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정의(周易正義)》는 왕필(王弼, 226~249)의 주(注)와 한강백(韓康伯)의 주(注)를 채용하여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주석(注釋)을 하여 지었다.
24. 복괘(復卦)[卦象:지뢰복]
☷ 坤上
☳ 震下
진[雷.우뢰]이 아래에 있고, 곤[地.땅]이 위에 있다.
復,亨。出入无疾,朋來无咎。反復其道,七日來復。利有攸往。 복(復)은 형통하니, 출입을 해야 병이 없고 벗이 와야 허물이 없다. 그 도(道)를 회복하여 돌아오는데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며, 가서 다스림[敒]이 있어야 이롭다. |
[孔穎達 疏]正義曰:「復亨」者,陽氣反復而得亨通,故云「復亨」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복(復)은 형통하니[復 亨]”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반복하여서 형통하여 통함을 얻기 때문에 이르기를 “복(復)은 형통하니[復 亨]”라고 한 것이다. 「出入無疾」者,出則剛長,入則陽反,理會其時,故無疾病也。 “출입을 해야 병이 없고[出入无疾]”라는 것은, 나가면 굳셈이 자라고 들어오면 양(陽)이 돌아와서 이치가 그 때에 모이기 때문에 질병이 없는 것이다. 「朋來無咎」者,朋謂陽也。反復眾陽,朋聚而來,則「無咎」也。若非陽眾來,則有咎,以其眾陽之來,故「無咎」也。 “벗이 와야 허물이 없다[朋來 无咎]”라는 것은, ‘벗[朋]’은 양(陽)을 말하며, 여러 양(陽)이 반복하여 벗이 모여서 오면 허물이 없다[无咎]. 만약 양(陽)이 무리하여 오지 않으면 허물이 있지만 그로써 여러 양(陽)이 오기 때문에 “허물이 없음[无咎]”이다. 「反復其道,七日來復」者,欲速反之與復而得其道,不可過遠。唯七日則來復,乃合於道也。 “그 도(道)를 반복하여 칠일 만에 와서 회복하며[反復其道 七日來復]”라는 것은, 속히 돌아가서 더블어 회복하여 그 도(道)를 얻고자 하면 지나치게 멀리해서는 안 되고, 오직 7일에 와서 회복해야 이에 도(道)에 부합하는 것이다. 「利有攸往」者,以陽氣方長,往則小人道消,故「利有攸往」也。 “가서 다스림[敒]이 이롭다[利有攸往]”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사방으로 자라서 가면 소인(小人)의 도(道)가 소멸되기 때문에 “가서 다스림[敒]이 이롭다[利有攸往]”라는 것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復亨」者,陽氣反復而得亨通,故云「復亨」也。「出入無疾」者,出則剛長,入則陽反,理會其時,故無疾病也。「朋來無咎」者,朋謂陽也。反復眾陽,朋聚而來,則「無咎」也。若非陽眾來,則有咎,以其眾陽之來,故「無咎」也。「反復其道,七日來復」者,欲速反之與復而得其道,不可過遠。唯七日則來復,乃合於道也。「利有攸往」者,以陽氣方長,往則小人道消,故「利有攸往」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복(復)은 형통하니[復 亨]”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반복하여서 형통하여 통함을 얻기 때문에 이르기를 “복(復)은 형통하니[復 亨]”라고 한 것이다.
“출입을 해야 병이 없고[出入无疾]”라는 것은, 나가면 굳셈이 자라고 들어오면 양(陽)이 돌아와서 이치가 그 때에 모이기 때문에 질병이 없는 것이다.
“벗이 와야 허물이 없다[朋來 无咎]”라는 것은, ‘벗[朋]’은 양(陽)을 말하며, 여러 양(陽)이 반복하여 벗이 모여서 오면 허물이 없다[无咎]. 만약 양(陽)이 무리하여 오지 않으면 허물이 있지만 그로써 여러 양(陽)이 오기 때문에 “허물이 없음[无咎]”이다.
“그 도(道)를 반복하여 칠일 만에 와서 회복하며[反復其道 七日來復]”라는 것은, 속히 돌아가서 더블어 회복하여 그 도(道)를 얻고자 하면 지나치게 멀리해서는 안 되고, 오직 7일에 와서 회복해야 이에 도(道)에 부합하는 것이다.
“가서 다스림[敒]이 이롭다[利有攸往]”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사방으로 자라서 가면 소인(小人)의 도(道)가 소멸되기 때문에 “가서 다스림[敒]이 이롭다[利有攸往]”라는 것이다.」
《彖》曰:復,亨,剛反,動而以順行,是以出入无疾, 《단전》에서 말하였다. “회복[復]하여 형통함은, 굳셈이 돌아와 움직이면서 순함으로써 행하니, 이로써 출입해야 병이 없고, 【王弼 注】 入則為反,出則剛長,故无疾。疾,猶病也。 【왕필 주】 들어오면 돌아옴이 되고, 나가면 굳셈이 자라기 때문에 병이 없다. 질(疾)은 병과 같다. |
朋來无咎。 벗이 와야 허물이 없다.“ 【王弼 注】 朋,謂陽也。 【왕필 주】 벗[朋]은 양[陽; 初九]을 가리킨다. |
[孔穎達 疏]「彖曰」至「無咎」。 ○正義曰:「復亨」者,以陽復則亨,故以亨連復而釋之也。「剛反動而以順行」者,既上釋「復亨」之義,又下釋「出入無疾朋來無咎」之理,故云「是以出入無疾朋來無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단왈(彖曰)에서 무구(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복(復)은 형통함은[復亨]”라는 것은, 그로써 양(陽)이 회복하면 형통하기 때문에 형통함을 가지고 회복함과 연결하여서 해석한 것이다. “굳셈이 돌아와 움직이면서 순함으로써 행하니[剛反動而以順行]”라는 것은, 이미 위에서 ‘회복[復]하여 형통함[復亨]’의 뜻을 해석함이며, 또 아래에서 ‘출입을 해야 병이 없고 벗이 와야 허물이 없음[出入無疾朋來無咎]’의 이치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로써 출입해야 병이 없고 벗이 와야 허물이 없다[是以出入無疾朋來無咎]”고 한 것이다.」 |
反復其道,七日來復, 그 도(道)를 회복하여 돌아오는데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王弼 注】 陽氣始剝盡,至來復時,凡七日。 【왕필 주】 양(陽)의 기운이 시작하여 깎임을 다하고 와서 회복할 때에 이르름이 모두 7일이다. |
