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정의(周易正義)》10卷은, 왕필(王弼)의 주(注)와 한강백(韓康伯)의 주(注)를 채용하여 공영달(孔穎達)이 주석(注釋)을 하였다.
○ 공영달(孔穎達.574~648)
당(唐)나라 유학자이며 자는 중달(仲達)이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국자좨주(國子祭酒) 공영달(孔穎達)에게 칙명으로 유가(儒家)의 5경(五經)에 표준 주석(注釋)을 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찬정(撰定)하였다.
1. 건괘(乾卦)
乾, 元亨, 利貞.
건(乾)은, 커지고 형통하며, 이롭고 바르다.
[孔穎達 疏]正義曰:「乾」者,此卦之名。謂之卦者,《易緯》云:「卦者掛也,言縣掛物象,以示於人,故謂之卦。」但二畫之體,雖象陰陽之氣,未成萬物之象,未得成卦,必三畫以象三才,寫天、地、雷、風、水、火、山、澤之象,乃謂之卦也。故《繫辭》云「八卦成列,象在其中矣」是也。但初有三畫,雖有萬物之象,於萬物變通之理,猶有未盡,故更重之而有六畫,備萬物之形象,窮天下之能事,故六畫成卦也。此乾卦本以象天,天乃積諸陽氣而成天,故此卦六爻皆陽畫成卦也。此既象天,何不謂之天,而謂之「乾」者?天者定體之名,「乾」者體用之稱。故《說卦》云:「乾,健也」。言天之體,以健為用。聖人作《易》本以教人,欲使人法天之用,不法天之體,故名「乾」,不名天也。天以健為用者,運行不息,應化無窮,此天之自然之理,故聖人當法此自然之象而施人事,亦當應物成務,云為不已,「終日乾乾」,無時懈倦,所以因天象以教人事。於物象言之,則純陽也,天也。於人事言之,則君也。父也。以其居尊,故在諸卦之首,為《易》理之初。但聖人名卦,體例不同,或則以物象而為卦名者,若否、泰、剝、頤、鼎之屬是也,或以象之所用而為卦名者,即乾、坤之屬是也。如此之類多矣。雖取物象,乃以人事而為卦名者,即家人、歸妹、謙、履之屬是也。所以如此不同者,但物有萬象,人有萬事,若執一事,不可包萬物之象;若限局一象,不可總萬有之事,故名有隱顯,辭有踳駁,不可一例求之,不可一類取之。故《繫辭》云:「上下無常,剛柔相易,不可為典要。」韓康伯注云「不可立定準」是也。「元、亨、利、貞」者,是乾之四德也。子夏傳云:「元,始也。亨,通也。利,和也。貞,正也。」言此卦之德,有純陽之性,自然能以陽氣始生萬物而得元始亨通,能使物性和諧,各有其利,又能使物堅固貞正得終。此卦自然令物有此四種使得其所,故謂之四德:言聖人亦當法此卦而行善道,以長萬物,物得生存而為「元」也。又當以嘉美之事,會合萬物,令使開通而為「亨」也。又當以義協和萬物,使物各得其理而為「利」也。又當以貞固幹事,使物各得其正而為「貞」也。是以聖人法乾而行此四德,故曰「元、亨、利、貞」。其委曲條例,備在《文言》。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이라는 것은, 이 괘(卦)의 이름이다. 일컫기를 괘(卦)라고 한 것은, 《역위(易緯)》에 이르기를 '괘(卦)라는 것은 걸어놓음[掛]이며, 사물의 모습[象]을 메달아 걸어놓아 그로써 사람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일컫기를 괘(卦)라고 했다.'고 하였다.
다만 두번 그은[획(畫)] 몸체는, 비록 음양(陰‧陽)의 기운을 모습[象]하였으나 아직 만물(萬物)의 모습을 이루지 못했고 아직 괘(卦)를 이룸을 얻지 못하였으며, 반드시 세 번을 그어야 그로써 삼재(三才; 천.지.인)를 모습하고, 하늘(天)과 땅(地), 우레(雷)와 바람(風), 물(水)과 불(火), 산(山)과 못(澤)의 모습[象]을 본떠서 이에 일컫기를 괘(卦)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여덟 괘(卦)가 줄지어 이루니 모습[象]이 그 안에 들어 있다.'라고 함이 이것이다.
다만 처음 세 획(畫)이 있어서 비록 만물(萬物)의 모습[象]이 있으나 만물(萬物)이 변하여 통하는 이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미진(未盡)함이 있기 때문에 거듭해서 여섯 획이 있도록 고치면 만물(萬物)의 모양[形]과 모습[象]을 구비하면 천하의 일을 잘함을 다하기 때문에 여섯 획[六畫] 괘(卦)를 이루었다.
이 건괘(乾卦)는 본래 하늘로써 모습[象]하였으니, 하늘은 바로 여러 양기(陽氣)가 쌓여서 하늘을 이루기 때문에 이 괘(卦)의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 획으로 괘( 卦)를 이루었다.
이[卦]는 이미 하늘을 모습[象]하였는데, 어찌 일컫기를 하늘[天]이라고 하지 않고서 일컫기를 건(乾)이라 한 것인가?
하늘[天]이라는 것은, 정한 몸체[體]의 이름이고, 건(乾)이라는 것은, 몸체[體]가 쓰임[用]을 가리킴이다.
그러므로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건(乾)은 굳셈[健]이다.”고 하였으니, 하늘의 몸체[體]가 굳셈으로써 쓰임[用]을 삼음이다.
성인이 《주역(周易)》을 지음은, 본래 사람들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쓰임[用]을 본받게 하고자 함이지, 하늘의 몸체[體]를 본받게 함은 아니기 때문에 이름이 건(乾)이고, 천(天)이라 이름하지 않았다.
하늘[天]이 굳셈[健]으로써 쓰임[用]을 삼는 것은, 운행을 쉬지 않고 달라짐에 응하여 다함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이치이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마땅히 이것[天]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모습[象]을 본받아서 사람의 일에 시행하고, 또한 마땅히 사물에 응하여 일을 이루며, 일러주며 행함을 그치지 않고,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며, 게을러 나태한 때가 없으니, 하늘의 모습[象]을 말미암아 그로써 사람의 일을 가르치신 까닭이다.
사물의 모습[象]으로 말하면 순수한 양기[純陽]이고 하늘이며, 사람의 일로 말하면 군주이고 아버지이며, 그로써 그 사는 데가 높기 때문에 여러 괘(卦)의 머리에 있고 《역(易)》의 이치가 되는 시초이다.
다만 성인(聖人)이 괘(卦)를 이름할적에 몸체[體]의 차례(次例)가 같지 아니하여, 혹은 사물의 모습[象]으로써 괘(卦)의 이름한 것이니, 비(否)와 태(泰), 박(剝)과 이(頤)와 정(鼎)의 등속이 이와 같다.
혹 모습[象]의 쓰이는 곳을 가지고서 괘(卦)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니, 바로 건(乾)과 곤(坤)의 속(屬)함이 이것인데, 이와 같은 무리[類]는 많다.
비록 사물의 모습[象]을 취하였으나 이에 사람의 일을 가지고서 괘(卦)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즉 가인(家人), 귀매(歸妹), 겸(謙), 리(履)의 등속이 이것이다.
이와 같이 까닭이 같지 않은 것은, 다만 사물은 만 가지 모습[象]이 있고 사람은 만 가지 일이 있으니, 만약 한 가지 일을 고집하면 만물의 모습[象]을 포함할 수가 없고, 만약 하나의 모습[象]에 국한하면 만 가지 있는 일을 총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름[명칭]은 숨음과 드러남이 있고, 말은 순수함과 잡됨이 있으니, 하나의 규칙[例]으로 구할 수는 없고 하나의 부류[類]로 취급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위와 아래가 일정함이 없고 굳셈[剛]과 부드러움[柔]이 서로 바뀌니 떳떳한 요체(要諦)가 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한강백[韓康伯(韓伯)]의 주(注)에 이르기를 “기준을 정해서 세울 수 없다.”고 하였음이 이것이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것은, 이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이다. 《자하전(子夏傳)》에 이르기를 “원(元)은 시작이고, 형(亨)은 통함이며, 이(利)는 어울림이고, 정(貞)은 바름이다.”고 했다.
이 괘(卦)의 덕(德)이 순수한 양(陽)의 본성이 있어서 스스로 잘 그러하여 양기(陽氣)를 가지고 처음 만물(萬物)을 낳으면서, 원시(元始)와 형통(亨通)을 얻어서 사물의 본성을 모두 잘 어울리게 하여 각각 그 이로움이 있게 하고, 또 사물로 하여금 견고(堅固)하고 곧고 바름을 얻어 잘 끝마치게 함을 말함이다.
이 괘(卦)는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그러하여 이 네 가지종류를 소유하는데 그 자리를 얻게 하였기 때문에 일컫기를 네 가지 덕(德)이라 하였다. 성인(聖人) 또한 마땅히 이 괘(卦)를 본받아서, 선(善)한 도(道)를 행하여 그로써 만물(萬物)을 자라게 하며 사물이 생존함을 얻어서 원(元)이 되게 하고, 또 마땅히 아름다운 일을 가지고 만물(萬物)을 모으고 합하여 사물로 하여금 열어서 통하게 하여 형(亨)이 되게 하며, 또 마땅히 옳음[義]로써 만물(萬物)을 화합하게 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이치를 얻어서 이(利)가 되게 하고, 또 마땅히 곧고 견고함으로 일을 주관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바름을 얻어서 정(貞)이 되게 해야 함을 말함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건(乾)을 본받아서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으며, 그 자세한 조례(條例)는 〈문언전(文言傳)〉에 갖추어져 있다.
【孔穎達 疏】 正義曰:「乾」者,此卦之名。謂之卦者,《易緯》云:「卦者掛也,言縣掛物象,以示於人,故謂之卦。」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이라는 것은, 이 괘(卦)의 이름이다. 일컫기를 괘(卦)라고 한 것은, 《역위(易緯)》에 이르기를 '괘(卦)라는 것은 걸어놓음[掛]이며, 사물의 모습[象]을 메달아 걸어놓아 그로써 사람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일컫기를 괘(卦)라고 했다.'고 하였다.
但二畫之體,雖象陰陽之氣,未成萬物之象,未得成卦,必三畫以象三才,寫天、地、雷、風、水、火、山、澤之象,乃謂之卦也。故《繫辭》云「八卦成列,象在其中矣」是也。
다만 두번 그은[획(畫)] 몸체는, 비록 음양(陰‧陽)의 기운을 모습[象]하였으나 아직 만물(萬物)의 모습을 이루지 못했고 아직 괘(卦)를 이룸을 얻지 못하였으며, 반드시 세 번을 그어야 그로써 삼재(三才; 천.지.인)를 모습하고, 하늘(天)과 땅(地), 우레(雷)와 바람(風), 물(水)과 불(火), 산(山)과 못(澤)의 모습[象]을 본떠서 이에 일컫기를 괘(卦)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여덟 괘(卦)가 줄지어 이루니 모습[象]이 그 안에 들어 있다.'라고 함이 이것이다.
但初有三畫,雖有萬物之象,於萬物變通之理,猶有未盡,故更重之而有六畫,備萬物之形象,窮天下之能事,故六畫成卦也。
다만 처음 세 획(畫)이 있어서 비록 만물(萬物)의 모습[象]이 있으나 만물(萬物)이 변하여 통하는 이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미진(未盡)함이 있기 때문에 거듭해서 여섯 획이 있도록 고치면 만물(萬物)의 모양[形]과 모습[象]을 구비하면 천하의 일을 잘함을 다하기 때문에 여섯 획[六畫] 괘(卦)를 이루었다.
此乾卦, 本以象天, 天乃積諸陽氣而成天, 故此卦六爻皆陽畫成卦也.
이 건괘(乾卦)는 본래 하늘로써 모습[象]하였으니, 하늘은 바로 여러 양기(陽氣)가 쌓여서 하늘을 이루기 때문에 이 괘(卦)의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 획으로 괘( 卦)를 이루었다.
此旣象天, 何不謂之天而謂之乾者.
이[卦]는 이미 하늘을 모습[象]하였는데, 어찌 일컫기를 하늘[天]이라고 하지 않고서 일컫기를 건(乾)이라 한 것인가?
天者, 定體之名, 乾者, 體用之稱.
하늘[天]이라는 것은, 정한 몸체[體]의 이름이고, 건(乾)이라는 것은, 몸체[體]가 쓰임[用]을 가리킴이다.
故說卦云“乾, 健也.” 言天之體以健爲用.
그러므로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건(乾)은 굳셈[健]이다.”고 하였으니, 하늘의 몸체[體]가 굳셈으로써 쓰임[用]을 삼음이다.
聖人作易, 本以敎人, 欲使人法天之用, 不法天之體, 故名乾, 不名天也.
성인이 《주역(周易)》을 지음은, 본래 사람들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쓰임[用]을 본받게 하고자 함이지, 하늘의 몸체[體]를 본받게 함은 아니기 때문에 이름이 건(乾)이고, 천(天)이라 이름하지 않았다.
天以健爲用者, 運行不息, 應化无窮, 此天之自然之理, 故聖人當法此自然之象而施人事, 亦當應物成務, 云爲不已, 終日乾乾, 无時懈倦, 所以因天象以敎人事.
하늘[天]이 굳셈[健]으로써 쓰임[用]을 삼는 것은, 운행을 쉬지 않고 달라짐에 응하여 다함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이치이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마땅히 이것[天]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모습[象]을 본받아서 사람의 일에 시행하고, 또한 마땅히 사물에 응하여 일을 이루며, 일러주며 행함을 그치지 않고,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며, 게을러 나태한 때가 없으니, 하늘의 모습[象]을 말미암아 그로써 사람의 일을 가르치신 까닭이다.
於物象言之, 則純陽也, 天也, 於人事言之, 則君也, 父也, 以其居尊, 故在諸卦之首, 爲易理之初.
사물의 모습[象]으로 말하면 순수한 양기[純陽]이고 하늘이며, 사람의 일로 말하면 군주이고 아버지이며, 그로써 그 사는 데가 높기 때문에 여러 괘(卦)의 머리에 있고 《역(易)》의 이치가 되는 시초이다.
但聖人名卦, 體例不同. 或則以物象而爲卦名者, 若否‧泰‧剝‧頤‧鼎之屬是也.
다만 성인(聖人)이 괘(卦)를 이름할적에 몸체[體]의 차례(次例)가 같지 아니하여, 혹은 사물의 모습[象]으로써 괘(卦)의 이름한 것이니, 비(否)와 태(泰), 박(剝)과 이(頤)와 정(鼎)의 등속이 이와 같다.
或以象之所用而爲卦名者, 卽乾‧坤之屬是也, 如此之類多矣.
혹 모습[象]의 쓰이는 곳을 가지고서 괘(卦)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니, 바로 건(乾)과 곤(坤)의 속(屬)함이 이것인데, 이와 같은 무리[類]는 많다.
雖取物象, 乃以人事而爲卦名者, 卽家人‧歸妹‧謙‧履之屬是也.
비록 사물의 모습[象]을 취하였으나 이에 사람의 일을 가지고서 괘(卦)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즉 가인(家人), 귀매(歸妹), 겸(謙), 리(履)의 등속이 이것이다.
所以如此不同者, 但物有萬象, 人有萬事, 若執一事, 不可包萬物之象, 若限局一象, 不可總萬有之事.
이와 같이 까닭이 같지 않은 것은, 다만 사물은 만 가지 모습[象]이 있고 사람은 만 가지 일이 있으니, 만약 한 가지 일을 고집하면 만물의 모습[象]을 포함할 수가 없고, 만약 하나의 모습[象]에 국한하면 만 가지 있는 일을 총괄할 수 없다.
故名有隱顯, 辭有踳駁, 不可一例求之, 不可一類取之.
그러므로 이름[명칭]은 숨음과 드러남이 있고, 말은 순수함과 잡됨이 있으니, 하나의 규칙[例]으로 구할 수는 없고 하나의 부류[類]로 취급 할 수가 없다.
故繫辭云“上下无常, 剛柔相易, 不可爲典要.” 韓康伯注云“不可立定準.” 是也.
그러므로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위와 아래가 일정함이 없고 굳셈[剛]과 부드러움[柔]이 서로 바뀌니 떳떳한 요체(要諦)가 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한강백[韓康伯(韓伯)]의 주(注)에 이르기를 “기준을 정해서 세울 수 없다.”고 하였음이 이것이다.
‘元‧亨‧利‧貞’者, 是乾之四德也. 子夏傳云 “元, 始也. 亨, 通也. 利, 和也. 貞, 正也.”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것은, 이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이다. 《자하전(子夏傳)》에 이르기를 “원(元)은 시작이고, 형(亨)은 통함이며, 이(利)는 어울림이고, 정(貞)은 바름이다.”고 했다.
言此卦之德, 有純陽之性, 自然能以陽氣始生萬物, 而得元始亨通, 能使物性和諧, 各有其利, 又能使物堅固貞正得終.
이 괘(卦)의 덕(德)이 순수한 양(陽)의 본성이 있어서 스스로 잘 그러하여 양기(陽氣)를 가지고 처음 만물(萬物)을 낳으면서, 원시(元始)와 형통(亨通)을 얻어서 사물의 본성을 모두 잘 어울리게 하여 각각 그 이로움이 있게 하고, 또 사물로 하여금 견고(堅固)하고 곧고 바름을 얻어 잘 끝마치게 함을 말함이다.
此卦自然令物有此四種, 使得其所, 故謂之四德. 言聖人亦當法此卦, 而行善道, 以長萬物, 物得生存而爲元也,
이 괘(卦)는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그러하여 이 네 가지종류를 소유하는데 그 자리를 얻게 하였기 때문에 일컫기를 네 가지 덕(德)이라 하였다. 성인(聖人) 또한 마땅히 이 괘(卦)를 본받아서, 선(善)한 도(道)를 행하여 그로써 만물(萬物)을 자라게 하며 사물이 생존함을 얻어서 원(元)이 되게 하고,
又當以嘉美之事, 會合萬物, 令使開通而爲亨也, 又當以義協和萬物, 使物各得其理而爲利也, 又當以貞固幹事, 使物各得其正而爲貞也. 是以聖人法乾而行此四德,
또 마땅히 아름다운 일을 가지고 만물(萬物)을 모으고 합하여 사물로 하여금 열어서 통하게 하여 형(亨)이 되게 하며, 또 마땅히 옳음[義]로써 만물(萬物)을 화합하게 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이치를 얻어서 이(利)가 되게 하고, 또 마땅히 곧고 견고함으로 일을 주관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바름을 얻어서 정(貞)이 되게 해야 함을 말함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건(乾)을 본받아서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였다.
故曰元‧亨‧利‧貞, 其委曲條例, 備在文言.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으며, 그 자세한 조례(條例)는 〈문언전(文言傳)〉에 갖추어져 있다.
初九, 潛龍勿用.
초구효는 [물에] 잠긴 용은 쓰지 말라.
【王弼 注】 文言備矣。
【왕필 주】 문언에 갖추었다.
[孔穎達 疏]正義曰:居第一之位,故稱「初」;以其陽爻,故稱「九」。潛者,隱伏之名;龍者,變化之物。言天之自然之氣起於建子之月,陰氣始盛,陽氣潛在地下,故言「初九潛龍」也。此自然之象,聖人作法,言於此潛龍之時,小人道盛,聖人雖有龍德,於此時唯宜潛藏,勿可施用,故言「勿用」。張氏云:「以道未可行,故稱'勿用'以誡之。」於此小人道盛之時,若其施用,則為小人所害。寡不敵眾,弱不勝強,禍害斯及,故誡「勿用」。若漢高祖生於暴秦之世,唯隱居為泗水亭長,是勿用也。諸儒皆以為舜始漁於雷澤。舜之時,當堯之世,堯君在上,不得為小人道盛。此「潛龍」始起,在建子之月,於義恐非也。第一位言「初」,第六位當言「終」;第六位言「上」,第一位當言「下」。所以文不同者,莊氏云:「下言初則上有末義。」故《大過·彖》云:「棟橈,本末弱。」是上有末義「六」言「上」,則「初」當言「下」。故《小象》云:「潛龍勿用,陽在下也。」則是初有下義,互文相通,義或然也。且第一言「初」者,欲明萬物積漸,從無入有,所以言初不言一與下也。六言「上」者,欲見位居卦上,故不言六與末也。此初九之等,是乾之六爻之辭,但乾卦是陽生之世,故六爻所述,皆以聖人出處托之,其餘卦六爻,各因象明義,隨義而發,不必皆論聖人。他皆仿此。謂之「爻」者,《繫辭》云:「爻也者,效此者也。」聖人畫爻,以仿效萬物之象。先儒云,後代聖人以《易》占事之時,先用蓍以求數,得數以定爻,累爻而成卦,因卦以生辭,則蓍為爻卦之本,爻卦為蓍之末。今案:《說卦》云:「聖人之作《易》也,幽贊於神明而生蓍,三天兩地而倚數,觀變於陰陽而立卦,發揮於剛柔而生爻。」《繫辭》云:「成天下之亹亹者,莫大乎蓍龜。是故天生神物,聖人則之。」又《易乾鑿度》云:「垂皇策者犧。」據此諸文,皆是用蓍以求卦。先儒之說,理當然矣。然陽爻稱「九」,陰爻稱「六」,其說有二:一者《乾》體有三畫,《坤》體有六畫,陽得兼陰,故其數九,陰不得兼陽,故其數六。二者老陽數九,老陰數六,老陰老陽皆變,《周易》以變者為占,故杜元凱注襄九年《傳》遇《艮》之八,及鄭康成注《易》,皆稱《周易》以變者為占,故稱九、稱六。所以老陽數九,老陰數六者,以揲蓍之數,九遇揲則得老陽,六遇揲則得老陰,其少陽稱七,少陰稱八,義亦准此。張氏以為陽數有七有九,陰數有八有六,但七為少陽,八為少陰,質而不變,為爻之本體。九為老陽,六為老陰,文而從變,故為爻之別名。且七既為陽爻,其畫已長。今有九之老陽,不可復畫為陽,所以重錢,避少陽七數,故稱九也。八為陰數而畫陰爻,今六為老陰,不可復畫陰爻。故交其錢,避八而稱六。但《易》含萬象,所托多塗,義或然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첫 번째의 지위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초(初)’라 칭하고, 그 양효(陽爻)로써 했기 때문에 ‘구(九)’라 칭했다.
잠(潛, 잠길 잠)이라는 것은 숨고 엎드리는 이름이고, 용(龍)이라는 것은, 변화(變化)하는 사물이다.
하늘의 스스로 그러하는 기운이 자(子)의 달에 일어나서 음(陰)의 기운이 처음 성대하고 양(陽)의 기운이 지하(地下)에 잠겨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에 ‘초구잠용(初九 潛龍)’이라 말하였다.
이는 자연의 모습[象]이니, 성인(聖人)이 법을 만들어서 이에 말씀하기를 ‘잠겨 있는 용(龍)의 때에는, 소인(小人)의 도(道)가 성대해지니 성인(聖人)이 비록 용의 덕을 있어도, 이 때에는 오직 마땅히 잠겨 숨어서 쓸 수 있게 베풀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쓰지 말라[勿用].’고 하였다.
장씨[張氏(張譏)]가 이르기를 “도(道)로서는 아직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칭하기를 ‘쓰지 말라’고 하여 그로써 경계를 하였다.”고 했는데, 소인의 도(道)가 성대해 지는 이 때에 만약 시행하여 쓰게 되면 소인이 해치는 바가 된다. 적은 것이 여럿을 대적하지 못하고 약함이 굳셈을 이기지 못하며 화(禍)와 해(害)가 이에 미치게 되기 때문에 ‘쓰지 말라[勿用].’고 경계하였다.
예컨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사나운 진(秦)나라의 세상에서 살았다면 오직 숨어 살아서 사수(泗水)의 정자 수장이 되었으니, 이것이 ‘물용(勿用)’이다. 여러 유학들이 모두 순(舜)임금이 뇌택(雷澤)에서 처음 물고기 잡았다고 여겼다. 순(舜)의 때는 마땅히 요(堯)임금의 세상이며 군주이신 요(堯)임금이 위에 있었으니, 소인의 도(道)가 성대하게 되지 못했다. 이 잠용(潛龍)이 처음 일어남은, [북두성(北斗星)이] 자(子) 방향을 세우는 달에 있으니, 뜻에는 아마도 안 맞다.
첫 번째 자리를 초(初)라고 말하면 여섯 번째 자리는 마땅히 마침[終]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여섯 번째 자리를 상(上)이라고 말하였으면 첫 번째 자리를 마땅히 하(下)라고 말하여야 한다. 글이 같지 않은 것의 이유는,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아래에서 초(初)라고 말하였으면 위에는 끝[末]의 뜻이 있다.”고 했으며, 그러므로 《대과 괘(大過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기둥이 흔들림은 근본과 끝이 약함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상(上)에 끝[末]의 뜻이 있으니 육(六)을 상(上)이라고 말했으면 초(初)는 마땅히 하(下)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소상전(小象)》에 이르기를 ‘잠용(潛龍)이니 쓰지 말라함은, 양(陽)이 아래에 있음이다.’고 하였으니, 곧 이것은 초(初)에 아래[下]의 뜻이 있고 상호 글이 서로 통하니, 뜻이 혹 그럴 듯하다.
또 첫 번째에 초(初)라고 말한 것은 만물(萬物)이 점점 쌓여서 없음[無]에서 부터 있음[有]으로 들어감을 밝히고자 함이니, 초(初)라 말하고 일(一)과 하(下)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육(六)을 상(上)이라고 말한 것은, 자리가 괘(卦)의 위쪽에 거주함을 보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육(六)과 말(末)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 초(初)와 구(九)의 등은 바로 건(乾)의 여섯 효(爻)의 효사(爻辭)인데, 다만 건괘(乾卦)는 이 양(陽)이 생겨나는 세상이기 때문에 여섯 효(爻)가 펼쳐진 바가 모두 성인(聖人)이 출처(出處)를 가지고 의탁(依託)을 하였고, 그 남어지 괘(卦)의 여섯 효(爻)는 각각 모습[象]을 말미암아 뜻을 밝히고 뜻을 따라서 펴내며 반드시 모두 성인(聖人)을 논하지는 않았으니, 다른 것도 모두 이를 모방(模倣)했다.
일컫기를 효(爻)라고 한 것은,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효(爻)라는 것은, 이것을 본받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효(爻)를 그리고 만물(萬物)의 모습[象]을 모방(模倣)하여서 본받았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후대 성인(聖人)이 《주역(周易)》으로써 일을 점칠 때에 먼저 시초(蓍草)로써 수(數)를 구하고, 얻은 수(數)를 가지고 효(爻)를 정하고, 효(爻)를 거듭하여서 괘(卦)를 이루고, 괘(卦)를 말미암아 그로써 말[괘사와 효사]이 생겨나니, 곧 시초(蓍草)는 효(爻)와 괘(卦)의 근본이 되고 효(爻)와 괘(卦)는 시초(蓍草)의 끝이 된다.”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면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음은, 신명(神明)의 도움이 그윽하여서 시초(蓍草)가 생겨났는데, 하늘을 셋으로 땅을 둘로 하여서 수(數)를 의지하였고, 음(陰)과 양(陽)에서 변함을 보고서 괘(卦)를 세웠으며, 굳셈과 부드러움에서 발휘하여 효(爻)가 생겨났다.”고 하였으며,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천하의 부지런히 힘써서 이루는 것은, 시초(蓍草)와 거북보다 큰 것이 없다. 이 때문에 하늘이 신성한 사물을 내시고 성인(聖人)이 그것을 본받았다.”고 하였으며, 또 《역건착도(易乾鑿度)》에 이르기를 “황책(皇策)을 남긴 것은 복희[伏犧(伏羲)]이다.”고 하였으니, 이 여러 글에 근거하면 모두 이 시초(蓍草)를 사용하여 그로써 괘(卦)를 구하였으니, 선유(先儒)의 말이 마땅히 그러한 이치이다.
그러나 양효(陽爻)를 구(九)라 칭하고 음효(陰爻)를 육(六)이라 칭함은 그 설명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건(乾)의 몸체에는 3번 그어져 있고 곤(坤)의 몸체에는 6번 그어져 있는데, 양(陽)은 음(陰)을 겸하기 때문에 그 수(數)가 9이고 음(陰)은 그 수(數)를 겸겸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수(數)가 6이라 함이다.
두 번째는 노양(老陽)의 수(數)가 9이고 노음(老陰)의 수(數)가 6인데 노음(老陰)과 노양(老陽)은 모두 변하니, 《주역(周易)》은 변하는 것으로써 점(占)을 치기 때문에 두원개[杜元凱(杜預)]가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9년의 “간(艮)이 8로 변한 괘《艮之八》를 만났다.”고 한 것에 주(注)를 내고,정강성[ 鄭康成(鄭玄)]이 《주역(周易)》 주(注)에서 모두 칭하기를 “《주역(周易)》은 변하는 것을 가지고 점(占)을 치기 때문에 9라 칭하고 6이라 칭한다.”라고 하였다.
노양(老陽)의 수(數)가 9이고 노음(老陰)의 수(數)가 6인 것의 까닭은, 시초(蓍草)를 떼어 셈하는 수(數)로써 9번 떼어내고 만나면 노양(老陽)을 얻고, 6번 떼어내고 만나면 노양(老陰)을 얻으니, 그 소양(少陽)을 7이라 칭하고 소음(少陰)을 8이라 칭하는데, 뜻이 또한 이에 근거함이다.
장씨(張氏)는 양(陽)의 수(數)는 7이 있고 9가 있고 음(陰)의 수(數)는 8이 있고 6이 있는데, 다만 7은 소양(少陽)이 되고 8은 소음(少陰)이 되니 물질이면서도 변하지 않아서 효(爻)의 본체(本體)가 되고, 9는 노양(老陽)이 되고 6은 老陰이 되니 무늬이면서 변함을 따르기 때문에 효(爻)의 이름으로 분별하게 되었음으로 여겼다.
다만 7이 이미 양효(陽爻)가 되어 그 획(畫)이 이미 자랐으나 이제 9의 노양(老陽)이 있으니 다시 그어서 양(陽)을 만들 수가 없음은, 동전점[重錢]에 소양(少陽)의 7의 수(數)를 피하였기 때문에 9라고 칭하였다.
8은 음(陰)의 수(數)라서 음(陰)의 효(爻)를 그었으나 이제 6이 노음(老陰)이 되었으니 다시 음효(陰爻)를 그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동전을 썩을[交]적에 8을 피하고 6이라고 칭하였다. 다만 《주역(周易)》은 만 가지 모습[象]을 포함하여 의탁한 곳의 길이 많다.”고 하였으니, 뜻이 혹 옳을 듯하다.
【孔穎達 疏】 正義曰:居第一之位,故稱「初」;以其陽爻,故稱「九」。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첫 번째의 지위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초(初)’라 칭하고, 그 양효(陽爻)로써 했기 때문에 ‘구(九)’라 칭했다.
潛者,隱伏之名;龍者,變化之物。
잠(潛, 잠길 잠)이라는 것은 숨고 엎드리는 이름이고, 용(龍)이라는 것은, 변화(變化)하는 사물이다.
言天之自然之氣起於建子之月,陰氣始盛,陽氣潛在地下,故言「初九潛龍」也。
하늘의 스스로 그러하는 기운이 자(子)의 달에 일어나서 음(陰)의 기운이 처음 성대하고 양(陽)의 기운이 지하(地下)에 잠겨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에 ‘초구잠용(初九 潛龍)’이라 말하였다.
此自然之象,聖人作法,言於此潛龍之時,小人道盛,聖人雖有龍德,於此時唯宜潛藏,勿可施用,故言「勿用」。
이는 자연의 모습[象]이니, 성인(聖人)이 법을 만들어서 이에 말씀하기를 ‘잠겨 있는 용(龍)의 때에는, 소인(小人)의 도(道)가 성대해지니 성인(聖人)이 비록 용의 덕을 있어도, 이 때에는 오직 마땅히 잠겨 숨어서 쓸 수 있게 베풀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쓰지 말라[勿用].’고 하였다.
張氏云:「以道未可行,故稱'勿用'以誡之。」於此小人道盛之時,若其施用,則為小人所害。寡不敵眾,弱不勝強,禍害斯及,故誡「勿用」。
장씨[張氏(張譏)]가 이르기를 “도(道)로서는 아직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칭하기를 ‘쓰지 말라’고 하여 그로써 경계를 하였다.”고 했는데, 소인의 도(道)가 성대해 지는 이 때에 만약 시행하여 쓰게 되면 소인이 해치는 바가 된다. 적은 것이 여럿을 대적하지 못하고 약함이 굳셈을 이기지 못하며 화(禍)와 해(害)가 이에 미치게 되기 때문에 ‘쓰지 말라[勿用].’고 경계하였다.
若漢高祖生於暴秦之世,唯隱居為泗水亭長,是勿用也。諸儒皆以為舜始漁於雷澤。舜之時,當堯之世,堯君在上,不得為小人道盛。此「潛龍」始起,在建子之月,於義恐非也。
예컨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사나운 진(秦)나라의 세상에서 살았다면 오직 숨어 살아서 사수(泗水)의 정자 수장이 되었으니, 이것이 ‘물용(勿用)’이다. 여러 유학들이 모두 순(舜)임금이 뇌택(雷澤)에서 처음 물고기 잡았다고 여겼다. 순(舜)의 때는 마땅히 요(堯)임금의 세상이며 군주이신 요(堯)임금이 위에 있었으니, 소인의 도(道)가 성대하게 되지 못했다. 이 잠용(潛龍)이 처음 일어남은, [북두성(北斗星)이] 자(子) 방향을 세우는 달에 있으니, 뜻에는 아마도 안 맞다.
第一位言「初」,第六位當言「終」;第六位言「上」,第一位當言「下」。所以文不同者,莊氏云:「下言初則上有末義。」故《大過.彖》云:「棟橈,本末弱。」是上有末義 「六」言「上」,則「初」當言「下」。
첫 번째 자리를 초(初)라고 말하면 여섯 번째 자리는 마땅히 마침[終]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여섯 번째 자리를 상(上)이라고 말하였으면 첫 번째 자리를 마땅히 하(下)라고 말하여야 한다. 글이 같지 않은 것의 이유는,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아래에서 초(初)라고 말하였으면 위에는 끝[末]의 뜻이 있다.”고 했으며, 그러므로 《대과 괘(大過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기둥이 흔들림은 근본과 끝이 약함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상(上)에 끝[末]의 뜻이 있으니 육(六)을 상(上)이라고 말했으면 초(初)는 마땅히 하(下)라고 말해야 한다.
故《小象》云:「潛龍勿用,陽在下也。」則是初有下義,互文相通,義或然也。
그러므로 《소상전(小象)》에 이르기를 ‘잠용(潛龍)이니 쓰지 말라함은, 양(陽)이 아래에 있음이다.’고 하였으니, 곧 이것은 초(初)에 아래[下]의 뜻이 있고 상호 글이 서로 통하니, 뜻이 혹 그럴 듯하다.
