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추좌전(春秋 左傳)』 주역점(周易占) 사례
ㅡ 【양공(襄公) 28年】의 기록은 시초(蓍草)를 헤아려 주역점을 친 기록이 아니고 단지 『주역(周易)』 경문을 인용한 사례이다.
◎ 『춘추좌전(春秋 左傳)』
○ 양공(襄公) 28年
【襄公 二八年】秋八月, 大雩, 旱也.
蔡侯歸自晉, 入于鄭. 鄭伯享之, 不敬. 子産曰, “蔡侯其不免乎! 日其過此也, 君使子展迋勞於東門之外, 而傲. 吾曰猶將更之. 今還, 受享而惰, 乃其心也. 君小國, 事大國, 而惰傲以爲己心, 將得死乎? 若不免, 必由其子. 其爲君也, 淫而不父. 僑聞之, 如是者, 恒有子禍.”
孟孝伯如晉, 告將爲宋之盟故如楚也.
蔡侯之如晉也, 鄭伯使游吉如楚. 及漢, 楚人還之, 曰, “宋之盟, 君實親辱. 今吾子來, 寡君謂吾子姑還, 吾將使馹奔問諸晉而以告.” 子大叔曰, “宋之盟, 君命將利小國, 而亦使安定其社稷, 鎭撫其民人, 以禮承天之休, 此君之憲令, 而小國之望也. 寡君是故使吉奉其皮幣, 以歲之不易, 聘於下執事. 今執事有命曰, 女何與政令之有? 必使而君棄而封守, 跋涉山川, 蒙犯霜露, 以逞君心. 小國將君是望, 敢不唯命是聽? 無乃非盟載之言, 以闕君德, 而執事有不利焉, 小國是懼. 不然, 其何勞之敢憚?” 子大叔歸, 復命. 告子展曰, “楚子將死矣. 不修其政德, 而貪昧於諸侯, 以逞其願, 欲久, 得乎? 周易有之, 在復☷☳之頤☶☳, 曰, ‘迷復, 凶’, 其楚子之謂乎! 欲復其願, 而棄其本, 復歸無所, 是謂迷復, 能無凶乎? 君其往也, 送葬而歸, 以快楚心. 楚不幾十年, 未能恤諸侯也, 吾乃休吾民矣.”
【양공(襄公) 28年】 가을 8월에, 큰 기우제는 가뭄 때문이었다.
채(蔡)나라 군주[侯,경공]가 진(晉)나라로 부터 돌아갈 적에 정(鄭)나라로 들어갔는데, 정(鄭)나라 군주[伯,간공]가 그를 대접하는데 공경스럽지 않았다.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채(蔡)나라 군주[侯]는 그것을 면하지 못했지요? 지난날 이곳을 지나갈 적에, 군주께서 자전(子展)으로 하여금 동문 밖에 가서 위로하도록 하면서 오만하였는데, 내가 오히려 장차 그것을 고치라고 말했었지만, 지금 돌아가는데도 대접을 나태하게 하니 그[鄭伯]의 마음이 그러함이다. 작은 나라의 군주가 큰 나라를 섬기면서 게으르고 오만함으로써 자기 마음을 쓴다면 장차 [편안한] 죽음을 얻겠는가? 만약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 아들 때문이며 임금 노릇하면서도 음탕하여서 아비 노릇을 못하였다. 내[僑]가 이와 같은 자는 항상 자식의 화가 있다고 들었다.'라고 했다.
[노나라] 맹효백(孟孝伯)이 진(晉)나라에 가서 장차 송(宋)나라의 맹약을 하기 때문에 초(楚)나라로 갈 것을 알렸다.
채(蔡)나라 군주[侯,경공]가 진(晉)나라에 갔는데, 정(鄭)나라 군주[伯,간공]는 유길(游吉)로 하여금 초(楚)나라로 가게 했다.
[유길(游吉)이] 한수(漢水)에 이르자 초(楚)나라 사람들이 그를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송(宋)나라의 동맹에 군주가 친히 실제로 욕(辱)을 봤었는데도 지금 우리에게 당신이 왔으니, 우리 [초나라]군주께서 나에게 당신을 잠시(暫時) 돌려보내라 말했으며, 내가 장차 역말을 달리게 하여 진(晉)나라에 모두 물어보고서 그로써 [당신에] 알리겠다."라고 했다.
자대숙[游吉]이 대답하기를 "송(宋)나라의 동맹에 군주의 명령은 장차 소국을 이롭게 하면서 또한 그[小國]들의 사직(社稷)을 안정시키고 그 백성과 사람들을 누르고 어루만져서 예(禮)로써 하늘의 복을 받들려 하시는데, 이것이 군주의 법과 령(令)이면서 작은 나라의 희망입니다. 우리 [정(鄭)나라] 군주께서는 이 때문에 나[游吉]로 하여금 모피와 직물을 받들고 올해는 [기근으로] 용이하지 않은데도 하집사(下執事)를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집사(執事)께서 명하시기를 '당신이 어찌 정사의 령[政令]에 참여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너희 임금으로 하여금 봉지를 지키는 일을 버려두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서리와 이슬을 뒤집어쓰더라도 그로써 [초(楚)나라] 군주의 마음를 기쁘게 하라.'고 하십니다.