[孔穎達 疏]「陽氣」至 「凡七日」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양기(陽氣)에서 범칠일(凡七日)까지.} ○正義曰:「陽氣始剝盡」,謂陽氣始於剝盡之後,至陽氣來復時,凡經七日。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양(陽)의 기운이 시작하여 깎임을 다함[陽氣始剝盡]’은 양(陽)의 기운이 깎임을 다한 뒤에 시작하여 양(陽)의 기운이 와서 회복할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7일이 걸림을 말한 것이다. 觀《注》之意,陽氣從剝盡之後,至於反復,凡經七日。其《注》分明。 주(注)의 뜻을 살펴보면, 양(陽)의 기운이 깎임을 다한 뒤로부터 반복함에 이르기까지 모두 7일이 걸리니, 그 주(注)가 분명하다. 如褚氏、莊氏並云「五月一陰生,至十一月一陽生」,凡七月。而云「七日」,不云「月」者,欲見陽長須速,故變月言日。 저씨[褚氏(褚仲都)]와 장씨(莊氏) 같은 이는 모두 이르기를 “5월에 한 음(陰)이 생겨서 11월에 한 양(陽)이 생길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7개월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7日이라고 하고 월(月)을 일러주지 않은 것은, 양(陽)의 자람이 모름지기 신속함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월(月)을 바꾸어 일(日)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今輔嗣云「剝盡」至「來復」,是從盡至來復,經七日也。若從五月言之,何得云「始盡」也? 又臨卦亦是陽長而言八月,今《復卦》亦是陽長,何以獨變月而稱七日? 지금 왕보사[王輔嗣(王弼)]가 이르기를 “박진(剝盡)으로부터 래복(來復)에 이르기까지”라고 하였으니, 이는 다함[盡]으로부터 회복함[復]에 이르기까지 7일이 걸리는 것이다. 만약 5월로부터 말을 하면 어찌 시작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임괘(臨卦) 또한 이 양(陽)이 자라는데 8월이라고 말하였으며, 지금 복괘(復卦) 또한 이 양(陽)이 자라는데 어찌하여 홀로 월(月)을 바꾸어 그로써 7일이라고 칭하였겠는가? 觀《注》之意,必謂不然,亦用《易緯》六日七分之義,同鄭康成之說。但於文省略,不復具言。 주(注)의 뜻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말함은, 또한 역위(易緯)의 6일 7푼의 뜻을 사용한 것이며, 정강성[鄭康成(鄭玄)]의 설명과 같다. 다만 글을 생략하여, 다시 갖추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案《易緯稽覽圖》云:「卦氣起中孚。」故離、坎、震、兌,各主其一方,其餘六十卦,卦有六爻,爻別主一日,凡主三百六十日。 살펴보건대, ≪역위계람도(易緯稽覽圖)≫에 이르기를 “괘(卦)의 기운이 중부(中孚)괘에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리괘(離卦)ㆍ감괘(坎卦)ㆍ진괘(震卦)ㆍ태괘(兌卦)는 각각 한 방위를 주장하고 그 나머지가 60괘인데, 괘(卦)에 여섯 효(爻)가 있고 효(爻)는 별도로 하루를 주장하니, 모두 360일을 주장함이다. 餘有五日四分日之一者,每日分為八十分,五日分為四百分四分日之一又為二十分,是四百二十分。 나머지 5일과 4분의 1일이 있는 것을 매일 나누어 80푼으로 만들면 5일이 나누면 400푼이 되고 4분의 1일이 또 20푼이 되며, 이는 420푼이다. 六十卦分之,六七四十二, 卦別各得七分,是每卦得六日七分也。 이를 60괘(卦)로 나누면 6×7=42여서 괘(卦)마다 별도로 각각 7푼을 얻으니, 이는 매 괘(卦)가 6일 7푼을 얻는 것이다. 剝卦陽氣之盡在於九月之末,十月當純坤用事。坤卦有六日七分。 박괘(剝卦)는 양(陽)의 기운이 다함이 9월의 끝에 있으며, 10월에는 순곤(純坤)이 용사(用事)를 당하여 곤괘(坤卦)가 6일 7푼을 가지고 있다. 坤卦之盡,則復卦陽來,是從剝盡至陽氣來復,隔坤之一卦六日七分,舉成數言之,故輔嗣言「凡七日」也。 곤괘(坤卦)가 다하면 복괘(復卦)의 양(陽)이 오니, 이는 깍임을 다함[剝盡]으로부터 양(陽)의 기운이 와서 회복될 때에 이르기까지 곤(坤)의 한 괘(卦)의 6일 7푼이 떨어져 있는데, 성수(成數)를 들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왕보사[王輔嗣]가 “모두 7일이다[凡七日]”라고 말한 것이다. 「反復」者,則出入之義。反謂入而倒反,復謂既反,之後復而向上也。 “돌아와 회복함[反復]”라는 것은, 나가고 들어오는 뜻이며, ‘반(反)’은 들어가서 돌아옴을 이르름을 말하고, ‘복(復)’은 이미 돌아온 뒤에 회복하여 위로 향함을 말한다.」 |
[孔穎達 疏] 「陽氣」 至 「凡七日」
○正義曰:「陽氣始剝盡」,謂陽氣始於剝盡之後,至陽氣來復時,凡經七日。觀《注》之意,陽氣從剝盡之後,至於反復,凡經七日。其《注》分明。如褚氏、莊氏並云「五月一陰生,至十一月一陽生」,凡七月。而云「七日」,不云「月」者,欲見陽長須速,故變月言日。今輔嗣云「剝盡」至「來復」,是從盡至來復,經七日也。若從五月言之,何得云「始盡」也?又臨卦亦是陽長而言八月,今《復卦》亦是陽長,何以獨變月而稱七日?觀《注》之意,必謂不然,亦用《易緯》六日七分之義,同鄭康成之說。但於文省略,不復具言。案《易緯稽覽圖》云:「卦氣起中孚。」故離、坎、震、兌,各主其一方,其餘六十卦,卦有六爻,爻別主一日,凡主三百六十日。餘有五日四分日之一者,每日分為八十分,五日分為四百分四分日之一又為二十分,是四百二十分。六十卦分之,六七四十二卦,別各得七分,是每卦得六日七分也。剝卦陽氣之盡在於九月之末,十月當純坤用事。坤卦有六日七分。坤卦之盡,則復卦陽來,是從剝盡至陽氣來復,隔坤之一卦六日七分,舉成數言之,故輔嗣言「凡七日」也。「反復」者,則出入之義。反謂入而倒反,復謂既反,之後復而向上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양기(陽氣)에서 범칠일(凡七日)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양(陽)의 기운이 시작하여 깎임을 다함[陽氣始剝盡]’은 양(陽)의 기운이 깎임을 다한 뒤에 시작하여 양(陽)의 기운이 와서 회복할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7일이 걸림을 말한 것이다.
주(注)의 뜻을 살펴보면, 양(陽)의 기운이 깎임을 다한 뒤로부터 반복함에 이르기까지 모두 7일이 걸리니, 그 주(注)가 분명하다.
저씨[褚氏(褚仲都)]와 장씨(莊氏) 같은 이는 모두 이르기를 “5월에 한 음(陰)이 생겨서 11월에 한 양(陽)이 생길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7개월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7日이라고 하고 월(月)을 일러주지 않은 것은, 양(陽)의 자람이 모름지기 신속함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월(月)을 바꾸어 일(日)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왕보사[王輔嗣(王弼)]가 이르기를 “박진(剝盡)으로부터 래복(來復)에 이르기까지”라고 하였으니, 이는 다함[盡]으로부터 회복함[復]에 이르기까지 7일이 걸리는 것이다. 만약 5월로부터 말을 하면 어찌 시작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임괘(臨卦) 또한 이 양(陽)이 자라는데 8월이라고 말하였으며, 지금 복괘(復卦) 또한 이 양(陽)이 자라는데 어찌하여 홀로 월(月)을 바꾸어 그로써 7일이라고 칭하였겠는가?
