫若不競,脩己莫若自保。守道則福至,求祿則辱來。居養賢之世,不能貞其所履,以全其德,而舍其靈龜之明兆,羨我朵頤而躁求,離其致養之至道,闚我寵祿而競進,凶莫甚焉。 【왕필 주】 턱이 움직임이란 것은 씹음이다. 양(陽)으로써 아래에 처하면서 움직임의 시작이 되어서 사물로 하여금 자기를 말미암아 잘 길러지게 하지 못하고 움직이면서 기름을 구하는 자이다. 자신을 편안히 함은 다투지 않음 보다 나음이 없고, 자기 몸을 닦음은 스스로를 보존함 보다 나음이 없으며, 도(道)를 지키면 복(福)이 이르고 녹(祿)을 구하면 욕됨이 온다. 현명함을 길러 주는 세상에 거주하여 그 이행하는 바를 곧게 하여 그로써 그 덕(德)을 온전히 잘하지 못해서, 그 신령스러운 거북의 밝은 조짐을 버리고 나의 움직이는 턱을 부러워하여 조급하게 구하며, 그 길러줌을 이르게 하는 지극한 도(道)를 떠나서 나의 영화로운 녹(祿)을 엿보면서 다투어 나아가니, 흉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다. |
[孔穎達 疏] 「初九」至「觀我朵頤凶」。 ○正義曰:「靈龜」謂神靈明鑒之龜。「兆」以喻己之明德也。「朵頤」謂朵動之頤以嚼物,喻貪婪以求食也。初九「以陽處下而為動始」,不能使物賴已而養,而更自動求養,是舍其靈龜之明兆,觀我朵頤而躁求。是損己廉靜之德,行其貪竊之情,所以「凶」也。不足可貴,故《象》云「亦不足貴」也。 ○注「朵頤者嚼也」至「凶莫甚焉」。 ○正義曰:「朵頤者嚼也」者,朵是動義,如手之捉物謂之朵也。今動其頤,故知嚼也。「不能令物猶己養」者,若道德弘大,則己能養物,是物由己養。今身處無位之地,又居震動之始,是動而自求養也。「離其致養之至道,闚我寵祿而競進」者,若能自守廉靜,保其明德,則能致君上所養。今不能守廉靜,是「離其致養之至道」,反以求其寵祿而競進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초구(初九)에서 관아타이흉(觀我朵頤凶)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신령한 거북[靈龜]’은, 신령스러워서 보여줌이 밝은 거북을 말한다. ‘조(兆)’는, 그로써 자기의 밝은 덕(德)을 비유하였다. ‘타이(朵頤)’는 움직이는 턱을 움직여 그로써 물건을 씹음을 말하며, 탐하여 욕심내고 그로써 음식을 구함을 비유한 것이다. 초구(初九)가 “양(陽)으로써 아래에 처하면서 움직임의 시작이 되어서[以陽處下而為動始]”물건으로 하여금 자기를 의뢰해서 길러지게 잘하지 못하면서 다시 스스로 움직여 길러주기를 구하니, 이는 그 신령스러운 거북의 밝은 조짐을 버리고 나의 움직이는 턱을 보고서 조급히 구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청렴하고 고요한 덕(德)을 덜어내고 그 도둑질하는 마음을 탐하여 행하는 것이니, 흉(凶)함의 까닭이다. 귀하게 할 수 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또한 귀함이 부족하다[亦不足貴]”라고 한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주타이자작야(注朵頤者嚼也)에서 흉막심언(凶莫甚焉)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턱이 움직임이란 것은 씹음이다[朵頤者 嚼也]”라는 것은, ‘타(朵, 늘어질 타)’는 바로 움직임의 뜻이며, 손이 물건을 쥐는 것 같음을 일컫기를 타(朵)라고 한다. 