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정의(周易正義)》는 왕필(王弼, 226~249)의 주(注)와 한강백(韓康伯)의 주(注)를 채용하여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주석(注釋)을 하여 지었다.
16. 예괘(豫卦)[卦象:뇌지예]
☳ 震上
☷ 坤下
곤[地.땅]이 아래에 있고, 진[雷.우뢰]이 위에 있다.
豫,利建侯行師。 예(豫)는 제후를 세워 군대를 움직임이 이롭다. |
[孔穎達 疏]正義曰:謂之豫者,取逸豫之義,以和順而動,動不違眾,眾皆說豫,故謂之豫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말하기를 ‘예(豫)’라고 한 것은, 편안한 안락(安樂)함의 뜻을 취하였으며, 그로써 어울려 따르면서 움직이며, 움직임이 무리를 어기지 않아서 무리가 모두 안락(安樂)함에 설득되었기 때문에 말하기를 ‘예(豫)’라고 하였다. 動而眾說,故可利建侯也。以順而動,不加無罪,故可以行師也。 움직이면 무리가 설득되기 때문에 제후[侯]를 세움이 이로울 수 있는 것이며, 순응함으로써 움직여 죄 없는데는 [벌을] 가하지 않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할 수 있는 것이다. 無四德者,以逸豫之事不可以常行,時有所為也。네가지 덕[元亨利貞]이 없는 것은, 그로써 편안한 안락(安樂)함의 일을 항상 행할 수가 없고, 때에 따라 하는 바가 있다. 縱恣寬暇之事不可長行以經邦訓俗,故無元亨也。逸豫非幹正之道,故不云「利貞」也。 방자하고 한가로이 하는 일은, 연방을 경영하여서 풍속을 가르침을 길게 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원(元)과 형(亨)이 없으며, 편안한 안락(安樂)함은 바름을 주관함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에 이(利)와 정(貞)을 일러주지 않았다. 莊氏云:「建侯,即元亨也。行師,即利貞也。」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제후[侯]를 세움은 바로 원형(元亨)이요, 군대를 출동함은 바로 이정(利貞)이다.” 하였다. 案:《屯卦》「元亨利貞」之後,別云「利建侯」,則「建侯」非「元亨」也。恐莊氏說非也。 살펴보면 둔괘(屯卦)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뒤에 별도로 이르기를 “제후[侯]를 세움이 이롭다.”고 하였는데, 즉 제후[侯]를 세움이 원형(元亨)이 아니며, 아마도 장씨(莊氏)의 설명은 틀린 듯하다.」 |
[孔穎達 疏] 正義曰:謂之豫者,取逸豫之義,以和順而動,動不違眾,眾皆說豫,故謂之豫也。動而眾說,故可利建侯也。以順而動,不加無罪,故可以行師也。無四德者,以逸豫之事不可以常行,時有所為也。縱恣寬暇之事不可長行以經邦訓俗,故無元亨也。逸豫非幹正之道,故不云「利貞」也。莊氏云:「建侯,即元亨也。行師,即利貞也。」案:《屯卦》「元亨利貞」之後,別云「利建侯」,則「建侯」非「元亨」也。恐莊氏說非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말하기를 ‘예(豫)’라고 한 것은, 편안한 안락함의 뜻을 취하였으며, 그로써 어울려 따르면서 움직이며, 움직임이 무리를 어기지 않아서 모두 즐거움에 설득되었기 때문에 말하기를 ‘예(豫)’라고 하였다.
움직이면 무리가 설득되기 때문에 제후[侯]를 세움이 이로울 수 있는 것이며, 순응함으로써 움직여 죄 없는데는 [벌을] 가하지 않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네가지 덕[元亨利貞]이 없는 것은, 그로써 편안한 안락함의 일을 항상 행할 수가 없고, 때에 따라 하는 바가 있다.
방자하고 한가로이 하는 일은, 연방을 경영하여서 풍속을 가르침을 길게 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원(元)과 형(亨)이 없으며, 편안하게 즐김은 바름을 주관함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에 이(利)와 정(貞)을 일러주지 않았다.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제후[侯]를 세움은 바로 원형(元亨)이요, 군대를 출동함은 바로 이정(利貞)이다.” 하였다.
살펴보면 둔괘(屯卦)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뒤에 별도로 이르기를 “제후[侯]를 세움이 이롭다.”고 하였는데, 즉 제후[侯]를 세움이 원형(元亨)이 아니며, 아마도 장씨(莊氏)의 설명은 틀린 듯하다.」
《彖》曰:豫,剛應而志行,順以動,豫。豫,順以動,故天地如之,而況建侯、行師乎? 天地以順動,故日月不過而四時不忒;聖人以順動,則刑罰清而民服。豫之時義大矣哉! 《단전(彖傳)》에서 말하였다. "예(豫)는 강[陽]함이 응하여 뜻이 행해지고, 순함으로써 움직임이 예(豫)이다. 예(豫)는 순함으로써 움직이기 때문이며 하늘과 땅도 그와 같은데, 하물며 제후를 세우고 군대를 움직임에는 어떠할까? 하늘과 땅은 순응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해와 달이 지나치지 않으면서 네 계절이 어긋나지 않으며, 성인이 그로써 순응하여 움직이면 형벌이 맑아져서 백성들이 복종한다. 예(豫)의 때가 의미가 크도다!" |
[孔穎達 疏] 「《彖》曰豫剛應而志行」至「大矣哉」。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단왈예강응이지행(彖曰豫剛應而志行)에서 대의재(大矣哉)까지.} ○正義曰:「豫,剛應而志行,順以動,豫」者,「剛」謂九四也;「應」謂初六也。既陰陽相應,故「志行」也。此就爻明豫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예(豫)는 강[陽]함이 응하여 뜻이 행해지고, 순함으로써 움직임이 예(豫)이다[豫 剛應而志行 順以動 豫]”라는 것은, ‘강(剛)’은 구4(九四)를 말하고, ‘응(應)’은 초육(初六)을 말한다. 이미 음(陰)과 양(陽)이 서로 응하였기 때문에 ‘뜻이 행해짐[志行]’이다. 이는 효(爻)에 나아가 예(豫)의 뜻을 밝힌 것이다. 順以動,坤在下,是順也。震在上,是動也。以順而動,故豫也。此以上下二象明豫義也。自此巳上,釋豫卦之理也。 ‘순함으로써 움직임[順以動]’은, 곤(坤)이 아래에 있음이 바로 ‘순(順)’이고, 진(震)괘가 위에 있음이 바로 ‘동(動)’이다. 순함으로써 움직이기 때문에 예(豫)이다. 