주(注)의 뜻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말함은, 또한 역위(易緯)의 6일 7푼의 뜻을 사용한 것이며, 정강성[鄭康成(鄭玄)]의 설명과 같다. 다만 글을 생략하여, 다시 갖추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살펴보건대, ≪역위계람도(易緯稽覽圖)≫에 이르기를 “괘(卦)의 기운이 중부(中孚)괘에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리괘(離卦)ㆍ감괘(坎卦)ㆍ진괘(震卦)ㆍ태괘(兌卦)는 각각 한 방위를 주장하고 그 나머지가 60괘인데, 괘(卦)에 여섯 효(爻)가 있고 효(爻)는 별도로 하루를 주장하니, 모두 360일을 주장함이다.
나머지 5일과 4분의 1일이 있는 것을 매일 나누어 80푼으로 만들면 5일이 나누면 400푼이 되고 4분의 1일이 또 20푼이 되며, 이는 420푼이다.
이를 60괘(卦)로 나누면 6×7=42여서 괘(卦)마다 별도로 각각 7푼을 얻으니, 이는 매 괘(卦)가 6일 7푼을 얻는 것이다.
박괘(剝卦)는 양(陽)의 기운이 다함이 9월의 끝에 있으며, 10월에는 순곤(純坤)이 용사(用事)를 당하여 곤괘(坤卦)가 6일 7푼을 가지고 있다.
곤괘(坤卦)가 다하면 복괘(復卦)의 양(陽)이 오니, 이는 깍임을 다함[剝盡]으로부터 양(陽)의 기운이 와서 회복될 때에 이르기까지 곤(坤)의 한 괘(卦)의 6일 7푼이 떨어져 있는데, 성수(成數)를 들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왕보사[王輔嗣]가 “모두 7일이다[凡七日]”라고 말한 것이다.
“돌아와 회복함[反復]”라는 것은, 나가고 들어오는 뜻이며, ‘반(反)’은 들어가서 돌아옴을 이르름을 말하고, ‘복(復)’은 이미 돌아온 뒤에 회복하여 위로 향함을 말한다.
天行也。 하늘의 운행이다. 【王弼 注】 以天之行,反復不過七日,復之不可遠也。 【왕필 주】 하늘이 행함으로써 7일을 넘지 않고 회복하여 돌아오니 회복함을 멀리 해서는 안된다. |
[孔穎達 疏]正義曰:「反復其道,七日來復。天行」者,以天行釋「反復其道七日來復」之義。言反之與復得合其道。唯七日而來復,不可久遠也。此是天之所行也。天之陽氣絕滅之後,不過七日,陽氣復生,此乃天之自然之理,故曰「天行」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도(道)를 회복하여 돌아오는데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하늘의 운행이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天行]”라는 것은, 하늘의 운행을 가지고 ‘그 도(道)를 회복하여 돌아오는데 7일 만에 와서 회복함[反復其道 七日來復]’의 뜻을 해석하였으며, 돌아옴[反]과 회복함[復]이 그 도(道)에 부합함을 말한 것이다. 오직 7일이 되면서 와서 회복하니, 오래 멀리해서는 안 되며, 이는 바로 하늘이 운행하는 곳이다. 하늘의 양(陽)의 기운이 끊어져 없어진 뒤에 7일을 지나지 않아서 양(陽)의 기운이 회복하여 생겨나며, 이는 바로 하늘이 스스로 그러함의 이치이기 때문에 “하늘의 운행[天行]”이라고 말한 것이다.」 |
利有攸往,剛長也。 가서 다스림[敒]이 이로움은, 굳셈이 자람이다. 【王弼 注】 往則小人道消也。 【왕필 주】 가면 소인(小人)의 도(道)가 사라짐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以「剛長」釋「利有攸往」之義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굳셈이 자람[剛長]”을 가지고 ‘가서 다스림[敒]이 이로움[利有攸往]’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
復其見天地之心乎? 회복함[復]은 그 하늘과 땅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가? 【王弼 注】 復者,反本之謂也。天地以本為心者也。凡動息則靜,靜非對動者也;語息則默,默非對語者也。然則天地雖大,富有萬物,雷動風行,運化萬變,寂然至无是其本矣。故動息地中,乃天地之心見也。若其以有為心,則異類未獲具存矣。 【왕필 주】 복(復)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옴을 말하며, 하늘과 땅은 근본을 가지고 마음을 삼는 것이다. 모든 움직임[動]이 쉬면 고요함[靜]이지만 고요함이 움직임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고, 말[語]을 쉬면 침묵[默]이지만 침묵이 말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비록 커서 만물을 많이 소유하고, 우레가 움직이고 바람이 다녀서 옮겨져 달라져 만 가지로 변하지만, 고요함[寂然]이 바로 그 근본을 없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움직임[動]이 땅 가운데에 쉬면 이에 천지(天地)의 마음을 본다. 만약 있음[有]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는다면 다른 부류를 모두 함께 얻지는 못한다. |
[孔穎達 疏]「復見天地之心乎」。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복기견천지지심호(復其見天地之心乎)까지.} ○正義曰:「復其見天地之心乎」者,此贊明復卦之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회복함[復]은 그 하늘과 땅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가?[復其見天地之心乎]”라는 것은, 이 복괘(復卦)의 뜻을 찬양하여 밝힌 것이다. 天地養萬物,以靜為心,不為而物自為,不生而物自生,寂然不動,此天地之心也。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를 적에 고요함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아 하지 않으면서도 사물이 스스로 하게 하고 낳지 않아도 사물이 스스로 생겨나서 고요한 것 처럼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하늘과 땅의 마음이다. 此復卦之象,「動」息地中,雷在地下,息而不動,靜寂之義,與天地之心相似。觀此復象,乃「見天地之心」也。天地非有主宰,何得有心?以人事之心,託天地以示法爾。 이는 복괘(復卦)의 모습[象]이며, 움직임[動]이 땅 안에서 휴식하고 우레가 땅 아래에 있어서 휴식하면서 움직이지 않으니 고요하여 잠잠함의 뜻이며 하늘과 땅의 마음이 서로 닮았다. 이 복괘(復卦)의 모습{象}을 보면 이에 “하늘과 땅의 마음이 보임[見天地之心]이다. 하늘과 땅은 주인하는 우두머리[主宰]가 있음이 아닌데, 어찌 마음이 있겠는가? 사람일[人事]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과 땅에 가탁하여 법(法)을 보였을 뿐이다.」 ○注「復者反本之謂也」至「未獲具存矣」。 ○ 【왕필 주(王弼 注)】의 “복자반본지위야(復者反本之謂也)에서 미획구존의(未獲具存矣)까지” ○正義曰:「復者反本之謂也」者,往前離本處而去,今更反於本處,是「反本」之謂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복(復)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감을 말하며[復者反本之謂也]”라는 것은, 앞으로 감은 본래의 곳을 떠나서 갔는데 지금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이는 ‘근본으로 돌아옴[反本]’을 말함이다. 「天地以本為心」者,「本」謂靜也。