작은 나라들이 장차 군주를 바라보는데 감히 명을 듣지 않겠습니까? 맹세에 기록되어 있는 말이 아니며 또한 없는데도 그로써 군주의 덕을 잃고 집사(執事)들도 그러하면 이롭지 않음이 있으며, 소국은 이것이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고로움을 감히 꺼리겠습니까?"라고 했다.
자대숙(子大叔)이 [정나라로] 돌아와 복명하고 자전(子展)에게 고하기를 "초(楚)나라 군주는 장차 죽을 것입니다. 정치의 덕을 닦지 않으면서 제후들에게 욕심만 탐내고 그로써 그 원함을 만족시키려 하니 오래하려 해도 오래 하겠습니까?
『주역』에 그것이 있는데 복괘(復卦)가 이괘(頤卦)로 변한[復☷☳之頤☶☳] 경우에 있으며, 말하기를 '회복함이 미혹(迷惑)하니 흉하다.'고 하였는데 그 초나라 군주[楚子]를 가리킴이지요? 그 원함을 회복하기 바라면서 근본을 버렸으니 회복하여도 돌아갈 곳이 없으며, 이는 회복함에 길을 잃었음[迷復]을 일컬었으니 능히 흉함이 없겠습니까." 군주께서 그곳에 가셔서 장례 전송[送葬]을 하시고 돌아와 그로써 초(楚)나라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십시오. 초(楚)나라는 거의 10년이 되지 않고서는 제후들을 잘 구휼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이에 우리 백성들을 쉬게 하십시요."라고 했다.
◎ 주역점(周易占) 사례
○ 양공(襄公) 28年[bc 545]
【襄公 二八年】秋八月, 大雩, 旱也. <【양공(襄公) 28年】 가을 8월에, 큰 기우제는 가뭄 때문이었다.>
蔡侯歸自晉, 入于鄭. 鄭伯享之, 不敬. <채(蔡)나라 군주[侯]가 진(晉)나라로 부터 돌아갈 적에 정(鄭)나라로 들어갔는데, 정(鄭)나라 군주[伯]가 그를 대접하는데 공경스럽지 않았다.>
子産曰, “蔡侯其不免乎! 日其過此也, 君使子展迋勞於東門之外, 而傲.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채(蔡)나라 군주[侯]는 그것을 면하지 못했지요? 지난날 이곳을 지나갈 적에, 군주께서 자전(子展)으로 하여금 동문 밖에 가서 위로하도록 하면서 오만하였는데,>
吾曰猶將更之. 今還, 受享而惰, 乃其心也. 君小國, 事大國, 而惰傲以爲己心, 將得死乎? 若不免, 必由其子. 其爲君也, 淫而不父. 僑聞之, 如是者, 恒有子禍.”<내가 오히려 장차 그것을 고치라고 말했었지만, 지금 돌아가는데도 대접을 나태하게 하니 그[鄭伯]의 마음이 그러함이다. 작은 나라의 군주가 큰 나라를 섬기면서 게으르고 오만함으로써 자기 마음을 쓴다면 장차 [편안한] 죽음을 얻겠는가? 만약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 아들 때문이며 임금 노릇하면서도 음탕하여서 아비 노릇을 못하였다. 내[僑]가 이와 같은 자는 항상 자식의 화가 있다고 들었다.'라고 했다.>
孟孝伯如晉, 告將爲宋之盟故如楚也. <[노나라] 맹효백(孟孝伯)이 진(晉)나라에 가서 장차 송(宋)나라의 맹약을 하기 때문에 초(楚)나라로 갈 것을 알렸다.>
蔡侯之如晉也, 鄭伯使游吉如楚. <채(蔡)나라 군주[侯,경공]가 진(晉)나라에 갔는데, 정(鄭)나라 군주[伯,간공]는 유길(游吉)로 하여금 초(楚)나라로 가게 했다.>
及漢, 楚人還之, 曰, “宋之盟, 君實親辱. 今吾子來, 寡君謂吾子姑還, 吾將使馹奔問諸晉而以告.” <[유길(游吉)이] 한수(漢水)에 이르자 초(楚)나라 사람들이 그를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송(宋)나라의 동맹에 군주가 친히 실제로 욕(辱)을 봤었는데도 지금 우리에게 당신이 왔으니, 우리 [초나라]군주께서 나에게 당신을 잠시(暫時) 돌려보내라 말했으며, 내가 장차 역말을 달리게 하여 진(晉)나라에 모두 물어보고서 그로써 [당신에] 알리겠다."라고 했다.>