지금 그 턱이 움직이기 때문에 씹음을 아는 것이다. “사물로 하여금 자기를 말미암아 잘 길러지게 하지 못하고[不能令物由己養]”라는 것은, 만약 도덕(道德)이 넓고 크면 자기가 사물을 잘 기르는데, 이는 사물이 자기를 말미암아 길러지는 것이며, 지금 자신이 지위의 땅이 없는데에 처하고 또 진(震)의 움직임이 시작함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움직여서 스스로 길러주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 길러줌을 이르게 하는 지극한 도(道)를 떠나서 나의 영화로운 녹(祿)을 엿보면서 다투어 나아가니[離其致養之至道 闚我寵祿而競進]”라는 것은, 만약 스스로 청렴함과 고요함을 잘 지켜서 그 밝은 덕(德)을 보존하면 군주에 이르러 위를 잘 길러주는 바인데, 지금 청렴함과 고요함을 잘 지키지 못하니, ‘그 길러줌을 이르게 하는 지극한 도(道)를 떠나서[離其致養之至道]’ 도리어 그로써 영광과 녹(祿)을 구하려고 다투어 나아가는 것이다.」 |
《象》曰:觀我朵頤,亦不足貴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나의 움직이는 턱을 봄은, 또한 귀함이 충분하지 않음이다.” |
[孔穎達 疏] 「初九」至「觀我朵頤凶」。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초구(初九)에서 관아타이흉(觀我朵頤凶)까지.}
○正義曰:「靈龜」謂神靈明鑒之龜。「兆」以喻己之明德也。「朵頤」謂朵動之頤以嚼物,喻貪婪以求食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신령한 거북[靈龜]’은, 신령스러워서 보여줌이 밝은 거북을 말한다. ‘조(兆)’는, 그로써 자기의 밝은 덕(德)을 비유하였다. ‘타이(朵頤)’는 움직이는 턱을 움직여 그로써 물건을 씹음을 말하며, 탐하여 욕심내고 그로써 음식을 구함을 비유한 것이다.
初九「以陽處下而為動始」,不能使物賴已而養,而更自動求養,是舍其靈龜之明兆,觀我朵頤而躁求。
초구(初九)가 “양(陽)으로써 아래에 처하면서 움직임의 시작이 되어서[以陽處下而為動始]”물건으로 하여금 자기를 의뢰해서 길러지게 잘하지 못하면서 다시 스스로 움직여 길러주기를 구하니, 이는 그 신령스러운 거북의 밝은 조짐을 버리고 나의 움직이는 턱을 보고서 조급히 구하는 것이다.
是損己廉靜之德,行其貪竊之情,所以「凶」也。不足可貴,故《象》云「亦不足貴」也。
이는 자기의 청렴하고 고요한 덕(德)을 덜어내고 그 도둑질하는 마음을 탐하여 행하는 것이니, 흉(凶)함의 까닭이다. 귀하게 할 수 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또한 귀함이 부족하다[亦不足貴]”라고 한 것이다.」
○注「朵頤者嚼也」至「凶莫甚焉」。
○ 【왕필 주(王弼 注)】의 “주타이자작야(注朵頤者嚼也)에서 흉막심언(凶莫甚焉)까지”
○正義曰:「朵頤者嚼也」者,朵是動義,如手之捉物謂之朵也。今動其頤,故知嚼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턱이 움직임이란 것은 씹음이다[朵頤者 嚼也]”라는 것은, ‘타(朵, 늘어질 타)’는 바로 움직임의 뜻이며, 손이 물건을 쥐는 것 같음을 일컫기를 타(朵)라고 한다. 지금 그 턱이 움직이기 때문에 씹음을 아는 것이다.
「不能令物猶己養」者,若道德弘大,則己能養物,是物由己養。今身處無位之地,又居震動之始,是動而自求養也。
“사물로 하여금 자기를 말미암아 잘 길러지게 하지 못하고[不能令物由己養]”라는 것은, 만약 도덕(道德)이 넓고 크면 자기가 사물을 잘 기르는데, 이는 사물이 자기를 말미암아 길러지는 것이며, 지금 자신이 지위의 땅이 없는데에 처하고 또 진(震)의 움직임이 시작함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움직여서 스스로 길러주기를 구하는 것이다.