言天地寂然不動,是「以本為心」者也。 “하늘과 땅은 근본을 가지고 마음을 삼는다[天地以本爲心]”라는 것은, ‘본(本)’은 잠잠함을 말하며, 하늘과 땅이 고요한 것 처럼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근본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는[以本為心] 것임을 말한 것이다. 凡動息則靜,靜非對動者也。天地之動,靜為其本,動為其末,言靜時多也,動時少也。若暫時而動,止息則歸靜,是靜非對動,言靜之為本,自然而有,非對動而生靜,故曰「靜非對動」者也。 “모든 움직임[動]이 쉬면 고요함[靜]이지만 고요함이 움직임을 상대하는 것은 아님[凡動息則靜 靜非對動]”은, 하늘과 땅의 움직임은 고요함이 근본이 되고 움직임이 그 끝이 되니, 고요한 때가 많고 움직이는 때가 적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잠시 움직이다가 그치고 쉬면 고요함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고요함이 움직임을 상대함이 아니고 고요함이 근본이 됨을 말하며, 스스로 그러함이 있어서 움직임을 상대하여서 고요함이 생김이 아니기 때문에 “고요함이 움직임을 상대함은 아니다[靜非對動]”라고 말한 것이다. 「語息則默,默非對語」者,語則聲之動,默則口之靜,是不語之時,恒常默也。非是對語有默以動靜語默,而地別體,故云「非對」也。 “말[語]을 쉬면 침묵[默]이지만 침묵이 말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語息則默 默非對語]”라는 것은, 말하면 소리가 움직이고 침묵하면 입이 고요하니, 이는 말하지 않을 때에 항상 침묵함이다. 이는 말을 상대하여 침묵이 있음이 아니고 움직임과 고요함으로써 말함과 침묵함이며 별도의 땅인 몸체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상대가 아니다[非對]”라고 한 것이다. 云「天地雖大,富有萬物,雷動風行,運化萬變」者,此言天地之動也。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비록 커서 만물을 많이 소유하고, 우레가 움직이고 바람이 다녀서 옮겨져 달라져 만 가지로 변하지만[天地雖大 富有萬物 雷動風行 運化萬變]”라는 것은, 이는 하늘과 땅의 움직임을 말한 것이다. 言「寂然至無是其本矣」者,凡有二義:一者萬物雖運動於外,而天地寂然至於其內也。外是其末,內是其本,言天地無心也。 “고요함[寂然]이 바로 그 근본을 없음에 이르게 한다.[寂然至无 是其本矣]”라는 것은, 무릇 두 가지 뜻이 있고, 첫 번째는 만물이 비록 밖에서 운동하면서 천지가 고요한 것처럼 그 안에 지극하며, 밖은 바로 그 끝이고 안은 바로 그 근본인바, 하늘과 땅이 마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二者雖雷動風行,千化萬變,若其雷風止息,運化停住之後,亦寂然至無也。 두 번째는 비록 우레가 움직이고 바람이 다녀서 천 가지로 달라지고 만 가지로 변하는데, 만약 그 우레와 바람이 그치고 멈추어서 운행과 달라짐이 멈추어 그침의 뒤에는 또한 고요하여 지극함이 없는 것이다. 「若其以有為心,則異類未獲具存」者,凡以無為心,則物我齊致,親疏一等,則不害異類,彼此獲寧。 “만약 있음[有]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는다면 다른 부류를 모두 함께 얻지는 못한다[若其以有爲心 則異類未獲具存]”라는 것은, 무릇 없음으로써 마음을 삼는다면 사물(남)과 내가 가지런히 이르르고 친함과 소원함이 한 등급이면 다른 종류를 해치지 않고 피차(彼此)가 편안함을 얻는다. 若其以有為心,則我之自我,不能普及於物,物之自物,不能普賴於我,物則被害,故「未獲具存」也。 만약 그 있음[有]으로써 마음을 삼으면 내가 스스로 나이니 사물에 널리 잘 미치지 못하고, 사물이 스스로 사물이 되면 나에게 널리 잘 의뢰하지 못하니, 사물이 곧 피해를 입기 때문에 함께 생존을 얻지못하는 것이다.」 |
[孔穎達 疏]「復見天地之心乎」。
○正義曰:「復其見天地之心乎」者,此贊明復卦之義。天地養萬物,以靜為心,不為而物自為,不生而物自生,寂然不動,此天地之心也。此復卦之象,「動」息地中,雷在地下,息而不動,靜寂之義,與天地之心相似。觀此復象,乃「見天地之心」也。天地非有主宰,何得有心?以人事之心,託天地以示法爾。
○注「復者反本之謂也」至「未獲具存矣」。
○正義曰:「復者反本之謂也」者,往前離本處而去,今更反於本處,是「反本」之謂也。「天地以本為心」者,「本」謂靜也。言天地寂然不動,是「以本為心」者也。凡動息則靜,靜非對動者也。天地之動,靜為其本,動為其末,言靜時多也,動時少也。若暫時而動,止息則歸靜,是靜非對動,言靜之為本,自然而有,非對動而生靜,故曰「靜非對動」者也。「語息則默,默非對語」者,語則聲之動,默則口之靜,是不語之時,恒常默也。非是對語有默以動靜語默,而地別體,故云「非對」也。云「天地雖大,富有萬物,雷動風行,運化萬變」者,此言天地之動也。言「寂然至無是其本矣」者,凡有二義:一者萬物雖運動於外,而天地寂然至於其內也。外是其末,內是其本,言天地無心也。二者雖雷動風行,千化萬變,若其雷風止息,運化停住之後,亦寂然至無也。「若其以有為心,則異類未獲具存」者,凡以無為心,則物我齊致,親疏一等,則不害異類,彼此獲寧。若其以有為心,則我之自我,不能普及於物,物之自物,不能普賴於我,物則被害,故「未獲具存」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복기견천지지심호(復其見天地之心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회복함[復]은 그 하늘과 땅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가?[復其見天地之心乎]”라는 것은, 이 복괘(復卦)의 뜻을 찬양하여 밝힌 것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를 적에 고요함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아 하지 않으면서도 사물이 스스로 하게 하고 낳지 않아도 사물이 스스로 생겨나서 고요한 것 처럼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하늘과 땅의 마음이다.
이는 복괘(復卦)의 모습[象]이며, 움직임[動]이 땅 안에서 휴식하고 우레가 땅 아래에 있어서 휴식하면서 움직이지 않으니 고요하여 잠잠함의 뜻이며 하늘과 땅의 마음이 서로 닮았다. 이 복괘(復卦)의 모습{象}을 보면 이에 “하늘과 땅의 마음이 보임[見天地之心]이다. 하늘과 땅은 주인하는 우두머리[主宰]가 있음이 아닌데, 어찌 마음이 있겠는가? 사람일[人事]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과 땅에 가탁하여 법(法)을 보였을 뿐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복자반본지위야(復者反本之謂也)에서 미획구존의(未獲具存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복(復)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감을 말하며[復者反本之謂也]”라는 것은, 앞으로 감은 본래의 곳을 떠나서 갔는데 지금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이는 ‘근본으로 돌아옴[反本]’을 말함이다.
“하늘과 땅은 근본을 가지고 마음을 삼는다[天地以本爲心]”라는 것은, ‘본(本)’은 잠잠함을 말하며, 하늘과 땅이 고요한 것 처럼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근본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는[以本為心] 것임을 말한 것이다.