이는 위와 아래 두 모습[象]을 가지고 예(豫)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로부터 이상은 예괘(豫卦)의 이치를 해석하였다. 「豫順以動,故天地如之,而況建侯行師乎?」者,此釋「利建侯行師」也。 “예(豫)는 순함으로써 움직이기 때문이며 하늘과 땅도 그와 같은데, 하물며 제후를 세우고 군대를 움직임에는 어떠할까?[豫順以動 故天地如之 而況建侯行師乎]”라는 것은, 이는 ‘제후[侯]를 세우고 군대를 행사함이 이로움[利建侯行師]’을 해석하였다. 若聖人和順而動,合天地之德,故天地亦如聖人而為之也。 만약 성인(聖人)이 어울려 따르면서 움직이면, 하늘과 땅의 덕(德)에 부합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또한 성인과 같이 그렇게 함이다. 天地尊大而遠,神之難者猶尚如之,況於封建諸侯、行師征伐乎?難者既從,易者可知。 하늘과 땅은 높고 크면서 멀고 신묘함의 어려운 것은 오히려 그와 같은데, 하물며 제후를 세워 봉하고 군대를 행사하여 정벌을 하겠는가? 어려운 것이 이미 따랐으면 쉬운 것은 알 수가 있음이다. 若「建侯」能順動,則人從之。「行師」能順動,則眾從之。 만약 제후를 세우[建侯]는데 잘 따라서 움직이면 사람들이 따르고, 군대를 행사[行師]하는데 잘 따라 움직이면 무리가 따른다. 天地以順動,故日月不過而四時不忒。自此以下,廣明天地聖人順動之功也。 “하늘과 땅은 순응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해와 달이 지나치지 않으면서 네 계절이 어긋나지 않으며[天地以順動 故日月不過而四時不忒]”라고 함은, 이로부터 이하는 하늘과 땅과 성인이 따라 움직임의 공(功)을 널리 밝힌 것이다. 若天地以順而動,則日月不有過差,依其晷度,四時不有忒變,寒暑以時。 만약 하늘과 땅이 그로써 순하면서 움직이면 해와 달이 지나치거나 어긋남이 없으며 그 궤도[그림자]를 따르므로, 사시(四時)가 어긋나거나 변하지 않아 춥고 더움이 때에 맞는다. 「聖人以順動,則刑罰清而民服」者,聖人能以理順而動,則不赦有罪,不濫無辜,故「刑罰清」也。刑罰當理,故人服也。 “성인이 그로써 순응하여 움직이면 형벌이 맑아져서 백성들이 복종한다[聖人以順動 則刑罰淸而民服]”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순한 이치로써 잘 움직이면 죄가 있으면 사면하지 않지만 허물 없는 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에 ‘형벌이 맑아짐’이며, 형벌이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종하는 것이다. 「豫之時義大矣哉」者,歎美為豫之善,言於逸豫之時,其義大矣。此歎卦也。 “예(豫)의 때가 의미가 크도다![豫之時義大矣哉]”라는 것은, 예(豫)의 착함이 됨을 감탄하고 찬미한 것이며, 편안하고 즐거운 때에 그 뜻이 큼을 말하였는데, 이는 괘(卦)를 감탄(感歎)한 것이다. 凡言不盡意者,不可煩文其說,且歎之以示情,使後生思其餘蘊,得意而忘言也。 무릇 말이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그 설명을 번거롭게 글로 쓸 수가 업으니, 우선 감탄을 하여 뜻[情]을 보임으로써 후생(後生)들로 하여금 그 나머지를 쌓아 생각하여 뜻을 얻고서 말을 잊게 한 것이다. 然歎卦有三體:一直歎時,如「大過之時大矣哉」之例是也;二歎時並用,如「險之時用大矣哉」之例是也;三歎時並義,「豫之時義大矣哉」之例是也。 그러나 괘(卦)를 탄미한 것에 세 가지 몸체[體]가 있는데, 첫 번째는 바로 때를 탄미하였고, ‘대과(大過)괘의 때가 크도다.’와 같은 예(例)가 이것이며, 두 번째는 때와 함께 쓰임[用]을 탄미하였고, [감(坎)괘에] ‘험함의 때와 쓰임이 크도다.’와 같은 예가 이것이며, 세 번째는 때와 함께 뜻[義]를 탄미하였는데, ‘예(豫)의 때와 뜻[義]가 크도다.’의 예(例)가 이것이다. 夫立卦之體,各象其時,時有屯夷,事非一揆,故爻來適時,有凶有吉。 무릇 괘(卦)를 세운 몸체[體]는, 각각 그 때를 모습[象]하며, 때에는 어려움과 평탄함이 있고, 일은 하나만 헤아림이 아니기 때문에 효(爻)의 옴이 때에 맞이하여 흉함이 있고 길함이 있는 것이다. 人之生世,亦復如斯,或逢治世,或遇亂時,出處存身,此道豈小?故曰「大矣哉」也。 사람의 살아가는 세상 또한 이와 같이 돌아가는데, 혹 다스려진 세상을 만나고 혹 혼란한 세상을 만나며 나아가는 곳이 자신에게 있는데, 이 도(道)가 어찌 작겠는가? 그러므로 “크도다[大矣哉]”라고 말한 것이다. 然時運雖多,大體不出四種者:一者治時,「頤養」之世是也;二者亂時,「大過」之世是也;三者離散之時,「解緩」之世是也;四者改易之時,「革變」之世是也。故舉此四卦之時為歎,餘皆可知。 그러나 시절의 운(運)이 비록 많더라도 대체(大體)로 네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인데, 첫 번째는 다스려진 때이니 이(頤)괘의 길러짐의 세상이 이것이고, 두 번째는 어지러운 때이니 대과(大過)괘의 세상이 이것이며, 세 번째는 이별하여 흩어지는 때이니 해(解)괘의 느슨한 세상이 이것이고, 네 번째는 고쳐서 바뀌는 때이니 혁(革)괘의 변함의 세상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이 네가지 괘(卦)의 때를 들어 탄미하였으며, 나머지를 모두 알 수 있음이다. 言「用」者,謂適時之用也。雖知居時之難,此事不小,而未知以何而用之耳。 쓰임[用]을 말한 것은, 때에 알맞은 쓰임을 말한 것이며, 비록 때의 어려움에 거주하며 이 일이 작지 않음을 알면서고 그로써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지 못함이다. 故坎、睽、蹇之時宜用君子,小人勿用。用險取濟,不可為常,斟酌得宜,是用時之大略。舉險難等三卦,餘從可知矣。 그러므로 감괘(坎卦)와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의 때는 마땅히 군자(君子)를 쓰고 소인(小人)은 쓰지 말아야 한다. 험함을 사용하여 구제를 취함은 항상 할 수 없고 짐작(斟酌)하여 마땅함을 얻얶는데, 이는 때를 씀의 대략이다. 험하고 어려움 등의 세가지 괘(卦)를 들었었는데 나머지는 따라서 알 수 있다. 又言「義」者,《姤卦》注云:「凡言義者,不盡於所見,中有意謂」者也。是其時皆有義也。 또 의(義)를 말한 것은, 구괘(姤卦)의 주(注)에 이르기를 “무릇 의(義)를 말한 것은, 보이는 바로는 다하지 못하여 뜻을 말함은 가운데에 있다.”라고 함이 이것이며, 이는 그 때가 모두 뜻[義]이 있음이다. 