「離其致養之至道,闚我寵祿而競進」者,若能自守廉靜,保其明德,則能致君上所養。今不能守廉靜,是「離其致養之至道」,反以求其寵祿而競進也。
“그 길러줌을 이르게 하는 지극한 도(道)를 떠나서 나의 영화로운 녹(祿)을 엿보면서 다투어 나아가니[離其致養之至道 闚我寵祿而競進]”라는 것은, 만약 스스로 청렴함과 고요함을 잘 지켜서 그 밝은 덕(德)을 보존하면 군주에 이르러 위를 잘 길러주는 바인데, 지금 청렴함과 고요함을 잘 지키지 못하니, ‘그 길러줌을 이르게 하는 지극한 도(道)를 떠나서[離其致養之至道]’ 도리어 그로써 영광과 녹(祿)을 구하려고 다투어 나아가는 것이다.」
六二,顛頤,拂經于丘, 頤征凶。 육이(六二)는, 기름을 거꾸로하여 언덕에서 근본을 어기고 길러주러 가니 흉하다. 【王弼 注】 養下曰顛。拂,違也。經,猶義也。丘,所履之常也。處下體之中,无應於上,反而養初。居下不奉上而反養下,故曰「顛頤,拂經于丘」也。以此而養,未見其福也。以此而行,未見有與,故曰「頤,征凶」。 【왕필 주】 아래를 기름을 전(顛)이라 말한다. 불(拂)은 어김이다. 경(經)은 옳음과 같다. 구(丘)는 밟은 곳이 떳떳함이다. 아래 몸체[體]의 가운데[中]에 처하고 위쪽에 응(應)이 없으니 돌이켜서 초구(初九)를 기른다. 아래에 거주하며 위를 받들지 않으면서 반대로 아래를 기르기 때문에 "기름이 뒤집어져, 언덕에서 근본을 어긴다."고 말했다. 이[거꾸로]로써 기르면 福을 받지 못하고, 이로써 행하면 함께 있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길러서 나가면 흉하다."라고 말했다. |
[孔穎達 疏]正義曰:顛,倒也。拂,違也。經,義也。丘,所履之常處也。六二處下體之中,無應於上,反倒下養初,故曰「顛頤」。下當奉上,是義之常處也。今不奉於上,而反養於下,是違此經義於常之處,故云「拂經於丘」也。「頤征凶」者,征,行也。若以此而養,所行皆凶,故曰「頤征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전(顚, 엎드러질 전)’은 거꾸로이고, ‘불(拂, 떨칠 불)’은 어김이며, ‘경(經, 벼리 경)’은 옳음이고, ‘구(丘, 언덕 구)’는 밟고 있는 바가 떳떳한 곳이다. 육2(六二)가 하체(下體)의 가운데[中]에 처하고 위에 응(應)이 없어서 도리어 거꾸로 아래로 축(初九)를 길러주기 때문에 “기름을 거꾸로한다[顛頤]”라고 말한 것이다. 아래는 마땅히 위를 받들어야 하며 이는 의로움의 떳떳한 곳인데, 지금 위를 받들지 않고 도리어 아래를 길러주니, 바로 이 떳떳한 곳에 처한 옳음의 근본을 어김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언덕에서 근본을 어기고[拂經於丘]”라고 한 것이다. “길러주러 가니 흉하다[頤征凶]”라는 것의, ‘정(征)’은 감이며, 만약 이렇게 하여서 길러주면 가는 바가 모두 흉하기 때문에 “길러주러 가니 흉하다[頤征凶]”라고 말한 것이다.」 |
《象》曰:六二征凶,行失類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육2(六二)가 나가면 흉함은, 행함이 무리를 잃음이다." 【王弼 注】 類皆上養,而二處下養初。 【왕필 주】 부류가 모두 위쪽을 기르는데 육2(六二)는 아래에 처하는 초구(初九)를 기른다. |
[孔穎達 疏]正義曰:頤養之體,類皆養上也。今此獨養下,是所行失類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頤)의 기름의 체(體)는 무리가 모두 윗쪽을 길러주는데, 지금 이[六二]가 홀로 아래를 길러주니, 이는 행하는 바가 무리를 잃음이다.」 |
六三,拂頤,貞凶,十年勿用,无攸利。 육삼(六三)은 기름에 어긋나고 곧아서 흉하니, 십년을 쓰지 말고 펼침[敒]이 없어야 이롭다. 【王弼 注】 履夫不正,以養於上,納上以諂者也。拂養正之義,故曰拂頤貞凶也。處頤而為此行,十年見棄者也。立行於斯,无施而利。 【왕필 주】 그 바르지 않은데를 밟고 그로써 상구(上九)를 기르니 위쪽에 상납함으로써 아첨하는 자이다. 바름을 기름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기름에 어긋나고 곧아서 흉하다."라고 했다. 기름에 처하면서 이를 행하여 실천하니, 십년동안 버람을 당하는 자이다. 이에 서서 행하면 베품은 없지만 이롭다. |