且第一言「初」者,欲明萬物積漸,從無入有,所以言初不言一與下也。六言「上」者,欲見位居卦上,故不言六與末也。
또 첫 번째에 초(初)라고 말한 것은 만물(萬物)이 점점 쌓여서 없음[無]에서 부터 있음[有]으로 들어감을 밝히고자 함이니, 초(初)라 말하고 일(一)과 하(下)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육(六)을 상(上)이라고 말한 것은, 자리가 괘(卦)의 위쪽에 거주함을 보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육(六)과 말(末)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此初九之等,是乾之六爻之辭,但乾卦是陽生之世,故六爻所述,皆以聖人出處托之,其餘卦六爻,各因象明義,隨義而發,不必皆論聖人。他皆仿此。
이 초(初)와 구(九)의 등은 바로 건(乾)의 여섯 효(爻)의 효사(爻辭)인데, 다만 건괘(乾卦)는 이 양(陽)이 생겨나는 세상이기 때문에 여섯 효(爻)가 펼쳐진 바가 모두 성인(聖人)이 출처(出處)를 가지고 의탁(依託)을 하였고, 그 남어지 괘(卦)의 여섯 효(爻)는 각각 모습[象]을 말미암아 뜻을 밝히고 뜻을 따라서 펴내며 반드시 모두 성인(聖人)을 논하지는 않았으니, 다른 것도 모두 이를 모방(模倣)했다.
謂之「爻」者,《繫辭》云:「爻也者,效此者也。」 聖人畫爻,以仿效萬物之象。
일컫기를 효(爻)라고 한 것은,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효(爻)라는 것은, 이것을 본받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효(爻)를 그리고 만물(萬物)의 모습[象]을 모방(模倣)하여서 본받았다.
先儒云,後代聖人以《易》占事之時,先用蓍以求數,得數以定爻,累爻而成卦,因卦以生辭,則蓍為爻卦之本,爻卦為蓍之末。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후대 성인(聖人)이 《주역(周易)》으로써 일을 점칠 때에 먼저 시초(蓍草)로써 수(數)를 구하고, 얻은 수(數)를 가지고 효(爻)를 정하고, 효(爻)를 거듭하여서 괘(卦)를 이루고, 괘(卦)를 말미암아 그로써 말[괘사와 효사]이 생겨나니, 곧 시초(蓍草)는 효(爻)와 괘(卦)의 근본이 되고 효(爻)와 괘(卦)는 시초(蓍草)의 끝이 된다.”고 하였다.
今案:《說卦》云:「聖人之作《易》也,幽贊於神明而生蓍,三天兩地而倚數,觀變於陰陽而立卦,發揮於剛柔而生爻。」《繫辭》云:「成天下之亹亹者,莫大乎蓍龜。是故天生神物,聖人則之。」 又《易乾鑿度》云:「垂皇策者犧。」據此諸文,皆是用蓍以求卦。先儒之說,理當然矣。
지금 살펴보면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음은, 신명(神明)의 도움이 그윽하여서 시초(蓍草)가 생겨났는데, 하늘을 셋으로 땅을 둘로 하여서 수(數)를 의지하였고, 음(陰)과 양(陽)에서 변함을 보고서 괘(卦)를 세웠으며, 굳셈과 부드러움에서 발휘하여 효(爻)가 생겨났다.”고 하였으며,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천하의 부지런히 힘써서 이루는 것은, 시초(蓍草)와 거북보다 큰 것이 없다. 이 때문에 하늘이 신성한 사물을 내시고 성인(聖人)이 그것을 본받았다.”고 하였으며, 또 《역건착도(易乾鑿度)》에 이르기를 “황책(皇策)을 남긴 것은 복희[伏犧(伏羲)]이다.”고 하였으니, 이 여러 글에 근거하면 모두 이 시초(蓍草)를 사용하여 그로써 괘(卦)를 구하였으니, 선유(先儒)의 말이 마땅히 그러한 이치이다.
然陽爻稱「九」,陰爻稱「六」,其說有二:一者《乾》體有三畫,《坤》體有六畫,陽得兼陰,故其數九,陰不得兼陽,故其數六。
그러나 양효(陽爻)를 구(九)라 칭하고 음효(陰爻)를 육(六)이라 칭함은 그 설명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건(乾)의 몸체에는 3번 그어져 있고 곤(坤)의 몸체에는 6번 그어져 있는데, 양(陽)은 음(陰)을 겸하기 때문에 그 수(數)가 9이고 음(陰)은 그 수(數)를 겸겸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수(數)가 6이라 함이다.
二者老陽數九,老陰數六,老陰老陽皆變,《周易》以變者為占,故杜元凱注襄九年《傳》遇《艮》之八,及鄭康成注《易》,皆稱《周易》以變者為占,故稱九、稱六。
두 번째는 노양(老陽)의 수(數)가 9이고 노음(老陰)의 수(數)가 6인데 노음(老陰)과 노양(老陽)은 모두 변하니, 《주역(周易)》은 변하는 것으로써 점(占)을 치기 때문에 두원개[杜元凱(杜預)]가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9년의 “간(艮)이 8로 변한 괘《艮之八》를 만났다.”고 한 것에 주(注)를 내고,정강성[ 鄭康成(鄭玄)]이 《주역(周易)》 주(注)에서 모두 칭하기를 “《주역(周易)》은 변하는 것을 가지고 점(占)을 치기 때문에 9라 칭하고 6이라 칭한다.”라고 하였다.
所以老陽數九,老陰數六者,以揲蓍之數,九遇揲則得老陽,六遇揲則得老陰,其少陽稱七,少陰稱八,義亦准此。
노양(老陽)의 수(數)가 9이고 노음(老陰)의 수(數)가 6인 것의 까닭은, 시초(蓍草)를 떼어 셈하는 수(數)로써 9번 떼어내고 만나면 노양(老陽)을 얻고, 6번 떼어내고 만나면 노양(老陰)을 얻으니, 그 소양(少陽)을 7이라 칭하고 소음(少陰)을 8이라 칭하는데, 뜻이 또한 이에 근거함이다.
張氏以為陽數有七有九,陰數有八有六,但七為少陽,八為少陰,質而不變,為爻之本體。九為老陽,六為老陰,文而從變,故為爻之別名。
장씨(張氏)는 양(陽)의 수(數)는 7이 있고 9가 있고 음(陰)의 수(數)는 8이 있고 6이 있는데, 다만 7은 소양(少陽)이 되고 8은 소음(少陰)이 되니 물질이면서도 변하지 않아서 효(爻)의 본체(本體)가 되고, 9는 노양(老陽)이 되고 6은 老陰이 되니 무늬이면서 변함을 따르기 때문에 효(爻)의 이름으로 분별하게 되었음으로 여겼다.
且七既為陽爻,其畫已長。今有九之老陽,不可復畫為陽,所以重錢,避少陽七數,故稱九也。
다만 7이 이미 양효(陽爻)가 되어 그 획(畫)이 이미 자랐으나 이제 9의 노양(老陽)이 있으니 다시 그어서 양(陽)을 만들 수가 없음은, 동전점[重錢]에 소양(少陽)의 7의 수(數)를 피하였기 때문에 9라고 칭하였다.
八為陰數而畫陰爻,今六為老陰,不可復畫陰爻。故交其錢,避八而稱六。但《易》含萬象,所托多塗,義或然也。
8은 음(陰)의 수(數)라서 음(陰)의 효(爻)를 그었으나 이제 6이 노음(老陰)이 되었으니 다시 음효(陰爻)를 그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동전을 썩을[交]적에 8을 피하고 6이라고 칭하였다. 다만 《주역(周易)》은 만 가지 모습[象]을 포함하여 의탁한 곳의 길이 많다.”고 하였으니, 뜻이 혹 옳을 듯하다.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구이효는 용이 나타나 밭에 있다.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王弼 注】 出潛離隱,故曰「見龍」;處於地上,故曰「在田」。德施周普,居中不偏,雖非君位,君之德也。初則不彰,三則乾乾,四則或躍,上則過亢。利見大人,唯二、五焉。
【왕필 주】 잠김에서 나와 숨은데서 붙좇기 때문에 "용이 나타난다"라고 말했고, 땅 위에 처했기 때문에 "밭에 있다"라고 말했다. 덕을 베풀고 두루 넓리 가운데 머물며 치우치지 않고, 비록 군주의 자리가 아니더라도 군주의 덕이다. 초효는 곧 드러나지 않고, 삼효는 곧 마르도록 힘쓰며, 사효는 곧 혹 뛰어오르고, 상효는 곧 지나치게 높다. 대인을 만나야 이로움은 오직 이효와 오효에 있다.
[孔穎達 疏]「九二」至「利見大人」。○正義曰:陽處二位,故曰「九二」。陽氣發見,故曰「見龍」。田是地上可營為有益之處,陽氣發在地上,故曰「在田」。且一之與二,俱為地道,二在一上,所以稱「田」。「見龍在田」,是自然之象。「利見大人」,以人事?之,言龍見在田之時,猶似聖人久潛稍出,雖非君位而有君德,故天下眾庶利見九二之「大人」。故先儒云:若夫子教於洙泗,利益天下,有人君之德,故稱「大人」。案:《文言》云:「九二德博而化。」又云:「君德也。」王輔嗣注云:「雖非君位,君之德也。」是九二有人君之德,所以稱「大人」也。輔嗣又云:「利見大人,唯二五焉。」是二之與五,俱是「大人」,為天下所「利見」也。而褚氏、張氏同鄭康成之說,皆以為九二利見九五之大人,其義非也。且「大人」之云,不專在九五與九二,故《訟卦》云:「利見大人。」又《蹇卦》:「利見大人。」此「大人」之文,施處廣矣,故輔嗣注謂九二也。是「大人」非專九五。○注「處於地上」至「唯二五焉」。○正義曰:「處於地上,故曰在田」者,先儒以為重卦之時,重於上下兩體,故初與四相應,二與五相應,三與上相應。是上下兩體,論天地人各別,但《易》含萬象,為例非一。及其六位,則一、二為地道,三、四為人道,五、上為天道。二在一上,是九二處其地上,所田食之處,唯在地上,所以稱「田」也。觀輔嗣之注意,唯取地上稱田,諸儒更廣而稱之,言田之耕稼利益,及於萬物,盈滿有益於人,猶若聖人益於萬物,故稱「田」也。「德施周普」者,下《小象》文,謂周而普遍。「居中不偏」者,九二居在下卦之中,而於上於下,其心一等,是「居中不偏」也。不偏則周普也。「雖非君位」者,二為大人,己居二位,是非君位也。「君之德」者,以德施周普也。《文言》云:「德博而化。」又云:「君德也。」是九二有人君之德也。「初則不彰」者,謂潛隱不彰顯也。「三則乾乾」者,危懼不安也。「四則或躍」者,謂進退懷疑也。「上則過亢」,過謂過甚,亢謂亢極。「利見大人,唯二五焉」者,言範模乾之一卦,故云「唯二五焉」。於別卦言之,非唯二五而己。故訟卦、蹇卦並云「利見大人」,所以施處廣,非唯二五也。諸儒以為九二當太蔟之月,陽氣發見,則九三為建辰之月,九四為建午之月,九五為建申之月,為陰氣始殺,不宜稱「飛龍在天」。上九為建戌之月,群陰既盛,上九不得言「與時偕極」。於此時陽氣僅存,何極之有?諸儒此說,於理稍乖。此乾之陽氣漸生,似聖人漸出,宜據十一月之後。至建巳之月已來,此九二當據建丑、建寅之間,於時地之萌牙初有出者,即是陽氣發見之義。乾卦之象,其應然也。但陰陽二氣,共成歲功,故陰興之時,仍有陽在,陽生之月,尚有陰存。所以六律六呂,陰陽相間,取象論義,與此不殊。乾之初九,則與復卦不殊。乾之九二,又與臨卦無別。何以復、臨二卦與此不同者,但《易》論象,復、臨二卦,既有群陰見象於上,即須論卦之象義,各自為文。此乾卦初九、九二,只論居位一爻,無群陰見象,故但自明當爻之地,為此與臨、復不同。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이(九二)에서 이견대인(利見大人)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양(陽)이 두번째 자리에 처했기 때문에 구이(九二)라고 말하였고, 양기(陽氣)가 피어 나타났기 때문에 '용이 나타났다[見龍].’고 말하였다. 밭[田]은 이 땅의 위이고, 유익함을 경영할 수 있는 곳이며, 양의 기운이 피어나 땅 위에 있기 때문에 ‘밭에 있다[在田].’고 말하였다.
또 초효의 2효와 같이함은 모두 땅의 도(道)가 되는데 2효가 초효의 위에 있음이, ‘밭[田]’이라 칭한 까닭이다. ‘견용재전(見龍在田)’은 자연의 모습[象]이고, ‘이견대인(利見大人)’은 사람의 일로써 의탁(依託)을 했으며,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을 때인데 오히려 성인(聖人)이 오랫동안 잠겼다가 차츰 나옴을 닮았으니, 비록 군주의 자리는 아니더라도 군주의 덕(德)이 있기 때문에 천하의 여러 무리는 구2[九二]효의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움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옛 유학자[先儒]가 이르기를 “공자[夫子]의 수사(洙泗)에서 가르침과 같이, 천하에 이로움을 더하여 군주된 사람의 덕(德)이 있었기 때문에 대인(大人)이라 칭한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구2효[九二]는 덕(德)이 넓어서 달라진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구이(九二)는〉 군주의 德이다.” 하였으며, 왕보사[王輔嗣(王弼)]의 주(注)에 이르기를 “비록 군주의 자리가 아니지만 군주의 덕(德)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구2효[九二]가 군주된 사람의 덕(德)이 있으므로 ‘대인(大人)’이라고 칭한 까닭이다.
왕보사(王輔嗣)가 또 이르기를 “이견대인(利見大人)은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2효(二爻)의 5효(五爻)와 같이하니 모두 이 대인(大人)이므로, 천하가 만나봄이 이로운[利見] 바가 됨이다.
그리고 저씨[褚氏(褚仲都)]와 장씨(張氏)는 정강성(鄭康成)의 설(說)과 같이 모두 구2(九二)가 구5(九五)의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로움으로 여겼으니, 그 뜻이 잘못이다. 또 대인(大人)이라고 말함은 오로지 구5(九五)와 구2(九二)에만 있지는 않기 때문에 《송괘(訟卦)》에 이르기를“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고, 《건괘(蹇卦)》에도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이는 大人이란 글월이 쓰는 곳이 넓음이다. 그러므로 왕보사(王輔嗣)의 주(注)에 구2(九二)를 말함이니, 이 대인(大人)은 구5(九五)를 오로지 함[가리킴]은 아니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처어지상(處於地上)]에서 [유이오언(唯二五焉)]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땅 위에 처하기 때문에 밭에 있다 말했다[處於地上 故曰在田]라고 한 것은, 옛 유학자[先儒]가 괘(卦)를 거듭한 때에는, 위아래 두 몸체[體]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초효(初爻)와 4효(四爻)가 서로 응하고, 2효(二爻)와 5효(五爻)가 서로 응하며, 3효(三爻)는 상효(上爻)와 서로 응하니, 이는 위와 아래 두 체(體)에 천.지.인(天‧地‧人)을 각각 나누어 논함인데, 다만 《주역(周易)》은 만 가지 모습[象]을 포함하기에 예(例)로 삼은 한 가지는 아니다.
그 여섯 자리에 미치면 1(一)과 2(二)는 지도(地道)가 되고 3(三)과 4(四)는 인도(人道)가 되며 5(五)와 상(上)은 천도(天道)가 된다. 2(二)가 1(一)의 위에 있으니, 이는 구2효(九二)가 땅 위에 처함인데, 밭[田]은 식량을 생산하는 곳인 바이니 오직 땅 위에 있으니 밭[田]이라고 칭한 까닭이다.” 하였다.
왕보사(王輔嗣)의 【왕필 주(王弼 注)】의 뜻을 보면, 오직 지상(地上)을 취하여 밭[田]이라 칭하였는데, 여러 유학자들은 다시 넓게 고쳐서 칭하기를 “밭의 갈고 심는 이익이 만물(萬物)에 미쳐서 가득차니 사람에게 유익하며, 마치 성인(聖人)이 만물(萬物)에게 더해짐과 같기 때문에 밭[田]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덕시주보(德施周普)]라는 것은, 아래 《소상전(小象)》의 글에 두루 하여서 넓리 미친다고 하였다. [거중불편(居中不偏)]이라는 것은, 구2효(九二)가 하괘(下卦)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위와 아래가 그 마음이 한 가지이니, 이는 가운데에 거주하여 편벽되지 않음니 편벽되지 않으면 두루 하여 넓음이다. [수비군위(雖非君位)]라는 것은 2효(二)가 대인(大人)이 되었으나 자기가 2효(二)의 자리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군주의 지위가 아니다. [군지덕(君之德)]이라는 것은, 그로써 덕(德)의 베풂이 두루 넓음이다.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덕(德)이 넓어서 달라진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주의 덕(德)이다.”고 하였으며, 이는 구2효(九二)가 군주 된 사람의 덕(德)이 있음이다. [초즉부창(初則不彰)]이라는 것은, 잠기고 숨어서 드러나지 못함을 일컬음이다. [삼즉건건(三則乾乾)]이라는 것은, 위태롭고 두려워 편안하지 못함이다. [사즉혹약(四則或躍)]이라는 것은, 나가고 물러남에 의심이 있음을 말함이다. [상즉과항(上則過亢)]이라는 것은, 과(過)는 지나침이 심함을 말하고, 항(亢)은 높음이 다했음을 일컫는다.
[이견대인 유이오언(利見大人 唯二五焉)]이라는 것은, 건(乾)의 한 괘(卦)를 모범으로 말 하였기 때문에 이르기를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라고 하였다. 다른 괘(卦)에서 말할 적에는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송괘(訟卦)와 건괘(蹇卦)에 모두 이르기를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쓰는 곳이 넓은 까닭이며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뿐만이 아니다.
여러 유학자들은 “구2(九二)가 태주(太蔟)의 달[정월]에 해당하여 양기(陽氣)가 발현함으로 여겼으니, 그렇다면 구3(九三)은 건진(建辰)의 달[3월]이 되고 구4(九四)는 건오(建午)의 달[5월]이 되며, 구5(九五)는 건신(建申)의 달[7월]이 되는데, 음기(陰氣)가 처음 [사물을] 죽이게 되므로, “용(龍)이 하늘에 있다.”고 칭함이 마땅하지 않다.
상구(上九)는 건술(建戌)의 달[9월]이 되니, 여러 음(陰)이 이미 성하므로, 상구(上九)에서 “때와 더블어 함께 지극하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이때에는 양기(陽氣)가 겨우 보존되어 있으니, 어찌 지극함이 있겠는가? 여러 유학자들의 이 설(說)은 이치에 다소 어긋난다.
이 건(乾)의 양기(陽氣)가 점점 생겨남은 성인(聖人)이 점점 나옴을 닮아서 마땅히 11월의 뒤에 의거한다. 건사(建巳)의 달[4월]이 이미 와서 이르렀으니, 이는 구2(九二)가 마땅히 건축(建丑;12월)과 건인(建寅;정월)의 사이에 의거 해야 마땅하며, 이때에 땅속에 있는 초목의 싹이 처음 나오는 것이 있으니, 곧 이는 양기(陽氣)가 발현하는 뜻이며, 건괘(乾卦)의 모습[象]이 당연히 그러함이다.
다만 음(陰)과 양(陽) 두 기운이 함께 한 해의 공을 이루기 때문에 음(陰)이 일어날 때에 그대로 양(陽)이 남아 있고, 양(陽)이 생겨나는 달에 오히려 음(陰)이 있기도 한다. 육율(六律)과 육려(六呂)는 음(陰)과 양(陽)이 서로 사이하여 있는 까닭이니, 모습[象]을 취하여 뜻[義]을 논함이 이와 다르지 않다.
건괘(乾卦)의 초9(初九)는 복괘(復卦)와 다르지 않고, 건괘(乾卦)의 구2(九二)는 임괘(臨卦)와 분별이 없는데, 어찌하여서 복괘(復卦)와 임괘(臨卦) 두 괘(卦)는 이와 더블어 한같지 않은 것은, 다만 《주역(周易)》은 모습[象]을 논하였는데, 복괘(復卦)와 임괘(臨卦) 두 괘(卦)는 이미 여러 음(陰)이 위에서 나타난 모습[象]이 있으니 즉 모름지기 괘(卦)의 모습[象]과 뜻(義)을 논해야 하는바, 각각 스스로 글월이 되었음이다.
이 건괘(乾卦)의 초9(初九)와 구2(九二)는 단지 자리에 거주한 한 효(爻)만을 논하였고, 여러 음(陰)이 나타난 모습[象]이 없기 때문에 다만 마땅한 효(爻)의 땅[자리]을 밝혔으니, 이는 임괘(臨卦)‧복괘(復卦)가 더블어 같지 않게 되었음이다.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구이효는 용이 나타나 밭에 있다.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王弼 注】 出潛離隱,故曰「見龍」;處於地上,故曰「在田」。德施周普,居中不偏,雖非君位,君之德也。初則不彰,三則乾乾,四則或躍,上則過亢。利見大人,唯二、五焉。
【왕필 주】 잠김에서 나와 숨은데서 붙좇기 때문에 "용이 나타난다"라고 말했고, 땅 위에 처했기 때문에 "밭에 있다"라고 말했다. 덕을 베풀고 두루 넓리 가운데 머물며 치우치지 않고, 비록 임금의 자리가 아니더라도 임금의 덕이다. 초효는 곧 드러나지 않고, 삼효는 곧 마르고 달으며, 사효는 곧 혹 뛰어오르고, 상효는 곧 지나치게 높다. 대인을 만나야 이로움은 오직 이효와 오효에 있다.
【孔穎達 疏】「九二」至「利見大人」。
○正義曰:陽處二位,故曰「九二」。陽氣發見,故曰「見龍」。田是地上可營為有益之處,陽氣發在地上,故曰「在田」。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이(九二)에서 이견대인(利見大人)까지}.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양(陽)이 두번째 자리에 처했기 때문에 구이(九二)라고 말하였고, 양기(陽氣)가 피어 나타났기 때문에 '용이 나타났다[見龍].’고 말하였다. 밭[田]은 이 땅의 위이고, 유익함을 경영할 수 있는 곳이며, 양의 기운이 피어나 땅 위에 있기 때문에 ‘밭에 있다[在田].’고 말하였다.
且一之與二,俱為地道,二在一上,所以稱「田」。「見龍在田」,是自然之象。「利見大人」,以人事託之,言龍見在田之時,猶似聖人久潛稍出,雖非君位而有君德,故天下眾庶利見九二之「大人」。
또 초효의 2효와 같이함은 모두 땅의 도(道)가 되는데 2효가 초효의 위에 있음이, ‘밭[田]’이라 칭한 까닭이다. ‘견용재전(見龍在田)’은 자연의 모습[象]이고, ‘이견대인(利見大人)’은 사람의 일로써 의탁(依託)을 했으며,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을 때인데 오히려 성인(聖人)이 오랫동안 잠겼다가 차츰 나옴을 닮았으니, 비록 군주의 자리는 아니더라도 군주의 덕(德)이 있기 때문에 천하의 여러 무리는 구2[九二]효의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움을 말함이다.
故先儒云:若夫子教於洙泗,利益天下,有人君之德,故稱「大人」。
그러므로 옛 유학자[先儒]가 이르기를 “공자[夫子]의 수사(洙泗)에서 가르침과 같이, 천하에 이로움을 더하여 군주된 사람의 덕(德)이 있었기 때문에 대인(大人)이라 칭한다.”고 하였다.
案:《文言》云:「九二德博而化。」又云:「君德也。」王輔嗣注云:「雖非君位,君之德也。」是九二有人君之德,所以稱「大人」也。
살펴보건대,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구2효[九二]는 덕(德)이 넓어서 달라진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구이(九二)는〉 군주의 德이다.” 하였으며, 왕보사[王輔嗣(王弼)]의 주(注)에 이르기를 “비록 군주의 자리가 아니지만 군주의 덕(德)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구2효[九二]가 군주된 사람의 덕(德)이 있으므로 ‘대인(大人)’이라고 칭한 까닭이다.
輔嗣又云:「利見大人,唯二五焉。」是二之與五,俱是「大人」,為天下所「利見」也。
왕보사(王輔嗣)가 또 이르기를 “이견대인(利見大人)은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2효(二爻)의 5효(五爻)와 같이하니 모두 이 대인(大人)이므로, 천하가 만나봄이 이로운[利見] 바가 됨이다.
而褚氏、張氏同鄭康成之說,皆以為九二利見九五之大人,其義非也。且「大人」之云,不專在九五與九二,故《訟卦》云:「利見大人。」又《蹇卦》:「利見大人。」此「大人」之文,施處廣矣,故輔嗣注謂九二也。是「大人」非專九五。
그리고 저씨[褚氏(褚仲都)]와 장씨(張氏)는 정강성(鄭康成)의 설(說)과 같이 모두 구2(九二)가 구5(九五)의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로움으로 여겼으니, 그 뜻이 잘못이다. 또 대인(大人)이라고 말함은 오로지 구5(九五)와 구2(九二)에만 있지는 않기 때문에 《송괘(訟卦)》에 이르기를“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고, 《건괘(蹇卦)》에도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이는 大人이란 글월이 쓰는 곳이 넓음이다. 그러므로 왕보사(王輔嗣)의 주(注)에 구2(九二)를 말함이니, 이 대인(大人)은 구5(九五)를 오로지 함[가리킴]은 아니다.」
○注「處於地上」至「唯二五焉」。
○【왕필 주(王弼 注)】의 [처어지상(處於地上)]에서 [유이오언(唯二五焉)]까지.
○正義曰:「處於地上,故曰在田」者,先儒以為重卦之時,重於上下兩體,故初與四相應,二與五相應,三與上相應。是上下兩體,論天地人各別,但《易》含萬象,為例非一。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땅 위에 처하기 때문에 밭에 있다 말했다[處於地上 故曰在田]라고 한 것은, 옛 유학자[先儒]가 괘(卦)를 거듭한 때에는, 위아래 두 몸체[體]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초효(初爻)와 4효(四爻)가 서로 응하고, 2효(二爻)와 5효(五爻)가 서로 응하며, 3효(三爻)는 상효(上爻)와 서로 응하니, 이는 위와 아래 두 체(體)에 천.지.인(天‧地‧人)을 각각 나누어 논함인데, 다만 《주역(周易)》은 만 가지 모습[象]을 포함하기에 예(例)로 삼은 한 가지는 아니다.
及其六位,則一、二為地道,三、四為人道,五、上為天道。二在一上,是九二處其地上,所田食之處,唯在地上,所以稱「田」也。
그 여섯 자리에 미치면 1(一)과 2(二)는 지도(地道)가 되고 3(三)과 4(四)는 인도(人道)가 되며 5(五)와 상(上)은 천도(天道)가 된다. 2(二)가 1(一)의 위에 있으니, 이는 구2효(九二)가 땅 위에 처함인데, 밭[田]은 식량을 생산하는 곳인 바이니 오직 땅 위에 있으니 밭[田]이라고 칭한 까닭이다.” 하였다.
觀輔嗣之注意,唯取地上稱田,諸儒更廣而稱之,言田之耕稼利益,及於萬物,盈滿有益於人,猶若聖人益於萬物,故稱「田」也。
왕보사(王輔嗣)의 【왕필 주(王弼 注)】의 뜻을 보면, 오직 지상(地上)을 취하여 밭[田]이라 칭하였는데, 여러 유학자들은 다시 넓게 고쳐서 칭하기를 “밭의 갈고 심는 이익이 만물(萬物)에 미쳐서 가득차니 사람에게 유익하며, 마치 성인(聖人)이 만물(萬物)에게 더해짐과 같기 때문에 밭[田]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德施周普」者,下《小象》文,謂周而普遍。「居中不偏」者,九二居在下卦之中,而於上於下,其心一等,是「居中不偏」也。不偏則周普也。「雖非君位」者,二為大人,己居二位,是非君位也。「君之德」者,以德施周普也。
[덕시주보(德施周普)]라는 것은, 아래 《소상전(小象)》의 글에 두루 하여서 넓리 미친다고 하였다. [거중불편(居中不偏)]이라는 것은, 구2효(九二)가 하괘(下卦)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위와 아래가 그 마음이 한 가지이니, 이는 가운데에 거주하여 편벽되지 않음니 편벽되지 않으면 두루 하여 넓음이다. [수비군위(雖非君位)]라는 것은 2효(二)가 대인(大人)이 되었으나 자기가 2효(二)의 자리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군주의 지위가 아니다. [군지덕(君之德)]이라는 것은, 그로써 덕(德)의 베풂이 두루 넓음이다.
《文言》云:「德博而化。」又云:「君德也。」是九二有人君之德也。「初則不彰」者,謂潛隱不彰顯也。「三則乾乾」者,危懼不安也。「四則或躍」者,謂進退懷疑也。「上則過亢」,過謂過甚,亢謂亢極。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덕(德)이 넓어서 달라진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주의 덕(德)이다.”고 하였으며, 이는 구2효(九二)가 군주 된 사람의 덕(德)이 있음이다. [초즉부창(初則不彰)]이라는 것은, 잠기고 숨어서 드러나지 못함을 일컬음이다. [삼즉건건(三則乾乾)]이라는 것은, 위태롭고 두려워 편안하지 못함이다. [사즉혹약(四則或躍)]이라는 것은, 나가고 물러남에 의심이 있음을 말함이다. [상즉과항(上則過亢)]이라는 것은, 과(過)는 지나침이 심함을 말하고, 항(亢)은 높음이 다했음을 일컫는다.
「利見大人,唯二五焉」者,言範模乾之一卦,故云「唯二五焉」。於別卦言之,非唯二五而己。故訟卦、蹇卦並云「利見大人」,所以施處廣,非唯二五也。
[이견대인 유이오언(利見大人 唯二五焉)]이라는 것은, 건(乾)의 한 괘(卦)를 모범으로 말 하였기 때문에 이르기를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라고 하였다. 다른 괘(卦)에서 말할 적에는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송괘(訟卦)와 건괘(蹇卦)에 모두 이르기를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쓰는 곳이 넓은 까닭이며 오직 2효(二爻)와 5효(五爻)뿐만이 아니다.
諸儒以為九二當太蔟之月,陽氣發見,則九三為建辰之月,九四為建午之月,九五為建申之月,為陰氣始殺,不宜稱「飛龍在天」。
여러 유학자들은 “구2(九二)가 태주(太蔟)의 달[정월]에 해당하여 양기(陽氣)가 발현함으로 여겼으니, 그렇다면 구3(九三)은 건진(建辰)의 달[3월]이 되고 구4(九四)는 건오(建午)의 달[5월]이 되며, 구5(九五)는 건신(建申)의 달[7월]이 되는데, 음기(陰氣)가 처음 [사물을] 죽이게 되므로, “용(龍)이 하늘에 있다.”고 칭함이 마땅하지 않다.
上九為建戌之月,群陰既盛,上九不得言「與時偕極」。於此時陽氣僅存,何極之有?諸儒此說,於理稍乖。
상구(上九)는 건술(建戌)의 달[9월]이 되니, 여러 음(陰)이 이미 성하므로, 상구(上九)에서 “때와 더블어 함께 지극하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이때에는 양기(陽氣)가 겨우 보존되어 있으니, 어찌 지극함이 있겠는가? 여러 유학자들의 이 설(說)은 이치에 다소 어긋난다.
此乾之陽氣漸生,似聖人漸出,宜據十一月之後。至建巳之月已來,此九二當據建丑、建寅之間,於時地之萌牙初有出者,即是陽氣發見之義。乾卦之象,其應然也。
이 건(乾)의 양기(陽氣)가 점점 생겨남은 성인(聖人)이 점점 나옴을 닮아서 마땅히 11월의 뒤에 의거한다. 건사(建巳)의 달[4월]이 이미 와서 이르렀으니, 이는 구2(九二)가 마땅히 건축(建丑;12월)과 건인(建寅;정월)의 사이에 의거 해야 마땅하며, 이때에 땅속에 있는 초목의 싹이 처음 나오는 것이 있으니, 곧 이는 양기(陽氣)가 발현하는 뜻이며, 건괘(乾卦)의 모습[象]이 당연히 그러함이다.
但陰陽二氣,共成歲功,故陰興之時,仍有陽在,陽生之月,尚有陰存。所以六律六呂,陰陽相間,取象論義,與此不殊。
다만 음(陰)과 양(陽) 두 기운이 함께 한 해의 공을 이루기 때문에 음(陰)이 일어날 때에 그대로 양(陽)이 남아 있고, 양(陽)이 생겨나는 달에 오히려 음(陰)이 있기도 한다. 육율(六律)과 육려(六呂)는 음(陰)과 양(陽)이 서로 사이하여 있는 까닭이니, 모습[象]을 취하여 뜻[義]을 논함이 이와 다르지 않다.
乾之初九,則與復卦不殊。乾之九二,又與臨卦無別。何以復、臨二卦與此不同者,但《易》論象,復、臨二卦,既有群陰見象於上,即須論卦之象義,各自為文。
건괘(乾卦)의 초9(初九)는 복괘(復卦)와 다르지 않고, 건괘(乾卦)의 구2(九二)는 임괘(臨卦)와 분별이 없는데, 어찌하여서 복괘(復卦)와 임괘(臨卦) 두 괘(卦)는 이와 더블어 한같지 않은 것은, 다만 《주역(周易)》은 모습[象]을 논하였는데, 복괘(復卦)와 임괘(臨卦) 두 괘(卦)는 이미 여러 음(陰)이 위에서 나타난 모습[象]이 있으니 즉 모름지기 괘(卦)의 모습[象]과 뜻(義)을 논해야 하는바, 각각 스스로 글월이 되었음이다.
此乾卦初九、九二,只論居位一爻,無群陰見象,故但自明當爻之地,為此與臨、復不同。
이 건괘(乾卦)의 초9(初九)와 구2(九二)는 단지 자리에 거주한 한 효(爻)만을 논하였고, 여러 음(陰)이 나타난 모습[象]이 없기 때문에 다만 마땅한 효(爻)의 땅[자리]을 밝혔으니, 이는 임괘(臨卦)‧복괘(復卦)가 더블어 같지 않게 되었음이다.
九三,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厲 無咎.
구삼효는 군자는 종일 부지런히 노력하고, 저녁에도 두려운 듯이 하면 위태하더라도 허물은 없다.
【王弼 注】 處下體之極,居上體之下,在不中之位,履重剛之險。上不在天,未可以安其尊也。下不在田,未可以寧其居也。純修下道,則居上之德廢;純修上道,則處下之禮曠。故終日乾乾,至於夕惕猶若厲也。居上不驕,在下不憂,因時而惕,不失其幾,雖危而勞,可以无咎。處下卦之極,愈於上九之亢,故竭知力而後免於咎也。乾三以處下卦之上,故免亢龍之悔。坤三以處下卦之上,故免龍戰之災。
【왕필 주】 하괘의 몸체의 끝에 처하고 상괘에 머물러 몸이 하괘로 하며, 가운데[中]가 아닌 자리에서 거듭된 굳셈의 험함을 밟았다.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아 그 높음을 편안히 할 수 없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아 그 거처를 편히 여길 수 없다. 아래의 도를 순수하게 닦으면 위에 머무는 덕이 없어지고, 위의 도를 순수하게 닦으면 아래에 거처하는 격식[體]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서 저녁에 이르도록 두려워하는 것이 오히려 닦달하는 듯 하다. 위에 머물면서 교만하지 않고 아래에 있어도 우려하지 않으며 때를 인하면서 두려워하고 거의 잃지 않으며 비록 위태하지만 수고하니 허물 없음으로 할 수 있다. 아래 괘의 꼭대기에 처하고 상구의 높은데 보다 낫기 때문에 지혜와 힘을 다한 이후에 허물을 면한다. 건괘의 삼효로서 아래 괘의 위에 처하기 때문에 높은 용의 후회를 면한다. 곤괘의 삼효로서 아래괘의 위에 처하기 때문에 용이 싸우는 재앙을 면한다.