“모든 움직임[動]이 쉬면 고요함[靜]이지만 고요함이 움직임을 상대하는 것은 아님[凡動息則靜 靜非對動]”은, 하늘과 땅의 움직임은 고요함이 근본이 되고 움직임이 그 끝이 되니, 고요한 때가 많고 움직이는 때가 적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잠시 움직이다가 그치고 쉬면 고요함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고요함이 움직임을 상대함이 아니고 고요함이 근본이 됨을 말하며, 스스로 그러함이 있어서 움직임을 상대하여서 고요함이 생김이 아니기 때문에 “고요함이 움직임을 상대함은 아니다[靜非對動]”라고 말한 것이다.
“말[語]을 쉬면 침묵[默]이지만 침묵이 말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語息則默 默非對語]”라는 것은, 말하면 소리가 움직이고 침묵하면 입이 고요하니, 이는 말하지 않을 때에 항상 침묵함이다. 이는 말을 상대하여 침묵이 있음이 아니고 움직임과 고요함으로써 말함과 침묵함이며 별도의 땅인 몸체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상대가 아니다[非對]”라고 한 것이다.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비록 커서 만물을 많이 소유하고, 우레가 움직이고 바람이 다녀서 옮겨져 달라져 만 가지로 변하지만[天地雖大 富有萬物 雷動風行 運化萬變]”라는 것은, 이는 하늘과 땅의 움직임을 말한 것이다.
“고요함[寂然]이 바로 그 근본을 없음에 이르게 한다.[寂然至无 是其本矣]”라는 것은, 무릇 두 가지 뜻이 있고, 첫 번째는 만물이 비록 밖에서 운동하면서 천지가 고요한 것처럼 그 안에 지극하며, 밖은 바로 그 끝이고 안은 바로 그 근본인바, 하늘과 땅이 마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두 번째는 비록 우레가 움직이고 바람이 다녀서 천 가지로 달라지고 만 가지로 변하는데, 만약 그 우레와 바람이 그치고 멈추어서 운행과 달라짐이 멈추어 그침의 뒤에는 또한 고요하여 지극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 있음[有]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는다면 다른 부류를 모두 함께 얻지는 못한다[若其以有爲心 則異類未獲具存]”라는 것은, 무릇 없음으로써 마음을 삼는다면 사물(남)과 내가 가지런히 이르르고 친함과 소원함이 한 등급이면 다른 종류를 해치지 않고 피차(彼此)가 편안함을 얻는다.
만약 그 있음[有]으로써 마음을 삼으면 내가 스스로 나이니 사물에 널리 잘 미치지 못하고, 사물이 스스로 사물이 되면 나에게 널리 잘 의뢰하지 못하니, 사물이 곧 피해를 입기 때문에 함께 생존을 얻지못하는 것이다.」
《象》曰:雷在地中,復。先王以至日閉關,商旅不行,后不省方。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우레가 땅속에 있음이 복(復)이다. 선왕(先王)이 그로써 동짓날에 관문을 닫고 장사꾼과 여행자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며 임금은 사방을 살피지 않는다.” 【王弼 注】 方,事也。冬至,陰之復也。夏至,陽之復也。故為復,則至於寂然大靜。先王則天地而行者也,動復則靜,行復則止,事復則无事也。 【왕필 주】 방(方)은 일이다. 동지(冬至)는 음(陰)을 회복함이고, 하지(夏至)는 양(陽)을 회복함이다. 그러므로 회복을 하면 고요함이 그러하여 크게 고요함에 이르른다. 선왕(先王)은 하늘과 땅을 법칙하여 행하는 자인데, 움직임[動]을 회복하면 고요함[靜]이고 행함을 회복하면 그치며 일을 회복하면 일이 없어진다. |
[孔穎達 疏]「《象》曰」至「後不省方」。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후불성방(后不省方)까지.} ○正義曰:「雷在地中復」者,雷是動物,復卦以動息為主,故曰「雷在地中」。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레가 땅속에 있음이 복(復)이다[雷在地中 復]”라는 것은, 우레는 바로 움직이는 사물이니, 복괘(復卦)는 움직이고 그침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우레가 땅 가운데에 있다[雷在地中]”라고 한 것이다. 「先王以至日閉關」者,先王象此復卦,以二至之日閉塞其關,使商旅不行於道路也。 “선왕(先王)이 그로써 동짓날에 관문을 닫고[先王以至日閉關]”라는 것은, 선왕(先王)이 이 복괘(復卦)를 모습[象]하고 그로써 동지(冬至)와 하지(夏至) 날에 그 관문을 폐쇄하며 장사꾼과 여행자들로 하여금 도로에 다니지 않게 하는 것이다. 「后不省方」者,方,事也。后不省視其方事也。以地掩閉於雷,故關門掩閉,商旅不行。君後掩閉於事,皆取「動息」之義。 “임금은 사방을 살피지 않는다[后不省方]”라는 것의, ‘방(方)’은 일이며, 임금이 그 사방 일을 살펴보지 않는 것이다. 그로써 땅이 우레에 가려져 닫혔기 때문에 관문을 가리고 닫아서 장사꾼과 여행자들이 다니지 않게 하고, 군주가 일을 가리고 닫음은, 모두 “움직이고 그침[動息]”의 뜻을 취한 것이다.」 ○注「方事也」至「事復則無事也」。 ○ 【왕필 주(王弼 注)】의 “방사야(方事也)에서 사복즉무사야(事復則无事也)까지” ○正義曰:「方,事」者,恐「方」是四方境域,故以「方」為事也。言至日不但不可出行,亦不可省視事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방(方)은 일이다[方 事]”라는 것은, 방(方)은 바로 4방(四方) 강역의 경계라고 생각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방(方)을 일이라 한 것이다. 지극한 날[至日]에는 나가 다녀서는 안 되며 또한 일을 살펴보아서도 안 됨을 말한 것이다. 「冬至陰之復,夏至陽之復」者,復謂反本,靜為動本。冬至一陽生,是陽動用而陰復於靜也。夏至一陰生,是陰動用而陽復於靜也。 “동지(冬至)는 음(陰)을 회복함이고, 하지(夏至)는 양(陽)을 회복함이다[冬至陰之復 夏至陽之復]”라는 것은, ‘복(復)’은 근본으로 돌아옴을 말하며, 정(靜)은 움직임의 근본이 된다. 동지(冬至)에 한 양(陽)이 생기니 이는 양(陽)이 움직임을 사용하여서 음(陰)이 정(靜)으로 돌아감이고, 하지(夏至)에 한 음(陰)이 생기니 이는 음(陰)이 움직임을 사용하여서 양(陽)이 정(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動復則靜,行復則止,事復則無事」者,動而反復則歸靜,行而反復則歸止,事而反復則歸於無事也。 “움직임[動]을 회복하면 고요함[靜]이고 행함을 회복하면 그치며 일을 회복하면 일이 없어진다[動復則靜 行復則止 事復則无事]”라는 것은, 움직여서 회복하여 돌아오면 정(靜)으로 돌아가고, 행하여서 회복하여 돌아오면 그침으로 돌아가며, 일하다가 회복하여 돌아오면 일이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
[孔穎達 疏]「《象》曰」至「後不省方」。
○正義曰:「雷在地中復」者,雷是動物,復卦以動息為主,故曰「雷在地中」。「先王以至日閉關」者,先王象此復卦,以二至之日閉塞其關,使商旅不行於道路也。「后不省方」者,方,事也。後不省視其方事也。以地掩閉於雷,故關門掩閉,商旅不行。君後掩閉於事,皆取「動息」之義。
○注「方事也」至「事復則無事也」。
○正義曰:「方,事」者,恐「方」是四方境域,故以「方」為事也。言至日不但不可出行,亦不可省視事也。「冬至陰之復,夏至陽之復」者,復謂反本,靜為動本。冬至一陽生,是陽動用而陰復於靜也。夏至一陰生,是陰動用而陽復於靜也。「動復則靜,行復則止,事復則無事」者,動而反復則歸靜,行而反復則歸止,事而反復則歸於無事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후불성방(后不省方)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우레가 땅속에 있음이 복(復)이다[雷在地中 復]”라는 것은, 우레는 바로 움직이는 사물이니, 복괘(復卦)는 움직이고 그침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우레가 땅 가운데에 있다[雷在地中]”라고 한 것이다.