[孔穎達 疏]正義曰:「拂頤貞凶」者,拂,違也。履夫不正,以養上九,是自納於上以諂媚者也。違養正之義,故曰拂頤貞而有凶也。為行如此,雖至十年,猶勿用而見棄也,故曰「十年勿用」。立行於此,故無所利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기름에 어긋나고 곧아서 흉하니[拂頤貞 凶]”라는 것은, ‘불(拂, 떨칠 불’은 어긋남이다. 그 바르지 않은데를 밟고 그로써 상구(上九)를 기르니 이는 스스로 위쪽에 상납함으로써 아첨하여 바치는 자이다. 바르게 기름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곧음을 길러줌에 어긋나서 흉함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행실을 이와 같이 하면 비록 10년에 이르더라도 오히려 쓰이지 못하고 버림을 당한다, 그러므로 “10년 동안 쓰지 말라[十年勿用]”라고 말하였다. 행실을 이렇게 세우기 때문에 이로운 바가 없는 것이다.」 |
《象》曰:十年勿用,道大悖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십년을 쓰지 말라함은 도가 크게 어그러졌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釋「十年勿用」之義。以其養上以諂媚,則於正道大悖亂,解「十年勿用」見棄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10년 동안 쓰지 말라[十年勿用]’의 뜻을 해석하였으며, 그로써 그 상구(上九)를 기름으로써 아첨하면 바를 도(道)에 크게 어긋나 어지러우니, ‘10년 동안 쓰이지 못하고[十年勿用]’ 버림을 당함을 해석한 것이다.」 |
六四,顛頤,吉。虎視耽耽, 其欲逐逐,无咎。 육사(六四)는 기름을 거꾸로 하여 길하지만,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야 허물이 없다. 【王弼 注】 體屬上體,居得其位,而應於初。以上養下,得頤之義,故曰顛頤吉也。下交不可以瀆,故虎視眈眈。威而不猛,不惡而嚴。養德施賢,何可有利?故其欲逐逐,尚敦實也。脩此二者,然後乃得全其吉而无咎。觀其自養則履正,察其所養則養陽,頤爻之貴,斯為盛矣。 【왕필 주】 몸체[體]가 상체(上體)에 속하고 그 지위를 얻어 거주하면서 초구(初九)에 응(應)하며, 위로써 아래를 길러주니 길러줌의 의리를 얻었기 때문에 “기름을 거꾸로 하여 길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아래와 사귀는데 모독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범이 천천히 노려보 듯이,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엄정함이다. 덕(德)을 길러서 현명함을 베푸는데 어찌 이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고자 함을 쫓아내고 오히려 도탑고 진실함이다. 이 두 가지를 닦은 연후에 비로소 그 길함을 온전히 하여서 허물이 없음이다. 그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니 곧 바름을 이행함이고, 그 길러주는 바를 살펴보니 곧 양(陽:初九)을 길러줌이니, 이괘(頤卦) 효(爻)의 귀함을 여기에 성대하게 하였다. |
[孔穎達 疏] 「六四,顛頤吉」至「無咎」。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육사전이길(六四顚頤吉)에서 무구(无咎)까지.} ○正義曰:「顛頤吉」者,「體屬上體,居得其位,而應於初,以上養下」,得養之宜,所以吉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기름을 거꾸로 하여 길하지만[顚頤 吉]”라는 것은, 몸[體]이 상체(上體)에 속하고 그 지위를 얻어 거주하면서 초구(初九)에 응(應)하여 그로써 위에서 아래를 길러주어 기름의 마땅함을 얻었으니, 길함의 까닭이다. 