【孔穎達 疏】「九三君子」至「夕惕若厲無咎」。○正義曰:以陽居三位,故稱「九三」;以居不得中,故不稱「大人」;陽而得位,故稱君子。在憂危之地,故「終日乾乾」,言每恒終竟此日,健健自強,勉力不有止息。「夕惕」者,謂終竟此日後,至向夕之時,猶懷憂惕。「若厲」者,若,如也;厲,危也。言尋常憂懼,恒如傾危,乃得無咎。謂既能如此戒慎,則無罪咎,如其不然,則有咎。故《繫辭》云:「無咎者,善補過也。」此一爻,因陽居九三之位,皆以人事明其象。○注「處下體之極」至「免龍戰之災」。○正義曰:「處下體之極」者,極,終也。三是上卦之下,下體之極,故云「極」也。又云:「居上體之下」者,四、五與上是上體,三居四下,未入上體,但居上體之下,四則已入上體,但居其上體之下,故九四注云「居上體之下」,與此別也。云「履重剛之險」者,上下皆有陽爻,剛強好為險難,故云「履重剛之險」。云「上不在天,未可以安其尊」者,若在天位,其尊自然安處,在上卦之下,雖在下卦之上,其尊未安,故云「未可以安其尊」也。「下不在田,未可以甯其居」者,田是所居之處,又是中和之所,既不在田,故不得安其居。「純脩下道,則居上之德廢」者,言若純脩下道以事上卦,則己居下卦之上,其德廢壞,言其太卑柔也。「純脩上道,則處下之禮曠」者,曠謂空曠,言已純脩居下卦之上道以自驕矜,則處上卦之下,其禮終竟空曠。「夕惕猶若厲也」者,言雖至於夕,恒懷惕懼,猶如未夕之前,當若厲也。案:此卦九三所居之處,實有危厲。又《文言》云:「雖危無咎。」是實有危也。據其上下文勢,「若」字宜為語辭,但諸儒並以「若」為「如」,如似有厲,是實無厲也,理恐未盡。今且依「如」解之。「因時而惕,不失其幾」者,「因時」謂因可憂之時,故《文言》云「因時而惕」,又云「知至至之,可與幾也」。是「因時而惕,不失其幾」也。「雖危而勞」者,「若厲」是「雖危」,「終日乾乾」是「而勞」也。「故竭知力而後免於咎」者,王以九三與上九相並,九三處下卦之極,其位猶卑,故竭知力而得免咎也。上九在上卦之上其位極尊,雖竭知力,不免亢極,言下勝於上,卑勝於尊。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3효 군자(九三君子)부터 석사약여무구(夕惕若厲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양(陽)으로써 3효(三)의 자리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구3(九三)이라 칭하였고, 거주한 데가 가운데[中]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인(大人)이라 칭하지 않았으며, 양(陽)이면서 자리를 얻었기 때문에 군자(君子)라고 칭하였다.
위태로운 땅에 근심이 있기 때문에 종일 애태우며 노력하[終日乾乾]니, 매번 항상 마침내 이 날을 마치도록 더욱 굳세게 스스로 강하게 힘써 노력하여 그치지 않음을 말함이다.
석척(夕惕)이라는 것은, 마침내 이 날을 마친 뒤에 저녁을 향할 때에 이르러도 오히려 근심과 두려움을 품음을 일컬음이다.
약려(若厲)라는 것의, 약(若)은 같음이고, 여(厲)는 위태로움이며, 항상 근심과 두려움을 찾고 항상 기울고 위태로운 듯이 하며, 이에 허물 없음을 얻음이니, 이미 이와 같이 경계하고 삼가함을 잘하면 죄(罪)와 허물이 없으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허물이 있음을 말함이다.
그러므로〈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허물이 없다는 것은, 잘못을 잘 보충함이다.”고 하였다.
이 한 효(爻)는 양(陽)이 구3(九三)의 자리에 거주함을 인하여 모두 사람의 일로써 그 모습(象)을 밝혔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처하체지극(處下體之極)]에서 [면용전지재(免龍戰之災)]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아래 몸의 꼭대기에 처한다[處下體之極]는 것은, 극(極)은 마침이며, 3효(三爻)는 바로 상괘(上卦)의 아래이고 하체(下體)의 꼭대기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꼭대기[極]’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한다.’는 것은, 4효(四爻)와 5효(五爻)가 상효(上爻)에 더블어 바로 상체(上體)이고, 3효(三爻)는 4효(四爻)의 아래에 거주하며, 아직 상체(上體)에 들어가지 않고 단지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하며, 4효(四爻)는 이미 상체(上體)에 들어갔는데 다만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구4(九四)의 주(注)에 이르기를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했다.”고 함이 이와 다른 것이다.
이르기를 “거듭 굳셈의 험함을 밟는다[履重剛之險].”는 것은, 위와 아래에 모두 양효(陽爻)가 있으니, 굳세고 강하여 험한 어려움을 실천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거듭 굳셈의 험함을 밟는다[履重剛之險].”라고 하였다.
이르기를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아 그 높음을 편안하게 할 수 없다[上不在天 未可以安其尊].”는 것은, 만약 하늘의 자리에 있으면 그 높음이 자연히 편안하게 처하지만, 상괘(上卦)의 아래에 있어서 비록 하괘(下卦)의 위에 있지만 그 높음이 아직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그 높음을 편안하게 할 수 없다[未可以安其尊].”라고 말하였다.
“아래로 밭에 있지 않아 그 거처를 편안히 할 수 없다[下不在田 未可以寧其居].“는 것은, 밭[田]은 바로 거주하는 바의 곳이고 또 이는 어울리는 가운데의 자리인데, 이미 밭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거처가 편안함을 얻지 못함이다.
“아래의 도를 순수하게 닦으면 위에 거주하는 덕이 없어진다[純脩下道 則居上之德廢].“라는 것은, 만약 순수하게 아래의 도(道)를 닦아서 그로써 상괘(上卦)를 섬기면 자기가 하괘(下卦)의 위에 거주하여 그 덕德)이 폐하고 무너짐을 말함이니, 그가 크게 낮추고 부드러움을 말함이다.
“위의 도를 순수하게 닦으면 아래에 거처하는 예(예)가 사라진다[純脩上道 則處下之禮曠].”라는 것은, 광(曠, 빌 광)은 텅 빔을 일컬으며, 자기가 순수하게 하괘(下卦)의 위에 거주하는 도(道)를 닦아서 그로써 스스로 교만하고 자랑하면 상괘(上卦)의 아래에 처하여 그 예(禮)를 끝마침이 마침내 텅 비게 됨을 말함이다.
“저녁을 두려워 함이, 위태로운 듯 함과 같다[夕惕猶若厲也].”라는 것은, 비록 저녁에 이르러도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함을 품어서 저녁이 되기 전과 같이 하여 항상 위태로운 듯이 함을 말함이다.
살펴보건대, 이 괘(卦)의 구3(九三)이 거처한 바의 곳은 실로 매우 위태로움이 있고, 또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 하였으니, 이는 실제로는 위태로움이 있음이다.
그 위와 아래 글의 형세의 근거(根據)는, 약(若)자는 마땅히 어조사가 되어야 하는데, 다만 여러 유학자들이 모두 약(若)을 가지고 여(如)라고 하여, “위태로움이 있음을 닮은 듯 하나 이는 실제로 위태로움이 없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치가 아마도 미진하지만 지금 또 여(如)에 의거해서 풀이를 한다.
“때를 인하여서 두려워하여 그 기미를 잃지 않는다[因時而惕 不失其幾].”라고 한 것은, 인시(因時)는 두려워할 수 있는 때를 따름을 말함이기 때문에,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때를 따라 두려워 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를 데를 알고 이르러 가니, 더불어 기미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이는 때를 따라서 두려워하면 그 기미를 잃지 않음이다.
“비록 위태하지만 노력한다[雖危而勞].”라는 것은, 약려(若厲)가 이 비록 위태함[雖危]이고, “종일 애태우며 노력함[終日乾乾].”은 바로 이 이로(而勞)이다.
“그러므로 지혜와 힘을 다한 이후에 허물을 면한다[故竭知力而後免於咎].”는 것은, 바로 그로써 구3(九三)이 상구(上九)와 더블어 서로 아우르니, 구3(九三)은 하괘(下卦)의 꼭대기에 처하여 그 자리가 오히려 낮기 때문에 지혜와 힘을 다하면 허물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상구(上九)는 상괘(上卦)의 위에 있어서 그 자리가 지극히 높으니 비록 지혜와 힘을 다하여도 높은 꼭대기[亢極]를 면하치 못하는데, 아래가 위를 이기고 낮음이 높음을 이김을 말함이다.
[孔穎達 疏]‘九三君子’至‘夕惕若厲无咎’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3효 군자(九三君子)부터 석사약여무구(夕惕若厲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以陽居三位, 故稱‘九三’. 以居不得中, 故不稱‘大人’. 陽而得位, 故稱‘君子’.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양(陽)으로써 3효(三)의 자리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구3(九三)이라 칭하였고, 거주한 데가 가운데[中]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인(大人)이라 칭하지 않았으며, 양(陽)이면서 자리를 얻었기 때문에 군자(君子)라고 칭하였다.
在憂危之地, 故‘終日乾乾’, 言每恒終竟此日, 健健自强勉力, 不有止息.
위태로운 땅에 근심이 있기 때문에 종일 애태우며 노력하[終日乾乾]니, 매번 항상 마침내 이 날을 마치도록 더욱 굳세게 스스로 강하게 힘써 노력하여 그치지 않음을 말함이다.
‘夕惕’者, 謂終竟此日後, 至向夕之時, 猶懷憂惕. ‘若厲’者, 若, 如也, 厲, 危也, 言尋常憂懼, 恒如傾危, 乃得无咎, 謂旣能如此戒愼, 則无罪咎, 如其不然, 則有咎.
석척(夕惕)이라는 것은, 마침내 이 날을 마친 뒤에 저녁을 향할 때에 이르러도 오히려 근심과 두려움을 품음을 일컬음이다.
약려(若厲)라는 것의, 약(若)은 같음이고, 여(厲)는 위태로움이며, 항상 근심과 두려움을 찾고 항상 기울고 위태로운 듯이 하며, 이에 허물 없음을 얻음이니, 이미 이와 같이 경계하고 삼가함을 잘하면 죄(罪)와 허물이 없으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허물이 있음을 말함이다.
故繫辭云“无咎者, 善補過也.”
그러므로〈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허물이 없다는 것은, 잘못을 잘 보충함이다.”고 하였다.
此一爻因陽居九三之位, 皆以人事明其象.
이 한 효(爻)는 양(陽)이 구3(九三)의 자리에 거주함을 인하여 모두 사람의 일로써 그 모습(象)을 밝혔다.
○注‘處下體之極’至‘免龍戰之災’
○ 【왕필 주(王弼 注)】의 [처하체지극(處下體之極)]에서 [면용전지재(免龍戰之災)]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處下體之極’者, 極, 終也, 三是上卦之下, 下體之極, 故云極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아래 몸의 꼭대기에 처한다[處下體之極]는 것은, 극(極)은 마침이며, 3효(三爻)는 바로 상괘(上卦)의 아래이고 하체(下體)의 꼭대기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꼭대기[極]’라고 하였다.
又云‘居上體之下’者, 四五與上是上體, 三居四下, 未入上體, 但居上體之下, 四則已入上體, 但居其上體之下, 故九四注云“居上體之下.”與此別也.
또 이르기를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한다.’는 것은, 4효(四爻)와 5효(五爻)가 상효(上爻)에 더블어 바로 상체(上體)이고, 3효(三爻)는 4효(四爻)의 아래에 거주하며, 아직 상체(上體)에 들어가지 않고 단지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하며, 4효(四爻)는 이미 상체(上體)에 들어갔는데 다만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구4(九四)의 주(注)에 이르기를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했다.”고 함이 이와 다른 것이다.
云‘履重剛之險’者, 上下皆有陽爻, 剛强好爲險難, 故云“履重剛之險”.
이르기를 “거듭 굳셈의 험함을 밟는다[履重剛之險].”는 것은, 위와 아래에 모두 양효(陽爻)가 있으니, 굳세고 강하여 험한 어려움을 실천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거듭 굳셈의 험함을 밟는다[履重剛之險].”라고 하였다.
云‘上不在天 未可以安其尊’者, 若在天位, 其尊自然安處, 在上卦之下, 雖在下卦之上, 其尊未安, 故云“未可以安其尊”也.
이르기를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아 그 높음을 편안하게 할 수 없다[上不在天 未可以安其尊].”는 것은, 만약 하늘의 자리에 있으면 그 높음이 자연히 편안하게 처하지만, 상괘(上卦)의 아래에 있어서 비록 하괘(下卦)의 위에 있지만 그 높음이 아직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그 높음을 편안하게 할 수 없다[未可以安其尊].”라고 말하였다.
‘下不在田 未可以寧其居’者, 田是所居之處, 又是中和之所, 旣不在田, 故不得安其居.
“아래로 밭에 있지 않아 그 거처를 편안히 할 수 없다[下不在田 未可以寧其居].“는 것은, 밭[田]은 바로 거주하는 바의 곳이고 또 이는 어울리는 가운데의 자리인데, 이미 밭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거처가 편안함을 얻지 못함이다.
‘純脩下道 則居上之德廢’者, 言若純脩下道以事上卦, 則己居下卦之上, 其德廢壞, 言其太卑柔也.
“아래의 도를 순수하게 닦으면 위에 거주하는 덕이 없어진다[純脩下道 則居上之德廢].“라는 것은, 만약 순수하게 아래의 도(道)를 닦아서 그로써 상괘(上卦)를 섬기면 자기가 하괘(下卦)의 위에 거주하여 그 덕德)이 폐하고 무너짐을 말함이니, 그가 크게 낮추고 부드러움을 말함이다.
‘純脩上道 則處下之禮曠’者, 曠謂空曠, 言己純脩居下卦之上道, 以自驕矜, 則處上卦之下, 其(相)[禮]終竟空曠.
“위의 도를 순수하게 닦으면 아래에 거처하는 예(예)가 사라진다[純脩上道 則處下之禮曠].”라는 것은, 광(曠, 빌 광)은 텅 빔을 일컬으며, 자기가 순수하게 하괘(下卦)의 위에 거주하는 도(道)를 닦아서 그로써 스스로 교만하고 자랑하면 상괘(上卦)의 아래에 처하여 그 예(禮)를 끝마침이 마침내 텅 비게 됨을 말함이다.
‘夕惕猶若厲也’者, 言雖至於夕, 恒懷惕懼, 猶如未夕之前, (當)[常]若厲也.
“저녁을 두려워 함이, 위태로운 듯 함과 같다[夕惕猶若厲也].”라는 것은, 비록 저녁에 이르러도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함을 품어서 저녁이 되기 전과 같이 하여 항상 위태로운 듯이 함을 말함이다.
案, 此卦九三所居之處, 實有危厲, 又文言云“雖危无咎.” 是實有危也.
살펴보건대, 이 괘(卦)의 구3(九三)이 거처한 바의 곳은 실로 매우 위태로움이 있고, 또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 하였으니, 이는 실제로는 위태로움이 있음이다.
據其上下文勢, 若字宜爲語辭, 但諸儒竝以若爲如, “如似有厲, 是實无厲也.” 理恐未盡, 今且依如解之.
그 위와 아래 글의 형세의 근거(根據)는, 약(若)자는 마땅히 어조사가 되어야 하는데, 다만 여러 유학자들이 모두 약(若)을 가지고 여(如)라고 하여, “위태로움이 있음을 닮은 듯 하나 이는 실제로 위태로움이 없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치가 아마도 미진하지만 지금 또 여(如)에 의거해서 풀이를 한다.
‘因時而惕 不失其幾’者, 因時謂因可憂之時, 故文言云“因時而惕.” 又云“知至至之, 可與幾也.” 是因時而惕, 不失其幾也.
“때를 인하여서 두려워하여 그 기미를 잃지 않는다[因時而惕 不失其幾].”라고 한 것은, 인시(因時)는 두려워할 수 있는 때를 따름을 말함이기 때문에,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때를 따라 두려워 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를 데를 알고 이르러 가니, 더불어 기미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이는 때를 따라서 두려워하면 그 기미를 잃지 않음이다.
‘雖危而勞’者, 若厲是雖危, ‘終日乾乾’, 是而勞也.
“비록 위태하지만 노력한다[雖危而勞].”라는 것은, 약려(若厲)가 이 비록 위태함[雖危]이고, “종일 애태우며 노력함[終日乾乾].”은 바로 이 이로(而勞)이다.
‘故竭知力而後免於咎’者, (王)[正]以九三與上九相竝, 九三處下卦之極, 其位猶卑, 故竭知力而得免咎也.
“그러므로 지혜와 힘을 다한 이후에 허물을 면한다[故竭知力而後免於咎].”는 것은, 바로 그로써 구3(九三)이 상구(上九)와 더블어 서로 아우르니, 구3(九三)은 하괘(下卦)의 꼭대기에 처하여 그 자리가 오히려 낮기 때문에 지혜와 힘을 다하면 허물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上九在上卦之上, 其位極尊, 雖竭知力, 不免亢極, 言下勝於上, 卑勝於尊.
상구(上九)는 상괘(上卦)의 위에 있어서 그 자리가 지극히 높으니 비록 지혜와 힘을 다하여도 높은 꼭대기[亢極]를 면하치 못하는데, 아래가 위를 이기고 낮음이 높음을 이김을 말함이다.
九四, 或躍在淵, 無咎.
구사효는 혹 못에 있으면서 뛰어오른다. 허물은 없다.
【王弼 注】 去下體之極,居上體之下,乾道革之時也。上不在天,下不在田,中不在人,履重剛之險,而无定位所處,斯誠進退无常之時也。近乎尊位,欲進其道,迫乎在下,非躍所及。欲靜其居,居非所安,持疑猶豫,未敢決志。用心存公,進不在私,疑以為慮,不謬於果,故无咎也。
【왕필 주】 하괘의 몸체의 끝을 떠나서 상괘 몸체의 아래에 거주하며, 건의 도는 개혁의 때이다. 상괘가 하늘에 있지 않고 하괘가 밭에 있지 않으며 가운데에 사람이 있지 않아서 거듭된 굳셈의 험함을 밟았는데, 일정한 자리에 처한 것이 없고 이를 이루고자 함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항상의 때가 없다.
높은 자리에 가까우면 그 도(道)에 나아가기를 바라면 아래에 있으면서 핍박받아 뛰어올라 미칠 곳이 아니다. 그 거처가 고요하기를 바라는데 거처가 편안한 곳이 아니면 의심을 가지고 오히려 예비하여 감히 뜻을 결정하지 못한다. 마음 쓰임이 공적임에 있고 나아감은 사사로움에 있지 않으며 의심으로서 우려(憂慮)하여 결과에 그르치지 않기때문에 허물이 없다.
【孔穎達 疏】「九四:或躍在淵,無咎」。
○正義曰:「或,疑也。躍,跳躍也。言九四陽氣漸進,似若龍體欲飛,猶「疑或」也。躍於在淵,未即飛也。此自然之象,猶若聖人位漸尊高欲進於王位,猶豫鷃疑,在於故位,未即進也。云:「無咎」者,以其鷃疑進退,不即果敢以取尊位,故「無咎」也。若其貪利務進,時未可行而行,則物所不與,故有咎也。若周西伯內執王心,外率諸侯以事紂也。
○注「去下體之極」至「無咎也」。
○正義曰:「去下體之極」者,離下體入上體,但在下體之上,故云「去下體之極」。注九三云「處下體之極」,彼仍處九三,與此別也。云「乾道革之時」者,革,變也。九四去下體入上體,是乾道革之時。云「上不在天,下不在田,中不在人」者,《易》之為體,三與四為人道,人近在下,不近於上,故九四云「中不在人」,異於九三也。云「而無定位所處」者,九四以陽居陰上,既不在於天,下復不在於地,中又不當於人,上下皆無定位所處也。「斯誠進退無常之時」者,《文言》云「上下無常」、「進退無恒」是也。「欲進其道,迫乎在下,非躍所及」者,謂欲進已聖道而居王位,但逼迫於下,群眾未許,非己獨躍所能進及也。「欲靜其居,居非所安,持疑猶豫,未敢決志」者,謂志欲靜其居處,百姓既未離禍患,須當拯救,所以不得安居,故遲疑猶豫,未敢決斷其志而苟進也。「用心存公,進不在私」者,本為救亂除患,不為於己,是進不在私也。「疑以為慮,不謬於果」者,謬謂謬錯,果謂果敢;若不思慮,苟欲求進,當錯謬於果敢之事,而致敗亡;若疑惑以為思慮,則不錯謬於果敢之事。其錯謬者,若宋襄公與楚人戰而致敗亡是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4(九四)효 혹약재연무구(或躍在淵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혹(或)은 의심함이다. 약(躍)은 뛰어 오름이다. 구4(九四)효의 양기(陽氣)가 점점 나아가니, 용(龍)의 몸과 같이 닮아서 날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혹 의심함을 말함이다.
못에 있으며 뛰어오름은 아직은 날지 못함이다. 이는 자연의 모습[象]이니, 오히려 성인(聖人)의 지위가 점점 높아져서 왕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미리 의심을 품으며 옛날 자리에 있어서 곧 나아가지 않음과 같다.
이르기를 "허물 없음(无咎)"이라는 것은, 그로써 의심을 품으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곧 과감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물이 없음이다.
만약 그 이익을 탐하고 나아감에 힘써서 때가 아직 행할 수 없는데도 행하면, 사물이 함께 하지 않는 바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
주(周)나라 서백(西伯)이 안으로 왕(王)의 마음을 가지고 밖으로 제후를 거느리며 그로써 주왕(紂王)을 섬긴 것과 같음이다.」
○【왕필 주(王弼 注)】의 {거하체지극(去下體之極)에서 무구야(无咎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아래 몸[下體]의 꼭대기를 떠남[去下體之極]."이라는 것은, 아래 몸[下體]을 떠나서 윗 몸[上體]에 들어감인데 다만 아래 몸의 위에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아래 몸의 꼭대기를 떠남"이라고 하였다.
구3(九三)의 주(注)에 이르기를 “아래 몸[下體]의 꼭대기에 처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것은 그대로 구3(九三)에 처하니 이것과는 다르다.
이르기를 "건의 도는 변하는 때이다[乾道革之時]."라는 것은, 혁(革)은 변함이며, 구4(九四)가 아래 몸[下體]를 떠나 윗 몸[上體]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건(乾)의 도(道)가 바뀌는 때이다.
이르기를 “위가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가 밭에 있지 않으며 가운데가 사람에 있지 않다[上不在天 下不在田 中不在人].”는 것은, 《주역(周易)》의 몸체[體]가 되는데 3효(三爻)와 4효(四爻)는 사람의 도(道)가 되며, 사람이 아래에 가까이 있고 위에 가깝지 않기 때문에 구4(九四)에 이르기를 “가운데에 사람이 있지 않다.[中不在人]”라고 하여 구3(九三)과는 다르다.
이르기를 “그리고 일정한 자리에 처한 바가 없다.[而无定位所處]”는 것은, 구4(九四)가 양(陽)으로써 음(陰)의 자리에 거주하고, 위로 나아가 하늘에 있지 않으며 아래로는 다시 땅에 있지 않고 가운데로는 또 사람에 해당되지 않으니, 위와 아래에 모두 일정한 자리로 처한 바가 없음이다.
“이를 이루고자 함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항상함의 때가 없다.[斯誠進退无常之時]”라는 것은,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오르내림이 일정함이 없다.”라고 함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항상함이 없다.”고 하였음이 이것이다.
“그 도(道)에 나아가기를 바라면 아래에 있으면서 핍박받아 뛰어올라서 미칠 곳이 아니다.[欲進其道 迫乎在下 非躍所及]”라는 것은, 자기의 성스러운 도(道)에 나아가면서 왕의 자리에 거주하기를 바라는데, 다만 아래에 핍박을 받고 여러 무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자기 홀로 도약하여 잘 나아가 미칠 곳이 아님을 일컬음이다.
“그 거처가 고요하기를 바라는데 거처가 편안한 곳이 아니면 의심을 가지고 오히려 예비하니, 감히 뜻을 결정하지 못한다.[欲靜其居 居非所安 持疑猶豫 未敢決志]”라는 것은, 뜻은 그 사는 곳을 고요히 하고자 하나 여러 성[百姓]들이 이미 재앙(災殃)과 근심을 떠나지 못했으니 모름지기 마땅히 구원하여 건져야 하며, 편안한 거처를 얻지 못하는 까닭이기 때문에 머뭇거리며 의심하고 오히려 예비해서 감히 그 뜻을 결단하여 진실로 나아가지 못함이다.
“마음 씀은 공적인데 있고 나아감은 사사로움에 있지 않다.[用心存公 進不在私]”는 것은, 본래 어지러움을 구제하고 근심을 제거하기 위함이며, 자기를 위함이 아니니, 이는 나아감이 사사로움에 있지 않음이다.
“의심하여 그로써 염려하게 되어 과감함에 그르치지 않는다.[疑以爲慮 不謬於果]”는 것은, 류(謬, 그르칠 류)는 잘못됨을 일컬으며 과(果)는 과감함을 일컫는데, 만약 깊이 사려하지 않고 진실로 나아가 구하기를 바라면 마땅히 과감한 일에 어긋나 그르쳐서 패망에 이르게 되며, 만약 의혹하여 그로써 깊이 생각하면 과감한 일에 어긋나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 어긋나 그르침이라는 것은, 송(宋)나라 양공(襄公)이 초(楚)나라 사람과 싸워서 패망에 이르게 되었음이 이것이다.」
[孔穎達 疏]‘九四或躍在淵无咎’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4(九四)효 혹약재연무구(或躍在淵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或’, 疑也. ‘躍’, 跳躍也. 言九四陽氣漸進, 似若龍體欲飛, 猶疑或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혹(或)은 의심함이다. 약(躍)은 뛰어 오름이다. 구4(九四)효의 양기(陽氣)가 점점 나아가니, 용(龍)의 몸과 같이 닮아서 날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혹 의심함을 말함이다.
躍於在淵, 未卽飛也. 此自然之象, 猶若聖人位漸尊高, 欲進於王位, 猶豫(遲)[持]疑, 在於故位, 未卽進也.
못에 있으며 뛰어오름은 아직은 날지 못함이다. 이는 자연의 모습[象]이니, 오히려 성인(聖人)의 지위가 점점 높아져서 왕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미리 의심을 품으며 옛날 자리에 있어서 곧 나아가지 않음과 같다.
云‘无咎’者, 以其(遲)[持]疑, 進退不卽果敢以取尊位, 故无咎也.
이르기를 "허물 없음(无咎)"이라는 것은, 그로써 의심을 품으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곧 과감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물이 없음이다.
若其貪利務進, 時未可行而行, 則物所不與, 故有咎也.
만약 그 이익을 탐하고 나아감에 힘써서 때가 아직 행할 수 없는데도 행하면, 사물이 함께 하지 않는 바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
若周西伯, 內執王心, 外率諸侯, 以事紂也.
주(周)나라 서백(西伯)이 안으로 왕(王)의 마음을 가지고 밖으로 제후를 거느리며 그로써 주왕(紂王)을 섬긴 것과 같음이다.」
○注‘去下體之極’至‘无咎也’
○【왕필 주(王弼 注)】의 {거하체지극(去下體之極)에서 무구야(无咎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去下體之極’者, 離下體, 入上體, 但在下體之上, 故云去下體之極.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아래 몸[下體]의 꼭대기를 떠남[去下體之極]."이라는 것은, 아래 몸[下體]을 떠나서 윗 몸[上體]에 들어감인데 다만 아래 몸의 위에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아래 몸의 꼭대기를 떠남"이라고 하였다.
注九三云“處下體之極.” 彼仍處九三, 與此別也.
구3(九三)의 주(注)에 이르기를 “아래 몸[下體]의 꼭대기에 처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것은 그대로 구3(九三)에 처하니 이것과는 다르다.
云‘乾道革之時’者, 革, 變也, 九四去下體, 入上體, 是乾道革之時.
이르기를 "건의 도는 변하는 때이다[乾道革之時]."라는 것은, 혁(革)은 변함이며, 구4(九四)가 아래 몸[下體]를 떠나 윗 몸[上體]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건(乾)의 도(道)가 바뀌는 때이다.
云‘上不在天 下不在田 中不在人’者, 易之爲體, 三與四爲人道, 人近在下, 不近於上, 故九四云“中不在人.” 異於九三也.
이르기를 “위가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가 밭에 있지 않으며 가운데가 사람에 있지 않다[上不在天 下不在田 中不在人].”는 것은, 《주역(周易)》의 몸체[體]가 되는데 3효(三爻)와 4효(四爻)는 사람의 도(道)가 되며, 사람이 아래에 가까이 있고 위에 가깝지 않기 때문에 구4(九四)에 이르기를 “가운데에 사람이 있지 않다.[中不在人]”라고 하여 구3(九三)과는 다르다.
云‘而无定位所處’者, 九四以陽居陰, 上旣不在於天, 下復不在於地, 中又不當於人, 上下皆无定位所處也.
이르기를 “그리고 일정한 자리에 처한 바가 없다.[而无定位所處]”는 것은, 구4(九四)가 양(陽)으로써 음(陰)의 자리에 거주하고, 위로 나아가 하늘에 있지 않으며 아래로는 다시 땅에 있지 않고 가운데로는 또 사람에 해당되지 않으니, 위와 아래에 모두 일정한 자리로 처한 바가 없음이다.
‘斯誠進退无常之時’者, 文言云“上下无常”, “進退无恒”, 是也.
“이를 이루고자 함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항상함의 때가 없다.[斯誠進退无常之時]”라는 것은,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오르내림이 일정함이 없다.”라고 함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항상함이 없다.”고 하였음이 이것이다.
‘欲進其道 迫乎在下 非躍所及’者, 謂欲進己聖道而居王位, 但逼迫於下, 群衆未許, 非己獨躍所能進及也.
“그 도(道)에 나아가기를 바라면 아래에 있으면서 핍박받아 뛰어올라서 미칠 곳이 아니다.[欲進其道 迫乎在下 非躍所及]”라는 것은, 자기의 성스러운 도(道)에 나아가면서 왕의 자리에 거주하기를 바라는데, 다만 아래에 핍박을 받고 여러 무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자기 홀로 도약하여 잘 나아가 미칠 곳이 아님을 일컬음이다.
‘欲靜其居 居非所安 持疑猶豫 未敢決志’者, 謂志欲靜其居處, 百姓旣未離禍患, 須當拯救, 所以不得安居, 故遲疑猶豫, 未敢決斷其志而苟進也.
“그 거처가 고요하기를 바라는데 거처가 편안한 곳이 아니면 의심을 가지고 오히려 예비하니, 감히 뜻을 결정하지 못한다.[欲靜其居 居非所安 持疑猶豫 未敢決志]”라는 것은, 뜻은 그 사는 곳을 고요히 하고자 하나 여러 성[百姓]들이 이미 재앙(災殃)과 근심을 떠나지 못했으니 모름지기 마땅히 구원하여 건져야 하며, 편안한 거처를 얻지 못하는 까닭이기 때문에 머뭇거리며 의심하고 오히려 예비해서 감히 그 뜻을 결단하여 진실로 나아가지 못함이다.
‘用心存公 進不在私’者, 本爲救亂除患, 不爲於己, 是進不在私也.
“마음 씀은 공적인데 있고 나아감은 사사로움에 있지 않다.[用心存公 進不在私]”는 것은, 본래 어지러움을 구제하고 근심을 제거하기 위함이며, 자기를 위함이 아니니, 이는 나아감이 사사로움에 있지 않음이다.
‘疑以爲慮 不謬於果’者, 謬謂謬錯, 果謂果敢, 若不思慮, 苟欲求進, 當錯謬於果敢之事, 而致敗亡, 若疑惑以爲思慮, 則不錯謬於果敢之事.
“의심하여 그로써 염려하게 되어 과감함에 그르치지 않는다.[疑以爲慮 不謬於果]”는 것은, 류(謬, 그르칠 류)는 잘못됨을 일컬으며 과(果)는 과감함을 일컫는데, 만약 깊이 사려하지 않고 진실로 나아가 구하기를 바라면 마땅히 과감한 일에 어긋나 그르쳐서 패망에 이르게 되며, 만약 의혹하여 그로써 깊이 생각하면 과감한 일에 어긋나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其錯謬者, 若宋襄公與楚人戰而致敗亡, 是也.
그 어긋나 그르침이라는 것은, 송(宋)나라 양공(襄公)이 초(楚)나라 사람과 싸워서 패망에 이르게 되었음이 이것이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구오효는 용(龍)이 날아서 하늘에 있다.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王弼 注】 不行不躍而在乎天,非飛而何?故曰飛龍也。龍德在天,則大人之路亨也。夫位以德興,德以位敘,以至德而處盛位,萬物之覩,不亦宜乎!
【왕필 주】 가지도 않고 뛰어오르지도 않는데 어찌 날지 않고서 하늘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룡(飛龍)이라 말했다. 용의 덕은 하늘에 있은 즉 대인의 길로 형통한다. 저 자리로서 덕이 일어나고 덕으로서 자리를 펼치며 그로서 덕에 이르러서 자리가 성대한 곳 만물이 보이고 마땅함이 또한 아니겠는가?
【孔穎達 疏】「九五」至「利見大人」。○正義曰:言九五陽氣盛至於天,故云「飛龍在天」。此自然之象,猶若聖人有龍德飛騰而居天位,德備天下,為萬物所瞻睹,故天下利見此居王位之大人。○注「龍德在天」。○正義曰:「龍德在天,則大人之路亨」,謂若聖人有龍德居在天位,則大人道路得亨通。猶若文王拘在羑里,是大人道路未亨也。「夫位以德興」者,位謂王位,以聖德之人能興王位也。「德以位敘」者,謂有聖德之人,得居王位,乃能敘其聖德。若孔子雖有聖德,而無其位,是德不能以位敘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5(九五)에서 이견대인(利見大人)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5(九五)는 양(陽)의 기운을 말하는데, 성대하여 하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르기를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라고 하였다.
이는 자연의 모습[象]이, 오히려 성인(聖人)이 용(龍)의 덕(德)을 지니고 날아올라서 천자의 지위에 거주하여, 덕(德)이 천하에 구비되어 만물(萬物)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천하가 이 왕의 자리에 거주를 하는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움이다.」
○【왕필 주(王弼 注)】의 "용덕재천(龍德在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용의 덕은 하늘에 있은 즉 대인의 길로 형통한다.[龍德在天 則大人之路亨]"라고 함은, 성인(聖人)이 용(龍)의 덕(德)을 지니고 천자 자리에 거주하고 있으면 대인(大人)의 도로가 형통함을 얻음과 같음을 일컬었는데, 오히려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구속되어 있음과 같은데, 이는 대인(大人)의 도로가 형통하지 않음이다.
"저 자리로서 덕이 일어난다.[夫位以德興]"는 것은, 위(位)는 왕의 자리[王位]를 일컫는데 성덕(聖德)의 사람으로써 왕의 자리를 잘 일으킴이다.