略明佚樂之世,相隨相遇之日,隱遯羈旅之時,凡五卦,其義不小,則餘卦亦可知也。 편안하고 즐거운[豫卦] 세상과 서로 따르고[隨卦] 서로 만나는[姤卦] 날과 은둔하고[遯卦] 떠도는 나그네[旅卦]의 때에 대략 밝혔는데, 모두 다섯 괘(卦)에 그 뜻이 작지 않으며, 즉 나머지 괘(卦)를 또한 알 수 있다. 今所歎者十二卦,足以發明大義,恢弘妙理者也。凡於《彖》之末歎云「大哉」者,凡一十二卦。 지금 탄미한 바의 열두 괘(卦)는, 큰 뜻을 밝혀 드러냄으로 넉넉하며 오묘한 이치를 크게 넓힌 것들이다. 무릇 〈단전(彖傳)〉의 끝에 탄미하며 이르기를 “크도다[大哉]”라고 한 것은 모두 열두 괘(卦)이다. 若《豫》、《旅》、《遯》、《姤》凡四卦,皆云「時義」。案:《姤卦》注云:「凡言義者,不盡於所見,中有意謂。」以此言之,則四卦卦各未盡其理,其中更有餘意,不可盡申,故總云「義」也。 예컨대 예괘(豫)卦와 여괘(旅卦)와 둔괘(遯卦)와 구괘(姤卦)의 무릇 네가지 괘(卦)에는 모두 “때의 뜻[時義]”라고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구괘(姤卦)의 주(注)에 이르기를 “무릇 뜻[義]를 말한 것은, 보이는 바로는 다하지 못하고 뜻을 말함은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가지고 말을 하면 곧 네 괘(卦)는 괘가 각각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하여 그 가운데에 다시 남은 뜻이 있어서 다 펼 수가 없기 때문에 총괄하여 이르기를 “의(義)”라고 한 것이다. 《隨》之一卦亦言「義」,但與四卦其文稍別。四卦皆云「時義」,《隨卦》則「隨時之義」者,非但其中別有義意,又取隨逐其時,故變云「隨時之義大矣哉! 수(隨)의 한 괘(卦)도 또한 뜻[義]를 말하였으나 다만 네 괘(卦)와 그 글이 조금 다르다. 네 卦에는 모두 이르기를 “시의(時義)”라고 하였으나 수괘(隨卦)에는 곧 “수(隨)는 때의 뜻이다[隨時之義]”라고 한 것은, 다만 그 가운데에 따로 뜻하는 마음[義意]이 있음이 아니며, 또 수(隨)가 때를 따름을 취하였기 때문에 변경하여 이르기를 “따르는 때의 뜻이 크도다[隨時之義 大矣哉]”라고 한 것이다. 《睽》、《蹇》、《坎》此三卦皆云「時用」。 案:《睽卦》注云:「睽離之時,非小人之所能用。」《蹇卦》亦云「非小人之所能用」。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와 감괘(坎卦)의 이 세 괘(卦)는 모두 이르기를 “시용(時用)”이라 하였는데, 살펴보면 규괘(睽卦)의 주(注)에 이르기를 “사팔눈이 떠나는 때는 소인(小人)을 잘 쓸 수 있는 바가 아니다[睽離之時,非小人之所能用]”라고 하였고, 건괘(蹇卦)에 또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잘 쓸 수 있는 바가 아니다[非小人之所能用]” 하였다. 此二卦言「大矣哉」者,則是大人能用,故云:「大矣哉」!其中更無餘義,唯大人能用,故云「用」不云「義」也。 이 두 괘(卦)에 “크도다[大矣哉]”라고 말한 것은, 바로 대인(大人)을 잘 쓰기 때문에 이르기를 “크도다[大矣哉]”라고 한 것이며, 그 가운데 다시 남은 뜻은 없고 오직 대인(大人)만 잘 쓰기 때문에 이르기를 “용(用)이라 하고 의(義)를 일러주지 않았다. 《坎卦》「時用」,則與《睽》、《蹇》稍別,故注云「非用之常,用有時也」。謂《坎》險之事,時之須用,利益乃大,與《睽》、《蹇》「時用」文同而義異也。 감괘(坎卦)의 “시용(時用)”은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주(注)에 이르기를 “쓰임[用]의 떳떳함이 아니니 쓰임에 때가 있다.”라고 하였고, 감(坎)괘 험함의 일은 때를 기다려 써야 이익이 더해져 비로소 커짐을 말하였으며,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의 “시용(時用)”과 글은 같으나 뜻이 다르다. 《解》之「時」,《革》之「時」,《頤》之「時」,《大過》之「時」,此四卦直云「時」,不云「義」與「用」也。 해(解)괘의 때[時]와 혁(革)괘의 때[時]와 이(頤)괘의 때[時]와 대과(大過)괘의 때[時]가, 이 네 괘(卦)에 직접 때[時]를 일러주고 의(義)와 용(用)을 말하지 않았다. 案:《解卦》注難解之時,非治難時,故不言「用」。體盡於《解》之名,無有幽隱,故不曰「義」。 살펴보건대, 해괘(解卦)의 주(注)에 “어려움이 풀리는 때는 어려움을 다스릴 때가 아니기 때문에 ”용(用)“을 말하지 않았고, 몸체[體]가 해(解)의 이름(卦名)에 다 드러나서 그윽하게 숨겨진 [뜻이] 없기 때문에 ”의(義)“를 말하지 않았다.” 하였다. 以此注言之,直云「時」者,尋卦之名則其意具盡,中間更無餘義,故不言「義」,其卦名之事,事巳行了,不須別有所用,故《解》、《革》及《頤》事巳行了,不須言「用」。 이 주(注)를 가지고 말을 하면, 바로 “시(時)”를 일러준 것은 괘(卦)의 이름을 찾아보면 그 뜻이 모두 다하여 중간에 다시 남은 뜻이 없기 때문에 “의(義)”를 말하지 않았고, 그 괘명(卦名)의 일이 일을 이미 완료해서 결국 별도로 쓰는 바가 있지 않기 때문에 해괘(解卦)와 혁괘(革卦)와 이괘(頤卦)에는 일이 이미 완료되어서 모름지기 “용(用)”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唯《大過》稱「時」,注云:「君子有為之時。」與《解》、《革》、《頤》其理稍別。《大過》是有用之時,亦直稱「時」者,取「大過」之名,其意即盡,更無餘意,故直稱「時」,不云「義」,又略不云「用」也。 오직 대과(大過)괘에서 “시(時)“를 칭했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일을] 할 때이다.”라고 하여, 해괘(解卦)와 혁괘(革卦)와 이괘(頤卦)와 그 이치가 조금 구별된다. 대과(大過)괘는 이 용(用)이 있는 때인데도 또한 바로 “시(時)”를 칭한 것은 대과(大過)의 이름을 취하면 그 뜻이 곧 다하여 다시 남은 뜻이 없기 때문에 바로 “시(時)”를 칭하고 “의(義)”를 일러주지 않았으며, 또 생략하여 “용(用)”을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
[孔穎達 疏] 「《彖》曰豫剛應而志行」至「大矣哉」。