“선왕(先王)이 그로써 동짓날에 관문을 닫고[先王以至日閉關]”라는 것은, 선왕(先王)이 이 복괘(復卦)를 모습[象]하고 그로써 동지(冬至)와 하지(夏至) 날에 그 관문을 폐쇄하며 장사꾼과 여행자들로 하여금 도로에 다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임금은 사방을 살피지 않는다[后不省方]”라는 것의, ‘방(方)’은 일이며, 임금이 그 사방 일을 살펴보지 않는 것이다. 그로써 땅이 우레에 가려져 닫혔기 때문에 관문을 가리고 닫아서 장사꾼과 여행자들이 다니지 않게 하고, 군주가 일을 가리고 닫음은, 모두 “움직이고 그침[動息]”의 뜻을 취한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방사야(方事也)에서 사복즉무사야(事復則无事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방(方)은 일이다[方 事]”라는 것은, 방(方)은 바로 4방(四方) 강역의 경계라고 생각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방(方)을 일이라 한 것이다. 지극한 날[至日]에는 나가 다녀서는 안 되며 또한 일을 살펴보아서도 안 됨을 말한 것이다.
“동지(冬至)는 음(陰)을 회복함이고, 하지(夏至)는 양(陽)을 회복함이다[冬至陰之復 夏至陽之復]”라는 것은, ‘복(復)’은 근본으로 돌아옴을 말하며, 정(靜)은 움직임의 근본이 된다. 동지(冬至)에 한 양(陽)이 생기니 이는 양(陽)이 움직임을 사용하여서 음(陰)이 정(靜)으로 돌아감이고, 하지(夏至)에 한 음(陰)이 생기니 이는 음(陰)이 움직임을 사용하여서 양(陽)이 정(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움직임[動]을 회복하면 고요함[靜]이고 행함을 회복하면 그치며 일을 회복하면 일이 없어진다[動復則靜 行復則止 事復則无事]”라는 것은, 움직여서 회복하여 돌아오면 정(靜)으로 돌아가고, 행하여서 회복하여 돌아오면 그침으로 돌아가며, 일하다가 회복하여 돌아오면 일이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初九,不遠復,无祇悔,元吉。 초구(初九)는 멀지 않아 회복하여 후회에 으르름이 없으니 크게 길하다. 【王弼 注】 最處復初,始復者也。復之不速,遂至迷凶*,不遠而復,幾悔而反,以此脩身,患難遠矣。錯之於事,其殆庶幾乎,故元吉也。* 或作「遂至遠凶」 【왕필 주】 회복함에 가장 처음에 처하여 회복을 시작한 자이다. 회복을 함이 빠르지 않으면 드디어 혼미한 흉함에 이르고 멀지 않아서 회복하니 조금 후회하고서 돌아오며 이로서 자신을 닦으니 근심과 걱정이 멀어진다 . 일에 섞이면 그 위태로움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크게 길함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不遠復」者,最處復初,是始復者也。既在陽復,即能從而復之,是迷而不遠,即能復也。「無祇悔元吉」者,韓氏云:「祇,大也。」既能速復,是無大悔,所以大吉。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멀지 않아 회복하여[不遠復]”라는 것은, 복(復)의 가장 처음에 처하였으니, 이는 회복을 시작하는 자이다. 이미 양(陽)이 회복함에 있으면 즉시 잘 따라하여서 회복을 하니, 이는 혼미하되 멀지 않으며 바로 잘 회복하는 것이다. “후회에 으르름이 없으니 크게 길하다[无祇悔 元吉] 한씨[韓氏(韓伯)]가 이르기를 “지(祇)는 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속히 잘 회복하면 이는 큰 후회가 없으니, 크게 길함의 까닭인 것이다.」 |
《象》曰:不遠之復,以脩身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멀지 않음의 회복함은, 그로써 자신을 닦음이다." [孔穎達 疏]正義曰: 釋「不遠之復」也。所以不遠速復者,以能脩正其身,有過則改故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멀리 가지 않고 회복함[不遠之復]’을 해석한 것이며, 멀리 가지 않고 속히 회복한다는 것의 까닭은, 그 자신을 잘 닦고 바루어서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 때문이다.」 |
六二,休復,吉。 육이(六二)는 회복을 휴식하니, 길하다. 【王弼 注】 得位處中,最比於初。上无陽爻以疑其親。陽為仁行,在初之上而附順之,下仁之謂也。既處中位,親仁善鄰,復之休也。 【왕필 주】 지위를 얻어 가운데[中]에 처하고 초구(初九)에 가장 친하다. 위에 그 친함을 위심하는 양효(陽爻)가 없으며, 양(陽)이 어짊을 행하게 되니, 초구(初九)의 위에 있으면서 따라서 붙음은 아래의 어짊을 말함이다. 이미 가운데 지위에 처하고 어짊에 친하고 이웃이 착하니 회복을 하여 휴식함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得位處中,最比於初,陽為仁行,已在其上,附而順之,是降下於仁,是休美之復,故云「休復吉」也。以其下仁,所以「吉」也。故《象》云「休復之吉,以下仁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지위를 얻고 가운데[中]에 처하여 초구(初九)와 가장 친하고, 양(陽)이 어짊을 행하게 되며 자기가 그 위에 있으면서 붙어서 순종을 하니, 이는 어짊에게 아래하여 낮추니, 바로 아름답게 휴식하는 회복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회복을 휴식함의 길함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로써 어짊에 아래하니, “길함[吉]“의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회복을 휴식함의 길함은, 그로써 아래가 어짊이다”라고 한 것이다[休復之吉,以下仁也]라고 하였다.」 |
《象》曰:休復之吉,以下仁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회복을 휴식함의 길함은, 그로써 아래가 어짊이다.” |
六三,頻復,厲无咎。 육삼(六三)은 회복을 재촉하여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 【王弼 注】 頻,頻蹙之貌也。處下體之終,雖愈於上六之迷,已失復遠矣,是以蹙也。蹙而求復,未至於迷,故雖危无咎也。復道宜速,蹙而乃復,義雖无咎,它來難保。 【왕필 주】 빈(頻, 자주 빈)은 자주 재촉하는 모양이다. 아래 몸체의 마침에 처하니 비록 상육(上六)의 어지러움[迷復] 보다는 나아도 이미 회복함을 멀리 잃었으니 이로써 재촉함이다. 재촉하면서 회복하기를 구하지만 아직 어지러움[迷]에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 도(道)를 회복함은 마땅히 빨리 재촉하면서 이에 회복했으니 뜻에는 비록 허물이 없으나 다르게 와야 어려움이 보호 된다. |