"덕으로서 자리를 펼친다.[德以位敍]"는 것은, 성덕(聖德)이 있는 사람이 왕의 지위[王位]에 거주함을 얻으니, 이에 그 성덕(聖德)을 잘 펼치는데, 공자(孔子)와 같이 비록 성덕(聖德)은 있으면서도 그 지위가 없으면, 이는 덕(德)을 지위로써 잘 펼지지 못함이다.」
[孔穎達 疏]‘九五’至‘利見大人’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5(九五)에서 이견대인(利見大人)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 言九五陽氣, 盛至於天, 故云“飛龍在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5(九五)는 양(陽)의 기운을 말하는데, 성대하여 하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르기를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라고 하였다.
此, 自然之象, 猶若聖人有龍德飛騰而居天位, 德備天下, 爲萬物所瞻覩, 故天下利見此居王位之大人.
이는 자연의 모습[象]이, 오히려 성인(聖人)이 용(龍)의 덕(德)을 지니고 날아올라서 천자의 지위에 거주하여, 덕(德)이 천하에 구비되어 만물(萬物)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천하가 이 왕의 자리에 거주를 하는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움이다.」
○注‘龍德在天’
○【왕필 주(王弼 注)】의 "용덕재천(龍德在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龍德在天 則大人之路亨’, 謂若聖人有龍德, 居在天位, 則大人道路得亨通, 猶若文王拘在羑里, 是大人道路未亨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용의 덕은 하늘에 있은 즉 대인의 길로 형통한다.[龍德在天 則大人之路亨]"라고 함은, 성인(聖人)이 용(龍)의 덕(德)을 지니고 천자 자리에 거주하고 있으면 대인(大人)의 도로가 형통함을 얻음과 같음을 일컬었는데, 오히려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구속되어 있음과 같은데, 이는 대인(大人)의 도로가 형통하지 않음이다.
‘夫位以德興’者, 位謂王位, 以聖德之人, 能興王位也.
"저 자리로서 덕이 일어난다.[夫位以德興]"는 것은, 위(位)는 왕의 자리[王位]를 일컫는데 성덕(聖德)의 사람으로써 왕의 자리를 잘 일으킴이다.
‘德以位敍’者, 謂有聖德之人, 得居王位, 乃能敍其聖德, 若孔子雖有聖德, 而无其位, 是德不能以位敍也.
"덕으로서 자리를 펼친다.[德以位敍]"는 것은, 성덕(聖德)이 있는 사람이 왕의 지위[王位]에 거주함을 얻으니, 이에 그 성덕(聖德)을 잘 펼치는데, 공자(孔子)와 같이 비록 성덕(聖德)은 있으면서도 그 지위가 없으면, 이는 덕(德)을 지위로써 잘 펼지지 못함이다.」
上九, 亢龍有悔.
상구효는 용이 끝에 올랐으니 후회가 있다.
[孔穎達 疏]正義曰:上九亢陽之至,大而極盛,故曰「亢龍」。此自然之象,以人事言之,似聖人有龍德,上居天位,久而亢極,物極則反,故「有悔」也。純陽雖極,未至大凶,但有悔吝而己。《繫辭》云:「悔吝者,言乎其小疵也。」故鄭引堯之末年,四凶在朝,是以有悔未大凶也。凡悔之為文,既是小疵,不單稱悔也。必以餘字配之。其悔若在,則言「有悔」,謂當有此悔,則此經是也。其悔若無,則言「悔亡」,言其悔已亡也,若《恒卦o九二》「悔亡」是也。其悔雖亡,或是更取他文結之,若《復卦o初九》「不遠復無祗悔」之類是也。但聖人至極,終始無虧,故《文言》云:「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其唯聖人乎?」是知大聖之人,本無此悔。但九五天位,有大聖而居者,亦有非大聖而居者,不能不有驕亢,故聖人設法以戒之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상구(上九)는, 양(陽)이 지극히 커서 높으면서도 지극히 성대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항용(亢龍)’이라 하였다.
이는 스스로 그러하는 모습[象]이고, 사람의 일로써 말을 하면 성인(聖人)을 닮아서 용(龍)의 덕(德)을 지니고 위로 천자의 자리[天位]인 위에 거주하니 오래하면서 지극히 높은데, 사물은 지극하면 반대로 되기 때문에 후회가 있음이다.
순수(純粹)한 양(陽)이 비록 지극하나 아직 크게 흉(凶)함에는 이르지 않았고, 다만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뉘우침과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작은 허물을 말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정현(鄭玄)이 요(堯)임금의 말년에 흉한 네 사람[四凶,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의 군주. 곤(鯀)]의 조정에 있었음을 인용하였는데 이로써 뉘우침이 있지만, 아직 크게 흉함은 아니다고 하였음이다.
무릇 회(悔, 뉘우칠 회)가 글이 되면서, 이미 이 작은 허물은 회(悔) 한 글자로 칭하지 않고 반드시 남어지 글자로써 짝을 하였다.
그 뉘우침이 만약 존재(存在)하면 뉘우침이 있다고 말함이며, 마땅히 이 뉘우침이 있음을 일컬었다면, 이 경문[상구효(上九爻)]의 이것이다. 그 뉘우침이 만약 없다면 뉘우침이 없어졌다[悔亡]고 말함이며, 그 뉘우침이 이미 없어졌음을 말한 것이니, 항괘(恒卦) 구2(九二)와 같이 뉘우침이 없어졌음[悔亡]이 이것이다.
그 뉘우침이 비록 없어졌으나 혹 이를 고쳐서 다른 글자를 취하여 결합을 하는데,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멀지 않아 회복하면 다만 뉘우침이 없다.[不遠復 无祗悔]”는 것과 같은 부류가 이것이다.
다만 성인(聖人)은 지극하여 끝까지 이지러짐이 없기 때문에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을 알면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는, 오직 성인(聖人)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크게 성스러운 사람은 본래 이 뉘우침이 없음을 안다.
다만 구5(九五)의 천자의 자리[天位]는 크게 성스러움이 있으면서 거주하는 자인데, 또한 크게 성스러움이 있지 않으면서 거주하는 자는 높은 교만함이 잘 있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법(法)을 만들어 그로써 경계를 하셨음이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上九亢陽之至大而極盛, 故曰‘亢龍’.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상구(上九)는, 양(陽)이 지극히 커서 높으면서도 지극히 성대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항용(亢龍)’이라 하였다.
此自然之象, 以人事言之, 似聖人有龍德, 上居天位, 久而亢極, 物極則反, 故有悔也.
이는 스스로 그러하는 모습[象]이고, 사람의 일로써 말을 하면 성인(聖人)을 닮아서 용(龍)의 덕(德)을 지니고 위로 천자의 자리[天位]인 위에 거주하니 오래하면서 지극히 높은데, 사물은 지극하면 반대로 되기 때문에 후회가 있다.
純陽雖極, 未至大凶, 但有悔吝而己.
순수(純粹)한 양(陽)이 비록 지극하나 아직 크게 흉(凶)함에는 이르지 않았고, 다만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繫辭云“悔吝者, 言乎其小疵也.”故鄭引堯之末年, 四凶在朝, 是以有悔, 未大凶也.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뉘우침과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작은 허물을 말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정현(鄭玄)이 요(堯)임금의 말년에 흉한 네 사람[四凶,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의 군주. 곤(鯀)]의 조정에 있었음을 인용하였는데 이로써 뉘우침이 있지만, 아직 크게 흉함은 아니다고 하였음이다.
凡‘悔’之爲文, 旣是小疵, 不單稱悔也, 必以餘字配之.
무릇 회(悔, 뉘우칠 회)가 글이 되면서, 이미 이 작은 허물은 회(悔) 한 글자로 칭하지 않고 반드시 남어지 글자로써 짝을 하였다.
其悔若在, 則言有悔, 謂當有此悔, 則此經是也. 其悔若无, 則言悔亡, 言其悔已亡也, 若恒卦九二“悔亡”是也.
그 뉘우침이 만약 존재(存在)하면 뉘우침이 있다고 말함이며, 마땅히 이 뉘우침이 있음을 일컬었다면, 이 경문[상구효(上九爻)]의 이것이다. 그 뉘우침이 만약 없다면 뉘우침이 없어졌다[悔亡]고 말함이며, 그 뉘우침이 이미 없어졌음을 말한 것이니, 항괘(恒卦) 구2(九二)와 같이 뉘우침이 없어졌음[悔亡]이 이것이다.
其悔雖亡, 或是更取他文結之, 若復卦初九“不遠復, 无祗悔”之類是也.
그 뉘우침이 비록 없어졌으나 혹 이를 고쳐서 다른 글자를 취하여 결합을 하는데,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멀지 않아 회복하면 다만 뉘우침이 없다.[不遠復 无祗悔]”는 것과 같은 부류가 이것이다.
但聖人至極, 終始无虧, 故文言云“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 是知大聖之人, 本無此悔.
다만 성인(聖人)은 지극하여 끝까지 이지러짐이 없기 때문에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을 알면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는, 오직 성인(聖人)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크게 성스러운 사람은 본래 이 뉘우침이 없음을 안다.
但九五天位, 有大聖而居者, 亦有非大聖而居者, 不能不有驕亢, 故聖人設法以戒之也.
다만 구5(九五)의 천자의 자리[天位]는 크게 성스러움이 있으면서 거주하는 자인데, 또한 크게 성스러움이 있지 않으면서 거주하는 자는 높은 교만함이 잘 있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법(法)을 만들어 그로써 경계를 하셨음이다.」
用九, 見群龍 無首 吉.
구(九)를 씀은 여러 용이 나타나 머리가 없어서 길하다.
【王弼 注】 九,天之德也。能用天德,乃見群龍之義焉。夫以剛健而居人之首,則物之所不與也。以柔順而為不正,則佞邪之道也。故乾吉在无首,坤利在永貞。
【왕필 주】 구(九)는 하늘의 덕이다. 하늘의 덕을 잘 쓰면, 비로서 그곳에 여러 용의 옳음이 나타난다. 대저 강건함으로서 머무름이 사람의 머리라면 만물이 더블지 않는 바이다. 유순함으로서 함이 바르지 않다면 아첨과 간사함의 도이다. 그러므로 건괘의 길함은 머리가 없음에 있고 곤괘의 이로움은 곧음이 오래함에 있다.
[孔穎達 疏]「用九:見群龍,無首,吉」。○正義曰:「用九見群龍」者,此一句說「乾元」能用天德也。九,天德也。若體「乾元」,聖人能用天德,則見「群龍」之義。「群龍」之義,以無首為吉,故曰「用九,見群龍,無首,吉」也。○注「九,天之德」。○正義曰:「九,天之德」者,言六爻俱九,乃共成天德,非是一爻之九,則為天德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용구견군용무수길(用九見群龍无首吉).}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여러 용이 나타남.[用九見群龍]”이라는 것은, 이 한 구(句)가 건(乾)의 근원이 하늘의 덕(德)을 잘 사용함을 설명함이다. 구(九)는 하늘의 덕(德)이다.
만약 건(乾)의 근원하는 몸은, 성인(聖人)이 하늘의 덕(德)을 잘 사용하면 여러 용(龍)이 나타남의 뜻이다.
여러 용(龍)의 뜻은 우두머리가 없음으로써 길하게 되기 때문에 말하기를 “용구(用九)는 여러 용(龍)이 나타나는데, 우두머리가 없으니 길하다.”라고 하였다.」
○【왕필 주(王弼 注)】의 "구천지덕(九天之德)"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九)는 하늘의 덕이다.[九 天之德]”라고 한 것은, 여섯 효(爻)가 모두 구(九)이고, 이에 함께 하늘의 덕(德)을 이루었으며, 이 한 효(爻)의 구(九)가 하늘의 덕(德)이 됨은 아님을 말함이다.」
[孔穎達 疏]用九見群龍无首吉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용구견군용무수길(用九見群龍无首吉).}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用九見群龍’者, 此一句, 說乾元能用天德也. 九, 天德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여러 용이 나타남.[用九見群龍]”이라는 것은, 이 한 구(句)가 건(乾)의 근원이 하늘의 덕(德)을 잘 사용함을 설명함이다. 구(九)는 하늘의 덕(德)이다.
若體乾元, 聖人能用天德, 則見群龍之義.
만약 건(乾)의 근원하는 몸은, 성인(聖人)이 하늘의 덕(德)을 잘 사용하면 여러 용(龍)이 나타남의 뜻이다.
群龍之義, 以无首爲吉, 故曰“用九見群龍, 无首, 吉”也.
여러 용(龍)의 뜻은 우두머리가 없음으로써 길하게 되기 때문에 말하기를 “용구(用九)는 여러 용(龍)이 나타나는데, 우두머리가 없으니 길하다.”라고 하였다.」
○注‘九天之德’
○【왕필 주(王弼 注)】의 "구천지덕(九天之德)"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九 天之德’者, 言六爻俱九, 乃共成天德, 非是一爻之九則爲天德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九)는 하늘의 덕이다.[九 天之德]”라고 한 것은, 여섯 효(爻)가 모두 구(九)이고, 이에 함께 하늘의 덕(德)을 이루었으며, 이 한 효(爻)의 구(九)가 하늘의 덕(德)이 됨은 아님을 말함이다.」
彖曰:大哉乾元,萬物資始,乃統天。雲行雨施,品物流形。大明終始,六位時成,時乘六龍以御天。乾道變化,各正性命。
단전(彖傳)은 말하였다. 크도다 건(乾)의 근원(元)이, 만물의 바탕을 시작하니 이에 하늘을 통솔한다.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며 온갖 사물이 사라지고 이루어 진다. 큰 밝음이 지고 뜨면서 여섯 방위와 시간이 이루어지며, 때맞게 여섯 용[六龍]을 타고 그로써 하늘을 제어한다. 건도(乾道)가 변하고 달라져서 각각의 본성[性]과 운명[命]을 바로잡는다.
【王弼 注】 天也者,形之名也。健也者,用形者也。夫形也者,物之累也。有天之形而能永保无虧,為物之首,統之者豈非至健哉!大明乎終始之道,故六位不失其時而成,升降无常,隨時而用,處則乘潛龍,出則乘飛龍,故曰「時乘六龍」也。乘變化御大器,靜專動直,不失太和,豈非正性命之情者邪!
【왕필 주】 하늘이란 것은 모양의 이름이다. 굳셈이란 것은 [하늘의] 모양을 사용한 것이다. 그 모양이라 한 것은, 만물의 연루(連累)됨이다. 하늘의 모양이 있고서 이지러짐이 없음을 오래도록 잘 보존하고, 만물의 머리가 되며 통솔하는 것은 대개 굳셈에 이르름이 아닌가! 마침과 시작의 도에 크게 밝기 때문에 여섯 개의 자리가 그 때를 잃지 않고서 이루어 오르고 내림의 일정함이 없고 때에 따라서 쓰이며 처하면 잠룡이 타고 나오면 비룡에 타기 때문에 말하기를 “때 맞게 육룡을 탄다”라고 하였다. 변화를 타고 큰 그릇을 부리며 고요하면 오로지하고 움직이면 곧으며 큰 화합을 잃지 않는데, 어찌 본성[性]과 운명[命]의 감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
[孔穎達 疏]「彖曰大哉乾元」至「各正性命」。
○正義曰:夫子所作《彖》辭,統論一卦之義,或說其卦之德,或說其卦之義,或說其卦之名,故《略例》云:「彖者何也?統論一卦之體,明其所由之主。」案:褚氏、莊氏並云:「彖,斷也,斷定一卦之義,所以名為彖也。」但此《彖》釋乾與元、亨、利、貞之德。但諸儒所說此《彖》分解四德,意各不同。今案:莊氏之說,於理稍密,依而用之。「大哉乾元,萬物資始,乃統天」者,此三句裛釋乾與元也。「乾」是卦名,「元」是乾德之首,故以元德配乾釋之。「大哉乾元」者,陽氣昊大,乾體廣遠,又以元大始生萬物,故曰「大哉乾元」。「萬物資始」者,釋其「乾元」稱「大」之義,以萬象之物,皆資取「乾元」,而各得始生,不失其宜,所以稱「大」也。「乃統天」者,以其至健而為物始,以此乃能統領於天,天是有形之物,以其至健,能總統有形,是「乾元」之德也。「雲行雨施,品物流形」者,此二句釋「亨」之德也,言乾能用天之德,使雲氣流行,雨澤施布,故品類之物,流布成形,各得亨通,無所壅蔽,是其「亨」也。「大明終始,六位時成」者,此二句總結乾卦之德也。以乾之為德,大明曉乎萬物終始之道,始則潛伏,終則飛躍,可潛則潛,可飛則飛,是明達乎始終之道,故六爻之位,依時而成。若其不明終始之道,應潛而飛,應飛而潛,應生而殺,應殺而生,六位不以時而成也。「時乘六龍,以御天」者,此二句申明「乾元」「乃統天」之義,言乾之為德,以依時乘駕六爻之陽氣,以控御於天體。六龍,即六位之龍也。以所居上下言之,謂之六位也;陽氣升降,謂之六龍也。上文以至健元始總明乾德,故云「乃統天」也。此名乘駕六龍,各分其事,故云「以御天」也。「乾道變化,各正性命」者,此二句更申明乾元資始之義。道體無形,自然使物開通,謂之為「道」。言乾卦之德,自然通物,故云「乾道」也。「變」謂後來改前,以漸移改,謂之變也。「化」謂一有一無,忽然而改,謂之為化。言乾之為道,使物漸變者,使物卒化者,各能正定物之性命。性者天生之質,若剛柔遲速之別;命者人所稟受,若貴賤夭壽之屬是也。
○注「天也者形之名也」至「豈非正性命之情者邪」。
○正義曰:夫形也者,物之累也。凡有形之物,以形為累,是含生之屬,各憂性命。而天地雖復有形,常能永保無虧,為物之首,豈非統用之者至極健哉!若非至健,何能使天形無累?見其無累,則知「至健」也。「乘變化而御大器」者,乘變化,則乘潛龍,飛龍之屬是也。「而御大器」,大器謂天也。乘此潛龍、飛龍而控御天體,所以運動不息,故云「而御大器」也。「靜專動直,不失大和」者,謂乾之為體,其靜住之時,則專一不轉移也,其運動之時,正直不傾邪也。故《上繫辭》云:「夫乾,其靜也專,其動也直,是以大生焉。」韓康伯注云:「專,專一也。直,剛正也。」「不失大和」,則下文「保合大和」是也。「豈非正性命之情者邪」,以乾能正定物之性命,故云「豈非正性命之情者邪」,謂物之性命各有情,非天之情也。天本無情,何情之有?而物之性命,各有情也。所稟生者謂之性,隨時念慮謂之情,無識無情,今據有識而言,故稱曰「情」也。夫子為《彖》之體,斷明一卦之義,體例不同。莊氏以為凡有一十二體,今則略舉大綱,不可事事繁說。莊氏云「《彖》者發首則歎美卦」者,則此《乾o彖》云「大哉乾元」,《坤卦o彖》云「至哉坤元」。以乾、坤德大,故先歎美之,乃後詳說其義。或有先疊文解義而後歎者,則《豫卦o彖》云:「《豫》之時義大矣哉」之類是也。或有先釋卦名之義,後以卦名結之者,則《同人o彖》云「柔得位得中而應乎《乾》,曰同人」,《大有o彖》云:「柔得尊位大中而上下應之曰:「大有之例是也。或有特疊卦名而稱其卦者,則同人彖云:「《同人》曰:同人於野,亨。」注云:「'同人於野,亨,利涉大川',非二之所能也。是乾之所行,故特曰'同人曰'。」此等之屬,為文不同,唯《同人》之《彖》特稱「同人曰」,注又別釋。其餘諸卦之《彖》,或詳或略,或先或後,故上下參差,體例不同,或難其解,或易略解。若一一比並,曲生節例,非聖人之本趣,恐學者之徒勞,心不曉也。今皆略而不言,必有其義,於卦下而具說。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경왈대재건원(彖曰大哉乾元)에서 각정성명(各正性命)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부자(夫子)께서 단사(彖辭)를 지으신 바는, 한 괘(卦)의 뜻을 통합(統合)하여 논(論)했는데, 혹 그 괘(卦)의 덕(德)을 설명하고, 혹 그 괘(卦)의 뜻을 설명하며, 혹은 그 괘(卦)의 이름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주역약례(周易略例)》에 이르기를 “단(彖)이란 것이 무엇일까? 한 괘(卦)의 몸체[體]를 통합統合하여 논(論)하여 그 연유한 바의 주체를 밝힌 것이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데[案], 저씨(褚氏)와 장씨(莊氏)가 나란히 이르기를 “단(彖)은 결단(決斷)함인데, 한 괘(卦)의 뜻을 끊어서 정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름을 단(彖)이라 한 까닭이다.”고 하였는데, 다만 이 단(彖)은, 건(乾)과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德)을 해석하였다.
다만 여러 유학자가 이 단(彖)을 설명한 바는, 네가지 덕(德)을 나누어 해석하여 뜻이 각각 같지 않다.
지금 살펴보건데, 장씨(莊氏)의 설명이 이치에 매우 치밀하니 의거해서 사용을 한다.
"크도다 건(乾)의 근원(元)이, 만물의 바탕을 시작하니 이에 하늘을 통솔(統率)한다.[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라는 것은, 이 세 구(句)는 건(乾)과 원(元)을 총괄하여 해석하였다.
‘건(乾)’은 바로 괘(卦)의 이름이고, ‘원(元)’은 바로 건괘(乾卦) 덕(德)의 머리이기 때문에, 원(元)의 덕(德)으로써 건(乾)에 짝하여 해석을 하였다.
"크도다, 건(乾)의 근원[元].[大哉乾元]"이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하늘처럼 크고 건(乾)의 몸[體]이 넓고 원대하며, 또 원(元)의 큼으로써 만물(萬物)을 처음 낳기 때문에 “크도다, 건(乾)의 근원.[大哉乾元]”이라고 말하였다.
"만물의 바탕을 시작한다.[萬物資始]"라는 것은, 그 건과 원[乾元]의 위대한 뜻을 칭하여 해석하였으니, 만 가지 모습[萬象]하는 사물로써 모두 건(乾)의 근원을 바탕으로 취하면서 각각 처음 생겨나서 그 마땅함을 잃지 않으니, 크다고 칭한 까닭이다.
“이에 하늘을 통솔한다.[乃統天]”라는 것은, 그로써 지극히 굳세면서 사물의 시작이 되니, 이로써 마침내 하늘을 잘 통솔(統率)하여 거느리며, 하늘은 바로 모양이 있는 사물이니 그 지극히 굳셈으로써 모양이 있음을 잘 통솔(統率)하여 거느리니, 이것이 건원(乾元)의 덕(德)이다.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니, 온갖 사물[品物]이 사라지고 이루어 진다.[雲行雨施 品物流形]”는 것은, 이 두 구(句)의 형통하는 덕(德)을 해석하였는데, 건(乾)이 하늘의 덕(德)을 잘 사용해서 구름으로 하여금 기운이 흘러가게 하고 비의 은택(恩澤)이 베풀어 펴지기 때문에 온갖 부류의 사물이 펼쳐지고 모양을 이루며 각각 형통함을 얻어서 막히고 가려진 바가 없으니, 이것이 그 형통함[亨]이다.
“큰 밝음이 지고 뜨면서 여섯 방위와 시간이 이루어진다.[大明終始 六位時成]”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건괘(乾卦)의 덕(德)을 총괄하여 맺었음이다.
건(乾)의 덕(德) 함을 가지고 만물이 시작하고 마침의 도(道)를 환하게 크게 밝혀서 처음에는 잠기어 엎드리고 끝에는 날아 오르는데, 잠길수 있으면 잠기고 날 수 있으면 날으니, 이는 시작하고 마침[終始]의 도(道)에 밝게 통달했기 때문에 여섯 효(爻)의 자리가 때에 맞추어서 이루어졌다.
만약 그 시작하고 마침[終始]의 도(道)가 밝지 않으면, 잠김에 호응할 적에 날고 날아야 할 적에 잠기며, 살려야 할 적에 죽이고 죽여야 할 적에 살린다면, 여섯 자리가 그로써 제때에 이루지 못할 것이다.
“때맞게 여섯 용[六龍]을 타고 그로써 하늘을 제어한다.[時乘六龍 以御天]”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건(乾)의 근원을 밝게 펼쳐서 이에 하늘의 뜻을 통솔함이니, 건(乾)의 덕(德)이 때에 맞춰 여섯 효(爻)의 양기(陽氣)를 수레하여 타고서 그로써 천체(天體)를 제어함을 말함이다.
여섯 용(龍)은 바로 여섯 자리의 용(龍)인데, 거주한 곳의 위와 아래를 가지고 말을 하며 일컫기를 여섯 자리라고 하고, 양기(陽氣)가 오르고 내림을 일컫기를 여섯 용(六龍)이라고 하였다.
위 글은 지극히 굳센 근원을 시작함을 가지고 건(乾)의 덕(德)을 총괄하여 밝혔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을 통솔한다.[乃統天]’라고 하였다.
이를 이름하여 여섯 용(龍)을 타고서 각각 그 일을 나누었기 때문에 이르기를 ‘그로써 하늘을 제어한다.[以御天]’라고 하였다.
“건도(乾道)가 변하고 달라져서 각각의 본성[性]과 운명[命]을 바로잡는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건(乾)의 근원이 바탕을 시작한다는 뜻을 고쳐서 거듭 밝힌 것이다.
도(道)의 몸은 형체(形體)가 없으나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그러하여 열리고 통함을 일컫기를 도(道)라 하고, 건괘(乾卦)의 덕(德)이 자연히 사물에 통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건도(乾道)’라고 하였다.
‘변(變)’은 뒤에 오는 것이 앞에서 고쳐짐을 말하는데, 그로써 점점 고쳐서 옮겨짐을 일컫기를 변(變)이라 하며, ‘화(化)’는 한 번은 있고 한 번은 없음을 말하는데, 갑자기 바뀜을 일컫기를 화(化)라고 한다.
건(乾)의 도(道)가 사물로 하여금 점점 변(變)하게 하는 것과 사물로 하여금 갑자기 달라지[化]게 하는 것이 각각 사물의 본성[性]과 운명[命]을 잘 바로잡아 정함을 말함이다.
‘성(性)’이란 것은, 하늘이 낳은 바탕인데, 굳셈과 부드러움 그리고 느림과 빠름의 분별과 같고, ‘명(命)’이란 것은, 사람이 부여 받은 바인데, 귀함과 천함 그리고 요절과 장수의 등속이 이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천야자형지명야(天也者形之名也)]에서 [기비정성명지정자야(豈非正性命之情者邪)]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모양이라 한 것은, 만물의 연루됨이다.[夫形也者 物之累也]”라고 함은, 무릇 모양[形]이 있는 사물은 모양[形]으로써 연루(連累)되는데, 이는 생명을 품고 있는 무리는 각각 본성[性]과 운명[命]을 근심함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비록 다시 모양[形]이 있더라도, 항상 길이 잘 보존하고 이지러짐이 없으며, 사물의 머리가 되는데, 어찌 통합(統合)하여 사용을 하는 것이 아닌데 지극히 굳세겠는가?
만약 지극히 굳셈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늘로 하여금 모양[形]이 연루(連累)됨이 잘 없게 하겠는가? 그 연루(連累)가 없으면 지극한 굳셈을 앎이 나타난다.
"변하여 달라짐을 타면서 큰 그릇[하늘]를 제어한다.[乘變化而御大器]"는 것은, 변화(變化)를 탄다면 잠긴 용(龍)과 나는 용(龍)의 등속을 타는 이것이다.
“큰 그릇을 제어함[而御大器]”의, 큰 그릇은 하늘을 말하는데, 이 잠긴 용(龍)과 나는 용(龍)을 타고서 천체(天體)를 제어하니, 운동을 그치지 않는 까닭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큰 그릇을 제어한다.[而御大器]’라고 하였다.
"고요하면 전일(專一)하고 움직이면 곧으니 크게 어울림을 잃지 않는다.[靜專動直 不失大和]"라는 것은, 건(乾)의 몸[體]이 되어, 고요하게 살아 갈 때라면 전일(專一)하여 옴겨가지 않으며, 운동하여 갈 때에는 바르고 곧아서 기울거나 간사하지 않음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계사상전(繫辭上傳)〉에 이르기를 “대저 건(乾)은 그 고요함이 전일(專一)하고 그 움직임이 정직하다.
이로써 그곳에 크게 생겨난다.”라고 하였으며, 한강백(韓康伯)의 주(注)에 이르기 “전(專)은 전일(專一)함이고, 직(直)은 굳세고 바름이다.”고 하였다. “크게 어울림을 잃지 않는다.[不失大和]”는 즉 아래 글에 “보존하고 합하여 크게 어울린다.[保合大和]”가 이것이다.
“어찌 본성과 천명의 감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豈非正性命之情者邪]”는, 건(乾)으로써 사물의 본성[性]과 운명[命]을 잘 바로잡아 정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어찌 본성과 천명의 감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豈非正性命之情者邪]”라고 하였는데, 사물의 성명(性命)이 각각 정(情)이 있음을 말함이고, 하늘의 정(情)이 아니다.
하늘은 본래 정(情)이 없는데, 어찌 정(情)이 있을까? 그렇지만 사물의 본성[性]과 운명[命]은 각각 정(情)이 있다.
받은 바에 태어난 것을 일컫기를 ‘본성[性]’이라 하고, 때에 따라 헤아려 생각함을 일컫기를 ‘정(情)’이라 하는데, [성명(性命)은] 의식(意識)도 없고 정(情)도 없으나 이제 의식(意識)이 있음을 의거(依據)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칭하기를 ‘정(情)’이라 말하였다.
공자[夫子]께서 〈단전(彖傳)〉의 몸체를 하면서 한 괘(卦)의 뜻을 끊어 밝혀서 몸체[體]의 예(例)가 같지를 않다.
장씨(莊氏)가 여기기를 “모두 12몸체[體]가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큰 줄기만을 간략히 열거하고 일마다 번거롭게 설명할 수가 없다.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단(彖)이라는 것은, 머리에 나타내고 즉 괘(卦)를 감탄(感歎)하여 찬미(讚美)한 것이니, 이 건괘(乾卦)의 〈단전(彖傳)〉에 ‘크도다, 건(乾)의 근원[元]이여.’라고 하였고, 곤괘(坤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지극하다, 곤(坤)의 근원[元]이여.’라고 하였는데, 건(乾)과 곤(坤)으로써 덕(德)이 크기 때문에 먼저 감탄(感歎)하여 찬미(讚美)를 하고 그 뒤에 그 뜻을 상세히 설명하였음이다.
혹은 먼저 중첩된 글로 뜻을 해석하고서 뒤에 감탄한 것은, 즉 예괘(豫卦)에 감탄(感歎)하여 이르기를 ‘예(豫)의 때와 뜻이 크도다.’라고 한 부류가 이것이다.
혹은 먼저 괘 이름[卦名]의 뜻을 해석하고, 뒤에 괘 이름[卦名]으로써 맺어 나간 것인데, 즉 동인괘(同人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부드러움[柔]이 가운데 자리를 얻으면서 건(乾)에 호응하므로 말하기를 「동인(同人)」이라 하였고, 대유괘(大有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부드러움[柔]이 높은 지위와 큰 중(中)을 얻고서 상하가 호응하므로 말하기를 「대유(大有)」라고 한것의 예가 이것이다.
혹은 특별히 괘(卦)가 중첩하여 있음을 이름하여서 그 괘(卦)를 칭한 것은, 곧 동인괘(同人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동인(同人)에 말하기를 ‘들에서 사람과 함께하니 형통하다.’고 했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들에서 사람과 함께하니 형통하다. 큰 냇물를 건넘이 이롭다.’라고 했음은, 2효(二爻)의 잘한 바가 아니며 이는 건(乾)이 행하는 바이기 때문에 특별히 말하기를 ‘동인왈(同人曰)’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등속은 글을 지음이 같지 않고, 오직 동인괘(同人卦)의 〈단전(彖傳)〉에 특별히 ‘동인왈(同人曰)’을 칭하였으며 주(注)에 또 다르게 해석하였다.
그 나머지 여러 괘(卦)의 〈단전(彖傳)〉은 혹 상세하고 혹은 간략하며, 혹 먼저하고 혹은 뒤에 하였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달리 참여하여 몸체[體]의 차례가 같지 않으니 혹 그 해석하기가 어렵고 혹은 간략히 해석하기가 쉽다.
만약 하나하나 나란히 비교하여 굽혀서 마듸[節]의 차례를 만들면 성인(聖人)의 본래 취지가 아니니, 배우는 자의 무리가 마음이 수고롭고 깨닫지 못할까 두렵다.
이제 모두 생략하고서 말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그 뜻이 있으니 괘(卦)의 아래에서 모두 설명하였다.」
[孔穎達 疏]‘彖曰大哉乾元’至‘各正性命’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경왈대재건원(彖曰大哉乾元)에서 각정성명(各正性命)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夫子所作彖辭, 統論一卦之義, 或說其卦之德, 或說其卦之義, 或說其卦之名, 故《略例》云 "彖者何也?統論一卦之體,明其所由之主."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부자(夫子)께서 단사(彖辭)를 지으신 바는, 한 괘(卦)의 뜻을 통합(統合)하여 논(論)했는데, 혹 그 괘(卦)의 덕(德)을 설명하고, 혹 그 괘(卦)의 뜻을 설명하며, 혹은 그 괘(卦)의 이름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주역약례(周易略例)》에 이르기를 “단(彖)이란 것이 무엇일까? 한 괘(卦)의 몸체[體]를 통합統合하여 논(論)하여 그 연유한 바의 주체를 밝힌 것이다.”고 하였다.
案, 褚氏‧莊氏竝云“彖, 斷也, 斷定一卦之義, 所以名爲彖也.” 但此彖釋乾與元亨利貞之德.
살펴보건데[案], 저씨(褚氏)와 장씨(莊氏)가 나란히 이르기를 “단(彖)은 결단(決斷)함인데, 한 괘(卦)의 뜻을 끊어서 정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름을 단(彖)이라 한 까닭이다.”고 하였는데, 다만 이 단(彖)은, 건(乾)과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德)을 해석하였다.
但諸儒所說此彖, 分解四德, 意各不同.
다만 여러 유학자가 이 단(彖)을 설명한 바는, 네가지 덕(德)을 나누어 해석하여 뜻이 각각 같지 않다.
今案, 莊氏之說, 於理稍密, 依而用之.
지금 살펴보건데, 장씨(莊氏)의 설명이 이치에 매우 치밀하니 의거해서 사용을 한다.
‘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者, 此三句, 總釋乾與元也.
"크도다 건(乾)의 근원(元)이, 만물의 바탕을 시작하니 이에 하늘을 통솔(統率)한다.[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라는 것은, 이 세 구(句)는 건(乾)과 원(元)을 총괄하여 해석하였다.
‘乾’是卦名, ‘元’是乾德之首, 故以元德配乾, 釋之.
‘건(乾)’은 바로 괘(卦)의 이름이고, ‘원(元)’은 바로 건괘(乾卦) 덕(德)의 머리이기 때문에, 원(元)의 덕(德)으로써 건(乾)에 짝하여 해석을 하였다.
‘大哉乾元’者, 陽氣昊大, 乾體廣遠, 又以元大始生萬物, 故曰大哉乾元.