○正義曰:「豫,剛應而志行,順以動,豫」者,「剛」謂九四也;「應」謂初六也。既陰陽相應,故「志行」也。此就爻明豫義。順以動,坤在下,是順也。震在上,是動也。以順而動,故豫也。此以上下二象明豫義也。自此巳上,釋豫卦之理也。「豫順以動,故天地如之,而況建侯行師乎?」者,此釋「利建侯行師」也。若聖人和順而動,合天地之德,故天地亦如聖人而為之也。天地尊大而遠,神之難者猶尚如之,況於封建諸侯、行師征伐乎?難者既從,易者可知。若「建侯」能順動,則人從之。「行師」能順動,則眾從之。天地以順動,故日月不過而四時不忒。自此以下,廣明天地聖人順動之功也。若天地以順而動,則日月不有過差,依其晷度,四時不有忒變,寒暑以時。「聖人以順動,則刑罰清而民服」者,聖人能以理順而動,則不赦有罪,不濫無辜,故「刑罰清」也。刑罰當理,故人服也。「豫之時義大矣哉」者,歎美為豫之善,言於逸豫之時,其義大矣。此歎卦也。凡言不盡意者,不可煩文其說,且歎之以示情,使後生思其餘蘊,得意而忘言也。然歎卦有三體:一直歎時,如「大過之時大矣哉」之例是也;二歎時並用,如「險之時用大矣哉」之例是也;三歎時並義,「豫之時義大矣哉」之例是也。夫立卦之體,各象其時,時有屯夷,事非一揆,故爻來適時,有凶有吉。人之生世,亦復如斯,或逢治世,或遇亂時,出處存身,此道豈小?故曰「大矣哉」也。然時運雖多,大體不出四種者:一者治時,「頤養」之世是也;二者亂時,「大過」之世是也;三者離散之時,「解緩」之世是也;四者改易之時,「革變」之世是也。故舉此四卦之時為歎,餘皆可知。言「用」者,謂適時之用也。雖知居時之難,此事不小,而未知以何而用之耳。故坎、睽、蹇之時宜用君子,小人勿用。用險取濟,不可為常,斟酌得宜,是用時之大略。舉險難等三卦,餘從可知矣。又言「義」者,《姤卦》注云:「凡言義者,不盡於所見,中有意謂」者也。是其時皆有義也。略明佚樂之世,相隨相遇之日,隱遯羈旅之時,凡五卦,其義不小,則餘卦亦可知也。今所歎者十二卦,足以發明大義,恢弘妙理者也。凡於《彖》之末歎云「大哉」者,凡一十二卦。若《豫》、《旅》、《遯》、《姤》凡四卦,皆云「時義」。案:《姤卦》注云:「凡言義者,不盡於所見,中有意謂。」以此言之,則四卦卦各未盡其理,其中更有餘意,不可盡申,故總云「義」也。《隨》之一卦亦言「義」,但與四卦其文稍別。四卦皆云「時義」,《隨卦》則「隨時之義」者,非但其中別有義意,又取隨逐其時,故變云「隨時之義大矣哉!《睽》、《蹇》、《坎》此三卦皆云「時用」。案:《睽卦》注云:「睽離之時,非小人之所能用。」《蹇卦》亦云「非小人之所能用」。此二卦言「大矣哉」者,則是大人能用,故云:「大矣哉」!其中更無餘義,唯大人能用,故云「用」不云「義」也。《坎卦》「時用」,則與《睽》、《蹇》稍別,故注云「非用之常,用有時也」。謂《坎》險之事,時之須用,利益乃大,與《睽》、《蹇》「時用」文同而義異也。《解》之「時」,《革》之「時」,《頤》之「時」,《大過》之「時」,此四卦直云「時」,不云「義」與「用」也。案:《解卦》注難解之時,非治難時,故不言「用」。體盡於《解》之名,無有幽隱,故不曰「義」,以此注言之,直云「時」者,尋卦之名則其意具盡,中間更無餘義,故不言「義」,其卦名之事,事巳行了,不須別有所用,故《解》、《革》及《頤》事巳行了,不須言「用」。唯《大過》稱「時」,注云:「君子有為之時。」與《解》、《革》、《頤》其理稍別。《大過》是有用之時,亦直稱「時」者,取「大過」之名,其意即盡,更無餘意,故直稱「時」,不云「義」,又略不云「用」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단왈예강응이지행(彖曰豫剛應而志行)에서 대의재(大矣哉)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예(豫)는 강[陽]함이 응하여 뜻이 행해지고, 순함으로써 움직임이 예(豫)이다[豫 剛應而志行 順以動 豫]”라는 것은, ‘강(剛)’은 구4(九四)를 말하고, ‘응(應)’은 초육(初六)을 말한다. 이미 음(陰)과 양(陽)이 서로 응하였기 때문에 ‘뜻이 행해짐[志行]’이다. 이는 효(爻)에 나아가 예(豫)의 뜻을 밝힌 것이다.
‘순함으로써 움직임[順以動]’은, 곤(坤)이 아래에 있음이 바로 ‘순(順)’이고, 진(震)괘가 위에 있음이 바로 ‘동(動)’이다.
순함으로써 움직이기 때문에 예(豫)이다. 이는 위와 아래 두 모습[象]을 가지고 예(豫)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로부터 이상은 예괘(豫卦)의 이치를 해석하였다.
“예(豫)는 순함으로써 움직이기 때문이며 하늘과 땅도 그와 같은데, 하물며 제후를 세우고 군대를 움직임에는 어떠할까?[豫順以動 故天地如之 而況建侯行師乎]”라는 것은, 이는 ‘제후[侯]를 세우고 군대를 행사함이 이로움[利建侯行師]’을 해석하였다.
만약 성인(聖人)이 어울려 따르면서 움직이면, 하늘과 땅의 덕(德)에 부합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또한 성인과 같이 그렇게 함이다.
하늘과 땅은 높고 크면서 멀고 신묘함의 어려운 것은 오히려 그와 같은데, 하물며 제후를 세워 봉하고 군대를 행사하여 정벌을 하겠는가? 어려운 것이 이미 따랐으면 쉬운 것은 알 수가 있음이다.
만약 제후를 세우[建侯]는데 잘 따라서 움직이면 사람들이 따르고, 군대를 행사[行師]하는데 잘 따라 움직이면 무리가 따른다.
“하늘과 땅은 순응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해와 달이 지나치지 않으면서 네 계절이 어긋나지 않으며[天地以順動 故日月不過而四時不忒]”라고 함은, 이로부터 이하는 하늘과 땅과 성인이 따라 움직임의 공(功)을 널리 밝힌 것이다.
만약 하늘과 땅이 그로써 순하면서 움직이면 해와 달이 지나치거나 어긋남이 없으며 그 궤도[그림자]를 따르므로, 사시(四時)가 어긋나거나 변하지 않아 춥고 더움이 때에 맞는다.
“성인이 그로써 순응하여 움직이면 형벌이 맑아져서 백성들이 복종한다[聖人以順動 則刑罰淸而民服]”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순한 이치로써 잘 움직이면 죄가 있으면 사면하지 않지만 허물 없는 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에 ‘형벌이 맑아짐’이며, 형벌이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종하는 것이다.
“예(豫)의 때가 의미가 크도다![豫之時義大矣哉]”라는 것은, 예(豫)의 착함이 됨을 감탄하고 찬미한 것이며, 편안하고 즐거운 때에 그 뜻이 큼을 말하였는데, 이는 괘(卦)를 감탄(感歎)한 것이다.
무릇 말이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그 설명을 번거롭게 글로 쓸 수가 업으니, 우선 감탄을 하여 뜻[情]을 보임으로써 후생(後生)들로 하여금 그 나머지를 쌓아 생각하여 뜻을 얻고서 말을 잊게 한 것이다.
그러나 괘(卦)를 탄미한 것에 세 가지 몸체[體]가 있는데, 첫 번째는 바로 때를 탄미하였고, ‘대과(大過)괘의 때가 크도다.’와 같은 예(例)가 이것이며, 두 번째는 때와 함께 쓰임[用]을 탄미하였고, [감(坎)괘에] ‘험함의 때와 쓰임이 크도다.’와 같은 예가 이것이며, 세 번째는 때와 함께 뜻[義]를 탄미하였는데, ‘예(豫)의 때와 뜻[義]가 크도다.’의 예(例)가 이것이다.