「虎視耽耽」者,以上養下,不可褻瀆,恒如虎視耽耽,然威而不猛也。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虎視耽耽]”라는 것은, 그로써 위에서 아래를 길러주면서 함부로 모독해서는 안 되니, 항상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 하면서도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음이다. 「其欲逐逐」者,既養於下,不可有求,其情之所欲逐逐然,尚於敦實也。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야[其欲逐逐]”라는 것은, 이미 아래를 길러주면서 요구함이 있어서는 안 되니, 그 뜻의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내는 것처럼 돈독하고 진실함을 숭상해야 한다. 「無咎」者,若能「虎視耽耽,其欲逐逐」,雖復「顛頤」養下,則得吉而「無咎」也。 “허물이 없다[无咎]”라는 것은, 만약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기[虎視耽耽,其欲逐逐]를 잘하는데, 비록 다시 ’기름을 거꾸로 하여[顛頤]‘ 아래를 길러주면 길함을 얻고 “허물이 없음[無咎]”이다.」 ○注「體屬上體」至「斯為盛矣」。 ○ 【왕필 주(王弼 注)】의 “체속상체(體屬上體)에서 사위성의(斯爲盛矣)까지” ○正義曰:「觀其自養則履正」者,以陰處陰,四自處其身,是觀其自養,則能履正道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니 곧 바름을 이행함이고[觀其自養 則履正]”라는 것은, 음(陰)으로써 음(陰)의 자리에 처하여 육4(六四)가 스스로 자신에 처하니, 이는 ‘그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니 곧 바른 도(道)를 잘 이행함’인 것이다. 「察其所養則養陽」者,六四下養於初,是觀其所養。初是陽爻,則能養陽也。 “그 길러주는 바를 살펴보니 곧 양(陽:初九)을 길러줌이니[察其所養 則養陽]”라는 것은, 육4(六四)가 아래로 초구(初九)를 길러주니, 이는 그 길러주는 바를 살펴봄이고, 초구(初九)가 양효(陽爻)이니 즉 양(陽)을 잘 길러주는 것이다.」 |
《象》曰:顛頤之吉,上施光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거꾸로 길러줌의 길함은, 위[六四]의 베품이 빛남이다. |
[孔穎達 疏] 正義曰:釋「顛頤吉」之義。「上」謂四也。下養於初,是上施也。能威而不猛,如虎視耽耽,又寡欲少求,其欲逐逐,能為此二者,是上之所施有光明也。然六二「顛頤」則為凶,六四「顛頤」得為吉者,六二身處下體而又下養,所以凶也;六四身處上體,又應於初,陰而應陽,又能威嚴寡欲,所以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거꾸로 길러줌의 길함[顛頤吉]’의 뜻을 해석하였으며, ‘상(上)’은 육4(六四)를 말하고 아래로 초구(初九)를 길러줌이 바로 위에서 베푸는 것이다. 능히 위엄이 있으나 사납지 않아서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 하고, 또 욕심을 적게 하고 요구를 적게 해서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니, 이 두 가지를 잘하면 이는 위에서 베푸는 바가 광명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2(六二)가 거꾸로 길러주면 흉함이 되고 육4(六四)는 거꾸로 길러줌이 길함이 되는 것은, 육2(六二)는 자신이 하체(下體)에 처하면서 또 아래로 길러주니 이 때문에 흉한 것이고, 육4(六四)는 자신이 상체(上體)에 처하고 또 초구(初九)에 응(應)하여 음(陰인데도 양(陽)에 응(應)하며 또 능히 위엄이 있고 욕심이 적으니, 이 때문에 길한 것이다.」 |
[孔穎達 疏] 「六四,顛頤吉」至「無咎」。