"크도다, 건(乾)의 근원[元].[大哉乾元]"이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하늘처럼 크고 건(乾)의 몸[體]이 넓고 원대하며, 또 원(元)의 큼으로써 만물(萬物)을 처음 낳기 때문에 “크도다, 건(乾)의 근원.[大哉乾元]”이라고 말하였다.
‘萬物資始’者, 釋其乾元稱大之義, 以萬象之物, 皆資取乾元, 而各得始生, 不失其宜, 所以稱大也.
"만물의 바탕을 시작한다.[萬物資始]"라는 것은, 그 건과 원[乾元]의 위대한 뜻을 칭하여 해석하였으니, 만 가지 모습[萬象]하는 사물로써 모두 건(乾)의 근원을 바탕으로 취하면서 각각 처음 생겨나서 그 마땅함을 잃지 않으니, 크다고 칭한 까닭이다.
‘乃統天’者, 以其至健而爲物始, 以此乃能統領於天, 天是有形之物, 以其至健, 能總統有形, 是乾元之德也.
“이에 하늘을 통솔한다.[乃統天]”라는 것은, 그로써 지극히 굳세면서 사물의 시작이 되니, 이로써 마침내 하늘을 잘 통솔(統率)하여 거느리며, 하늘은 바로 모양이 있는 사물이니 그 지극히 굳셈으로써 모양이 있음을 잘 통솔(統率)하여 거느리니, 이것이 건원(乾元)의 덕(德)이다.
‘雲行雨施 品物流形’者, 此二句, 釋亨之德也, 言乾能用天之德, 使雲氣流行, 雨澤施布, 故品類之物, 流布成形, 各得亨通, 无所壅蔽, 是其亨也.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니, 온갖 사물[品物]이 사라지고 이루어 진다.[雲行雨施 品物流形]”는 것은, 이 두 구(句)의 형통하는 덕(德)을 해석하였는데, 건(乾)이 하늘의 덕(德)을 잘 사용해서 구름으로 하여금 기운이 흘러가게 하고 비의 은택(恩澤)이 베풀어 펴지기 때문에 온갖 부류의 사물이 펼쳐지고 모양을 이루며 각각 형통함을 얻어서 막히고 가려진 바가 없으니, 이것이 그 형통함[亨]이다.
‘大明終始 六位時成’者, 此二句, 總結乾卦之德也.
“큰 밝음이 지고 뜨면서 여섯 방위와 시간이 이루어진다.[大明終始 六位時成]”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건괘(乾卦)의 덕(德)을 총괄하여 맺었음이다.
以乾之爲德, 大明曉乎萬物終始之道, 始則潛伏, 終則飛躍, 可潛則潛, 可飛則飛, 是明達乎始終之道, 故六爻之位, 依時而成.
건(乾)의 덕(德) 함을 가지고 만물이 시작하고 마침의 도(道)를 환하게 크게 밝혀서 처음에는 잠기어 엎드리고 끝에는 날아 오르는데, 잠길수 있으면 잠기고 날 수 있으면 날으니, 이는 시작하고 마침[終始]의 도(道)에 밝게 통달했기 때문에 여섯 효(爻)의 자리가 때에 맞추어서 이루어졌다.
若其不明終始之道, 應潛而飛, 應飛而潛, 應生而殺, 應殺而生, 六位不以時而成也.
만약 그 시작하고 마침[終始]의 도(道)가 밝지 않으면, 잠김에 호응할 적에 날고 날아야 할 적에 잠기며, 살려야 할 적에 죽이고 죽여야 할 적에 살린다면, 여섯 자리가 그로써 제때에 이루지 못할 것이다.
‘時乘六龍 以御天’者, 此二句, 申明乾元乃統天之義, 言乾之爲德, 以依時乘駕六爻之陽氣, 以控御於天體.
“때맞게 여섯 용[六龍]을 타고 그로써 하늘을 제어한다.[時乘六龍 以御天]”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건(乾)의 근원을 밝게 펼쳐서 이에 하늘의 뜻을 통솔함이니, 건(乾)의 덕(德)이 때에 맞춰 여섯 효(爻)의 양기(陽氣)를 수레하여 타고서 그로써 천체(天體)를 제어함을 말함이다.
六龍卽六位之龍也, 以所居上下言之, 謂之六位也, 陽氣升降, 謂之六龍也.
여섯 용(龍)은 바로 여섯 자리의 용(龍)인데, 거주한 곳의 위와 아래를 가지고 말을 하며 일컫기를 여섯 자리라고 하고, 양기(陽氣)가 오르고 내림을 일컫기를 여섯 용(六龍)이라고 하였다.
上文以至健元始總明乾德, 故云‘乃統天’也.
위 글은 지극히 굳센 근원을 시작함을 가지고 건(乾)의 덕(德)을 총괄하여 밝혔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을 통솔한다.[乃統天]’라고 하였다.
此名乘駕六龍, 各分其事, 故云‘以御天’也.
이를 이름하여 여섯 용(龍)을 타고서 각각 그 일을 나누었기 때문에 이르기를 ‘그로써 하늘을 제어한다.[以御天]’라고 하였다.
‘乾道變化 各正性命’者, 此二句, 更申明乾元資始之義.
“건도(乾道)가 변하고 달라져서 각각의 본성[性]과 운명[命]을 바로잡는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건(乾)의 근원이 바탕을 시작한다는 뜻을 고쳐서 거듭 밝힌 것이다.
道體无形, 自然使物開通, 謂之爲道. 言乾卦之德, 自然通物, 故云‘乾道’也.
도(道)의 몸은 형체(形體)가 없으나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그러하여 열리고 통함을 일컫기를 도(道)라 하고, 건괘(乾卦)의 덕(德)이 자연히 사물에 통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건도(乾道)’라고 하였다.
‘變’謂後來改前, 以漸移改, 謂之變也. ‘化’謂一有一无, 忽然而改, 謂之爲化.
‘변(變)’은 뒤에 오는 것이 앞에서 고쳐짐을 말하는데, 그로써 점점 고쳐서 옮겨짐을 일컫기를 변(變)이라 하며, ‘화(化)’는 한 번은 있고 한 번은 없음을 말하는데, 갑자기 바뀜을 일컫기를 화(化)라고 한다.
言乾之爲道, 使物漸變者, 使物卒化者, 各能正定物之性命.
건(乾)의 도(道)가 사물로 하여금 점점 변(變)하게 하는 것과 사물로 하여금 갑자기 달라지[化]게 하는 것이 각각 사물의 본성[性]과 운명[命]을 잘 바로잡아 정함을 말함이다.
‘性’者, 天生之質, 若剛柔遲速之別, ‘命’者, 人所稟受, 若貴賤夭壽之屬, 是也.
‘성(性)’이란 것은, 하늘이 낳은 바탕인데, 굳셈과 부드러움 그리고 느림과 빠름의 분별과 같고, ‘명(命)’이란 것은, 사람이 부여 받은 바인데, 귀함과 천함 그리고 요절과 장수의 등속이 이것이다.」
○注‘天也者形之名也’至‘豈非正性命之情者邪’
○ 【왕필 주(王弼 注)】의 [천야자형지명야(天也者形之名也)]에서 [기비정성명지정자야(豈非正性命之情者邪)]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夫形也者 物之累也’. 凡有形之物, 以形爲累, 是含生之屬, 各憂性命.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모양이라 한 것은, 만물의 연루됨이다.[夫形也者 物之累也]”라고 함은, 무릇 모양[形]이 있는 사물은 모양[形]으로써 연루(連累)되는데, 이는 생명을 품고 있는 무리는 각각 본성[性]과 운명[命]을 근심함이다.
而天地雖復有形, 常能永保无虧, 爲物之首, 豈非統用之者, 至極健哉.
그리고 하늘과 땅이 비록 다시 모양[形]이 있더라도, 항상 길이 잘 보존하고 이지러짐이 없으며, 사물의 머리가 되는데, 어찌 통합(統合)하여 사용을 하는 것이 아닌데 지극히 굳세겠는가?
若非至健, 何能使天形无累? 見其无累, 則知至健也.
만약 지극히 굳셈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늘로 하여금 모양[形]이 연루(連累)됨이 잘 없게 하겠는가? 그 연루(連累)가 없으면 지극한 굳셈을 앎이 나타난다.
‘乘變化而御大器’者, ‘乘變化’則乘潛龍飛龍之屬是也.
"변하여 달라짐을 타면서 큰 그릇[하늘]를 제어한다.[乘變化而御大器]"는 것은, 변화(變化)를 탄다면 잠긴 용(龍)과 나는 용(龍)의 등속을 타는 이것이다.
‘而御大器’, 大器謂天也, 乘此潛龍飛龍, 而控御天體, 所以運動不息, 故云‘而御大器’也.
“큰 그릇을 제어함[而御大器]”의, 큰 그릇은 하늘을 말하는데, 이 잠긴 용(龍)과 나는 용(龍)을 타고서 천체(天體)를 제어하니, 운동을 그치지 않는 까닭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큰 그릇을 제어한다.[而御大器]’라고 하였다.
‘靜專動直 不失大和’者, 謂乾之爲體, 其靜住之時, 則專一不轉移也, 其運動之時, 正直不傾邪也.
"고요하면 전일(專一)하고 움직이면 곧으니 크게 어울림을 잃지 않는다.[靜專動直 不失大和]"라는 것은, 건(乾)의 몸[體]이 되어, 고요하게 살아 갈 때라면 전일(專一)하여 옴겨가지 않으며, 운동하여 갈 때에는 바르고 곧아서 기울거나 간사하지 않음을 말함이다.
故上繫辭云“夫乾, 其靜也專, 其動也直. 是以大生焉.” 韓康伯注云“專, 專一也. 直, 剛正也.”是以大生焉.” 韓康伯注云“專, 專一也. 直, 剛正也.”‘不失大和’, 則下文“保合大和”, 是也.
그러므로 〈계사상전(繫辭上傳)〉에 이르기를 “대저 건(乾)은 그 고요함이 전일(專一)하고 그 움직임이 정직하다.
이로써 그곳에 크게 생겨난다.”라고 하였으며, 한강백(韓康伯)의 주(注)에 이르기 “전(專)은 전일(專一)함이고, 직(直)은 굳세고 바름이다.”고 하였다. “크게 어울림을 잃지 않는다.[不失大和]”는 즉 아래 글에 “보존하고 합하여 크게 어울린다.[保合大和]”가 이것이다.
‘豈非正性命之情者邪’, 以乾能正定物之性命, 故云“豈非正性命之情者邪”, 謂物之性命, 各有情, 非天之情也.
“어찌 본성과 천명의 감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豈非正性命之情者邪]”는, 건(乾)으로써 사물의 본성[性]과 운명[命]을 잘 바로잡아 정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어찌 본성과 천명의 감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豈非正性命之情者邪]”라고 하였는데, 사물의 성명(性命)이 각각 정(情)이 있음을 말함이고, 하늘의 정(情)이 아니다.
天本无情, 何情之有? 而物之性命, 各有情也.
하늘은 본래 정(情)이 없는데, 어찌 정(情)이 있을까? 그렇지만 사물의 본성[性]과 운명[命]은 각각 정(情)이 있다.
所稟生者, 謂之‘性’, 隨時念慮, 謂之‘情’. 无識无情, 今據有識而言, 故稱曰‘情’也.
받은 바에 태어난 것을 일컫기를 ‘본성[性]’이라 하고, 때에 따라 헤아려 생각함을 일컫기를 ‘정(情)’이라 하는데, [성명(性命)은] 의식(意識)도 없고 정(情)도 없으나 이제 의식(意識)이 있음을 의거(依據)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칭하기를 ‘정(情)’이라 말하였다.
夫子爲彖之體, 斷明一卦之義, 體例不同.
공자[夫子]께서 〈단전(彖傳)〉의 몸체를 하면서 한 괘(卦)의 뜻을 끊어 밝혀서 몸체[體]의 예(例)가 같지를 않다.
莊氏 以爲“凡有一十二體.” 今則略擧大綱, 不可事事繁說.
장씨(莊氏)가 여기기를 “모두 12몸체[體]가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큰 줄기만을 간략히 열거하고 일마다 번거롭게 설명할 수가 없다.
莊氏云“彖者, 發首則歎美卦者, 則此乾彖云‘大哉乾元’, 坤卦彖云‘至哉坤元’, 以乾‧坤德大, 故先歎美之, 乃後詳說其義.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단(彖)이라는 것은, 머리에 나타내고 즉 괘(卦)를 감탄(感歎)하여 찬미(讚美)한 것이니, 이 건괘(乾卦)의 〈단전(彖傳)〉에 ‘크도다, 건(乾)의 근원[元]이여.’라고 하였고, 곤괘(坤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지극하다, 곤(坤)의 근원[元]이여.’라고 하였는데, 건(乾)과 곤(坤)으로써 덕(德)이 크기 때문에 먼저 감탄(感歎)하여 찬미(讚美)를 하고 그 뒤에 그 뜻을 상세히 설명하였음이다.
或有先疊文解義而後歎者, 則豫卦歎云‘豫之時義大矣哉’之類, 是也.
혹은 먼저 중첩된 글로 뜻을 해석하고서 뒤에 감탄한 것은, 즉 예괘(豫卦)에 감탄(感歎)하여 이르기를 ‘예(豫)의 때와 뜻이 크도다.’라고 한 부류가 이것이다.
或有先釋卦名之義, 後以卦名結之者, 則同人彖云‘柔得位得中而應乎乾, 曰「同人」’, 大有彖云‘柔得尊位大中而上下應之, 曰「大有」’之例, 是也.
혹은 먼저 괘 이름[卦名]의 뜻을 해석하고, 뒤에 괘 이름[卦名]으로써 맺어 나간 것인데, 즉 동인괘(同人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부드러움[柔]이 가운데 자리를 얻으면서 건(乾)에 호응하므로 말하기를 「동인(同人)」이라 하였고, 대유괘(大有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부드러움[柔]이 높은 지위와 큰 중(中)을 얻고서 상하가 호응하므로 말하기를 「대유(大有)」라고 한것의 예가 이것이다.
或有特疊卦名而稱其卦者, 則同人彖云‘同人曰, 「同人於野, 亨.」’注云‘「同人於野, 亨. 利涉大川.」 非二之所能也, 是乾之所行, 故特曰「同人曰」.’此等之屬, 爲文不同, 唯同人之彖, 特稱‘同人曰.’ 注又別釋.
혹은 특별히 괘(卦)가 중첩하여 있음을 이름하여서 그 괘(卦)를 칭한 것은, 곧 동인괘(同人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동인(同人)에 말하기를 ‘들에서 사람과 함께하니 형통하다.’고 했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들에서 사람과 함께하니 형통하다. 큰 냇물를 건넘이 이롭다.’라고 했음은, 2효(二爻)의 잘한 바가 아니며 이는 건(乾)이 행하는 바이기 때문에 특별히 말하기를 ‘동인왈(同人曰)’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등속은 글을 지음이 같지 않고, 오직 동인괘(同人卦)의 〈단전(彖傳)〉에 특별히 ‘동인왈(同人曰)’을 칭하였으며 주(注)에 또 다르게 해석하였다.
其餘諸卦之彖, 或詳或略, 或先或後, 故上下參差, 體例不同, 或難其解, 或易略解.
그 나머지 여러 괘(卦)의 〈단전(彖傳)〉은 혹 상세하고 혹은 간략하며, 혹 먼저하고 혹은 뒤에 하였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달리 참여하여 몸체[體]의 차례가 같지 않으니 혹 그 해석하기가 어렵고 혹은 간략히 해석하기가 쉽다.
若一一比竝, 曲生節例, 非聖人之本趣, 恐學者之徒勞心不曉也.
만약 하나하나 나란히 비교하여 굽혀서 마듸[節]의 차례를 만들면 성인(聖人)의 본래 취지가 아니니, 배우는 자의 무리가 마음이 수고롭고 깨닫지 못할까 두렵다.
今皆略而不言, 必有其義, 於卦下而具說.
이제 모두 생략하고서 말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그 뜻이 있으니 괘(卦)의 아래에서 모두 설명하였다.」
保合大和,乃利貞。
보전하여 합하고 크게 어울리면 이에 이롭고 곧게 된다.
【王弼 注】 不和而剛暴。
【왕필 주】 어울리지 않으면서 굳세고 사나움이다.
[孔穎達 疏]正義曰:此二句釋「利貞」也。純陽剛暴,若無和順,則物不得利,又失其正。以能保安合會大利之道,乃能利貞於萬物,言萬物得利而貞正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두 구(句)는, ‘이로움[利]과 곧음[貞]’을 해석하였다.
순수한 양(陽)이 굳세고 사나우니, 만약 어울리어 따름이 없으면 사물이 이로움을 얻지 못하고 또 그 바름을 잃는다.
큰 이로움의 도(道)를 잘 보존하여 편안히 하고 합하여 모임으로써 이에 만물(萬物)을 이롭게하고 바르게 잘하니, 만물(萬物)이 이로움을 얻어서 곧게 바로잡음을 말한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二句, 釋利‧貞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두 구(句)는, ‘이로움[利]과 곧음[貞]’을 해석하였다.
純陽剛暴, 若无和順, 則物不得利, 又失其正.
순수한 양(陽)이 굳세고 사나우니, 만약 어울리어 따름이 없으면 사물이 이로움을 얻지 못하고 또 그 바름을 잃는다.
以能保安合會大利之道, 乃能利貞於萬物, 言萬物得利而貞正也.
큰 이로움의 도(道)를 잘 보존하여 편안히 하고 합하여 모임으로써 이에 만물(萬物)을 이롭게하고 바르게 잘하니, 만물(萬物)이 이로움을 얻어서 곧게 바로잡음을 말한다.
首出庶物,萬國咸寧。
머리에 여러 만물이 나오니, 만국이 모두 편안하다.
【王弼 注】 萬國所以寧,各以有君也。
【왕필 주】 만국이 편안한 까닭은, 각각 그로써 임금이 있음이다.
[孔穎達 疏]正義曰:自上已來,皆論乾德自然養萬物之道。此二句論聖人上法乾德,生養萬物,言聖人為君在眾物之上,最尊高於物,以頭首出於眾物之上,各置君長以領萬國,故萬國皆得寧也。人君位實尊高,故於此云首出於庶物者也。志須卑下,故前經云「無首,吉」也。但前文說乾用天德,其事既詳,故此文聖人以人事象乾,於文略也。以此言之,聖人亦當令萬物資始,統領於天位,而「雲行雨施」,布散恩澤,使兆庶眾物,各流布其形,又大明乎盛衰終始之道,使天地四時貴賤高下,各以時而成。又任用群賢,以奉行聖化,使物各正性命。此聖人所以象乾而立化。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위로부터 와서 그침은, 모두 건(乾)의 덕(德)이 만물(萬物)을 길러주는 도(道)가 스스로 그러함을 논하였으며, 이 두 구(句)는 성인(聖人)이 위로 건(乾)의 덕(德)을 본받아서 만물(萬物)을 낳고 기름을 논하였다.
성인(聖人)이 군주가 되어 여러 사물의 위에 있어서 사물 중에 가장 높으니, 그로써 머리가 여러 사물의 위에서 첫 머리로 나와서 각각 군장(君長)을 설치하고, 그로써 만국을 다스렸기 때문에 만국이 모두 편안함을 얻었다는 말이다.
사람의 군주된 자리는 진실로 높고 존엄하기 때문에 여기에 이르기를 “여러 사물에서 첫 머리로 나온다.”고 하였는데, 뜻은 모름지기 아래로 낮추어야 하기 때문에 앞의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머리가 없으니 길(吉)하다.”고 하였다.
다만 앞의 글은 건(乾)이 하늘의 덕(德)을 사용함을 설명하여 그 일이 이미 자세하기 때문에 이 글은 성인(聖人)이 사람의 일로써 건(乾)을 모습[象]하여 글을 간략하게 하였다.
이로써 말을 하면, 성인(聖人) 또한 마땅히 만물(萬物)로 하여금 바탕을 시작하게 하고 하늘의 자리에서 모두 다스리면서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게 하여 은택을 펼쳐주고 많은 여러 무리의 사물들로 하여금 각각 그 모양을 흐르고 펴게 하였다.
또 성대함과 쇄약해짐 그리고 시작과 마침의 도(道)에 크게 밝아서 천지(天地)와 사시(四時), 귀천(貴賤)과 고하(高下)로 하여금 각각 그로써 때맞게 이루어지게 하고, 또 여러 현명한 이들을 임용하여 성스럽게 달라지는 행함을 받들어서 사물로 하여금 각각 본성[性]과 운명[命]을 바로잡는다. 이는 성인(聖人)이 건(乾)을 모습[象]을 세워서 달라지게 하는 까닭이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自上已來, 皆論乾德自然養萬物之道. 此二句, 論聖人上法乾德, 生養萬物.
【공영달 소(孔穎達 疏)】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위로부터 와서 그침은, 모두 건(乾)의 덕(德)이 만물(萬物)을 길러주는 도(道)가 스스로 그러함을 논하였으며, 이 두 구(句)는 성인(聖人)이 위로 건(乾)의 덕(德)을 본받아서 만물(萬物)을 낳고 기름을 논하였다.
言聖人爲君, 在衆物之上, 最尊高於物, 以頭首出於衆物之上, 各置君長, 以領萬國, 故萬國皆得寧也.
성인(聖人)이 군주가 되어 여러 사물의 위에 있어서 사물 중에 가장 높으니, 그로써 머리가 여러 사물의 위에서 첫 머리로 나와서 각각 군장(君長)을 설치하고, 그로써 만국을 다스렸기 때문에 만국이 모두 편안함을 얻었다는 말이다.
人君位實尊高, 故於此云首出於庶物者也. 志須卑下, 故前經云“无首, 吉”也.
사람의 군주된 자리는 진실로 높고 존엄하기 때문에 여기에 이르기를 “여러 사물에서 첫 머리로 나온다.”고 하였는데, 뜻은 모름지기 아래로 낮추어야 하기 때문에 앞의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머리가 없으니 길(吉)하다.”고 하였다.
但前文說乾用天德, 其事旣詳, 故此文聖人以人事象乾, 於文略也.
다만 앞의 글은 건(乾)이 하늘의 덕(德)을 사용함을 설명하여 그 일이 이미 자세하기 때문에 이 글은 성인(聖人)이 사람의 일로써 건(乾)을 모습[象]하여 글을 간략하게 하였다.
以此言之, 聖人亦當令萬物資始, 統領於天位, 而雲行雨施, 布散恩澤, 使兆庶衆物, 各流布其形.
이로써 말을 하면, 성인(聖人) 또한 마땅히 만물(萬物)로 하여금 바탕을 시작하게 하고 하늘의 자리에서 모두 다스리면서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게 하여 은택을 펼쳐주고 많은 여러 무리의 사물들로 하여금 각각 그 모양을 흐르고 펴게 하였다.
又大明乎盛衰終始之道, 使天地四時貴賤高下, 各以時而成. 又任用群賢, 以奉行聖化, 使物各正性命. 此聖人所以象乾而立化.
또 성대함과 쇄약해짐 그리고 시작과 마침의 도(道)에 크게 밝아서 천지(天地)와 사시(四時), 귀천(貴賤)과 고하(高下)로 하여금 각각 그로써 때맞게 이루어지게 하고, 또 여러 현명한 이들을 임용하여 성스럽게 달라지는 행함을 받들어서 사물로 하여금 각각 본성[性]과 운명[命]을 바로잡는다. 이는 성인(聖人)이 건(乾)을 모습[象]을 세워서 달라지게 하는 까닭이다.
象曰:天行健,君子以自強不息。
상전(象傳)은 말하였다. 하늘의 운행은 굳건하다. 군자는 이로서 스스로 강하게 하여서 쉬지 않는다.
[孔穎達 疏]「《象》曰天行健」至「自強不息」。○正義曰:此《大象》也。《十翼》之中第三翼,總象一卦,故謂之「大象」。但萬物之體,自然各有形象,聖人設卦以寫萬物之象。今夫子釋此卦之所象,故言「《象》曰」。天有純剛,故有健用。今畫純陽之卦以比擬之,故謂之《象》。《象》在《彖》後者,《彖》詳而《象》略也。是以過半之義,思在《彖》而不在《象》,有由而然也。「天行健」者,行者,運動之稱,健者強壯之名,「乾」是眾健之訓。今《大象》不取餘健為釋,偏說「天」者,萬物壯健,皆有衰怠,唯天運動日過一度,蓋運轉混沒,未曾休息,故云「天行健」。健是「乾」之訓也。順者「坤」之訓也。《坤》則云「地勢坤」。此不言「天行乾」而言「健」者,劉表云:「詳其名也。」然則「天」是體名,「乾」則用名,「健」是其訓,三者並見,最為詳悉,所以尊乾異於他卦。凡六十四卦,說象不同:或總舉象之所由,不論象之實體,又總包六爻,不顯上體下體,則乾、坤二卦是也。或直舉上下二體者,若「雲雷,屯」,也。「天地交,泰」也。「天地不交,否」也。「雷電,噬嗑」也,「雷風,恒」也,「雷雨作,解」也,「風雷,益」也,「雷電皆至,豐」也,「洊雷,震」也,「隨風,巽」也,「習坎,坎」也,「明兩作,離」也,「兼山,艮」也,「麗澤,兌」也。凡此一十四卦,皆裛舉兩體而結義也。取兩體俱成,或有直舉兩體上下相對者,「天與水違行,訟」也,「上天下澤,履」也,「天與火同,人」也,「上火下澤,睽」也,凡此四卦,或取兩體相違,或取兩體相合,或取兩體上下相承而為卦也,故兩體相對而俱言也。雖上下二體,共成一卦,或直指上體而為文者,若「雲上於天,需」也,「風行天上,小畜」也,「火在天上,大有」也,「雷出地奮,豫」也,「風行地上,觀」也,「山附於地,剝」也,「澤滅木,大過」也,「雷在天上,大壯」也,「明出地上,晉」也,「風自火出,家人」也,「澤上於天,夬」也,「澤上於地,萃」也。「風行水上,渙」也,「水在火上,既濟」也,「火在水上,未濟」也。凡此十五卦,皆先舉上象而連於下,亦意取上象以立卦名也。亦有雖意在上象,而先舉下象,以出上象者,「地上有水,比」也,「澤上有地,臨」也,「山上有澤,咸」也,「山上有火,旅」也,「木上有水,井」也,「木上有火,鼎」也,「山上有木,漸」也,「澤上有雷,歸妹」也,「山上有水,蹇」也,「澤上有水,節」也,「澤上有風,中孚」也,「山上有雷,小過」也。凡此十二卦,皆先舉下象以出上象,亦意取上象,共下象而成卦也。或先舉上象而出下象,義取下象以成卦義者,「山下出泉,蒙」也,「地中有水,師」也,「山下有風,蠱」也,「山下有火,賁」也,「天下雷行,無妄」也,「山下有雷,頤」也,「天下有山,遯」也,「山下有澤,損」也,「天下有風,姤」也,「地中有山,謙」也,「澤中有雷,隨」也,「地中生木,升也」,「澤中有火,革」也。凡此十三卦,皆先舉上體,後明下體也。其上體是天,天與山則稱「下」也。若上體是地,地與澤則稱「中」也。或有雖先舉下象,稱在上象之下者,若「雷在地中,復」也,「天在山中,大畜」也,「明入地中,明夷」也,「澤無水,困」也。是先舉下象而稱在上象之下,亦義取下象以立卦也。所論之例者,皆大判而言之,其間委曲,各於卦下別更詳之。先儒所云此等象辭,或有實象,或有假像。實象者,若「地上有水,比」也,「地中生木,升」也,皆非虛,故言實也。假像者,若「天在山中」,「風自火出」,如此之類,實無此象,假而為義,故謂之假也。雖有實象、假像,皆以義示人,總謂之「象」也。「天行健」者,謂天體之行,晝夜不息,周而復始,無時虧退,故云「天行健」。此謂天之自然之象。「君子以自強不息」,此以人事法天所行,言君子之人,用此卦象,自彊勉力,不有止息。言「君子」者,謂君臨上位,子愛下民,通天子諸侯,兼公卿大夫有地者。凡言「君子」,義皆然也。但位尊者象卦之義多也,位卑者象卦之義少也。但須量力而行,各法其卦也,所以諸卦並稱「君子」。若卦體之義,唯施於天子,不兼包在下者,則言「先王」也。若《比卦》稱「先王以建萬國」,《豫卦》稱「先王以作樂崇德」,《觀卦》稱「先王以省方觀民設教」,《噬嗑》稱「先王以明罰敕法」,《復卦》稱「先王以至日閉關」,《無妄》稱「先王以茂對時育萬物」,《渙卦》稱「先王以享於帝立廟」,《泰卦》稱「後以財成天地之道」,《姤卦》稱「後以施命誥四方」。稱「後」兼諸侯也,自外卦並稱「君子」。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천행건(象曰天行健)에서 자강불식(自强不息)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이는 대상(大象)이고, 십익(十翼)의 가운데 3번째 편[翼]이니, 한 괘(卦)를 모두 모습[象]하였기 때문에 일컫기를 "큰 모습[大象]"이라 하였다.
다만 만물(萬物)의 몸은, 스스로 그러한 각각 모양[形]과 모습[象]이 있는데 성인(聖人)이 괘(卦)를 설치(設置)하고 그로써 만물(萬物)의 모습[象]을 그렸으니, 지금 공자[夫子]께서 이 괘(卦)의 모습[象]한 바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상왈(象曰)’이라고 말하였다.
하늘은 순수한 굳셈이 있기 때문에 굳셈의 쓰임이 있으니, 이제 순수한 양(陽)의 괘(卦)를 그어서 그로써 견주어 비교(比較)를 했기 때문에 일컫기를 ‘상(象)’이라 하였다.
〈상전(象傳)〉이 〈단전(彖傳)〉의 뒤에 있는 것은,〈단전(彖傳)〉이 자세하고 〈상전(象傳)〉이 소략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반을 넘는 뜻과 생각이 〈단전(彖傳)〉에 있고 〈상전(象傳)〉에 있지 않으며, 이유가 있어서 그러하다.
"하늘의 운행은 굳셈.[天行健]"이라는 것의, ‘행(行)’이라는 것은, 운행하여 움직임[運動]을 칭하고, ‘건(健)’이라는 것은, 강하고 건장함의 이름이며, 건(乾)은 바로 여러 굳셈의 세김[訓]이다.
지금 대상(大象)에 다른 굳셈[健]을 취하여 해석을 하지 않고 하늘에 치우쳐 설명한 것은, 만물(萬物)이 씩씩하고 굳셈이 모두 쇠약하고 태만함이 있는데 오직 하늘의 운동은 하루에 한 도수(度數)를 지나가며, 대개 운전이 섞이거나 빠져서 일찍이 쉬거나 그치지 않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은 굳세다.[天行健]”라고 하였다.
굳셈[健]은 건(乾)의 세김[訓]이고, 순함[順]은 곤(坤)의 세김[訓]이다.
곤(坤)은 곧 이르기를 “땅의 형세(形勢)가 순하다.[順; 坤]”고 하였는데, 이는 “하늘의 운행이 굳세다.[乾; 健]”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굳세이라 말한 것을, 유표(劉表)가 이르기를 “그 이름을 자세히 함이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천(天)은 몸체[體]의 이름이고 건(乾)은 쓰임[用]의 이름이며 굳셈[健]은 바로 그 세김[訓]이다.
세 가지가 나란히 나타나 모두 가장 자세하게 되는데, 건(乾)을 높이는 까닭은 다른 괘(卦)와 달리하였음이다.
무릇 64괘(卦)에 모습[象]을 같지 않음으로 설명했는데, 혹 모습[象]의 연유한 바를 모두 들었으나 모습[象]의 실체(實體)를 논하지 않았으며, 또 6효(爻)를 모두 포괄하고 상체(上體)와 하체(下體)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곧 건(乾)과 곤(坤) 두 괘(卦)가 이것이다.
혹은 위아래 두 몸을 바로 든 것은, “구름과 우레 [두 몸이] 둔(屯䷂)괘”이고, “하늘과 땅이 사귐이 태(泰䷊)괘”이며, “하늘과 땅이 사귀지 않음이 비(否䷋)괘”이고, “우레와 번개가 서합(噬嗑䷔)괘”이며, “우레와 바람이 항(恒䷟)괘”이고, “우레와 비가 일어남이 해(解䷧)괘”이며, “바람과 우레가 익(益䷩)괘”이고, “우레와 번개가 모두 이르름이 풍 (豐䷶)괘”이며, “우레가 거듭함을 진(震䷲)괘”이고, “바람을 따름이 손(巽䷸)괘”이며, “구덩이를 거듭함이 감(坎䷜)괘”이고, “두 쪽이 밝게 일어남이 리(離䷝)괘”이며, “산을 겸함이 간(艮䷳)괘”이고, “못이 짝함이 태(兌䷹)괘”가 이와 같다. 무릇 이 14가지 괘(卦)는 모두 두쪽 몸을 다 들어서 뜻을 맺었다.
두 몸을 취하여 모두 이루고, 혹은 위아래 두 몸을 바로 들어서 상대한 것이 있으니, “하늘과 물이 어긋나게 감이 송(訟䷅)괘”이고,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리(履䷉)괘”이며, “하늘과 불이 동인(同人䷌)괘”이고,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睽䷥)괘”인데, 무릇 이 네가지 괘(卦)는 혹 두 몸이 서로 어김을 취하였고, 혹은 두 몸이 서로 합함을 취하였으며, 혹은 위아래 두 몸이 서로 받듦을 취하여서 괘(卦)가 되었기 때문에 두 몸을 서로 상대하면서 함께 말하였다.
비록 위아래 두 몸이 함께 한 괘(卦)를 이루었으나, 혹 곧바로 상체(上體)를 가리키면서 글로 삼은 것은, “구름이 하늘로 올라감이 수(需䷄)괘”이고, “바람이 하늘에 올라가 다님이 소축(小畜䷈)괘”이며, 불이 하늘에 올라가 있음이 대유(大有䷍)괘”이고, “우레가 땅에서 떨쳐 나옴이 예(豫䷏)괘”이며, “바람이 땅 위로 다님이 관(觀䷓)괘”이고, “산이 땅에 붙어 있음이 박(剝䷖)괘”이며, “못이 나무를 멸함이 대과(大過䷛)괘”이고, “우레가 하늘에 올라가 있은이 대장(大壯䷡)괘”이며, “밝음이 땅 위로 나옴이 진(晉䷢)괘”이고, “바람이 불에서 나옴이 가인(家人䷤)괘”이고, “못이 하늘로 올라감이 쾌(夬䷪)괘”이며, “못이 땅에 올라감이 췌(萃䷬)괘”이고, “바람이 물 위로 다님이 환(渙䷺)괘”이며, “물이 불 위에 있음이 기제(旣濟䷾)괘”이고, “불이 물 위에 있음의 미제(未濟䷿)괘”가 이와 같은데, 무릇 이 15가지 괘(卦)는 모두 먼저 위의 모습[象]을 들고서 아래에 이었으며, 또한 뜻이 위의 모습[象]을 취하여 그로써 괘(卦)의 이름을 세웠다.