무릇 괘(卦)를 세운 몸체[體]는, 각각 그 때를 모습[象]하며, 때에는 어려움과 평탄함이 있고, 일은 하나만 헤아림이 아니기 때문에 효(爻)의 옴이 때에 맞이하여 흉함이 있고 길함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살아가는 세상 또한 이와 같이 돌아가는데, 혹 다스려진 세상을 만나고 혹 혼란한 세상을 만나며 나아가는 곳이 자신에게 있는데, 이 도(道)가 어찌 작겠는가? 그러므로 “크도다[大矣哉]”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시절의 운(運)이 비록 많더라도 대체(大體)로 네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인데, 첫 번째는 다스려진 때이니 이(頤)괘의 길러짐의 세상이 이것이고, 두 번째는 어지러운 때이니 대과(大過)괘의 세상이 이것이며, 세 번째는 이별하여 흩어지는 때이니 해(解)괘의 느슨한 세상이 이것이고, 네 번째는 고쳐서 바뀌는 때이니 혁(革)괘의 변함의 세상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이 네가지 괘(卦)의 때를 들어 탄미하였으며, 나머지를 모두 알 수 있음이다.
쓰임[用]을 말한 것은, 때에 알맞은 쓰임을 말한 것이며, 비록 때의 어려움에 거주하며 이 일이 작지 않음을 알면서고 그로써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감괘(坎卦)와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의 때는 마땅히 군자(君子)를 쓰고 소인(小人)은 쓰지 말아야 한다.
험함을 사용하여 구제를 취함은 항상 할 수 없고 짐작(斟酌)하여 마땅함을 얻얶는데, 이는 때를 씀의 대략이다. 험하고 어려움 등의 세가지 괘(卦)를 들었었는데 나머지는 따라서 알 수 있다.
또 의(義)를 말한 것은, 구괘(姤卦)의 주(注)에 이르기를 “무릇 의(義)를 말한 것은, 보이는 바로는 다하지 못하여 뜻을 말함은 가운데에 있다.”라고 함이 이것이며, 이는 그 때가 모두 뜻[義]이 있음이다.
편안하고 즐거운[豫卦] 세상과 서로 따르고[隨卦] 서로 만나는[姤卦] 날과 은둔하고[遯卦] 떠도는 나그네[旅卦]의 때에 대략 밝혔는데, 모두 다섯 괘(卦)에 그 뜻이 작지 않으며, 즉 나머지 괘(卦)를 또한 알 수 있다.
지금 탄미한 바의 열두 괘(卦)는, 큰 뜻을 밝혀 드러냄으로 넉넉하며 오묘한 이치를 크게 넓힌 것들이다. 무릇 〈단전(彖傳)〉의 끝에 탄미하며 이르기를 “크도다[大哉]”라고 한 것은 모두 열두 괘(卦)이다.
예컨대 예괘(豫)卦와 여괘(旅卦)와 둔괘(遯卦)와 구괘(姤卦)의 무릇 네가지 괘(卦)에는 모두 “때의 뜻[時義]”라고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구괘(姤卦)의 주(注)에 이르기를 “무릇 뜻[義]를 말한 것은, 보이는 바로는 다하지 못하고 뜻을 말함은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가지고 말을 하면 곧 네 괘(卦)는 괘가 각각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하여 그 가운데에 다시 남은 뜻이 있어서 다 펼 수가 없기 때문에 총괄하여 이르기를 “의(義)”라고 한 것이다.
수(隨)의 한 괘(卦)도 또한 뜻[義]를 말하였으나 다만 네 괘(卦)와 그 글이 조금 다르다. 네 卦에는 모두 이르기를 “시의(時義)”라고 하였으나 수괘(隨卦)에는 곧 “수(隨)는 때의 뜻이다[隨時之義]”라고 한 것은, 다만 그 가운데에 따로 뜻하는 마음[義意]이 있음이 아니며, 또 수(隨)가 때를 따름을 취하였기 때문에 변경하여 이르기를 “따르는 때의 뜻이 크도다[隨時之義 大矣哉]”라고 한 것이다.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와 감괘(坎卦)의 이 세 괘(卦)는 모두 이르기를 “시용(時用)”이라 하였는데, 살펴보면 규괘(睽卦)의 주(注)에 이르기를 “사팔눈이 떠나는 때는 소인(小人)을 잘 쓸 수 있는 바가 아니다[睽離之時,非小人之所能用]”라고 하였고, 건괘(蹇卦)에 또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잘 쓸 수 있는 바가 아니다[非小人之所能用]” 하였다.
이 두 괘(卦)에 “크도다[大矣哉]”라고 말한 것은, 바로 대인(大人)을 잘 쓰기 때문에 이르기를 “크도다[大矣哉]”라고 한 것이며, 그 가운데 다시 남은 뜻은 없고 오직 대인(大人)만 잘 쓰기 때문에 이르기를 “용(用)이라 하고 의(義)를 일러주지 않았다.
감괘(坎卦)의 “시용(時用)”은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주(注)에 이르기를 “쓰임[用]의 떳떳함이 아니니 쓰임에 때가 있다.”라고 하였고, 감(坎)괘 험함의 일은 때를 기다려 써야 이익이 더해져 비로소 커짐을 말하였으며, 규괘(睽卦)와 건괘(蹇卦)의 “시용(時用)”과 글은 같으나 뜻이 다르다.
해(解)괘의 때[時]와 혁(革)괘의 때[時]와 이(頤)괘의 때[時]와 대과(大過)괘의 때[時]가, 이 네 괘(卦)에 직접 때[時]를 일러주고 의(義)와 용(用)을 말하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해괘(解卦)의 주(注)에 “어려움이 풀리는 때는 어려움을 다스릴 때가 아니기 때문에 ”용(用)“을 말하지 않았고, 몸체[體]가 해(解)의 이름(卦名)에 다 드러나서 그윽하게 숨겨진 [뜻이] 없기 때문에 ”의(義)“를 말하지 않았다.” 하였다.