[孔穎達 疏]「《象》曰休復之吉」至「無咎」。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휴복지길(象曰休復之吉)에서 무구(无咎)까지.} ○正義曰:「頻復」者,頻謂頻蹙。六三處下體之上,去復稍遠,雖勝於上六迷復,猶頻蹙而復,復道宜速,謂蹙而求復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회복을 재촉하여[頻復]”라는 것은, ‘빈(頻)’은 자주 재촉함을 말한다. 육3(六三)이 하체(下體)의 위에 처하여 회복함[復]과 거리가 약간 멀지만, 비록 상육(上六)의 ‘회복이 혼미함[迷復]’보다는 나으나 오히려 자주 재촉하여서 회복하고, 회복하는 도(道)는 마땅히 신속해야 하니, 재촉하면서 회복함을 구함을 말한 것이다. 去復猶近,雖有危厲,於義無咎。故《象》云「義無咎」也。 회복함[復]과의 거리가 오히려 가까워서 비록 위태한 괴로움이 있으나 뜻함[義]에는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뜻[義]에는 허물이 없다[義無咎]”라고 한 것이다.」 ○注「頻蹙之貌」至「它來難保」。 ○ 【왕필 주(王弼 注)】의 “빈축지모(頻蹙之貌)에서 타래난보(它來難保)까지” ○正義曰:「義雖無咎,它來難保」者,去復未甚大遠,於義雖復無咎,謂以道自守,得「無咎」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 뜻에는 비록 허물이 없으나 다르게 와야 어려움이 보호 된다[義雖无咎 它來難保]”라는 것은, 회복[復]과의 거리가 그다지 크게 멀지 않으니, 뜻에는 비록 회복하나 허물이 없으며, 도(道)로써 스스로 지켜서 “허물이 없음[無咎]”을 얻음을 말한 것이다. 若自守之外,更有他事而來,則難可保此無咎之吉也。所以《象》云「義無咎」,守常之義得無咎也。 만약 스스로 지키는 외에 다시 다른 일이 있어서 오게 되면, 이 허물 없음의 길함을 보장하기 어렵다.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뜻에는 허물이 없다[義無咎]”라고 한 까닭인데, 떳떳함을 지키는 뜻에 허물 없음을 얻는 것이다.」 |
《象》曰:頻復之厲,義无咎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회복을 재촉함의 위태로움은, 뜻에는 허물이 없다. |
[孔穎達 疏]「《象》曰休復之吉」至「無咎」。
○正義曰:「頻復」者,頻謂頻蹙。六三處下體之上,去復稍遠,雖勝於上六迷復,猶頻蹙而復,復道宜速,謂蹙而求復也。去復猶近,雖有危厲,於義無咎。故《象》云「義無咎」也。
○注「頻蹙之貌」至「它來難保」。
○正義曰:「義雖無咎,它來難保」者,去復未甚大遠,於義雖復無咎,謂以道自守,得「無咎」也。若自守之外,更有他事而來,則難可保此無咎之吉也。所以《象》云「義無咎」,守常之義得無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휴복지길(象曰休復之吉)에서 무구(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회복을 재촉하여[頻復]”라는 것은, ‘빈(頻)’은 자주 재촉함을 말한다. 육3(六三)이 하체(下體)의 위에 처하여 회복함[復]과 거리가 약간 멀지만, 비록 상육(上六)의 ‘회복이 혼미함[迷復]’보다는 나으나 오히려 자주 재촉하여서 회복하고, 회복하는 도(道)는 마땅히 신속해야 하니, 재촉하면서 회복함을 구함을 말한 것이다.
회복함[復]과의 거리가 오히려 가까워서 비록 위태한 괴로움이 있으나 뜻함[義]에는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뜻[義]에는 허물이 없다[義無咎]”라고 한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빈축지모(頻蹙之貌)에서 타래난보(它來難保)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 뜻에는 비록 허물이 없으나 다르게 와야 어려움이 보호 된다[義雖无咎 它來難保]”라는 것은, 회복[復]과의 거리가 그다지 크게 멀지 않으니, 뜻에는 비록 회복하나 허물이 없으며, 도(道)로써 스스로 지켜서 “허물이 없음[無咎]”을 얻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스스로 지키는 외에 다시 다른 일이 있어서 오게 되면, 이 허물 없음의 길함을 보장하기 어렵다.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뜻에는 허물이 없다[義無咎]”라고 한 까닭인데, 떳떳함을 지키는 뜻에 허물 없음을 얻는 것이다.」
六四,中行獨復。 육사(六四)는 가운데가 행하여서 회복을 홀로 한다. 【王弼 注】 四上下各有二陰而處厥中,履得其位而應於初,獨得所復。順道而反,物莫之犯,故曰中行獨復也。 【왕필 주】 육4(六四)의 위와 아래가 각각 두 음(陰)이 있는데 그 가운데 처하고, 그 지위를 얻어 밟고서 초구(初九)에 응하니 홀로 회복하는 바를 얻는다. 도(道)를 따르면서 돌아오니 사물이 범함이 없기 때문에 "가운데가 행하여서 회복을 홀로 한다."라고 말했다. |
[孔穎達 疏]「《象》曰」至「中行獨復」。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중행독복(中行獨復)까지.} ○正義曰:「中行獨復」者,處於上卦之下,上下各有二陰,巳獨應初,居在眾陰之中,故云「中行」。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가운데가 행하여서 회복을 홀로 한다[中行 獨復]”라는 것은, 상괘(上卦)의 아래에 처하고 위아래에 각각 두 음(陰)이 있는데 자기만 홀로 초구(初九)에 응(應)하니, 거주함이 여러 음(陰)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가운데가 행한다[中行]”라고 하였다. 獨自應初,故云「獨復」。從道而歸,故《象》云「以從道也」。 홀로 스스로 초구(初九)에 응(應)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홀로 회복한다[獨復]”라고 하였다. 도(道)를 따라서 돌아오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그로써 도(道)를 따름이다[以從道也]”라고 한 것이다.」 |
《象》曰:中行獨復,以從道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가운데가 행하여 회복을 홀로 함은, 그로써 도(道)를 따름이다.” |
[孔穎達 疏]「《象》曰」至「中行獨復」。
○正義曰:「中行獨復」者,處於上卦之下,上下各有二陰,巳獨應初,居在眾陰之中,故云「中行」。獨自應初,故云「獨復」。從道而歸,故《象》云「以從道也」。
[孔穎達 疏]「《象》曰」至「中行獨復」。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중행독복(中行獨復)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가운데가 행하여서 회복을 홀로 한다[中行 獨復]”라는 것은, 상괘(上卦)의 아래에 처하고 위아래에 각각 두 음(陰)이 있는데 자기만 홀로 초구(初九)에 응(應)하니, 거주함이 여러 음(陰)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가운데가 행한다[中行]”라고 하였다.