또한 비록 뜻이 위의 모습[象]에 있는데도 먼저 아래의 모습[象]을 들어서 그로써 위의 모습[象]이 나오게 한 것은, “땅 위에 물이 있음이 비(比䷇)괘”이고, “못 위에 땅이 있음이 임(臨䷒)괘”이며, “산 위에 못이 있음이 함(咸䷞)괘”이고, “산 위에 불이 있음이 여(旅䷷)괘”이며, “나무 위에 물이 있음이 정(井䷯)괘”이고, “나무 위에 불이 있음이 정(鼎䷱)괘”이며, “산 위에 나무가 있음이 점(漸䷴)괘”이고, “못 위에 우레가 있음이 귀매(歸妹䷵)괘”이며, “산 위에 물이 있음이 건(蹇䷦)괘”이고, “못 위에 물이 있음이 절(節䷻)괘”이며, “못 위에 바람이 있음이 중부(中孚䷼)괘”이고, “산 위에 우레가 있음이 소과(小過䷽)괘”인데, 무릇 이 12가지 괘(卦)는 모두 먼저 아래 모습[象]을 들어서 그로써 위의 모습[象]이 나왔으며, 또한 뜻은 위의 모습[象]을 취하고 아래의 모습[象]을 함께하여서 괘(卦)를 이었다.
혹 먼저 위의 모습[象]을 들어서 아래 모습[象]이 나오게 하고, 뜻은 아래의 모습[象]을 취하여 그로써 괘(卦)의 뜻을 이룬 것은, “산 아래 샘물이 나옴이 몽(蒙䷃)괘”이고, “땅 가운데 물이 있음이 사(師䷆)괘”이며, “산 아래 바람이 있음이 고(蠱䷑)괘”이고, “산 아래 불이 있음이 분(賁䷕)괘”이며, “하늘 아래 우레가 다님이 무망(无妄䷘)괘”이고, “산 아래 우레가 있음이 이(頤䷚)괘”이며, “하늘 아래 산이 있음이 둔(遯䷠)괘”이고, “산 아래 못이 있음이 손(損䷨)괘”이며, “하늘 아래 바람이 있음이 구(姤䷫)괘”이고, “땅 가운데 산이 있음이 겸(謙䷎)괘”이며, “못 가운데 우레가 있음이 수(隨䷐)괘”이고, “땅 가운데 나무가 생김이 승(升䷭)괘”이며, “못 가운데 불이 있음이 혁(革䷰)괘”인데, 무릇 이 13가지 괘(卦)는 모두 먼저 위의 몸[體]을 들고 뒤에 아래 몸[體]을 밝게 하였는데, 그 위의 몸이 이 하늘이며, 하늘과 산이면 아래를 칭하였으며, 만약 위의 몸이 이 땅이며 땅과 못이면 가운데를 칭하였다.
혹은 비록 먼저 아래의 모습[象]을 들었으나 위의 모습[象]의 아래에 있는 것처럼 칭한 것이 있는데, “우레가 땅 가운데 있음이 복(復䷗)괘”이고, “하늘이 산 가운데 있음이 대축(大畜䷙)괘”이며,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감이 명이(明夷䷣)괘”이고, “못에 물이 없음의 곤(困䷮)괘”가 이와 같은데, 이는 먼저 아래의 모습[象]을 들고서 위의 모습[象]의 아래에 있음으로 칭하였으며, 또한 뜻은 아래의 모습[象]을 취하여 그로써 괘(卦)를 세웠다.
논한 바의 예로 한 것은, 모두 크게 판별하여서 말을 하였으며, 그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각각 괘(卦) 아래에 따로 자세히 고쳤다.
선유(先儒)가 일러준 바는 “이 〈상전(象傳)〉의 말은 혹 실제 모습[象]이 있고 혹은 거짓 모습[象]이 있다.” 하였는데, 실제 모습[象]이라는 것은, “땅 위에 물이 있음이 비(比䷇)괘”이고, “땅 가운데 나무가 자람의 승(升䷭)괘”가 이와 같은데, 모두 헛됨이 아니기 때문에 ‘실(實)’이라고 말하였다.
거짓 모습[象]이라는 것은 “하늘이 산 가운데 있음”과, “바람이 불에서 나왔다.”는 것과 같은데, 이와 같은 부류는 실제로 이러한 모습[象]이 없으나 거짓인데도 뜻을 삼았기 때문에 일컫기를 ‘가(假)’라고 하였다. 비록 실제 모습[象]과 거짓 모습[象]이 있으나 모두 뜻을 가지고 사람에게 보여주었으니, 총괄하여 일컫기를 ‘모습[象]’이라 하였다.
‘하늘이 운행이 굳세다.[天行健]’는 것은, 천체의 운행을 말하는데,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두루 하면서 다시 시작하여 한때도 이지러지거나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세다.[天行健]”라고 하였다. 이는 하늘의 스스로 그러함의 모습[象]을 말함이다.
‘군자는 스스로 강하게 하여서 쉬지 않는다.[君子以自强不息]’라고 함은, 이는 사람의 일로써 하늘의 운행하는 바를 본받음을 말함이며, 군자(君子)인 사람이 이 괘(卦)의 모습[象]을 사용하여 스스로 힘쓰고 노력하여 그치고 쉼이 있지 않음이다.
군자(君子)라고 말한 것은, 군자가 높은 자리에 임하여 아래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함을 가리킴이다.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를 통하고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를 겸하여 땅[食邑]이 있는 자는, 모두 군자(君子)라고 말하며 뜻이 모두 그러하다.
다만 지위가 높은 자는, 괘(卦) 모습[象]의 뜻이 많고, 지위가 낮은 자는 괘(卦) 모습[象]의 뜻이 적다.
다만 모름지기 힘을 헤아리면서 행하여 각각 그 괘(卦)를 본받아야 하기에, 여러 괘(卦)를 모두 군자(君子)라고 칭한 까닭이다.
만약 괘(卦) 몸의 뜻이 오직 천자(天子)에게만 시행되어서 아래에 있는 자를 겸하여 포함하지 않으면 ‘선왕(先王)’이라고 말하였는데, 비괘(比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만국을 세운다.”는 것과, 예괘(豫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음악을 만들어 덕(德)을 높인다.”는 것과, 관괘(觀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지방을 살펴보고 백성을 살펴보아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과,
서합괘(噬嗑卦)에 칭하기를 “先王이 그로써 형벌을 밝히고 법을 신칙한다.”는 것과, 복괘(復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보고서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는 것과, 무망괘(无妄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크게 때를 대하여 만물을 기른다.”는 것과, 환괘(渙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상제에게 제향하고 사당을 세운다.”는 것과, 태괘(泰卦)에 칭하기를 “임금[后]이 그로써 천지의 도(道)를 쌓아 이룬다.”는 것과, 구괘(姤卦)에 칭하기를 “임금이 보고서 명(命)을 베풀어 사방을 가르친다.”는 것이 같은 것이다.
‘후(后)’라고 칭한 것은 제후(諸侯)를 겸함이며, 이 밖의 괘(卦)에는 군자(君子)라고 나란히 칭하였다.」
[孔穎達 疏]‘象曰天行健’至‘自强不息’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천행건(象曰天行健)에서 자강불식(自强不息)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大象也, 十翼之中第三翼, 總象一卦, 故謂之大象.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대상(大象)이고, 십익(十翼)의 가운데 3번째 편[翼]이니, 한 괘(卦)를 모두 모습[象]하였기 때문에 일컫기를 "큰 모습[大象]"이라 하였다.
但萬物之體, 自然各有形象, 聖人設卦, 以寫萬物之象, 今夫子釋此卦之所象, 故言‘象曰’.
다만 만물(萬物)의 몸은, 스스로 그러한 각각 모양[形]과 모습[象]이 있는데 성인(聖人)이 괘(卦)를 설치(設置)하고 그로써 만물(萬物)의 모습[象]을 그렸으니, 지금 공자[夫子]께서 이 괘(卦)의 모습[象]한 바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상왈(象曰)’이라고 말하였다.
天有純剛, 故有健用, 今畫純陽之卦, 以比擬之, 故謂之‘象’.
하늘은 순수한 굳셈이 있기 때문에 굳셈의 쓰임이 있으니, 이제 순수한 양(陽)의 괘(卦)를 그어서 그로써 견주어 비교(比較)를 했기 때문에 일컫기를 ‘상(象)’이라 하였다.
象在彖後者, 彖詳而象略也.
〈상전(象傳)〉이 〈단전(彖傳)〉의 뒤에 있는 것은,〈단전(彖傳)〉이 자세하고 〈상전(象傳)〉이 소략하기 때문이다.
是以過半之義思, 在彖而不在象, 有由而然也.
이로써 반을 넘는 뜻과 생각이 〈단전(彖傳)〉에 있고 〈상전(象傳)〉에 있지 않으며, 이유가 있어서 그러하다.
‘天行健’者, ‘行’者運動之稱, ‘健’者强壯之名, 乾是衆健之訓.
"하늘의 운행은 굳셈.[天行健]"이라는 것의, ‘행(行)’이라는 것은, 운행하여 움직임[運動]을 칭하고, ‘건(健)’이라는 것은, 강하고 건장함의 이름이며, 건(乾)은 바로 여러 굳셈의 세김[訓]이다.
今大象不取餘健爲釋, 偏說天者, 萬物壯健, 皆有衰怠, 唯天運動, 日過一度, 蓋運轉混沒, 未曾休息, 故云“天行健”.
지금 대상(大象)에 다른 굳셈[健]을 취하여 해석을 하지 않고 하늘에 치우쳐 설명한 것은, 만물(萬物)이 씩씩하고 굳셈이 모두 쇠약하고 태만함이 있는데 오직 하늘의 운동은 하루에 한 도수(度數)를 지나가며, 대개 운전이 섞이거나 빠져서 일찍이 쉬거나 그치지 않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은 굳세다.[天行健]”라고 하였다.
健是乾之訓也, 順者坤之訓也.
굳셈[健]은 건(乾)의 세김[訓]이고, 순함[順]은 곤(坤)의 세김[訓]이다.
坤則云“地勢坤”, 此不言“天行乾”, 而言健者, 劉表云“詳其名也.” 然則天是體名, 乾則用名, 健是其訓.
곤(坤)은 곧 이르기를 “땅의 형세(形勢)가 순하다.[順; 坤]”고 하였는데, 이는 “하늘의 운행이 굳세다.[乾; 健]”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굳세이라 말한 것을, 유표(劉表)가 이르기를 “그 이름을 자세히 함이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천(天)은 몸체[體]의 이름이고 건(乾)은 쓰임[用]의 이름이며 굳셈[健]은 바로 그 세김[訓]이다.
三者竝見, 最爲詳悉, 所以尊乾, 異於他卦.
세 가지가 나란히 나타나 모두 가장 자세하게 되는데, 건(乾)을 높이는 까닭은 다른 괘(卦)와 달리하였음이다.
凡六十四卦, 說象不同, 或總擧象之所由, 不論象之實體, 又總包六爻, 不顯上體下體, 則乾‧坤二卦, 是也. 凡六十四卦, 說象不同, 或總擧象之所由, 不論象之實體, 又總包六爻, 不顯上體下體, 則乾‧坤二卦, 是也.
무릇 64괘(卦)에 모습[象]을 같지 않음으로 설명했는데, 혹 모습[象]의 연유한 바를 모두 들었으나 모습[象]의 실체(實體)를 논하지 않았으며, 또 6효(爻)를 모두 포괄하고 상체(上體)와 하체(下體)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곧 건(乾)과 곤(坤) 두 괘(卦)가 이것이다.
或直擧上下二體者, 若“雲雷, 屯”也, “天地交, 泰”也, “天地不交, 否”也, “雷電, 噬嗑”也, “雷風, 恒”也, “雷雨作, 解”也, “風雷, 益”也, “雷電皆至, 豐”也, “洊雷, 震”也, “隨風, 巽”也, “習坎, 坎”也, “明兩作, 離”也, “兼山, 艮”也, “麗澤, 兌”也, 凡此一十四卦, 皆總擧兩體而結義也.
혹은 위아래 두 몸을 바로 든 것은, “구름과 우레 [두 몸이] 둔(屯䷂)괘”이고, “하늘과 땅이 사귐이 태(泰䷊)괘”이며, “하늘과 땅이 사귀지 않음이 비(否䷋)괘”이고, “우레와 번개가 서합(噬嗑䷔)괘”이며, “우레와 바람이 항(恒䷟)괘”이고, “우레와 비가 일어남이 해(解䷧)괘”이며, “바람과 우레가 익(益䷩)괘”이고, “우레와 번개가 모두 이르름이 풍 (豐䷶)괘”이며, “우레가 거듭함을 진(震䷲)괘”이고, “바람을 따름이 손(巽䷸)괘”이며, “구덩이를 거듭함이 감(坎䷜)괘”이고, “두 쪽이 밝게 일어남이 리(離䷝)괘”이며, “산을 겸함이 간(艮䷳)괘”이고, “못이 짝함이 태(兌䷹)괘”가 이와 같다. 무릇 이 14가지 괘(卦)는 모두 두쪽 몸을 다 들어서 뜻을 맺었다.
取兩體俱成, 或有直擧兩體上下相對者, “天與水違行, 訟”也, “上天下澤, 履”也, “天與火, 同人”也, “上火下澤, 睽”也, 凡此四卦, 或取兩體相違, 或取兩體相合, 或取兩體上下相承而爲卦也, 故兩體相對而俱言也.
두 몸을 취하여 모두 이루고, 혹은 위아래 두 몸을 바로 들어서 상대한 것이 있으니, “하늘과 물이 어긋나게 감이 송(訟䷅)괘”이고,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리(履䷉)괘”이며, “하늘과 불이 동인(同人䷌)괘”이고,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睽䷥)괘”인데, 무릇 이 네가지 괘(卦)는 혹 두 몸이 서로 어김을 취하였고, 혹은 두 몸이 서로 합함을 취하였으며, 혹은 위아래 두 몸이 서로 받듦을 취하여서 괘(卦)가 되었기 때문에 두 몸을 서로 상대하면서 함께 말하였다.
雖上下二體共成一卦, 或直指上體而爲文者, 若“雲上於天, 需”也, “風行天上, 小畜”也, “火在天上, 大有”也, “雷出地奮, 豫”也, “風行地上, 觀”也, “山附於地, 剝”也, “澤滅木, 大過”也, “雷在天上, 大壯”也, “明出地上, 晉”也, “風自火出, 家人”也, “澤上於天, 夬”也, “澤上於地, 萃”也, “風行水上, 渙”也, “水在火上, 旣濟”也, “火在水上, 未濟”也, 凡此十五卦, 皆先擧上象而連於下, 亦意取上象以立卦名也.
비록 위아래 두 몸이 함께 한 괘(卦)를 이루었으나, 혹 곧바로 상체(上體)를 가리키면서 글로 삼은 것은, “구름이 하늘로 올라감이 수(需䷄)괘”이고, “바람이 하늘에 올라가 다님이 소축(小畜䷈)괘”이며, 불이 하늘에 올라가 있음이 대유(大有䷍)괘”이고, “우레가 땅에서 떨쳐 나옴이 예(豫䷏)괘”이며, “바람이 땅 위로 다님이 관(觀䷓)괘”이고, “산이 땅에 붙어 있음이 박(剝䷖)괘”이며, “못이 나무를 멸함이 대과(大過䷛)괘”이고, “우레가 하늘에 올라가 있은이 대장(大壯䷡)괘”이며, “밝음이 땅 위로 나옴이 진(晉䷢)괘”이고, “바람이 불에서 나옴이 가인(家人䷤)괘”이고, “못이 하늘로 올라감이 쾌(夬䷪)괘”이며, “못이 땅에 올라감이 췌(萃䷬)괘”이고, “바람이 물 위로 다님이 환(渙䷺)괘”이며, “물이 불 위에 있음이 기제(旣濟䷾)괘”이고, “불이 물 위에 있음의 미제(未濟䷿)괘”가 이와 같은데, 무릇 이 15가지 괘(卦)는 모두 먼저 위의 모습[象]을 들고서 아래에 이었으며, 또한 뜻이 위의 모습[象]을 취하여 그로써 괘(卦)의 이름을 세웠다.
亦有雖意在上象, 而先擧下象, 以出上象者, “地上有水, 比”也, “澤上有地, 臨”也, “山上有澤, 咸”也, “山上有火, 旅”也, “木上有水, 井”也, “木上有火, 鼎”也, “山上有木, 漸”也, “澤上有雷, 歸妹”也, “山上有水, 蹇”也, “澤上有水, 節”也, “澤上有風, 中孚”也, “山上有雷, 小過”也, 凡此十二卦, 皆先擧下象以出上象, 亦意取上象, 共下象而成卦也.
또한 비록 뜻이 위의 모습[象]에 있는데도 먼저 아래의 모습[象]을 들어서 그로써 위의 모습[象]이 나오게 한 것은, “땅 위에 물이 있음이 비(比䷇)괘”이고, “못 위에 땅이 있음이 임(臨䷒)괘”이며, “산 위에 못이 있음이 함(咸䷞)괘”이고, “산 위에 불이 있음이 여(旅䷷)괘”이며, “나무 위에 물이 있음이 정(井䷯)괘”이고, “나무 위에 불이 있음이 정(鼎䷱)괘”이며, “산 위에 나무가 있음이 점(漸䷴)괘”이고, “못 위에 우레가 있음이 귀매(歸妹䷵)괘”이며, “산 위에 물이 있음이 건(蹇䷦)괘”이고, “못 위에 물이 있음이 절(節䷻)괘”이며, “못 위에 바람이 있음이 중부(中孚䷼)괘”이고, “산 위에 우레가 있음이 소과(小過䷽)괘”인데, 무릇 이 12가지 괘(卦)는 모두 먼저 아래 모습[象]을 들어서 그로써 위의 모습[象]이 나왔으며, 또한 뜻은 위의 모습[象]을 취하고 아래의 모습[象]을 함께하여서 괘(卦)를 이었다.
或先擧上象而出下象, 義取下象以成卦義者, “山下出泉, 蒙”也, “地中有水, 師”也, “山下有風, 蠱”也, “山下有火, 賁”也, “天下雷行, 无妄”也, “山下有雷, 頤”也, “天下有山, 遯”也, “山下有澤, 損”也, “天下有風, 姤”也, “地中有山, 謙”也, “澤中有雷, 隨”也, “地中生木, 升”也, “澤中有火, 革”也, 凡此十三卦, 皆先擧上體, 後明下體也, 其上體是天, 天與山則稱下也, 若上體是地, 地與澤則稱中也.
혹 먼저 위의 모습[象]을 들어서 아래 모습[象]이 나오게 하고, 뜻은 아래의 모습[象]을 취하여 그로써 괘(卦)의 뜻을 이룬 것은, “산 아래 샘물이 나옴이 몽(蒙䷃)괘”이고, “땅 가운데 물이 있음이 사(師䷆)괘”이며, “산 아래 바람이 있음이 고(蠱䷑)괘”이고, “산 아래 불이 있음이 분(賁䷕)괘”이며, “하늘 아래 우레가 다님이 무망(无妄䷘)괘”이고, “산 아래 우레가 있음이 이(頤䷚)괘”이며, “하늘 아래 산이 있음이 둔(遯䷠)괘”이고, “산 아래 못이 있음이 손(損䷨)괘”이며, “하늘 아래 바람이 있음이 구(姤䷫)괘”이고, “땅 가운데 산이 있음이 겸(謙䷎)괘”이며, “못 가운데 우레가 있음이 수(隨䷐)괘”이고, “땅 가운데 나무가 생김이 승(升䷭)괘”이며, “못 가운데 불이 있음이 혁(革䷰)괘”인데, 무릇 이 13가지 괘(卦)는 모두 먼저 위의 몸[體]을 들고 뒤에 아래 몸[體]을 밝게 하였는데, 그 위의 몸이 이 하늘이며, 하늘과 산이면 아래를 칭하였으며, 만약 위의 몸이 이 땅이며 땅과 못이면 가운데를 칭하였다.
或有雖先擧下象, 稱在上象之下者, 若“雷在地中, 復”也, “天在山中, 大畜”也, “明入地中, 明夷”也, “澤无水, 困”也, 是先擧下象而稱在上象之下, 亦義取下象以立卦也.
혹은 비록 먼저 아래의 모습[象]을 들었으나 위의 모습[象]의 아래에 있는 것처럼 칭한 것이 있는데, “우레가 땅 가운데 있음이 복(復䷗)괘”이고, “하늘이 산 가운데 있음이 대축(大畜䷙)괘”이며,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감이 명이(明夷䷣)괘”이고, “못에 물이 없음의 곤(困䷮)괘”가 이와 같은데, 이는 먼저 아래의 모습[象]을 들고서 위의 모습[象]의 아래에 있음으로 칭하였으며, 또한 뜻은 아래의 모습[象]을 취하여 그로써 괘(卦)를 세웠다.
所論之例者, 皆大判而言之, 其間委曲, 各於卦下, 別更詳之.
논한 바의 예로 한 것은, 모두 크게 판별하여서 말을 하였으며, 그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각각 괘(卦) 아래에 따로 자세히 고쳤다.
先儒所云“此等象辭, 或有實象, 或有假象.”實象者, 若“地上有水, 比”也, “地中生木, 升”也, 皆非虛, 故言實也.
선유(先儒)가 일러준 바는 “이 〈상전(象傳)〉의 말은 혹 실제 모습[象]이 있고 혹은 거짓 모습[象]이 있다.” 하였는데, 실제 모습[象]이라는 것은, “땅 위에 물이 있음이 비(比䷇)괘”이고, “땅 가운데 나무가 자람의 승(升䷭)괘”가 이와 같은데, 모두 헛됨이 아니기 때문에 ‘실(實)’이라고 말하였다.
假象者, 若“天在山中”, “風自火出”, 如此之類, 實无此象, 假而爲義, 故謂之假也. 雖有實象假象, 皆以義示人, 總謂之象也.
거짓 모습[象]이라는 것은 “하늘이 산 가운데 있음”과, “바람이 불에서 나왔다.”는 것과 같은데, 이와 같은 부류는 실제로 이러한 모습[象]이 없으나 거짓인데도 뜻을 삼았기 때문에 일컫기를 ‘가(假)’라고 하였다. 비록 실제 모습[象]과 거짓 모습[象]이 있으나 모두 뜻을 가지고 사람에게 보여주었으니, 총괄하여 일컫기를 ‘모습[象]’이라 하였다.
‘天行健’者, 謂天體之行, 晝夜不息, 周而復始, 无時虧退, 故云“天行健”. 此謂天之自然之象.
‘하늘이 운행이 굳세다.[天行健]’는 것은, 천체의 운행을 말하는데,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두루 하면서 다시 시작하여 한때도 이지러지거나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세다.[天行健]”라고 하였다. 이는 하늘의 스스로 그러함의 모습[象]을 말함이다.
‘君子以自强不息’, 此以人事法天所行言. 君子之人, 用此卦象, 自彊勉力, 不有止息.
‘군자는 스스로 강하게 하여서 쉬지 않는다.[君子以自强不息]’라고 함은, 이는 사람의 일로써 하늘의 운행하는 바를 본받음을 말함이며, 군자(君子)인 사람이 이 괘(卦)의 모습[象]을 사용하여 스스로 힘쓰고 노력하여 그치고 쉼이 있지 않음이다.
言‘君子’者, 謂君臨上位, 子愛下民. 通天子‧諸侯, 兼公卿‧大夫有地者, 凡言君子, 義皆然也.
군자(君子)라고 말한 것은, 군자가 높은 자리에 임하여 아래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함을 가리킴이다.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를 통하고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를 겸하여 땅[食邑]이 있는 자는, 모두 군자(君子)라고 말하며 뜻이 모두 그러하다.
但位尊者, 象卦之義多也, 位卑者, 象卦之義少也. 但須量力而行, 各法其卦也, 所以諸卦竝稱君子.
다만 지위가 높은 자는, 괘(卦) 모습[象]의 뜻이 많고, 지위가 낮은 자는 괘(卦) 모습[象]의 뜻이 적다.
다만 모름지기 힘을 헤아리면서 행하여 각각 그 괘(卦)를 본받아야 하기에, 여러 괘(卦)를 모두 군자(君子)라고 칭한 까닭이다.
若卦體之義, 唯施於天子, 不兼包在下者, 則言先王也, 若比卦稱“先王以建萬國”, 豫卦稱“先王以作樂崇德”, 觀卦稱“先王以省方觀民設敎”, 噬嗑稱“先王以明罰勅法”, 復卦稱“先王以至日閉關”, 无妄稱“先王以茂對時育萬物”, 渙卦稱“先王以享于帝立廟”, 泰卦稱“后以財成天地之道”, 姤卦稱“后以施命誥四方”.
만약 괘(卦) 몸의 뜻이 오직 천자(天子)에게만 시행되어서 아래에 있는 자를 겸하여 포함하지 않으면 ‘선왕(先王)’이라고 말하였는데, 비괘(比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만국을 세운다.”는 것과, 예괘(豫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음악을 만들어 덕(德)을 높인다.”는 것과, 관괘(觀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지방을 살펴보고 백성을 살펴보아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과,
서합괘(噬嗑卦)에 칭하기를 “先王이 그로써 형벌을 밝히고 법을 신칙한다.”는 것과, 복괘(復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보고서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는 것과, 무망괘(无妄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크게 때를 대하여 만물을 기른다.”는 것과, 환괘(渙卦)에 칭하기를 “선왕(先王)이 그로써 상제에게 제향하고 사당을 세운다.”는 것과, 태괘(泰卦)에 칭하기를 “임금[后]이 그로써 천지의 도(道)를 쌓아 이룬다.”는 것과, 구괘(姤卦)에 칭하기를 “임금이 보고서 명(命)을 베풀어 사방을 가르친다.”는 것이 같은 것이다.
稱后, 兼諸侯也, 自外卦, 竝稱君子.
‘후(后)’라고 칭한 것은 제후(諸侯)를 겸함이며, 이 밖의 괘(卦)에는 군자(君子)라고 나란히 칭하였다.」
[小象傳 初九] 潛龍勿用,陽在下也。
[小象傳 九二] 見龍在田,德施普也。
[小象傳 九三] 終日乾乾,反復道也。
잠겨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함은 양(陽)이 아래에 있음이다.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음은 덕(德)을 널리 베품이다. 종일토록 더욱 노력함은 도(道)를 회복함이다.
【王弼 注】 以上言之則不驕,以下言之則不憂,反覆皆道也。
【왕필 주】 이상의 말한 것인 즉 교만하지 않음이고, 이하의 말한 것인 즉 근심하지 않음이며 모든 도(道)를 반대로 덮음이다.
[孔穎達 疏]「潛龍勿用」至「反覆道也」。
正義曰:自此以下至「盈不可久」,是夫子釋六爻之《象》辭,謂之「小象」。以初九陽潛地中,故云「陽在下也」。經言「龍」而《象》言「陽」者,明經之稱「龍」,則陽氣也。此一爻之象,專明天之自然之氣也。「見龍在田,德施普」者,此以人事言之,用龍德在田,似聖人己出在世,道德恩施,能普遍也。《比》「初九勿用」,是其周普也。若《比》九五,則猶狹也。「終日乾乾,反復道」者,此亦以人事言之。君子「終日乾乾」,自彊不息,故反之與覆,皆合其道。反謂進反在上也,處下卦之上,能不驕逸,是反能合道也。覆謂從上倒覆而下,居上卦之下,能不憂懼,是覆能合道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잠용물용(潛龍勿用)에서 반복도야(反覆道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로부터 이하 ‘영불가구(盈不可久)’에 이르기 까지는 바로 공자[夫子]께서 여섯 효(爻)를 해석한 〈상전(象傳)〉의 말이며, 일컫기를 소상(小象)이라 한다.
초구(初九)로써 양(陽)이 땅 가운데 잠겨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양(陽)이 아래에 있다.”고 함이다.
경(經)에서는 용(龍)을 말하였는데 〈상전(象傳)〉에서는 양(陽)이라 말한 것은, 경(經)의 용(龍)이라 칭함이 곧 양기(陽氣)임을 밝힘이다. 이는 한 효(爻)의 모습[象]이니, 오로지 하늘의 스스로 그러하는 기운을 밝힘이다.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음은 덕(德)을 널리 베품이다.[見龍在田 德施普]”라는 것은, 이는 사람의 일로써 말을 하였다. 용(龍)의 덕(德)을 사용하여 밭에 있음은 성인(聖人)이 이미 나와 세상에 있음을 닮았는데, 도덕(道德)과 은혜(恩惠)의 베풂을 넓리 두루 잘함이다. <비(比)>괘 초구(初九)의 ‘쓰지 말라[勿用]’고 하였는데, 이는 두루 넓리함이며 만약 <비(比)>괘 구오(九五)에 곧 좁음과 같다.
“종일토록 더욱 노력함은 도(道)를 회복함이다.[終日乾乾 反復道]”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로써 말을 하였다.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며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기 때문에 돌아가서 더블어 다시하니 모두 그 도(道)에 부합함이다.
‘반(反)’은 나아갔다가 돌아와서 위에 있음을 말하는데, 아래 괘(卦)의 위에 처하여 교만함과 안일함을 잘하지 않으니, 이는 돌이켜서 도(道)에 잘 부합함이다.
‘복(覆)’은 위에서 거꾸로 다시 하여 아래에 따름을 일컫는데, 상괘(上卦)의 아래에 거주하여 근심과 두려움을 잘하지 않으니, 이는 다시[覆]하여 도(道)에 잘 부합함이다.
[孔穎達 疏]‘潛龍勿用’至‘反覆道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잠용물용(潛龍勿用)에서 반복도야(反覆道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自此以下至‘盈不可久’, 是夫子釋六爻之象辭, 謂之小象.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로부터 이하 ‘영불가구(盈不可久)’에 이르기 까지는 바로 공자[夫子]께서 여섯 효(爻)를 해석한 〈상전(象傳)〉의 말이며, 일컫기를 소상(小象)이라 한다.
以初九陽潛地中, 故云“陽在下也.”
초구(初九)로써 양(陽)이 땅 가운데 잠겨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양(陽)이 아래에 있다.”고 함이다.
經言龍而象言陽者, 明經之稱龍, 則陽氣也. 此一爻之象, 專明天之自然之氣也.
경(經)에서는 용(龍)을 말하였는데 〈상전(象傳)〉에서는 양(陽)이라 말한 것은, 경(經)의 용(龍)이라 칭함이 곧 양기(陽氣)임을 밝힘이다. 이는 한 효(爻)의 모습[象]이니, 오로지 하늘의 스스로 그러하는 기운을 밝힘이다.
‘見龍在田 德施普’者, 此以人事言之. 用龍德在田, 似聖人已出在世, 道德恩施, 能普徧也, 《比》初九勿用, 是其周普也, 若比九五, 則猶狹也.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음은 덕(德)을 널리 베품이다.[見龍在田 德施普]”라는 것은, 이는 사람의 일로써 말을 하였다. 용(龍)의 덕(德)을 사용하여 밭에 있음은 성인(聖人)이 이미 나와 세상에 있음을 닮았는데, 도덕(道德)과 은혜(恩惠)의 베풂을 넓리 두루 잘함이다. <비(比)>괘 초구(初九)의 ‘쓰지 말라[勿用]’고 하였는데, 이는 두루 넓리함이며 만약 <비(比)>괘 구오(九五)에 곧 좁음과 같다.
‘終日乾乾 反復道’者, 此亦以人事言之. 君子終日乾乾, 自彊不息, 故反之與覆, 皆合其道.
“종일토록 더욱 노력함은 도(道)를 회복함이다.[終日乾乾 反復道]”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로써 말을 하였다.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며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기 때문에 돌아가서 더블어 다시하니 모두 그 도(道)에 부합함이다.
反謂進反在上也, 處下卦之上, 能不驕逸, 是反能合道也.
‘반(反)’은 나아갔다가 돌아와서 위에 있음을 말하는데, 아래 괘(卦)의 위에 처하여 교만함과 안일함을 잘하지 않으니, 이는 돌이켜서 도(道)에 잘 부합함이다.
覆謂從上倒覆而下, 居上卦之下, 能不憂懼, 是覆能合道也.
‘복(覆)’은 위에서 거꾸로 다시 하여 아래에 따름을 일컫는데, 상괘(上卦)의 아래에 거주하여 근심과 두려움을 잘하지 않으니, 이는 다시[覆]하여 도(道)에 잘 부합함이다.
[小象傳 九四] 或躍在淵,進,无咎也。
연못에 있으면서 때로 뛰어오름은, 나아가도 허물이 없음이다.
[小象傳 九五] 飛龍在天,大人造也。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은, 대인이 지어냄이다.
[小象傳 上九] 亢龍有悔,盈不可久也。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음은, 가득참은 오래 할 수 없음이다.
[孔穎達 疏]「或躍在淵」至「盈不可久也」。○正義曰:「或躍在淵,進無咎」者,此亦人事言之。進則跳躍在上,退在潛處在淵,猶聖人疑或,而在於貴位也。心所欲進,意在於公,非是為私,故「進無咎」也。「飛龍在天,大人造」者,此亦人事言之。「飛龍在天」,猶聖人之在王位。造,為也。唯大人能為之而成就也。姚信、陸績之屬,皆以「造」為造至之「造」。今案:《象》辭皆上下為韻,則姚信之義,其讀非也。「亢龍有悔,盈不可久」者,此亦人事言之。九五是盈也,盈而不已則至上九,地致亢極,有悔恨也。故云「盈不可久也」。但此六爻《象》辭,第一爻言「陽在下」,是舉自然之象,明其餘五爻皆有自然之象,舉初以見未。五爻並論人事,則知初爻亦有人事,互文相通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혹약재연(或躍在淵)에서 영불가구야(盈不可久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연못에 있으면서 때로 뛰어오름은, 나아가도 허물이 없음이다.[或躍在淵 進无咎]”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을 말하였음이다.
마음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바는, 뜻이 공정함에 있으며, 이는 사사로움을 하려함이 아니기 때문에 나아감에 허물이 없다.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음은, 대인이 지어냄이다.[飛龍在天 大人造]"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을 말하였음이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飛龍在天]"은 성왕(聖人)이 왕의 자리에 있음과 같다.
‘조(造)’는 함인데,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그것을 잘하여서 나아가 이룸이다.
조신(姚信, 오나라 무강 사람)과 육적(陸績)의 부류는, 모두 지음을 가지고 만들어 이르름의 조(造)라 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상전(象傳)의 말은 모두 상하가 운율(韻律)로 되어 있으니, 곧 조신(姚信)이 뜻함은 그 읽음[讀]이 잘못되었다.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음은, 가득차면 오래 할 수 없음이다.[亢龍有悔 盈不可久]"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을 말하였음이다.
구오(九五)는 바로 가득함인데, 가득한데도 그치지 않으면 상구(上九)에 이르러 땅이 높은 꼭대기[亢極]를 이루게 되니, 뉘우치고 한탄함이 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가득함을 오래 할 수 없다.[盈不可久]”라고 하였다.
다만 이 여섯 효(爻)의 단전(象傳) 글의 첫 번째 효(爻)에서 말하기를 “양(陽)이 아래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스스로 그러함의 모습[象]을 들어서 그 나머지 다섯 효(爻)가 모두 스스로 그러함의 모습[象]이 있음을 밝혔으니, 처음을 들어서 그로써 끝을 나타냄이며, 다섯 효(爻)가 나란히 사람의 일을 논하였으니, 곧 초효(初爻) 또한 사람의 일이 있음을 알게되며, 글이 서로 서로 통한다.」
[孔穎達 疏]‘或躍在淵’至‘盈不可久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혹약재연(或躍在淵)에서 영불가구야(盈不可久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或躍在淵 進无咎’者, 此亦人事言之.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연못에 있으면서 때로 뛰어오름은, 나아가도 허물이 없음이다.[或躍在淵 進无咎]”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을 말하였음이다.