이 주(注)를 가지고 말을 하면, 바로 “시(時)”를 일러준 것은 괘(卦)의 이름을 찾아보면 그 뜻이 모두 다하여 중간에 다시 남은 뜻이 없기 때문에 “의(義)”를 말하지 않았고, 그 괘명(卦名)의 일이 일을 이미 완료해서 결국 별도로 쓰는 바가 있지 않기 때문에 해괘(解卦)와 혁괘(革卦)와 이괘(頤卦)에는 일이 이미 완료되어서 모름지기 “용(用)”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오직 대과(大過)괘에서 “시(時)“를 칭했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일을] 할 때이다.”라고 하여, 해괘(解卦)와 혁괘(革卦)와 이괘(頤卦)와 그 이치가 조금 구별된다. 대과(大過)괘는 이 용(用)이 있는 때인데도 또한 바로 “시(時)”를 칭한 것은 대과(大過)의 이름을 취하면 그 뜻이 곧 다하여 다시 남은 뜻이 없기 때문에 바로 “시(時)”를 칭하고 “의(義)”를 일러주지 않았으며, 또 생략하여 “용(用)”을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象》曰:雷出地奮,豫,先王以作樂崇德,殷薦之上帝,以配祖考。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우레가 땅에서 나와 떨침이 예(豫)이며, 선왕이 그로써 음악을 지어 덕(德)을 높이고 크게[殷] 상제께 제사를 올리고 그로써 조상과 아버지를 배향(配享)한다." |
[孔穎達 疏] 正義曰:案諸卦之象,或云「雲上於天」,或云「風行天上」,以類言之,今此應云「雷出地上」,乃云「雷出地奮豫」者,雷是陽氣之聲,奮是震動之狀。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살펴보건대, 여러 괘(卦)의 모습[象]에, 혹은 이르기를 “구름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고, 혹은 이르기를 “바람이 하늘 위로 간다.”고 하였는데, 이런 부류[類]로써 말을 하면 지금 여기에는 응당 이르기를 “우레가 땅 위로 나온다.”고 해야 하는데, 이에 이르기를 “우레가 땅에서 나와 분발함이 예(豫)이다[雷出地奮豫]”라고 한 것은, ‘우뢰[雷]’는 양기(陽氣)의 소리이고 ‘분(奮, 떨칠 분)’은 바로 진동하는 상태이다. 雷既出地,震動萬物,被陽氣而生,各皆逸豫,故曰「雷出地奮,豫」也。 우레가 이미 땅에서 나와 만물(萬物)을 진동시키고 양기(陽氣)를 입고서 태어나 각각 모두 편안하고 안락(安樂)하기 때문에 “우레가 땅에서 나와 분발함이 예(豫)이다[雷出地奮,豫]”라고 말한 것이다. 「先王以作樂崇德」者,雷是鼓動,故先王法此鼓動而作樂,崇盛德業,樂以發揚盛德故也。 “선왕이 그로써 음악을 지어 덕(德)을 높이고[先王以作樂崇德]”라는 것은, 우레는 바로 북이 울림이기 때문에 선왕(先王)이 이 북이 울림을 본받아 음악을 만들어서 덕(德)과 업(業)을 성대하게 높였으며, 음악으로써 덕(德)을 성대하게 펼쳐 일으키는 연고(緣故)이다. 「殷薦之上帝」者,用此殷盛之樂,薦祭上帝也,象雷出地而向天也。 “크게[殷] 상제께 제사를 올리고[殷薦之上帝]”라는 것은, 이 성대한 음악을 사용하여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리니, 우레가 땅에서 나와 하늘을 향하는 모습[象]이다. 「以配祖考」者,謂以祖考配上帝。用祖用考,若周夏正郊天配靈威仰,以祖後稷配也;配祀明堂五方之帝,以考文王也,故云:「以配祖考」也。 “그로써 조상과 아버지를 배향(配享)한다[以配祖考]”라는 것은, 선조와 아버지를 상제(上帝)에게 배향함을 말한다. 선조를 사용하고 아버지를 사용함은, 예컨대 주(周)나라의 하정(夏正)에 하늘에 교(郊)제사를 지낼 적에는 영(靈)의 위엄을 우러러 배향하고 그로써 선조인 후직(后稷)을 여기에 배향하며, 명당(明堂)의 5방(五方)의 상제[帝]에 배사(配祀)고 그로써 아버지인 문왕(文王)을 배향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선조와 아버지로 배향하였다[以配祖考]”라고 말한 것이다.」 |
[孔穎達 疏] 正義曰:案諸卦之象,或云「雲上於天」,或云「風行天上」,以類言之,今此應云「雷出地上」,乃云「雷出地奮豫」者,雷是陽氣之聲,奮是震動之狀。雷既出地,震動萬物,被陽氣而生,各皆逸豫,故曰「雷出地奮,豫」也。「先王以作樂崇德」者,雷是鼓動,故先王法此鼓動而作樂,崇盛德業,樂以發揚盛德故也。「殷薦之上帝」者,用此殷盛之樂,薦祭上帝也,象雷出地而向天也。「以配祖考」者,謂以祖考配上帝。用祖用考,若周夏正郊天配靈威仰,以祖後稷配也;配祀明堂五方之帝,以考文王也,故云:「以配祖考」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살펴보건대, 여러 괘(卦)의 모습[象]에, 혹은 이르기를 “구름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고, 혹은 이르기를 “바람이 하늘 위로 간다.”고 하였는데, 이런 부류[類]로써 말을 하면 지금 여기에는 응당 이르기를 “우레가 땅 위로 나온다.”고 해야 하는데, 이에 이르기를 “우레가 땅에서 나와 분발함이 예(豫)이다[雷出地奮豫]”라고 한 것은, ‘우뢰[雷]’는 양기(陽氣)의 소리이고 ‘분(奮, 떨칠 분)’은 바로 진동하는 상태이다.
우레가 이미 땅에서 나와 만물(萬物)을 진동시키고 양기(陽氣)를 입고서 태어나 각각 모두 편안하고 안락(安樂)하기 때문에 “우레가 땅에서 나와 분발함이 예(豫)이다[雷出地奮,豫]”라고 말한 것이다.
“선왕이 그로써 음악을 지어 덕(德)을 높이고[先王以作樂崇德]”라는 것은, 우레는 바로 북이 울림이기 때문에 선왕(先王)이 이 북이 울림을 본받아 음악을 만들어서 덕(德)과 업(業)을 성대하게 높였으며, 음악으로써 덕(德)을 성대하게 펼쳐 일으키는 연고(緣故)이다.
“크게[殷] 상제께 제사를 올리고[殷薦之上帝]”라는 것은, 이 성대한 음악을 사용하여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리니, 우레가 땅에서 나와 하늘을 향하는 모습[象]이다.
“그로써 조상과 아버지를 배향(配享)한다[以配祖考]”라는 것은, 선조와 아버지를 상제(上帝)에게 배향함을 말한다.