子大叔曰, “宋之盟, 君命將利小國, 而亦使安定其社稷, 鎭撫其民人, 以禮承天之休, 此君之憲令, 而小國之望也. 寡君是故使吉奉其皮幣, 以歲之不易, 聘於下執事. 今執事有命曰, 女何與政令之有? 必使而君棄而封守, 跋涉山川, 蒙犯霜露, 以逞君心. <자대숙[游吉]이 대답하기를 "송(宋)나라의 동맹에 군주의 명령은 장차 소국을 이롭게 하면서 또한 그[小國]들의 사직(社稷)을 안정시키고 그 백성과 사람들을 누르고 어루만져서 예(禮)로써 하늘의 복을 받들려 하시는데, 이것이 군주의 법과 령(令)이면서 작은 나라의 희망입니다. 우리 [정(鄭)나라] 군주께서는 이 때문에 나[游吉]로 하여금 모피와 직물을 받들고 올해는 [기근으로] 용이하지 않은데도 하집사(下執事)를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집사(執事)께서 명하시기를 '당신이 어찌 정사의 령[政令]에 참여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너희 임금으로 하여금 봉지를 지키는 일을 버려두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서리와 이슬을 뒤집어쓰더라도 그로써 [초(楚)나라] 군주의 마음를 기쁘게 하라.'고 하십니다.>
小國將君是望, 敢不唯命是聽? 無乃非盟載之言, 以闕君德, 而執事有不利焉, 小國是懼. 不然, 其何勞之敢憚?” <작은 나라들이 장차 군주를 바라보는데 감히 명을 듣지 않겠습니까? 맹세에 기록되어 있는 말이 아니며 또한 없는데도 그로써 군주의 덕을 잃고 집사(執事)들도 그러하면 이롭지 않음이 있으며, 소국은 이것이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고로움을 감히 꺼리겠습니까?"라고 했다.>
子大叔歸, 復命. 告子展曰, “楚子將死矣. 不修其政德, 而貪昧於諸侯, 以逞其願, 欲久, 得乎? <자대숙(子大叔)이 [정나라로] 돌아와 복명하고 자전(子展)에게 고하기를 "초(楚)나라 군주는 장차 죽을 것입니다. 정치의 덕을 닦지 않으면서 제후들에게 욕심만 탐내고 그로써 그 원함을 만족시키려 하니 오래하려 해도 오래 하겠습니까?>
周易有之, 在復☷☳之頤☶☳, 曰, ‘迷復, 凶’, 其楚子之謂乎! 欲復其願, 而棄其本, 復歸無所, 是謂迷復, 能無凶乎? 君其往也, 送葬而歸, 以快楚心. 楚不幾十年, 未能恤諸侯也, 吾乃休吾民矣.” <『주역』에 그것이 있는데 복괘(復卦)가 이괘(頤卦)로 변한[復☷☳之頤☶☳] 경우에 있으며, 말하기를 '회복함이 미혹(迷惑)하니 흉하다.'고 하였는데 그 초나라 군주[楚子]를 가리킴이지요? 그 원함을 회복하기 바라면서 근본을 버렸으니 회복하여도 돌아갈 곳이 없으며, 이는 회복함에 길을 잃었음[迷復]을 일컬었으니 능히 흉함이 없겠습니까." 군주께서 그곳에 가셔서 장례 전송[送葬]을 하시고 돌아와 그로써 초(楚)나라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십시오. 초(楚)나라는 거의 10년이 되지 않고서는 제후들을 잘 구휼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이에 우리 백성들을 쉬게 하십시요."라고 했다.>
■ 주역점을 친 기록이 아니고『주역(周易)』을 인용한 사례이다.
○ 24. 복괘(復卦)[卦象:지뢰복]
☷ 坤上
☳ 震下
진(震)[雷.우뢰]이 아래에 있고, 곤(坤)[地.땅]이 위에 있다.
【卦辭(괘사)】
復,亨。出入无疾,朋來无咎。反復其道,七日來復。利有攸往。
복(復)은 형통하여 나가고 들어오는데 병은 없지만 동문이 와야 허물이 없다. 그 도에 회복하여 돌아가는데 칠일 만에 회복하여 오며, 할일이 있는데 가야 이롭다.
【爻辭(효사)】
上六,迷復,凶,有災眚。用行師,終有大敗。以其國君凶,至于十年不克征。
상육(上六)은 회복함이 미혹(迷惑)하니 흉하고 재앙이 있으며, 군사를 행하는 데에 쓰면 마침은 크게 패함이 있다. 그로서 그 나라 임금이 흉하여 십년이 될 때까지 정벌을 못할 것이다.
○ 27. 이괘(頤卦)[卦象:산뢰이]
☶ 艮上
☳ 震下
진(震)[雷.우뢰]이 아래에 있고, 간(艮)[山.산]이 위에 있다.
【卦辭(괘사)】
頤,貞吉。觀頤,自求口實。
이(頤)는 곧아야 길하니, 기름을 보고서 스스로 입을 채움[음식]을 구한다.
◪ 복괘(復卦)
【爻辭(효사)】
上六,迷復,凶,有災眚。用行師,終有大敗。以其國君凶,至于十年不克征。
상육(上六)은 회복함이 미혹(迷惑)하니 흉하고 재앙이 있으며, 군사를 행하는 데에 쓰면 마침은 크게 패함이 있다. 그로서 그 나라 임금이 흉하여 십년이 될 때까지 정벌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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