進則跳躍在上, 退在潛處在淵, 猶聖人疑或, 而在於貴位也.
마음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바는, 뜻이 공정함에 있으며, 이는 사사로움을 하려함이 아니기 때문에 나아감에 허물이 없다.
‘飛龍在天 大人造’者, 此亦人事言之.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음은, 대인이 지어냄이다.[飛龍在天 大人造]"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을 말하였음이다.
‘飛龍在天’, 猶聖人之在王位.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飛龍在天]"은 성왕(聖人)이 왕의 자리에 있음과 같다.
‘造’, 爲也, 唯大人能爲之而成就也.
‘조(造)’는 함인데,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그것을 잘 하여서 나아가 이룸이다.
姚信‧陸績之屬, 皆以造爲造至之造.
조신(姚信, 오나라 무강 사람)과 육적(陸績)의 부류는, 모두 지음을 가지고 만들어 이르름의 조(造)라 하였다.
今案, 象辭皆上下爲韻, 則姚信之義, 其讀非也.
이제 살펴보건대, 상전(象傳)의 말은 모두 상하가 운율(韻律)로 되어 있으니, 곧 조신(姚信)이 뜻함은 그 읽음[讀]이 잘못되었다.
‘亢龍有悔 盈不可久’者, 此亦人事言之.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음은, 가득차면 오래 할 수 없음이다.[亢龍有悔 盈不可久]"라는 것은, 이 또한 사람의 일을 말하였음이다.
九五是盈也, 盈而不已, 則至上九, 地致亢極, 有悔恨也, 故云“盈不可久也.”
구오(九五)는 바로 가득함인데, 가득한데도 그치지 않으면 상구(上九)에 이르러 땅이 높은 꼭대기[亢極]를 이루게 되니, 뉘우치고 한탄함이 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가득함을 오래 할 수 없다.[盈不可久]”라고 하였다.
但此六爻象辭, 第一爻言“陽在下”, 是擧自然之象, 明其餘五爻皆有自然之象, 擧初以見末, 五爻竝論人事, 則知初爻亦有人事, 互文相通也.
다만 이 여섯 효(爻)의 단전(象傳) 글의 첫 번째 효(爻)에서 말하기를 “양(陽)이 아래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스스로 그러함의 모습[象]을 들어서 그 나머지 다섯 효(爻)가 모두 스스로 그러함의 모습[象]이 있음을 밝혔으니, 처음을 들어서 그로써 끝을 나타냄이며, 다섯 효(爻)가 나란히 사람의 일을 논하였으니, 곧 초효(初爻) 또한 사람의 일이 있음을 알게되며, 글이 서로 서로 통한다.」
用九,天德,不可為首也。
용구(用九)는 하늘의 덕(德)은 우두머리 됨이 불가하다.
[孔穎達 疏]正義曰:此一節釋經之「用九」之《象》辭。經稱「用九」,故《象》更疊云「用九」。云「天德不可為首」者,此夫子釋辭也。九是天之德也,天德剛健,當以柔和接待於下,不可更懷尊剛為物之首,故云「天德不可為首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경(經)의 용구(用九)를 해석한 상전(象傳)의 말이다. 경(經)에 용구(用九)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다시 중첩하여 이르기를 ‘용구(用九)’라고 하였으며, 이르기를 “ 하늘의 덕(德)은 우두머리 됨이 불가하다.[天德不可爲首]”라고 한 것이며, 이는 공자[夫子]께서 해석한 말이다.
이 구(九)는 하늘의 덕(德)인데, 하늘의 덕(德)은 강건(剛健)하니, 마땅히 부드럽게 어울림으로써 아래를 접대하는데, 높음과 굳셈을 다시 품어서 사물의 머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덕(德)은 머리가 될 수가 없다.[天德不可爲首]”라고 하였음이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一節, 釋經之用九之象辭. 經稱用九, 故象更疊云‘用九’. 云‘天德不可爲首’者, 此夫子釋辭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경(經)의 용구(用九)를 해석한 상전(象傳)의 말이다. 경(經)에 용구(用九)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다시 중첩하여 이르기를 ‘용구(用九)’라고 하였으며, 이르기를 “ 하늘의 덕(德)은 우두머리 됨이 불가하다.[天德不可爲首]”라고 한 것이며, 이는 공자[夫子]께서 해석한 말이다.
九是天之德也, 天德剛健, 當以柔和接待於下, 不可更懷尊剛, 爲物之首, 故云“天德不可爲首也.”
이 구(九)는 하늘의 덕(德)인데, 하늘의 덕(德)은 강건(剛健)하니, 마땅히 부드럽게 어울림으로써 아래를 접대하는데, 높음과 굳셈을 다시 품어서 사물의 머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덕(德)은 머리가 될 수가 없다.[天德不可爲首]”라고 하였음이다.」
◎ ≪文言傳≫ 第一節
文言曰:元者善之長也,亨者嘉之會也,利者義之和也,貞者事之幹也。君子體仁足以長人,嘉會足以合禮,利物足以和義,貞固足以幹事。君子行此四德者,故曰:乾,元亨利貞。
글 말[文言]에 말하였다. 「원(元)이란 것은 선(善)의 우두머리이며, 형(亨)이란 것은 아름다움(嘉)의 모임이다. 이(利)라는 것은 옳음의 어울림이고, 정(貞)이란 것은 일의 근간이다. 군자가 어짊을 체득하면 사람을 길러내기에 족하고, 아름다움을 모으면 예(禮)를 부합시키기에 족하며, 만물을 이롭게 하면 옳음을 화합하기에 족하고, 곧음을 굳건히 하면 일을 주간하기에 족하다. 군자는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건(乾)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고 말하였다.
[孔穎達 疏]「《文言》曰」至「乾元亨利貞」。
○正義曰:《文言》者,是夫子第七翼也。以乾、坤其《易》之門戶邪,其餘諸卦及爻,皆從乾、坤而出,義理深奧,故特作《文言》以開釋之。莊氏云:「文謂文飾,以乾、坤德大,故特文飾,以為《文言》。」今謂夫子但贊明易道,申說義理,非是文飾華彩,當謂釋二卦之經文,故稱《文言》。從此至「元亨利貞」,明乾之四德,為第一節;從「初九曰潛龍勿用」至「動而有悔」,明六爻之義,為第二節;自「潛龍勿用」下至「天下治也」,論六爻之人事,為第三節;自「潛龍勿用,陽氣潛藏」至「乃見天則」,論六爻自然之氣,為第四節;自「乾元者」至「天下平也」,此一節復說「乾元」之「四德」之義,為第五節;自「君子以成德為行」至「其唯聖人乎」,此一節更廣明六爻之義,為第六節。今各依文解之。此第一節論乾之四德也。「元者善之長也」,此巳下論乾之「四德」,但乾之為體,是天之用。凡天地運化,自然而爾,因無而生有也,無為而自為。天本無心,豈造「元亨利貞」之德也?天本無名,豈造「元亨利貞」之名也?但聖人以人事?之,謂此自然之功,為天之四德,垂教於下,使後代聖人法天之所為,故立天「四德」以設教也。莊氏云:「第一節'元者善之長'者,謂天之體性,生養萬物,善之大者,莫善施生,元為施生之宗,故言'元者善之長'也。'亨者嘉之會'者,嘉,美也。言天能通暢萬物,使物嘉美之會聚,故云'嘉之會'也。'利者義之和'者,言天能利益庶物,使物各得其宜而和同也。'貞者事之幹'者,言天能以中正之氣,成就萬物,使物皆得幹濟。」莊氏之意,以此四句明天之德也,而配四時。「元」是物始,於時配春,春為發生,故下云「體仁」,仁則春也。「亨」是通暢萬物,於時配夏,故下云「合禮」,禮則夏也。「利」為和義,於時配秋,秋既物成,各合其宜。「貞」為事幹,於時配冬,冬既收藏,事皆幹了也。於五行之氣,唯少土也。土則分王四季,四氣之行,非土不載,故不言也。「君子體仁足以長人」者,自此巳下,明人法天之行此「四德」,言君子之人,體包仁道,泛愛施生,足以尊長於人也。仁則善也,謂行仁德,法天之「元」德也。「嘉會足以合禮」者,言君子能使萬物嘉美集會,足以配合於禮,謂法天之「亨」也。「利物足以和義」者,言君子利益萬物,使物各得其宜,足以和合於義,法天之「利」也。「貞固足以幹事」者,言君子能堅固貞正,令物得成,使事皆幹濟,此法天之「貞」也。施於王事言之,元則仁也,亨則禮也,利則義也,貞則信也。不論智者,行此四事,並須資於知。且《乾鑿度》云:「水土二行,兼信與知也。」故略而不言也。「君子行此四德者,故曰:乾,元亨利貞」,以君子之人,當行此四種之德。是以文王作《易》,稱「元亨利貞」之德,欲使君子法之。但行此「四德」,則與天同功,非聖人不可。唯云「君子」者,但易之為道。廣為垂法。若限尚聖人,恐不逮餘下。故總云「君子」,使諸侯公卿之等,悉皆行之。但聖人行此「四德」,能盡其極也。君子行此「四德」,各量力而為,多少各有其分。但乾卦象天,故以此「四德」皆為天德。但陰陽合會,二象相成,皆能有德,非獨乾之一卦。是以諸卦之中亦有「四德」,但餘卦「四德」有劣於乾故乾。卦直云「四德」。更無所言,欲見乾之「四德」,無所不包。其餘卦「四德」之下,則更有餘事,以「四德」狹劣,故以餘事系之,即《坤卦》之類是也。亦有「四德」之上,即論餘事,若《革卦》云「巳日乃孚,元亨利貞,悔亡」也。由「乃孚」之後有「元亨利貞」,乃得「悔亡」也。有「四德」者,即乾、坤、屯、臨、隨、無妄、革七卦是也。亦有其卦非善,而有「四德」者,以其卦凶,故有「四德」乃可也。故《隨卦》有「元亨利貞」,乃得無咎」是也。「四德」具者,其卦未必善也。亦有三德者,即離、鹹、萃、兌、渙、小過。凡六卦就三德之中,為文不一,或總稱三德於上,更別陳餘事於下,若離、鹹之屬是也。就三德之中,上下不一,《離》則云「利貞亨」。由利貞乃得亨也。亦有先云「亨」,更陳餘事,乃始云「利貞」者,以有餘事,乃得利貞故也。有二德者,大有、蠱、漸、大畜、升、困、中孚凡七卦。此二德或在事上言之,或在事後言之由後有事,乃致此二德故也。亦有一德者,若蒙、師、小、畜、履、泰、謙、噬嗑、賁、復、大過、震、豐、節、既濟、未濟、凡十五卦,皆一德也,並是「亨」也。或多在事上言之,或在事後言。《履卦》云:「履虎尾,不咥人,亨。」由有事乃得亨。以前所論德者,皆於經文挺然特明德者乃言之也。其有因事相連而言德者,則不數之也。若《需卦》云:「需,有孚,光亨貞吉。」雖有亨、貞二德,連事起文,故不數也。《遯卦》云:「亨,小利貞。」雖有三德,亦不數也。《旅卦》云:「旅,小亨。旅,貞吉。」雖有亨、貞二德,亦連他事,不數也。《比卦》云:「原筮,元永貞,無咎。」《否卦》云:「否之匪人,不利君子貞。」雖有「貞」字,亦連他文言之,又非本卦德,亦不數之。《同人》云:「同人於野,亨。」《坎卦》云:「有孚,維心亨。」《損卦》云:「無咎可貞。」此等雖有一德,皆連事而言之,故亦不數,所以然者,但易含萬象,事義非一,隨時曲變,不可為典要故也。其有意義,各於卦下詳之。亦有卦善而德少者,若泰與謙、復之類,雖善,唯一德也。亦有全無德者,若豫、觀、剝、晉、蹇、解、夬、姤、井、艮、歸妹、凡十一卦也。大略唯有凶卦無德者,若剝、蹇、夬、姤之屬是也。亦有卦善而無德者,晉、解之屬是也。各於卦下詳之。凡「四德」者,亨之與貞,其德特行,若元之與利,則配連他事。其意以元配亨,以利配貞,雖配他事為文,元是元大也,始首也;利是利益也,合和也。以當分言之,各是其一德也。唯配亨、貞,俱為四德。元雖配亨,亦配他事,故比卦云「元永貞」,《坤o六五》「黃裳元吉」是也。利亦非獨利貞,亦所利餘事多矣,若「利涉大川」,「利建侯」,「利見大人」,「利君子貞」。如此之屬,是利字所施處廣,故諸卦謂他事之利,不數以為德也。此「四德」非唯卦下有之,亦於爻下有之,但爻下其事稍少。故「黃裳元吉」及「何天之衢亨,小貞吉,大貞凶」,此皆於爻下言之,其利則諸爻皆有。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문언왈(文言曰)에서 건원형이정(乾元亨利貞)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문언(文言)"이라는 것은, 이는 공자[夫子]의 7번째 익(翼)이다.
건(乾)과 곤(坤)으로써 그 역(易)의 문호(門戶)를 하였고, 그 나머지 여러 괘(卦)와 효(爻)는 모두 건·곤(乾‧坤)을 따르면서 나오는 의로운 이치가 심오하기 때문에 특별히 문언전(文言傳)을 지어 그로써 열고 해석을 하였다.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글[文]은 글의 꾸밈[文飾]을 말하는데, 건·곤(乾· 坤)으로써 덕(德)이 크기 때문에 특별히 글을 꾸미고 그로써 '문언(文言)'이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공자[夫子]께서 다만 역(易)의 도(道)를 도와 밝힘을 말하며, 의리를 거듭 설명했는데, 이 글을 꾸밈은 화려한 채색이 아니니, 마땅히 두 괘(卦)의 경문(經文)을 해석하여 말했기 때문에 '문언(文言)'이라 칭하였다.
이에 따른 ‘원형이정(元亨利貞)’까지는,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을 밝혀서 첫 번째 절(節)이 되었고, ‘초구왈 잠용물용(初九曰 潛龍勿用)’에 따른 ‘동이유회(動而有悔)’까지는, 여섯 효(爻)의 뜻을 밝혀서 두 번째 절(節)이 되었으며, ‘잠용물용(潛龍勿用)’으로부터 아래로 ‘천하치야(天下治也)’까지는, 여섯 효(爻)의 사람 일[人事]을 논하여서 세 번째 절(節)이 되었고, ‘잠용물용 양기잠장(潛龍勿用 陽氣潛藏)’부터 ‘내견천즉(乃見天則)’까지는 여섯 효(爻)의 스스로 그러하는 기(氣)를 논하여서 네 번째 절(節)이 되었으며, ‘건원자(乾元者)’부터 ‘천하평야(天下平也)’까지의, 이 한 절(節)은 건원(乾元)의 네 가지 덕(德)의 뜻을 다시 설명하여서 다섯 번째 절(節)이 되었고, ‘군자이성덕위행(君子以成德爲行)’부터 ‘기유성인호(其唯聖人乎)’까지의, 이 한 절(節)은 여섯 효(爻)의 뜻을 넓게 다시 밝혀서 여섯 번째 절(節)이 되었는데, 이제 각각 글에 의거하여 해석을 하였다.
이는 첫 번째 절(節)이,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을 논하였다.
‘원자선지장야(元者善之長也)’는 이것이 이미 뒤[아래]에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을 논하였는데, 다만 건(乾)의 몸[體]이 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쓰임이다.
무릇 천지가 운행하여 달라짐은 스스로 그러하는데, 없음[无]으로 인하여 있음[有]이 생겨나며 함이 없는데도 스스로 그러하게 된다.
하늘은 본래 마음이 없는데, 어찌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德)을 만들 것이며, 하늘은 본래 이름이 없는데, 어찌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이름을 만들겠는가?
다만 성인(聖人)이 사람의 일로써 의탁을 하여 이 자연의 공(功)이 하늘의 네 가지 덕(德)이 됨을 말하며, 아래에 가르침을 드리워서 후대의 성인(聖人)으로 하여금 하늘이 하는 바를 본받게 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네 가지 덕(德)을 세워서 그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첫 번째 절(節)의 ‘원자선지장(元者善之長)’이라는 것은, 하늘의 몸체와 본성이 만물(萬物)을 낳고 기름을 가리킨다. 선(善)이 큰 것은, 삶을 베품보다 좋음이 없고 원(元)은 삶을 베푸는 으뜸이 되기 때문에 ‘원자선지장(元者善之長)’이라 말하였다.
‘형자가지회(亨者嘉之會)’라는 것은, 가(嘉)는 아름다움이니 하늘이 만물을 화창(和暢)하게 잘 통하여 사물로 하여금 아름다운 모임을 모아서 아름답게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가지회(嘉之會)’라 하였음을 말한다.
‘이자의지화(利者義之和)’라는 것은, 하늘이 여러 사물에 이로움을 잘 더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마땅함을 얻어서 함께 어울리게 함을 말하였다.
‘정자사지간(貞者事之幹)’이라는 것은, 하늘이 중정(中正)의 기운으로써 만물을 잘 성취시켜 사물로 하여금 모두 줄기가 가지런함을 얻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장씨(莊氏)의 뜻은 이 네 구(句)를 가지고, 하늘의 덕(德)은 사시(四時)에 짝함을 밝힌 것이다.
원(元)은 이 사물의 시작이고 시절에는 봄을 짝하며, 봄은 펴서 생겨나기 때문에 뒤[아래]에 이르기를 “어짊[仁]을 체득한다.”고 하였는데, 어짊[仁]이 곧 봄이다.
형(亨)은 이것이 사물을 화창(和暢)하게 통하니, 시절에는 여름을 짝하기 때문에 뒤[아래]에 이르기를 “예(禮)에 합한다.”고 하였는데, 예(禮)는 곧 여름이다.
이(利)는 옳음[義]에 어울리게 되니, 시절에는 가을을 짝하며, 가을은 이미 사물이 이루어져 각각 그 마땅함에 합하였다.
정(貞)은 일의 줄기[幹]가 되니, 시절에는 겨울을 짝하며, 겨울은 이미 거두어 저장해서 일이 모두 줄기가 완료(完了)되었다.
오행(五行)의 기운에 오직 토(土)가 적은데, 토(土)는 네 계절[四季]에 나누어 건장하여, 네 기운[木‧火‧金‧水]의 운행이 토(土)가 아니면 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군자체인 족이장인(君子體仁 足以長人)’이라는 것은, 이로부터 이 뒤[아래]에는 사람이 하늘의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함을 본받음을 밝힘인데, 군자(君子)인 사람은 몸[體]이 어진 도(道)를 품고 널리 사랑하여 삶을 베풀면 남들에게 높은 우두머리가 되기에 넉넉함을 말하였다.
어짊은 곧 선(善)이니, 어진 덕(德)을 행함은 하늘의 큰 덕(德)을 본받음이다.
‘가회 족이합례(嘉會 足以合禮)’라는 것은, 군자(君子)가 만물로 하여금 아름답게 모으는 모임을 기리기를 잘함을 말하여, 예(禮)에 합하여 짝하기에 넉넉함을 말하는데, 하늘의 형통함[亨]을 본받음을 일컫는다.
‘이물 족이화의(利物 足以和義)’라는 것은, 군자(君子)가 만물에 이로움을 더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마땅함을 얻게 하면 옳음[義]에 어울려 합함이 넉넉함을 말하는데, 하늘의 이로움을 본받음이다.
‘정고 족이간사(貞固 足以幹事)’라는 것은, 군자(君子)가 견고하고 곧고 바름을 잘하여 사물로 하여금 이루어지게 해서 일이 모두 뿌리를 가지런하게 함을 말하는데, 이는 하늘의 곧음[貞]을 본받음이다.
일을 건장하게 베풂을 말하면, 원(元)은 어짊[仁]이고 형(亨)은 예(禮)이며 이(利)는 옳음[義]이고 정(貞)은 믿음[信]이다.
지혜를 논하지 않은 것은, 이 네 가지 일을 행하면, 모름지기 지혜(智慧)에 나란히 하여 드디어 바탕이 됨이다.
또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수(水)와 토(土) 둘을 행함은 신(信)과 지(智)를 겸함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생략하고서 말하지 않았다.
‘군자는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건(乾)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고 말하였다.[君子行此四德者 故曰乾元亨利貞]’는, 그로써 군자(君子)인 사람은 마땅히 이 네 가지 종류의 덕(德)을 행하여야 한다.
이로써 문왕(文王)이 《역(易)》을 지을 적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德)을 칭하여 군자(君子)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면 하늘과 공(功)이 같게 되니, 성인(聖人)이 아니면 할 수 없는데 오직 이르기를 군자(君子)라고 한 것은, 다만 《역(易)》의 도(道)가 되고, 넓리 법을 드리우게 되니, 만약 오히려 성인(聖人)에 국한하면 나머지 뒤[아래]에 미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에 총괄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라고 하여 제후(諸侯)와 공경(公卿)의 무리로 하여금 모두 다 행하게 하였다.
다만 성인(聖人)은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여 그 지극함을 다 잘하고, 군자(君子)는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나 각각 그 힘을 헤아려서 하여 많고 적음이 각각 그 나누어짐이 있다. 다만 건괘(乾卦)는 하늘을 모습[象]하였기 때문에 이 네 가지 덕(德)으로써 모두 하늘의 덕(德)이라 하였다.
다만 음(陰)과 양(陽)이 모여 합하여 두 모습[象]이 서로 이루어지면 모두 덕(德)이 잘 있으며, 건(乾)의 한 괘(卦)만은 아니다.
이로써 여러 괘(卦)의 가운데에도 또한 네 가지 덕(德)이 있으나 다만 나머지 괘(卦)의 네 가지 덕(德)은 건(乾) 보다 못함이 있다. 그러므로 건괘(乾卦)에 직접 이르기를 "네 가지 덕(德)을 다시 말한 바가 없음은,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이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음을 나타내기를 바람이다."고 했다.
그 나머지 괘(卦)는 네 가지 덕(德)의 뒤[아래]에 곧 다시 나머지 일이 있는데, 그로써 네 가지 덕(德)이 좁고 졸렬(拙劣)하기 때문에 나머지 일로써 메달았으니, 즉 곤괘(坤卦)의 부류가 이것이다.
또한 네 가지 덕(德)의 앞[위]에 곧 나머지 일을 논함이 있는데, 혁괘(革卦)에 “[혁(革)은] 하루가 끝나야 비로소 믿으니, 원형이정(元亨利貞)하여 후회가 없다.”라는 것과 같으며, 말미암고서 비로소 믿은 뒤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으니, 비로소 후회가 없음을 얻는다.
네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즉 건(乾), 곤(坤), 둔(屯), 임(臨), 수(隨), 무망(无妄), 혁(革)의 일곱 괘(卦)가 이것이다.
또한 그 괘(卦)가 선(善)하지 않음이 있으면서 네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그로써 그 괘(卦)가 흉하기 때문에 네 가지 덕(德)이 있어야 비로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괘(隨卦)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어야 비로소 허물이 없음을 얻는다.”고 함이 이것인데, 네 가지 덕(德)을 모두 갖추었으나 그 괘(卦)가 반드시 선(善)하지는 않다.
또한 세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즉 이(離), 함(咸), 췌(萃), 태(兌), 환(渙), 소과(小過)의 모두 여섯 괘(卦)는 세 가지 덕(德) 가운데에 나아가 글이 됨이 하나가 아니며, 혹 세 가지 덕(德)의 앞[위]에서 총괄하여 말하고 다시 뒤[아래]에서 나머지 일을 나누어 말하였는데, 리(離)와 함(咸)과 같은 등속이 이것이다.
세 가지 덕(德)의 가운데에 나아가 앞[위]과 뒤[아래]가 똑같지 않은데, 이(離)괘에 곧 이르기를 "곧아야 이롭고 통한다.”라고 함은, 곧아야 이로움[利貞]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형통함을 얻는다.
또한 먼저 형(亨)을 일러주고 다시 나머지 일을 펼쳐니 이에 비로소 이정(利貞)을 일러준 것이 있는데, 나머지 일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곧음이 이로움[利貞]을 얻기 때문이다.
두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대유(大有), 고(蠱), 점(漸), 대축(大畜), 승(升), 곤(困), 중부(中孚)의 모두 일곱가지 괘(卦)인데, 이 두 가지 덕(德)은 혹 일 앞[위]에 말함이 있고 혹은 일 뒤에 말함이 있으니, 뒤에 일이 있음을 말미암아서 비로소이 두 가지 덕(德)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몽(蒙), 사(師), 소축(小畜), 리(履), 태(泰), 겸(謙), 서합(噬嗑), 비(賁), 복(復), 대과(大過), 진(震), 풍(豐), 절(節), 기제(旣濟), 미제(未濟)와 같은 모두 열다섯 가지 괘(卦)는 다 한 가지 덕(德)인데, 모두 형(亨)이다.
혹 일 앞[위]에서 말을 함이 많이 있고, 혹은 일 뒤에 말이 있는데, 리괘(履卦)에 이르기를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라고 하였음은, 일이 있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형통함을 얻음이다.
그로써 앞에 덕(德)을 논한 것은, 모두 경문(經文)에 두드러지게 덕(德)을 특별히 밝힌 것을 이에 말을 함이다.
그 일을 말미암아 서로 이어서 덕(德)을 말한 것이 있음은, 곧 셈을 하지 않았는데, 수괘(需卦)에 이르기를 “수(需)는 믿음이 있어서 빛이 통하고 곧음[貞]이 길(吉)하다.”라고 함과 같으며, 비록 형(亨)과 정(貞)의 두 가지 덕(德)이 있으나 일을 이어서 글이 일어났기 때문에 셈하지 않았다.
둔괘(遯卦)에 이르기를 “형통[亨]하고 곧아[貞]야 조금 이롭[利]다.”라고 하였는데, 비록 세 가지 덕(德)이 있으나 또한 셈하지 않았다. 여괘(旅卦)에 이르기를 “여(旅)는 조금 형통[亨]하니 나그네가 곧아[貞]야 길(吉)하다.”고 하였는데, 비록 형(亨)과 정(貞)의 두 가지 덕(德)이 있으나 또한 다른 일에 연결했기에 셈하지 않았다.
비괘(比卦)에 이르기를 “근원하여 점치되 처음부터 오래 곧아[貞]야 허물이 없다.”고 하였으며, 비괘(否卦)에 이르기를 “비(否)는 사람이 갈데가 아니니, 군자(君子)의 곧음[貞]이라도 이롭지[利] 않다.”라고 하였는데, 비록 ‘정(貞)’자가 있으나, 또한 다른 글을 이어서 말을 하였고, 또 본래 괘(卦)의 덕(德)이 아니므로 또한 셈하지 않았다.
동인괘(同人卦)에 이르기를 “들에서는 남과 함께해야 형통[亨]하다.”고 하였고, 감괘(坎卦)에 이르기를 “믿음이 있어야 오직 마음이 형통[亨]하다.”고 하였으며, 손괘(損卦)에 이르기를 “허물이 없어야 곧을[貞]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따위는 비록 한 가지 덕(德)이 있으나 모두 일을 이어서 말을 하였기 때문에 또한 셈하지 않았다.
그러한 것의 까닭은, 다만 《역(易)》은 만 가지 모습[象]을 포함하여 일의 뜻이 한 가지가 아니며, 때에 따라 변함이 굽어서 법의 요체(要諦)로 삼을 수 없음이다. 그 뜻에 옳음[義]이 있으면 각각 괘(卦) 아래에서 자세하게 하였다.
또한 괘(卦)는 선(善)한데도 덕(德)이 적은 것이 있는데, 태(泰)와 겸(謙), 복(復)과 같은 부류(部類)이며, 비록 선(善)하지만 오직 한 가지 덕(德)뿐이다.
또한 전혀 덕(德)이 없는 것이 있는데, 예(豫), 관(觀), 박(剝), 진(晉), 건(蹇), 해(解), 쾌(夬), 구(姤), 정(井), 간(艮), 귀매(歸妹)와 같은 모두 열한 가지 괘(卦)이다.
대체로 오직 흉한 괘(卦)에 덕(德)이 없는 것이 있는데, 박(剝), 건(蹇), 쾌(夬), 구(姤)와 같음이 이것이며, 또한 괘(卦)는 선(善)함이 있는데도 덕(德)이 없는 것이 있는데, 진(晉), 해(解)의 등속이 이것이며, 각각 괘(卦)에서 아래에 자세히 하였다.
무릇 네 가지 덕(德)이라는 것은, 형(亨)과 정(貞)은 그 덕(德)을 특별히 행하고, 원(元)과 이(利)는 곧 다른 일에 짝하여 이어진다.
그 뜻은 원(元)으로써 형(亨)에 짝하고 이(利)로써 정(貞)에 짝하며, 비록 다른 일에 짝하여 글을 썼으나 원(元)은 바로 원대(元大)함이고 시작하는 머리이며, 이(利)는 바로 이로움을 더함이고 어울려 합함이니, 마땅히 나누어 말을 함으로써 각각 이 한 가지 덕(德)이지만, 오직 형(亨)과 정(貞)에 짝하면 모두 네 가지 덕(德)이 된다.
원(元)이 비록 형(亨)에 짝하지만 또한 다른 일에도 짝하기 때문에 비괘(比卦)에서 이르기를 “처음부터 오래 곧아야 한다.[元永貞]”고 하였고, 곤괘(坤卦) 육오(六五)에서 “황색 치마이니, 크게 길하다.[黃裳元吉]”라고 하였음이 이것이다.
이(利) 또한 홀로 이정(利貞)이 아니고, 또한 이로운 바의 다른 일이 많으며, ‘이섭대천(利涉大川)’과 ‘이건후(利建侯)’와 ‘이견대인(利見大人)’과 ‘이군자정(利君子貞)’과 같은데, 이와 같은 등속은 이 ‘이(利)’자를 쓰는 바의 곳이 넓기 때문에 여러 괘(卦)에서 다른 일의 이로움을 말하였으니, 셈하여서 덕(德)으로 삼지 않았다.
이 네 가지 덕(德)은 오직 괘(卦) 아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효(爻)의 아래에서도 말을 했으며, 다만 효(爻) 아래는 그 일이 다소 적기 때문에 ‘황상원길(黃裳元吉)’과 ‘하천지구형(何天之衢亨)’과 ‘소정길(小貞吉)’, ‘대정길(大貞凶)’에서, 이는 모두 효(爻) 아래에서 말을 했으며, 그 이로움은 여러 효(爻)에도 모두 있다.」
[孔穎達 疏]‘文言曰’至‘乾元亨利貞’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문언왈(文言曰)에서 건원형이정(乾元亨利貞)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文言’者, 是夫子第七翼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문언(文言)"이라는 것은, 이는 공자[夫子]의 7번째 익(翼)이다.
以乾‧坤其易之門戶邪, 其餘諸卦及爻, 皆從乾‧坤而出, 義理深奧, 故特作文言以開釋之.
건(乾)과 곤(坤)으로써 그 역(易)의 문호(門戶)를 하였고, 그 나머지 여러 괘(卦)와 효(爻)는 모두 건·곤(乾‧坤)을 따르면서 나오는 의로운 이치가 심오하기 때문에 특별히 문언전(文言傳)을 지어 그로써 열고 해석을 하였다.
莊氏云“文謂文飾. 以乾‧坤德大, 故特文飾, 以爲'文言'.”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글[文]은 글의 꾸밈[文飾]을 말하는데, 건·곤(乾· 坤)으로써 덕(德)이 크기 때문에 특별히 글을 꾸미고 그로써 '문언(文言)'이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나,
今謂夫子但贊明易道, 申說義理, 非是文飾華彩, 當謂釋二卦之經文, 故稱"文言".
지금 공자[夫子]께서 다만 역(易)의 도(道)를 도와 밝힘을 말하며, 의리를 거듭 설명했는데, 이 글을 꾸밈은 화려한 채색이 아니니, 마땅히 두 괘(卦)의 경문(經文)을 해석하여 말했기 때문에 '문언(文言)'이라 칭하였다.
從此至‘元亨利貞’, 明乾之四德, 爲第一節; 從‘初九曰潛龍勿用’, 至‘動而有悔’, 明六爻之義, 爲第二節; 自‘潛龍勿用’, 下至‘天下治也’, 論六爻之人事, 爲第三節; 自‘潛龍勿用, 陽氣潛藏’, 至‘乃見天則’, 論六爻自然之氣, 爲第四節; 自‘乾元者’, 至‘天下平也’, 此一節, 復說乾元之四德之義, 爲第五節; 自‘君子以成德爲行’, 至‘其唯聖人乎’, 此一節, 更廣明六爻之義, 爲第六節, 今各依文解之.
이에 따른 ‘원형이정(元亨利貞)’까지는,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을 밝혀서 첫 번째 절(節)이 되었고, ‘초구왈 잠용물용(初九曰 潛龍勿用)’에 따른 ‘동이유회(動而有悔)’까지는, 여섯 효(爻)의 뜻을 밝혀서 두 번째 절(節)이 되었으며, ‘잠용물용(潛龍勿用)’으로부터 아래로 ‘천하치야(天下治也)’까지는, 여섯 효(爻)의 사람 일[人事]을 논하여서 세 번째 절(節)이 되었고, ‘잠용물용 양기잠장(潛龍勿用 陽氣潛藏)’부터 ‘내견천즉(乃見天則)’까지는 여섯 효(爻)의 스스로 그러하는 기(氣)를 논하여서 네 번째 절(節)이 되었으며, ‘건원자(乾元者)’부터 ‘천하평야(天下平也)’까지의, 이 한 절(節)은 건원(乾元)의 네 가지 덕(德)의 뜻을 다시 설명하여서 다섯 번째 절(節)이 되었고, ‘군자이성덕위행(君子以成德爲行)’부터 ‘기유성인호(其唯聖人乎)’까지의, 이 한 절(節)은 여섯 효(爻)의 뜻을 넓게 다시 밝혀서 여섯 번째 절(節)이 되었는데, 이제 각각 글에 의거하여 해석을 하였다.
此第一節, 論乾之四德也.
이는 첫 번째 절(節)이,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을 논하였다.
‘元者善之長也’ 此已下, 論乾之四德, 但乾之爲體, 是天之用.
‘원자선지장야(元者善之長也)’는 이것이 이미 뒤[아래]에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을 논하였는데, 다만 건(乾)의 몸[體]이 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쓰임이다.
凡天地運化, 自然而爾, 因无而生有也, 无爲而自爲. 天本无心, 豈造元亨利貞之德也. 天本无名, 豈造元亨利貞之名也. 但聖人以人事託之, 謂此自然之功, 爲天之四德, 垂敎於下, 使後代聖人法天之所爲, 故立天四德以設敎也.
무릇 천지가 운행하여 달라짐은 스스로 그러하는데, 없음[无]으로 인하여 있음[有]이 생겨나며 함이 없는데도 스스로 그러하게 된다.
하늘은 본래 마음이 없는데, 어찌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德)을 만들 것이며, 하늘은 본래 이름이 없는데, 어찌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이름을 만들겠는가?