선조를 사용하고 아버지를 사용함은, 예컨대 주(周)나라의 하정(夏正)에 하늘에 교(郊)제사를 지낼 적에는 영(靈)의 위엄을 우러러 배향하고 그로써 선조인 후직(后稷)을 여기에 배향하며, 명당(明堂)의 5방(五方)의 상제[帝]에 배사(配祀)고 그로써 아버지인 문왕(文王)을 배향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선조와 아버지로 배향하였다[以配祖考]”라고 말한 것이다.」
初六,鳴豫,凶。 초육(初六)은 안락(安樂)함이 들리[鳴]면 흉하다. 【王弼 注】 處豫之初,而特得志於上。樂過則淫,志窮則凶,豫何可鳴? 【왕필 주】 예(豫)의 처음에 처하면서 특히 위쪽의 뜻을 얻는다. 즐거움이 지나치면 음란해지고 뜻이 궁해지면 흉해 지는데 안락(安樂)하다면 어찌 소문 날 수 있겠는가? |
[孔穎達 疏] 正義曰:「鳴豫」者,處豫之初,而獨得應於四,逸豫之甚,是聲鳴於豫。但逸樂之極,過則淫荒。獨得於樂,所以「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안락(安樂)함이 들리[鳴]면[鳴豫]”라는 것은, 예(豫)의 처음에 처하면서 홀로 구4(九四)에게 응(應)을 얻어서 편안함과 안락(安樂)함이 심하며, 이는 안락(安樂)함을 소리로 울리는 것이다. 다만 편안함과 안락(安樂)함이 지극하여, 지나치면 음탕하고 황폐하며, 홀로 즐거움을 얻음이 흉한 까닭이다.」 |
《象》曰:初六鳴豫,志窮凶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초육의 안락함이 들림은, 뜻이 다하여 흉함이다." [孔穎達 疏] 正義曰:釋「鳴豫」之義。而初時鳴豫,後則樂志窮盡,故為「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안락(安樂)함이 들림[鳴]’의 뜻을 해석하였으며, 처음에는 안락(安樂)함을 울리지만 뒤에는 곧 즐거운 뜻이 다 없어지기 때문에 흉함이 되는 것이다.」 |
六二,介于石,不終日貞吉。 육이(六二)는, 돌에 끼었으니, 하루 종일 곧지 않아야 길하다. 【王弼 注】 處豫之時,得位履中,安夫貞正,不求苟豫者也。順不苟從,豫不違中,是以上交不諂,下交不瀆。明禍福之所生,故不苟說;辯必然之理,故不改其操。介如石焉,不終日明矣。 【왕필 주】 예(豫)의 때에 처하여 지위를 얻고 가운데[中]를 밟고서 편안한 장부가 곧고 바르며, 구차하게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 자이다. 순한데도 구차하게 따르지 않고 편안한데도 가운데를 어기지 않으니 바로 그로써 위로 사귀면서 아첨하지 않고 아래로 사귀면서 더럽히지 않는다. 화(禍)와 복(福)이 생겨나는 바에 밝기 때문에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고, 반드시 그러하는 이치를 분별하기 때문에 그 지조를 고치지 않는다. 돌에 낀 것과 같으니, 날이 저물도록 밝지 않다. |
[孔穎達 疏]正義曰:「介於石」者,得位履中,安夫貞正,不苟求逸豫,上交不諂,下交不瀆,知幾事之初始,明禍福之所生,不苟求逸豫,守志耿介似於石。然見幾之速,不待終竟一日,去惡修善,相守正得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돌에 끼었으니[介于石]”라는 것은, 지위를 얻고 가운데[中]를 밟고 있어서 편안한 장부가 곧고 바르며, 구차하게 안락한 기쁨을 구하지 않고 위로 사귀면서 아첨하지 않고 아래로 사귀면서 더럽히지 않는다. 일의 처음 시작하는 기미를 알고 화(禍)와 복(福)이 생겨나는 바에 밝기 때문에 구차하게 안일하게 즐기지 않고 뜻을 지킴이 빛에 끼인 돌을 닮았다. 그러나 기미(幾微)를 신속하게 보고 하루를 마침을 기다리지 않으며, 악(惡)을 제거하고 선(善)을 닦아 서로 바름을 지켜 길함을 얻는 것이다.」 |
《象》曰:不終日貞吉,以中正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종일 토록 곧지 않아야 길함은, 그로써 가운데 바로[中正]함 이다." [孔穎達 疏]正義曰:釋「貞吉」之義,所以見其惡事,即能離去,不待終日守正吉者,以比六二居中守正,順不苟從,豫不違中,故不須待其一日終守貞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곧아야 길함[貞吉]’의 뜻을 해석한 것이며, 악(惡)한 일을 보면 바로 잘 떠나가서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름을 지켜 길한 것의 까닭은, 육2(六二)가 그로써 맞닿아 가운데[中]에 거주하고 바름을 지키며 순한데도 구차하게 따르지 않고 편안한데도 가운데를 어기지 않기 때문에 모름지기 하루를 마치도록 기다리지 않고 곧음을 지켜 길한 것이다.」 |
六三,盱豫, 悔,遲有悔。 육삼(六三)은, 안락(安樂)함을 쳐다보면 후회하고, 늦어도 후회가 있다. 【王弼 注】居下體之極,處兩卦之際,履非其位,承動豫之主。若其睢盱而豫,悔亦生焉。遲而不從,豫之所疾。位非所據,而以從豫,進退離悔,宜其然矣。 【왕필 주】 아래 몸체[體]의 꼭대기에 거주하고 양쪽 괘의 변두리에 처하며 그 지위가 아닌데를 밟고서 움직이는 예(豫)의 주(主)를 받든다. 만약 부릅뜨고 쳐다보면서 안락(安樂)하면 또한 그곳에 후회가 생겨난다. 늦게 하면서 따르지 않으면 안락(安樂)함의 병인 바이다. 지위가 근거하는 곳이 아니면서 그로써 안락(安樂)을 따르니, 나아가고 물러남과 이별하고 후회함이 마땅히 그러하다. |
[孔穎達 疏]正義曰「盱豫悔」者,六三履非其位,上承「動豫」之主。「盱」謂睢盱。睢盱者,喜說之貌。若睢盱之求豫,則悔吝也。「遲有悔」者,居豫之時,若遲停不求於豫,亦有悔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안락(安樂)함을 쳐다보면 후회하고[盱豫 悔]”라는 것은, 육3(六三)이 그 지위가 아닌데를 밟고서 위로 움직이는 예(豫)의 주체를 받들고 있음이다. ‘우(盱, 쳐다볼 우)’는 부릅뜨고 쳐다봄을 말하며, 부릅뜨고 쳐다보는 것은 기쁨을 설득하는 모양이다. 만약 부릅뜨고 쳐다보며 기뻐함을 구하면 부끄러워 후회할 것이다. “늦어도 후회가 있다[遲有悔]”라는 것은, 안락함[豫]의 때에 거주하여 만약 멈춰서 더디게 기쁨을 구하지 않으면 또한 후회가 있는 것이다.」 |
《象》曰:盱豫有悔,位不當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안락(安樂)함을 쳐다보면 후회가 있음은, 지위가 마당하지 않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解其「盱豫有悔」之義,以六三居不當位,進退不得其所,故「盱豫有悔」。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안락(安樂)함을 쳐다보면 후회가 있음[盱豫有悔]’의 뜻을 해석한 것이며, 육3(六三)이 거주한 지위가 마땅하지 않음으로써 나아가고 물러남에 그 자리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안락(安樂)함을 쳐다보면 후회가 있음[盱豫有悔]’이다. 但《象》載經文,多從省略。 다만 〈상전(象傳)〉은 경문(經文)을 기재할 적에 대부분 생략함을 따른다. 經有「盱豫有悔」、「遲有悔」,兩文具載,《象》唯云「盱豫有悔」,不言「遲」者,略其文也。故直云「盱豫」。 경문(經文)에는 “우예유회(盱豫有悔)”와 “지유회(遲有悔)”가 두 글이 모두 실려져 있는데, 〈상전(象傳)〉에는 오직 “우예유회(盱豫有悔)”만을 일러주고 “지(遲)”는 말하지 않은 것은, 그 글을 생략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우예(盱豫)”를 말하였다. 舉其欲進,略云「有悔」,舉其遲也。 그 나아가고자 함을 들어서 생략하여 이르기를 “유회(有悔)”라고 하였으니 그 더딤을 든 것이다.」 |
[孔穎達 疏] 正義曰:解其「盱豫有悔」之義,以六三居不當位,進退不得其所,故「盱豫有悔」。但《象》載經文,多從省略。經有「盱豫有悔」、「遲有悔」,兩文具載,《象》唯云「盱豫有悔」,不言「遲」者,略其文也。故直云「盱豫」。舉其欲進,略云「有悔」,舉其遲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안락(安樂)함을 쳐다보면 후회가 있음[盱豫有悔]’의 뜻을 해석한 것이며, 육3(六三)이 거주한 지위가 마땅하지 않음으로써 나아가고 물러남에 그 자리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안락(安樂)함을 쳐다보면 후회가 있음[盱豫有悔]’이다.