○正義曰:「顛頤吉」者,「體屬上體,居得其位,而應於初,以上養下」,得養之宜,所以吉也。「虎視耽耽」者,以上養下,不可褻瀆,恒如虎視耽耽,然威而不猛也。「其欲逐逐」者,既養於下,不可有求,其情之所欲逐逐然,尚於敦實也。「無咎」者,若能「虎視耽耽,其欲逐逐」,雖復「顛頤」養下,則得吉而「無咎」也。
○注「體屬上體」至「斯為盛矣」。
○正義曰:「觀其自養則履正」者,以陰處陰,四自處其身,是觀其自養,則能履正道也。「察其所養則養陽」者,六四下養於初,是觀其所養。初是陽爻,則能養陽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육사전이길(六四顚頤吉)에서 무구(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기름을 거꾸로 하여 길하지만[顚頤 吉]”라는 것은, 몸[體]이 상체(上體)에 속하고 그 지위를 얻어 거주하면서 초구(初九)에 응(應)하여 그로써 위에서 아래를 길러주어 기름의 마땅함을 얻었으니, 길함의 까닭이다.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虎視耽耽]”라는 것은, 그로써 위에서 아래를 길러주면서 함부로 모독해서는 안 되니, 항상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 하면서도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음이다.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야[其欲逐逐]”라는 것은, 이미 아래를 길러주면서 요구함이 있어서는 안 되니, 그 뜻의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내는 것처럼 돈독하고 진실함을 숭상해야 한다.
“허물이 없다[无咎]”라는 것은, 만약 ‘범이 천천히 노려보듯이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기[虎視耽耽,其欲逐逐]를 잘하는데, 비록 다시 ’기름을 거꾸로 하여[顛頤]‘ 아래를 길러주면 길함을 얻고 “허물이 없음[無咎]”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체속상체(體屬上體)에서 사위성의(斯爲盛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니 곧 바름을 이행함이고[觀其自養 則履正]”라는 것은, 음(陰)으로써 음(陰)의 자리에 처하여 육4(六四)가 스스로 자신에 처하니, 이는 ‘그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니 곧 바른 도(道)를 잘 이행함’인 것이다.
“그 길러주는 바를 살펴보니 곧 양(陽:初九)을 길러줌이니[察其所養 則養陽]”라는 것은, 육4(六四)가 아래로 초구(初九)를 길러주니, 이는 그 길러주는 바를 살펴봄이고, 초구(初九)가 양효(陽爻)이니 즉 양(陽)을 잘 길러주는 것이다.」
六五,拂經,居貞吉,不可涉大川。 육오(六五)는 정도에 어긋나니 곧음에 거주함이 길하고, 큰 내를 건너면 안 된다. 【王弼 注】 以陰居陽,拂頤之義也,行則失類,故宜居貞也。无應於下,而比於上,故可守貞從上,得頤之吉。雖得居貞之吉,處頤違謙,難未可涉也。 【왕필 주】 음(陰)으로써 양(陽)에 거주하니 길러줌의 뜻을 어겼으며 행하면 무리를 잃기 때문에 마땅히 곧음에 거주해야한다. 아래에서 응(應)이 없는데도 위에 친하기 때문에 위를 쫓아서 곧음을 지킬 수 있고 기름의 길함을 얻는다. 비록 곧음의 길함에 머무름을 얻지만 기르는 곳에 겸손을 어기니 아직 건널 수가 없다. |
[孔穎達 疏]正義曰:拂,違也。經,義也。以陰居陽,不有謙退,乖違於「頤養」之義,故言「拂經」也。「居貞吉」者,行則失類,「居貞吉」也。「不可涉大川」者,處頤違謙,患難未解,故「不可涉大川」,故「居貞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불(拂, 떨칠 불)’은 어김이고, ‘경(經, 지날 경)’은 의로움이다. 음(陰)으로써 양(陽)에 거주하여 물러나는 겸손함이 있지 않아서 이(頤)의 길러주는 의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정도에 어긋난다[拂經]”라고 말하였다. “곧음에 거주함이 길하고[居貞 吉]”라는 것은, 행하면 무리를 잃으니, ‘곧음에 거주함이 길함[居貞 吉]’이다. “큰 내를 건너면 안 된다[不可涉大川]”라는 것은, 이(頤)에 처하여 겸손함을 어겨서 환란을 아직 풀지 못하였기 때문에 ‘큰 내를 건너면 안 됨[不可涉大川]’이며, 그러므로 ‘곧음에 거주함이 길함[居貞 吉]’이다.」 |