홀로 스스로 초구(初九)에 응(應)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홀로 회복한다[獨復]”라고 하였다. 도(道)를 따라서 돌아오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그로써 도(道)를 따름이다[以從道也]”라고 한 것이다.」
六五,敦復,无悔。 육오(六五)는 회복을 두텁게 했으니 후회가 없다. 【王弼 注】 居厚而履中,居厚則无怨,履中則可以自考。雖不足以及休復之吉,守厚以復,悔可免也。 【왕필 주】 두터움에 거주하면서 가운데를 밟았는데 두터움에 거주하면 원망이 없으며 가운데를 밟으면 스스로를 살필 수 있다. 비록 회복하여 쉬는 길함에 미침으로는 부족하지만 두터움을 지킴으로써 회복하여 후회를 면 할 수 있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敦復無悔」者,處坤之中,是敦厚於復,故云「敦復」。既能履中,又能自考成其行。既居敦厚,物無所怨,雖不及六二之「休復」,猶得免於悔吝,故云「無悔」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회복을 두텁게 했으니 후회가 없다[敦復 无悔]”라는 것은, 곤(坤)의 가운데[中]에 처하였으니 이는 회복함에 돈후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회복을 두텁게 함[敦復]”라고 한 것이다. 이미 中을 잘 밟고 또 스스로 잘 고려하여 그 행실을 이루며, 이미 돈후함에 거주하여 사물(사람)이 원망하는 바가 없으니, 비록 육2(六二)의 ‘회복함을 그침[休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히려 후회와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후회가 없다[無悔]”라고 한 것이다.」 |
《象》曰:敦復无悔,中以自考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회복을 두텁게 하여 후회가 없음은, 가운데로써 스스로를 살핌이다.” [孔穎達 疏]正義曰:釋「無悔」之義。以其處中,能自考其身,故「無悔」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후회가 없다[無悔]’의 뜻을 해석하였으며, 가운데[中]에 처함으로써 스스로 그 자신을 잘 고려하기 때문에 ‘후회가 없음[無悔]’이다.」 |
上六,迷復,凶,有災眚。用行師,終有大敗。以其國君凶,至于十年不克征。 상육(上六)은 회복함이 미혹(迷惑)하니 흉하고 재앙이 있으며, 군대를 행하는 데에 사용하면 마침은 크게 패함이 있다. 그로써 그 나라 군주가 흉하여 10년에 이르도록 정벌을 못할 것이다. 【王弼 注】 最處復後,是迷者也。以迷求復,故曰迷復也。用之行師,難用有克也,終必大敗。用之於國,則反乎君道也。大敗乃復,量斯勢也,雖復十年脩之,猶未能征也。 【왕필 주】 회복[復]의 가장 뒤에 처하니, 이는 미혹(迷惑)한 자이다. 미혹함을 가지고 회복을 구하기 때문에 "미혹을 회복함[迷復]"이라 말하였다. 군대를 행함에 사용함은 이김을 사용하기가 어려워 마침은 반드시 크게 패한다. 나라에서 사용을 한다면 군주의 도(道)에 반한다. 크게 패하고 이에 회복하며, 이 형세를 헤아리는데 비록 10년을 닦아서 회복하여도 오히려 잘 정복하지 못한다. |
[孔穎達 疏]「上六迷復凶」至「不克征」。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육미복흉(上六迷復凶)에서 불극정(不克征)까지.} ○正義曰:「迷復凶」者,最處復後,是迷闇於復。「以迷求復」,所以「凶」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회복함이 미혹(迷惑)하니 흉함[迷復 凶]”이라는 것은, 복(復)의 가장 뒤에 처하였으니, 이는 회복함에 혼미하고 어두운 것이다. 혼미함으로써 회복함을 구하기 때문에 흉한 것이다. 「有災眚」者,闇於復道,必無福慶,唯有災眚也。 “재앙이 있으며[有災眚]”라는 것은, 회복하는 도(道)에 어두우니, 반드시 복(福)과 경사가 없으며, 오직 재앙이 있는 것이다. 「用行師終有大敗」者,所為既凶,故用之行師,必無克勝,唯「終有大敗」也。 “군대를 행하는 데에 사용하면 마침은 크게 패함이 있다[用行師 終有大敗]”라는 것은, 하는 바가 이미 흉하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함을 사용하면 반드시 이기지 못하고 오직 마침은 크게 패함이 있다[終有大敗]라고 하였다. 「以其國君凶」者,以,用也。用此迷復於其國內,則反違君道,所以凶也。 “그로써 그 나라 군주가 흉하여[以其國君 凶]”라는 것의, ‘이(以)’는 사용함이며, 이 회복함이 미혹함(迷惑)을 그 나라 안에 사용하면 군주의 도(道)에 도리어 어긋나니, 이 때문에 흉한 것이다. 「至於十年不克征」者,師敗國凶,量斯形勢,雖至十年猶不能征伐。以其迷闇不復,而反違於君道,故《象》云「迷復之凶,反君道也」。 “10년에 이르도록 정벌을 못할 것이다[至于十年 不克征]”라는 것은, 군대가 패하고 나라가 흉하면 이 형세를 헤아려서 비록 10년에 이르더라도 오히려 능히 정벌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써 그 혼미하고 어두움을 회복하지 않아서 군주의 도(道)를 도리어 어겼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회복함이 미혹(迷惑)하여 흉함은, 군주의 도(道)에 위반함이다.”라고 한 것이다.」 |
《象》曰:迷復之凶,反君道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회복함이 미혹(迷惑)하여 흉함은, 군주의 도(道)에 반함이다.” |
[孔穎達 疏]「上六迷復凶」至「不克征」。
○正義曰:「迷復凶」者,最處復後,是迷闇於復。「以迷求復」,所以「凶」也。「有災眚」者,闇於復道,必無福慶,唯有災眚也。「用行師終有大敗」者,所為既凶,故用之行師,必無克勝,唯「終有大敗」也。「以其國君凶」者,以,用也。用此迷復於其國內,則反違君道,所以凶也。「至於十年不克征」者,師敗國凶,量斯形勢,雖至十年猶不能征伐。以其迷闇不復,而反違於君道,故《象》云「迷復之凶,反君道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육미복흉(上六迷復凶)에서 불극정(不克征)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회복함이 미혹(迷惑)하니 흉함[迷復 凶]”이라는 것은, 복(復)의 가장 뒤에 처하였으니, 이는 회복함에 혼미하고 어두운 것이다. 혼미함으로써 회복함을 구하기 때문에 흉한 것이다.
“재앙이 있으며[有災眚]”라는 것은, 회복하는 도(道)에 어두우니, 반드시 복(福)과 경사가 없으며, 오직 재앙이 있는 것이다.
“군대를 행하는 데에 사용하면 마침은 크게 패함이 있다[用行師 終有大敗]”라는 것은, 하는 바가 이미 흉하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함을 사용하면 반드시 이기지 못하고 오직 마침은 크게 패함이 있다[終有大敗]라고 하였다.
“그로써 그 나라 군주가 흉하여[以其國君 凶]”라는 것의, ‘이(以)’는 사용함이며, 이 회복함이 미혹함(迷惑)을 그 나라 안에 사용하면 군주의 도(道)에 도리어 어긋나니, 이 때문에 흉한 것이다.
“10년에 이르도록 정벌을 못할 것이다[至于十年 不克征]”라는 것은, 군대가 패하고 나라가 흉하면 이 형세를 헤아려서 비록 10년에 이르더라도 오히려 능히 정벌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써 그 혼미하고 어두움을 회복하지 않아서 군주의 도(道)를 도리어 어겼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회복함이 미혹(迷惑)하여 흉함은, 군주의 도(道)에 위반함이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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