다만 〈상전(象傳)〉은 경문(經文)을 기재할 적에 대부분 생략함을 따른다.
경문(經文)에는 “우예유회(盱豫有悔)”와 “지유회(遲有悔)”가 두 글이 모두 실려져 있는데, 〈상전(象傳)〉에는 오직 “우예유회(盱豫有悔)”만을 일러주고 “지(遲)”는 말하지 않은 것은, 그 글을 생략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우예(盱豫)”를 말하였다.
그 나아가고자 함을 들어서 생략하여 이르기를 “유회(有悔)”라고 하였으니 그 더딤을 든 것이다.」
九四,由豫,大有得。勿疑,朋盍簪。 구사(九四)는, 안락(安樂)함을 말미암아 크게 얻음이 있지만, 의심하지 말아야 동문이 빨리 모여든다. 【王弼 注】 處豫之時,居動之始,獨體陽爻,眾陰所從。莫不由之以得其豫,故曰「由豫,大有得」也。夫不信於物,物亦疑焉,故勿疑則朋合疾也。盍,合也。簪,疾也。 【왕필 주】 예(豫)의 때에 처하고 움직임의 시작에 거주하며 몸[體]이 홀로 양효(陽爻)이니 여러 음(陰)이 따르는 바이다. 그 안락(安樂)함을 얻기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안락(安樂)함을 말미암아 크게 얻음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것이 사물을 믿지 않으면 사물 또한 그것을 의심한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아야 곧 동문이 빨리 합한다. 합(盍)은 합함이다. 잠(簪)은 빠름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由豫大有得」者,處豫之時,居動之始,獨體陽爻,為眾陰之所從,莫不由之以得其豫,故云「由豫」也。「大有得」者,眾陰皆歸,是大有所得。「勿疑朋盍簪」者,盍,合也。簪,疾也。若能不疑於物,以信待之,則眾陰群朋合聚而疾來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안락(安樂)함을 말미암아 크게 얻음이 있지만[由豫 大有得]”라는 것은, 안락(安樂)함의 때에 처하고 움직임의 시작에 거주하여, 몸[體]이 홀로 양효(陽爻)이니 여러 음(陰)의 따르는 바가 되어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으로써 그 안락(安樂)함을 얻기 때문에 이르기를 “안락(安樂)함을 말미암는다[由豫]”라고 한 것이다. “크게 얻음이 있다[大有得]”라는 것은, 여러 음(陰)이 모두 귀의하니, 바로 크게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아야 곧 동문이 모두 합한다[勿疑 朋盍簪]”라는 것의, ‘합(盍)’는 합함이고 ‘잠(簪)’은 빠름이다. 만약 사물[남]을 잘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써 대하면 여러 음(陰)과 여러 벗들이 합하여 모여서 빨리 올 것이다.」 |
《象》曰:由豫大有得,志大行也。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안락(安樂)함을 말미암아 크게 얻음이 있음은 뜻이 크게 행해짐이다." [孔穎達 疏]正義曰:釋「由豫大有」之意。眾陰既由之而豫,大有所得,是志意大同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안락(安樂)함을 말미암아 크게 있음[由豫大有]’의 뜻을 해석하였다. 여러 음(陰)이 이미 말미암아서 안락(安樂)함을 크게 얻은 바가 있으니, 이는 뜻함이 크게 같은 뜻이다.」 |
六五,貞疾,恒不死。 육오(六五)는 곧음이 병이지만 항상 죽지는 않는다. 【王弼 注】 四以剛動,為豫之主。專權執制,非己所乘,故不敢與四爭權。而又居中處尊,未可得亡,是以必常至于貞疾,恒不死而已。 【왕필 주】 구사(九四)가 강함을 가지고 움직여 예(豫)괘의 주체가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고 제도를 잡지만 자기[六五]가 탈 곳이 아니기 때문에 감히 구사(九四)와 권력을 다투지 못한다. 그리고 또 가운데 거주하고 높은데 처하여 망하게 할 수는 없으며, 이로써 반드시 항상 곧은 병에 이르지만 항상 죽지는 않을 뿐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四以剛動為豫之主,專權執制,非已所乘,故不敢與四專權。而又居中處尊,未可得亡滅之,是以必常至於貞疾,恒得不死而巳。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4(九四)가 굳센 움직임으로써 예(豫)의 주체가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억제하여 다스리니 자기(六五)를 받드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구4(九四)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한다. 그런데 또 가운데[中]에 거주하고 높은데에 처하여 멸하여 없앨 수가 없으며, 이로써 반드시 항상 곧음의 병에 이르르니 항상 죽지 않음을 얻을 뿐이다.」 |
《象》曰:六五貞疾,乘剛也;恒不死,中未亡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육5(六五)의 곧음의 병은 굳셈을 올라탔음이며, 항상 죽지 않음은 가운데[中]를 잃지 않음이다." [孔穎達 疏]正義曰:「六五貞疾乘剛」者,解「貞疾」之義。以乘九四之剛,故正得其疾,恒不死也。「中未亡」者,以其居中處尊,未可亡滅之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육5(六五)의 곧음의 병은 굳셈을 올라탔음[六五貞疾 乘剛]”라는 것은, ‘곧음의 병[貞疾]’의 뜻을 해석한 것이며, 그로써 구4(九四)의 굳셈을 타고 있기 때문에 바름을 그 병으로 얻어서 항상 죽지 않는 것이다. “가운데[中]를 잃지 않음이다[中未亡]”라는 것은, 그로써 가운데[中]에 거주하고 높은데에 처하여 멸하여 없게 할 수 없음이다.」 |
上六,冥豫成, 有渝,无咎。 상육(上六)은 어두운 안락(安樂)함이 이루어져서 변함이 있으나 허물은 없다. 【王弼 注】 處動豫之極,極豫盡樂,故至于冥豫成也。過豫不已,何可長乎?故必渝變,然後无咎。 【왕필 주】 움직여 예(豫)의 꼭대기에 처하여 안락함이 끝나고 즐거움이 다했기 때문에 안락함이 어두움에 이르름을 이루었다. 지나친 안락함을 그치지 않는데 어찌 길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넘쳐 변하며 그러한 뒤에 허물이 없다. |
[孔穎達 疏]正義曰:「處動豫之極,極豫盡樂」,乃至於冥昧之豫而成就也。如俾晝作夜,不能休巳,滅亡在近。「有渝無咎」者,渝,變也。若能自思改變,不為「冥豫」,乃得「無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움직여 예(豫)의 꼭대기에 처하여 안락함이 끝나고 즐거움이 다했음[處動豫之極,極豫盡樂]은, 마침내 어두움의 안락(安樂)함에 이르러서 나아가 이루었음이다. 만약 낮을 더하여 밤에 까지 [어두운 안락(安樂)함을] 즐기며 잘 그치지 않으면 멸망이 가까이 있는 것이다. “넘침이 있으나 허물은 없다[有渝 无咎]”라는 것의 ‘유(渝, 변할 유)’는 변함이다. 만약 스스로 잘 고치고 변하려고 생각하여 ‘어두운 안락함[冥豫]‘을 하지 않으면 마침내 ’허물이 없음[無咎]’을 얻는 것이다.」 |
《象》曰:冥豫在上,何可長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어두운 안락(安樂)함이 위에 있는데, 어찌 길게 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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