《象》曰:居貞之吉,順以從上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곧음에 거주함의 김함은, 순응함으로써 상구(上九)효를 따름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釋「居貞」之義。以五近上九,以陰順陽,親從於上,故得「居貞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곧음에 거주함[居貞]’의 뜻을 해석하였으며, 육5(六五)가 상구(上九)에 가까워서 음(陰)으로써 양(陽)에 순종하고 위를 친하게 따르기 때문에 ‘곧음에 거주함이 길함[居貞吉]’을 얻는 것이다.」 |
上九,由頤,厲吉,利涉大川。 상구(上九)는 말미암아서 길러지니 위태하지만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 【王弼 注】 以陽處上,而履四陰,陰不能獨為主,必宗於陽也。故莫不由之以得其養,故曰由頤。為眾陰之主,不可瀆也,故厲乃吉。有似家人悔厲之義,貴而无位,是以厲也;高而有民,是以吉也。為養之主,物莫之違,故利涉大川也。 【왕필 주】 양(陽)으로서 위에 처하면서 네 음(陰)을 밟고 있으며, 음(陰)은 홀로 주체를 잘 하지 못하여 반드시 양(陽)을 높인다. 그러므로 자기로 기름을 얻음으로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말미암아 길러진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음(陰)의 주체가 되었으니 더럽힐 수가 없기 때문에 위태롭지만 마침내 길하다. 가인(家人)괘의 ‘위태함을 뉘우침[悔厲]’의 뜻을 닮음이 있으며 귀한데도 지위가 없으니 이로써 위태함이고, 높으면서 백성이 있으니 이로써 길함이다. 길러주는 주체가 되어 사물[남]이 어기지 못하기 때문에 큰 내를 건넘이 이로움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由頤」者,以陽處上而履四陰,陰不能獨為其主,必宗事於陽也。眾陰莫不由之以得其養,故曰「由頤」也。「厲吉」者,為眾陰之主,不可褻瀆,嚴厲乃吉,故曰「厲吉」也。「利涉大川」者,為養之主,無所不為,故「利涉大川」而有慶也。故《象》云「大有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말미암아서 길러지니[由頤]”라는 것은, 양(陽)으로써 위에 처하면서 네 음(陰)을 밟고 있으니, 음(陰)이 홀로 주체가 잘 되지 못하여 반드시 양(陽)을 높이고 섬긴다. 여러 음(陰)이 그것[陽]을 말미암아 기름을 얻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말미암아서 길러지니[由頤]”라고 한 것이다. “위태하지만 길하니[厲吉]”라는 것은, 여러 음(陰)의 주체가 되어 더럽고 거만하면 안 되고 엄정하면 위태로워도 비로소 길하기 때문에 “위태하지만 길하다[厲吉]”라고 말했다.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利涉大川]”라는 것은, 기르는 주체가 되어 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큰 내를 건넘이 이롭고 경사가 있다. 그러므로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큰 경사가 있다[大有慶也]”라고 한 것이다.」 |
《象》曰:由頤厲吉,大有慶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기름을 말미암아서 위태하지만 길함은, 큰 경사가 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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