다만 성인(聖人)이 사람의 일로써 의탁을 하여 이 자연의 공(功)이 하늘의 네 가지 덕(德)이 됨을 말하며, 아래에 가르침을 드리워서 후대의 성인(聖人)으로 하여금 하늘이 하는 바를 본받게 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네 가지 덕(德)을 세워서 그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
莊氏云“第一節‘元者善之長’者, 謂天之體性, 生養萬物. 善之大者, 莫善施生, 元爲施生之宗, 故言‘元者善之長’也.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첫 번째 절(節)의 ‘원자선지장(元者善之長)’이라는 것은, 하늘의 몸체와 본성이 만물(萬物)을 낳고 기름을 가리킨다. 선(善)이 큰 것은, 삶을 베품보다 좋음이 없고 원(元)은 삶을 베푸는 으뜸이 되기 때문에 ‘원자선지장(元者善之長)’이라 말하였다.
‘亨者嘉之會’者, 嘉, 美也, 言天能通暢萬物, 使物嘉美之會聚, 故云‘嘉之會’也.
‘형자가지회(亨者嘉之會)’라는 것은, 가(嘉)는 아름다움이니 하늘이 만물을 화창(和暢)하게 잘 통하여 사물로 하여금 아름다운 모임을 모아서 아름답게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가지회(嘉之會)’라 하였음을 말한다.
‘利者義之和’者, 言天能利益庶物, 使物各得其宜而和同也.
‘이자의지화(利者義之和)’라는 것은, 하늘이 여러 사물에 이로움을 잘 더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마땅함을 얻어서 함께 어울리게 함을 말하였다.
‘貞者事之幹’者, 言天能以中正之氣成就萬物, 使物皆得幹濟.” 莊氏之意, 以此四句, 明天之德也, 而配四時.
‘정자사지간(貞者事之幹)’이라는 것은, 하늘이 중정(中正)의 기운으로써 만물을 잘 성취시켜 사물로 하여금 모두 줄기가 가지런함을 얻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장씨(莊氏)의 뜻은 이 네 구(句)를 가지고, 하늘의 덕(德)은 사시(四時)에 짝함을 밝힌 것이다.
元是物始, 於時配春, 春爲發生, 故下云“體仁”, 仁則春也.
원(元)은 이 사물의 시작이고 시절에는 봄을 짝하며, 봄은 펴서 생겨나기 때문에 뒤[아래]에 이르기를 “어짊[仁]을 체득한다.”고 하였는데, 어짊[仁]이 곧 봄이다.
亨是通暢萬物, 於時配夏, 故下云“合禮”, 禮則夏也.
형(亨)은 이것이 사물을 화창(和暢)하게 통하니, 시절에는 여름을 짝하기 때문에 뒤[아래]에 이르기를 “예(禮)에 합한다.”고 하였는데, 예(禮)는 곧 여름이다.
利爲和義, 於時配秋, 秋旣物成, 各合其宜.
이(利)는 옳음[義]에 어울리게 되니, 시절에는 가을을 짝하며, 가을은 이미 사물이 이루어져 각각 그 마땅함에 합하였다.
貞爲事幹, 於時配冬, 冬旣收藏, 事皆幹了也.
정(貞)은 일의 줄기[幹]가 되니, 시절에는 겨울을 짝하며, 겨울은 이미 거두어 저장해서 일이 모두 줄기가 완료(完了)되었다.
於五行之氣, 唯少土也, 土則分王(旺)四季, 四氣之行, 非土, 不載, 故不言也.
오행(五行)의 기운에 오직 토(土)가 적은데, 토(土)는 네 계절[四季]에 나누어 건장하여, 네 기운[木‧火‧金‧水]의 운행이 토(土)가 아니면 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君子體仁 足以長人’者, 自此已下, 明人法天之行此四德, 言君子之人, 體包仁道, 汎愛施生, 足以尊長於人也.
‘군자체인 족이장인(君子體仁 足以長人)’이라는 것은, 이로부터 이 뒤[아래]에는 사람이 하늘의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함을 본받음을 밝힘인데, 군자(君子)인 사람은 몸[體]이 어진 도(道)를 품고 널리 사랑하여 삶을 베풀면 남들에게 높은 우두머리가 되기에 넉넉함을 말하였다.
仁則善也, 謂行仁德, 法天之元德也.
어짊은 곧 선(善)이니, 어진 덕(德)을 행함은 하늘의 큰 덕(德)을 본받음이다.
‘嘉會 足以合禮’者, 言君子能使萬物嘉美集會, 足以配合於禮, 謂法天之亨也.
‘가회 족이합례(嘉會 足以合禮)’라는 것은, 군자(君子)가 만물로 하여금 아름답게 모으는 모임을 기리기를 잘함을 말하여, 예(禮)에 합하여 짝하기에 넉넉함을 말하는데, 하늘의 형통함[亨]을 본받음을 일컫는다.
‘利物 足以和義’者, 言君子利益萬物, 使物各得其宜, 足以和合於義, 法天之利也.
‘이물 족이화의(利物 足以和義)’라는 것은, 군자(君子)가 만물에 이로움을 더하여 사물로 하여금 각각 그 마땅함을 얻게 하면 옳음[義]에 어울려 합함이 넉넉함을 말하는데, 하늘의 이로움을 본받음이다.
‘貞固 足以幹事’者, 言君子能堅固貞正, 令物得成, 使事皆幹濟, 此法天之貞也.
‘정고 족이간사(貞固 足以幹事)’라는 것은, 군자(君子)가 견고하고 곧고 바름을 잘하여 사물로 하여금 이루어지게 해서 일이 모두 뿌리를 가지런하게 함을 말하는데, 이는 하늘의 곧음[貞]을 본받음이다.
施於王[旺]事言之, 元則仁也, 亨則禮也, 利則義也, 貞則信也.
일을 건장하게 베풂을 말하면, 원(元)은 어짊[仁]이고 형(亨)은 예(禮)이며 이(利)는 옳음[義]이고 정(貞)은 믿음[信]이다.
不論智者, 行此四事, 竝須資於知.
지혜를 논하지 않은 것은, 이 네 가지 일을 행하면, 모름지기 지혜(智慧)에 나란히 하여 드디어 바탕이 됨이다.
且乾鑿度云“水土二行, 兼信與知也.” 故略而不言也.
또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수(水)와 토(土) 둘을 행함은 신(信)과 지(智)를 겸함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생략하고서 말하지 않았다.
‘君子行此四德者 故曰乾元亨利貞’, 以君子之人, 當行此四種之德.
‘군자는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건(乾)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고 말하였다.[君子行此四德者 故曰乾元亨利貞]’는, 그로써 군자(君子)인 사람은 마땅히 이 네 가지 종류의 덕(德)을 행하여야 한다.
是以文王作易, 稱元亨利貞之德, 欲使君子法之.
이로써 문왕(文王)이 《역(易)》을 지을 적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德)을 칭하여 군자(君子)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자 한 것이다.
但行此四德, 則與天同功, 非聖人, 不可, 唯云君子者, 但易之爲道, 廣爲垂法, 若限尙聖人, 恐不逮餘下, 故總云君子, 使諸侯‧公卿之等, 悉皆行之.
다만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면 하늘과 공(功)이 같게 되니, 성인(聖人)이 아니면 할 수 없는데 오직 이르기를 군자(君子)라고 한 것은, 다만 《역(易)》의 도(道)가 되고, 넓리 법을 드리우게 되니, 만약 오히려 성인(聖人)에 국한하면 나머지 뒤[아래]에 미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에 총괄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라고 하여 제후(諸侯)와 공경(公卿)의 무리로 하여금 모두 다 행하게 하였다.
但聖人行此四德, 能盡其極也, 君子行此四德, 各量力而爲, 多少各有其分. 但乾卦象天, 故以此四德, 皆爲天德. 但陰陽合會, 二象相成, 皆能有德, 非獨乾之一卦.
다만 성인(聖人)은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여 그 지극함을 다 잘하고, 군자(君子)는 이 네 가지 덕(德)을 행하나 각각 그 힘을 헤아려서 하여 많고 적음이 각각 그 나누어짐이 있다. 다만 건괘(乾卦)는 하늘을 모습[象]하였기 때문에 이 네 가지 덕(德)으로써 모두 하늘의 덕(德)이라 하였다.
다만 음(陰)과 양(陽)이 모여 합하여 두 모습[象]이 서로 이루어지면 모두 덕(德)이 잘 있으며, 건(乾)의 한 괘(卦)만은 아니다.
是以諸卦之中, 亦有四德, 但餘卦四德, 有劣於乾. 故乾卦直云四德, 更无所言, 欲見乾之四德, 无所不包.
이로써 여러 괘(卦)의 가운데에도 또한 네 가지 덕(德)이 있으나 다만 나머지 괘(卦)의 네 가지 덕(德)은 건(乾) 보다 못함이 있다. 그러므로 건괘(乾卦)에 직접 이르기를 "네 가지 덕(德)을 다시 말한 바가 없음은, 건(乾)의 네 가지 덕(德)이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음을 나타내기를 바람이다."고 했다.
其餘卦, 四德之下, 則更有餘事, 以四德狹劣, 故以餘事繫之, 卽坤卦之類是也.
그 나머지 괘(卦)는 네 가지 덕(德)의 뒤[아래]에 곧 다시 나머지 일이 있는데, 그로써 네 가지 덕(德)이 좁고 졸렬(拙劣)하기 때문에 나머지 일로써 메달았으니, 즉 곤괘(坤卦)의 부류가 이것이다.
亦有四德之上, 卽論餘事, 若革卦云“已日乃孚, 元亨利貞, 悔亡”也, 由乃孚之後, 有元亨利貞, 乃得悔亡也.
또한 네 가지 덕(德)의 앞[위]에 곧 나머지 일을 논함이 있는데, 혁괘(革卦)에 “[혁(革)은] 하루가 끝나야 비로소 믿으니, 원형이정(元亨利貞)하여 후회가 없다.”라는 것과 같으며, 말미암고서 비로소 믿은 뒤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으니, 비로소 후회가 없음을 얻는다.
有四德者, 卽乾‧坤‧屯‧臨‧隨‧无妄‧革七卦, 是也.
네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즉 건(乾), 곤(坤), 둔(屯), 임(臨), 수(隨), 무망(无妄), 혁(革)의 일곱 괘(卦)가 이것이다.
亦有其卦非善, 而有四德者, 以其卦凶, 故有四德, 乃可也.
또한 그 괘(卦)가 선(善)하지 않음이 있으면서 네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그로써 그 괘(卦)가 흉하기 때문에 네 가지 덕(德)이 있어야 비로소 할 수 있다.
故隨卦“有元亨利貞, 乃得无咎.” 是也, 四德具者, 其卦未必善也.
그러므로 수괘(隨卦)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어야 비로소 허물이 없음을 얻는다.”고 함이 이것인데, 네 가지 덕(德)을 모두 갖추었으나 그 괘(卦)가 반드시 선(善)하지는 않다.
亦有三德者, 卽離‧咸‧萃‧兌‧渙‧小過凡六卦, 就三德之中, 爲文不一, 或總稱三德於上, 更別陳餘事於下, 若離‧咸之屬, 是也.
또한 세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즉 이(離), 함(咸), 췌(萃), 태(兌), 환(渙), 소과(小過)의 모두 여섯 괘(卦)는 세 가지 덕(德) 가운데에 나아가 글이 됨이 하나가 아니며, 혹 세 가지 덕(德)의 앞[위]에서 총괄하여 말하고 다시 뒤[아래]에서 나머지 일을 나누어 말하였는데, 리(離)와 함(咸)과 같은 등속이 이것이다.
就三德之中, 上下不一, 離則云“利貞, 亨”, 由利貞, 乃得亨也.
세 가지 덕(德)의 가운데에 나아가 앞[위]과 뒤[아래]가 똑같지 않은데, 이(離)괘에 곧 이르기를 "곧아야 이롭고 통한다.”라고 함은, 곧아야 이로움[利貞]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형통함을 얻는다.
亦有先云亨, 更陳餘事, 乃始云利貞者, 以有餘事, 乃得利貞故也.
또한 먼저 형(亨)을 일러주고 다시 나머지 일을 펼쳐니 이에 비로소 이정(利貞)을 일러준 것이 있는데, 나머지 일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곧음이 이로움[利貞]을 얻기 때문이다.
有二德者, 大有‧蠱‧漸‧大畜‧升‧困‧中孚凡七卦, 此二德, 或在事上言之, 或在事後言之, 由後有事, 乃致此二德故也.
두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대유(大有), 고(蠱), 점(漸), 대축(大畜), 승(升), 곤(困), 중부(中孚)의 모두 일곱가지 괘(卦)인데, 이 두 가지 덕(德)은 혹 일 앞[위]에 말함이 있고 혹은 일 뒤에 말함이 있으니, 뒤에 일이 있음을 말미암아서 비로소이 두 가지 덕(德)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亦有一德者, 若蒙‧師‧小畜‧履‧泰‧謙‧噬嗑‧賁‧復‧大過‧震‧豐‧節‧旣濟‧未濟凡十五卦, 皆一德也, 竝是亨也.
또한 한 가지 덕(德)이 있는 것은, 몽(蒙), 사(師), 소축(小畜), 리(履), 태(泰), 겸(謙), 서합(噬嗑), 비(賁), 복(復), 대과(大過), 진(震), 풍(豐), 절(節), 기제(旣濟), 미제(未濟)와 같은 모두 열다섯 가지 괘(卦)는 다 한 가지 덕(德)인데, 모두 형(亨)이다.
或多在事上言之, 或在事後言, 履卦云“履虎尾, 不咥人, 亨”, 由有事, 乃得亨.
혹 일 앞[위]에서 말을 함이 많이 있고, 혹은 일 뒤에 말이 있는데, 리괘(履卦)에 이르기를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라고 하였음은, 일이 있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형통함을 얻음이다.
以前所論德者, 皆於經文, 挺然特明德者, 乃言之也.
그로써 앞에 덕(德)을 논한 것은, 모두 경문(經文)에 두드러지게 덕(德)을 특별히 밝힌 것을 이에 말을 함이다.
其有因事相連而言德者, 則不數之也. 若需卦云“需, 有孚, 光亨貞吉”, 雖有亨貞二德, 連事起文, 故不數也.
그 일을 말미암아 서로 이어서 덕(德)을 말한 것이 있음은, 곧 셈을 하지 않았는데, 수괘(需卦)에 이르기를 “수(需)는 믿음이 있어서 빛이 통하고 곧음[貞]이 길(吉)하다.”라고 함과 같으며, 비록 형(亨)과 정(貞)의 두 가지 덕(德)이 있으나 일을 이어서 글이 일어났기 때문에 셈하지 않았다.
遯卦云“亨, 小利貞”, 雖有三德, 亦不數也. 旅卦云“旅, 小亨, 旅貞, 吉”, 雖有亨貞二德, 亦連他事, 不數也.
둔괘(遯卦)에 이르기를 “형통[亨]하고 곧아[貞]야 조금 이롭[利]다.”라고 하였는데, 비록 세 가지 덕(德)이 있으나 또한 셈하지 않았다. 여괘(旅卦)에 이르기를 “여(旅)는 조금 형통[亨]하니 나그네가 곧아[貞]야 길(吉)하다.”고 하였는데, 비록 형(亨)과 정(貞)의 두 가지 덕(德)이 있으나 또한 다른 일에 연결했기에 셈하지 않았다.
比卦云“原筮, 元永貞, 无咎”, 否卦云“否之匪人, 不利君子貞”, 雖有貞字, 亦連他文言之, 又非本卦德, 亦不數之.
비괘(比卦)에 이르기를 “근원하여 점치되 처음부터 오래 곧아[貞]야 허물이 없다.”고 하였으며, 비괘(否卦)에 이르기를 “비(否)는 사람이 갈데가 아니니, 군자(君子)의 곧음[貞]이라도 이롭지[利] 않다.”라고 하였는데, 비록 ‘정(貞)’자가 있으나, 또한 다른 글을 이어서 말을 하였고, 또 본래 괘(卦)의 덕(德)이 아니므로 또한 셈하지 않았다.
同人云“同人於野, 亨”, 坎卦云“有孚, 維心亨”, 損卦云“无咎可貞”, 此等雖有一德, 皆連事而言之, 故亦不數.
동인괘(同人卦)에 이르기를 “들에서는 남과 함께해야 형통[亨]하다.”고 하였고, 감괘(坎卦)에 이르기를 “믿음이 있어야 오직 마음이 형통[亨]하다.”고 하였으며, 손괘(損卦)에 이르기를 “허물이 없어야 곧을[貞]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따위는 비록 한 가지 덕(德)이 있으나 모두 일을 이어서 말을 하였기 때문에 또한 셈하지 않았다.
所以然者, 但易含萬象, 事義非一, 隨時曲變, 不可爲典要故也. 其有意義, 各於卦下詳之.
그러한 것의 까닭은, 다만 《역(易)》은 만 가지 모습[象]을 포함하여 일의 뜻이 한 가지가 아니며, 때에 따라 변함이 굽어서 법의 요체(要諦)로 삼을 수 없음이다. 그 뜻에 옳음[義]이 있으면 각각 괘(卦) 아래에서 자세하게 하였다.
亦有卦善而德少者, 若泰與謙‧復之類, 雖善, 唯一德也.
또한 괘(卦)는 선(善)한데도 덕(德)이 적은 것이 있는데, 태(泰)와 겸(謙), 복(復)과 같은 부류(部類)이며, 비록 선(善)하지만 오직 한 가지 덕(德)뿐이다.
亦有全无德者, 若豫‧觀‧剝‧晉‧蹇‧解‧夬‧姤‧井‧艮‧歸妹凡十一卦也.
또한 전혀 덕(德)이 없는 것이 있는데, 예(豫), 관(觀), 박(剝), 진(晉), 건(蹇), 해(解), 쾌(夬), 구(姤), 정(井), 간(艮), 귀매(歸妹)와 같은 모두 열한 가지 괘(卦)이다.
大略唯有凶卦无德者, 若剝‧蹇‧夬‧姤之屬, 是也, 亦有卦善而无德者, 晉‧解之屬, 是也, 各於卦下詳之.
대체로 오직 흉한 괘(卦)에 덕(德)이 없는 것이 있는데, 박(剝), 건(蹇), 쾌(夬), 구(姤)와 같음이 이것이며, 또한 괘(卦)는 선(善)함이 있는데도 덕(德)이 없는 것이 있는데, 진(晉), 해(解)의 등속이 이것이며, 각각 괘(卦)에서 아래에 자세히 하였다.
凡四德者, 亨之與貞, 其德特行, 若元之與利, 則配連他事.
무릇 네 가지 덕(德)이라는 것은, 형(亨)과 정(貞)은 그 덕(德)을 특별히 행하고, 원(元)과 이(利)는 곧 다른 일에 짝하여 이어진다.
其意以元配亨, 以利配貞, 雖配他事爲文, 元是元大也, 始首也, 利是利益也, 合和也, 以當分言之, 各是其一德也, 唯配亨貞, 俱爲四德.
그 뜻은 원(元)으로써 형(亨)에 짝하고 이(利)로써 정(貞)에 짝하며, 비록 다른 일에 짝하여 글을 썼으나 원(元)은 바로 원대(元大)함이고 시작하는 머리이며, 이(利)는 바로 이로움을 더함이고 어울려 합함이니, 마땅히 나누어 말을 함으로써 각각 이 한 가지 덕(德)이지만, 오직 형(亨)과 정(貞)에 짝하면 모두 네 가지 덕(德)이 된다.
元雖配亨, 亦配他事, 故比卦云“元永貞”, 坤六五“黃裳元吉”, 是也.
원(元)이 비록 형(亨)에 짝하지만 또한 다른 일에도 짝하기 때문에 비괘(比卦)에서 이르기를 “처음부터 오래 곧아야 한다.[元永貞]”고 하였고, 곤괘(坤卦) 육오(六五)에서 “황색 치마이니, 크게 길하다.[黃裳元吉]”라고 하였음이 이것이다.
利亦非獨利貞, 亦所利餘事多矣. 若“利涉大川”, “利建侯”, “利見大人”, “利君子貞”, 如此之屬, 是利字所施處廣, 故諸卦謂他事之利, 不數以爲德也.
이(利) 또한 홀로 이정(利貞)이 아니고, 또한 이로운 바의 다른 일이 많으며, ‘이섭대천(利涉大川)’과 ‘이건후(利建侯)’와 ‘이견대인(利見大人)’과 ‘이군자정(利君子貞)’과 같은데, 이와 같은 등속은 이 ‘이(利)’자를 쓰는 바의 곳이 넓기 때문에 여러 괘(卦)에서 다른 일의 이로움을 말하였으니, 셈하여서 덕(德)으로 삼지 않았다.
此四德, 非唯卦下有之, 亦於爻下有之, 但爻下, 其事稍少. 故“黃裳元吉”及“何天之衢亨”, “小貞吉”, “大貞凶”, 此皆於爻下言之, 其利則諸爻皆有.
이 네 가지 덕(德)은 오직 괘(卦) 아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효(爻)의 아래에서도 말을 했으며, 다만 효(爻) 아래는 그 일이 다소 적기 때문에 ‘황상원길(黃裳元吉)’과 ‘하천지구형(何天之衢亨)’과 ‘소정길(小貞吉)’, ‘대정길(大貞凶)’에서, 이는 모두 효(爻) 아래에서 말을 했으며, 그 이로움은 여러 효(爻)에도 모두 있다.」
◎ ≪文言傳≫ 第二節
初九曰:「潛龍勿用」何謂也?子曰:「龍德而隱者也。不易乎世。
초구효(初九爻)에 말하기를, “[물에] 잠긴 용(龍)이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가 말했다. “용의 덕(德)이 있으면서 숨어있는 자이니, 세상에 따라 바뀌지 않으며,
【王弼 注】 不為世俗所移易也。
【왕필 주】 세상의 풍속이 바뀌어도 옮기는 바를 하지 않는다.
[孔穎達 疏]「初九曰」至「不易乎世」。
○正義曰:此第二節釋初九爻辭也。「初九曰潛龍勿用,何謂也」者,此夫子疊經初九爻辭,故言「初九曰」。方釋其義,假設問辭,故言「潛龍勿用何謂也」。「子曰龍德而隱者也」,此夫子以人事釋「潛龍」之義,聖人有龍德隱居者也。「不易乎世」者,不移易其心在於世俗,雖逢險難,不易本志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초구왈(初九曰)에서 불역호세(不易乎世)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문언전(文言傳)의] 두 번째 절(節)인데, 초구(初九)의 효사(爻辭)를 해석하였다.
"초구효(初九爻)에 말하기를, '잠긴 용(龍)이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初九曰潛龍勿用 何謂也]"라는 것은, 이는 공자[夫子]께서 경문(經文)의 초구효사(初九爻辭)를 거듭[설명]하였기 때문에 ‘초구왈(初九曰)’이라 말하였다.
그 뜻을 해석하는 방편(方便)으로 묻는 말을 임시(臨時)로 썻기 때문에 '잠긴 용(龍)이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라고 말하였음이다.
"공자(孔子)께서 말했다. '용의 덕(德)이 있으면서 숨어있는 자이니,[子曰龍德而隱者也]'라고 했는데, 이는 공자[夫子]가 사람의 일로써 잠용(潛龍)의 뜻을 해석하였는데, 성인(聖人)은 용(龍)의 덕(德)이 있으며 숨어 사는 자이다.
"세상에 따라 바뀌지 않으며,[不易乎世]"라는 것은, 그 마음을 옮겨 바꾸지 않고, 세상 풍속에 있으며 비록 험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본래의 뜻을 바꾸지 않음이다.
[孔穎達 疏]‘初九曰’至‘不易乎世’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초구왈(初九曰)에서 불역호세(不易乎世)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第二節釋初九爻辭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문언전(文言傳)의] 두 번째 절(節)인데, 초구(初九)의 효사(爻辭)를 해석하였다.
‘初九曰潛龍勿用 何謂也’者, 此夫子疊經初九爻辭, 故言‘初九曰’.
"초구효(初九爻)에 말하기를, '잠긴 용(龍)이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初九曰潛龍勿用 何謂也]"라는 것은, 이는 공자[夫子]께서 경문(經文)의 초구효사(初九爻辭)를 거듭[설명]하였기 때문에 ‘초구왈(初九曰)’이라 말하였다.
方釋其義, 假設問辭, 故言‘潛龍勿用, 何謂也.’
그 뜻을 해석하는 방편(方便)으로 묻는 말을 임시(臨時)로 썻기 때문에 '잠긴 용(龍)이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라고 말하였음이다.
‘子曰龍德而隱者也’, 此夫子以人事釋潛龍之義, 聖人有龍德隱居者也.
"공자(孔子)께서 말했다. '용의 덕(德)이 있으면서 숨어있는 자이니,[子曰龍德而隱者也]'라고 했는데, 이는 공자[夫子]가 사람의 일로써 잠용(潛龍)의 뜻을 해석하였는데, 성인(聖人)은 용(龍)의 덕(德)이 있으며 숨어 사는 자이다.
‘不易乎世’者, 不移易其心, 在於世俗, 雖逢險難, 不易本志也.
"세상에 따라 바뀌지 않으며,[不易乎世]"라는 것은, 그 마음을 옮겨 바꾸지 않고, 세상 풍속에 있으며 비록 험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본래의 뜻을 바꾸지 않음이다.
不成乎名,遯世无悶,不見是而无悶。樂則行之,憂則違之,確乎其不可拔,潛龍也。」
명성을 이루려하지 않고, 세상을 숨어살면서도 답답함이 없으며, 이를 보지 않아도 답답함이 없다. 즐거우면 행하려 하고, 근심스러우면 피하려 하니, 그 은둔한 용은 뽑아낼 수 없음이 확실하다.
[孔穎達 疏]「不成乎名」至「潛龍也」。
○正義曰:「不成乎名」者,言自隱默,不成就於令名,使人知也。「遁世無悶」者,謂逃遁避世,雖逢無道,心無所悶。「不見是而無悶」者,言舉世皆非,雖不見善,而心亦無悶。上云「遁世無悶」,心處僻陋,不見是而無悶,此因見世俗行惡,是亦「無悶」,故再起「無悶」之文。「樂則行之,憂則違之」者,心以為樂,已則行之,心以為憂,已則違之。「確乎其不可拔」者,身雖逐物推移,隱潛避世,心志守道,確乎堅實其不可拔,此是「潛龍」之義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불설호명(不成乎名)에서 잠용야(潛龍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명성을 이루려하지 않고,[不成乎名]"라는 것은, 스스로 숨고 침묵하며, 좋은 이름에 나아가 남들이 알게 함을 이루지 않음을 말함이다.
"세상을 숨어살면서도 답답함이 없으며,[遯世无悶]"라는 것은, 달아나 도망하여 세상을 피하고 비록 무도(無道)함을 만나더라도 마음이 답답한 바가 없음을 일컫는다.
"이를 보지 않아도 답답함이 없다.[不見是而无悶]"라는 것은, 세상이 모두 잘못을 거행하여, 비록 선(善)을 보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또한 답답함이 없음을 말함이다.
앞[위]에서 이르기를 “세상을 숨어살면서도 답답함이 없으며,[遯世无悶]”라고 함은, 마음이 궁벽하고 누추함에 처함이고, “이를 보지 않아도 답답함이 없다.[不見是而无悶]”라고 함은, 이 세상 풍속이 악(惡)을 행함을 말미암아 보았는데도, 이 또한 답답함이 없었기 때문에 답답함이 없다는 글을 다시 기록했다.
“즐거우면 행하려 하고, 근심스러우면 피하려 하니,[樂則行之 憂則違之]”라는 것은, 마음이 그로써 즐겁게 되면 자기가 곧 행하려 하고, 마음이 그로써 근심하게 되면 자기가 곧 어기려 함이다.
“뽑아낼 수 없음이 확실하다.[確乎其不可拔]”라는 것은, 자신이 비록 사물에 따라 미루어 옮겨가고 잠기어 숨으며 세상을 피하지만 마음의 뜻은 도(道)를 지키고 견실함에 확고하여 그를 뽑을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잠용(潛龍)의 뜻이다.
[孔穎達 疏]‘不成乎名’至‘潛龍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불설호명(不成乎名)에서 잠용야(潛龍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不成乎名’者, 言自隱默, 不成就於令名, 使人知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명성을 이루려하지 않고,[不成乎名]"라는 것은, 스스로 침묵을 지키며, 좋은 이름에 나아가 남들이 알게 함을 이루지 않음을 말함이다.
‘遯世无悶’者, 謂逃遯避世, 雖逢无道, 心无所悶.
"세상을 숨어살면서도 답답함이 없으며,[遯世无悶]"라는 것은, 달아나 도망하여 세상을 피하고 비록 무도(無道)함을 만나더라도 마음이 답답한 바가 없음을 일컫는다.
‘不見是而无悶’者, 言擧世皆非, 雖不見善, 而心亦无悶.
"이를 보지 않아도 답답함이 없다.[不見是而无悶]"라는 것은, 세상이 모두 잘못을 거행하여, 비록 선(善)을 보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또한 답답함이 없음을 말함이다.
上云‘遯世无悶’, 心處僻陋, ‘不見是而无悶’, 此因見世俗行惡, 是亦无悶, 故再起无悶之文.
앞[위]에서 이르기를 “세상을 숨어살면서도 답답함이 없으며,[遯世无悶]”라고 함은, 마음이 궁벽하고 누추함에 처함이고, “이를 보지 않아도 답답함이 없다.[不見是而无悶]”라고 함은, 이 세상 풍속이 악(惡)을 행함을 말미암아 보았는데도, 이 또한 답답함이 없었기 때문에 답답함이 없다는 글을 다시 기록했다.
‘樂則行之 憂則違之’者, 心以爲樂, 己則行之, 心以爲憂, 己則違之.
“즐거우면 행하려 하고, 근심스러우면 피하려 하니,[樂則行之 憂則違之]”라는 것은, 마음이 그로써 즐겁게 되면 자기가 곧 행하려 하고, 마음이 그로써 근심하게 되면 자기가 곧 어기려 함이다.
‘確乎其不可拔’者, 身雖逐物推移, 隱潛避世, 心志守道, 確乎堅實, 其不可拔, 此是潛龍之義也.
“뽑아낼 수 없음이 확실하다.[確乎其不可拔]”라는 것은, 자신이 비록 사물에 따라 미루어 옮겨가고 잠기어 숨으며 세상을 피하지만 마음의 뜻은 도(道)를 지키고 견실함에 확고하여 그를 뽑을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잠용(潛龍)의 뜻이다.
九二曰:「見龍在田,利見大人。」何謂也?子曰:「龍德而正中者也。庸言之信,庸行之謹,閑邪存其誠,善世而不伐,德博而化。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君德也。」
구이효(九二爻)에 말하기를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남이 이롭다"라고 함이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용(龍)의 덕이면서 가운데로 바로잡는 자이다. 말은 믿음으로 고쳐 쓰고 행동은 삼가함으로 고쳐 행하며, 사악(邪惡)함을 막아서 성실함을 보존하고 세상을 선도하고서 자랑하지 않으며, 덕(德)을 넓혀서 달라진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남이 이롭다'고 함은 군주의 덕(德)이다.“
[孔穎達 疏]「九二曰」至「君德也」。
○正義曰:此釋九二爻辭。「子曰:龍德而正中」者,九二居中不偏,然不如九五居尊得位,故但云「龍德而正中者也」。「庸言之信,庸行之謹」者,庸謂中庸,庸,常也。從始至末,常言之信實,常行之謹慎。「閑邪存其誠」者,言防閑邪惡,當自存其誠實也。「善世而不伐」者,謂為善於世,而不自伐其功。「德博而化」者,言德能廣博,而變化於世俗。初爻則全隱遁避世,二爻則漸見德行以化於俗也。若舜漁於雷澤,陶於河濱,以器不窳,民漸化之是也。「《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君德」者,以其異於諸爻,故特稱「《易》曰」。「見龍在田」,未是君位,但云「君德」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이왈(九二曰)에서 군덕야(君德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이(九二)의 효사(爻辭)를 해석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용(龍)의 덕이면서 가운데로 바로잡는 자이다.'[子曰龍德而正中者]"는, 구이(九二)가 가운데에 거주하고 편벽되지 않으나, 그러나 구오(九五)가 높은 자리를 얻어 거주함 만은 못하기 때문에 다만 이르기를 “용(龍)의 덕이면서 가운데로 바로잡는 자이다.[龍德而正中者]”라고 하였음이다.
"말은 믿음으로 고쳐 쓰고 행동은 삼가함으로 고쳐 행하며,[庸言之信 庸行之謹]"라는 것은, 용(庸)은 가운데로 고쳐씀을[中庸]을 말하고, 용(庸)은 항상(恒常)함이며, 처음을 좇아서 끝에 이르면서 항상 말함을 신실(信實)하게 하고 항상 행실을 근신(謹愼)함이다.
"사악(邪惡)함을 막아서 성실함을 보존하고,閑邪存其誠]"라는 것은, 사악함을 방어하여 막음은, 마땅히 스스로 그 이루고자하는 진실을 보존함을 말함이다.
"세상을 선도하고서 자랑하지 않으며,[善世而不伐]"라는 것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그 공(功)을 자랑하지 않음을 말함이다.
"덕(德)을 넓혀서 달라진다.[德博而化]"라는 것은, 덕(德)을 잘 널리 넓혀서 세속을 변화시킴을 말함이다.
초효(初爻)는 곧 완전히 은둔하여 세상을 피하였고, 이효(二爻)는 덕행(德行)을 점점 드러내어 그로써 세속을 교화하는 것인데, 순(舜)임금이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고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굽는데 그로써 그릇이 이지러지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점점 교화된 것이 이것이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남이 이롭다'고 함은 군주의 덕(德)이다.[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라는 것은, 그로써 여러 효(爻)에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역왈(易曰)’이라고 칭하였다.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음[見龍在田]”은, 아직 군주의 지위가 아니고 다만 군주의 덕(德)을 일러주었음이다.」
[孔穎達 疏]‘九二曰’至‘君德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이왈(九二曰)에서 군덕야(君德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釋九二爻辭.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이(九二)의 효사(爻辭)를 해석하였다.
‘子曰龍德而正中者’, 九二居中不偏, 然不如九五居尊得位, 故但云“龍德而正中者”也.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용(龍)의 덕이면서 가운데로 바로잡는 자이다.'[子曰龍德而正中者]"는, 구이(九二)가 가운데에 거주하고 편벽되지 않으나, 그러나 구오(九五)가 높은 자리를 얻어 거주함 만은 못하기 때문에 다만 이르기를 “용(龍)의 덕이면서 가운데로 바로잡는 자이다.[龍德而正中者]”라고 하였음이다.
‘庸言之信 庸行之謹’者, 庸謂中庸, 庸, 常也, 從始至末, 常言之信實, 常行之謹愼.
"말은 믿음으로 고쳐 쓰고 행동은 삼가함으로 고쳐 행하며,[庸言之信 庸行之謹]"라는 것은, 용(庸)은 가운데로 고쳐씀을[中庸]을 말하고, 용(庸)은 항상(恒常)함이며, 처음을 좇아서 끝에 이르면서 항상 말함을 신실(信實)하게 하고 항상 행실을 근신(謹愼)함이다.
‘閑邪存其誠’者, 言防閑邪惡, 當自存其誠實也.
"사악(邪惡)함을 막아서 성실함을 보존하고,閑邪存其誠]"라는 것은, 사악함을 방어하여 막음은, 마땅히 스스로 그 이루고자하는 진실을 보존함을 말함이다.
‘善世而不伐’者, 謂爲善於世, 而不自伐其功.
"세상을 선도하고서 자랑하지 않으며,[善世而不伐]"라는 것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그 공(功)을 자랑하지 않음을 말함이다.
‘德博而化’者, 言德能廣博, 而變化於世俗.
"덕(德)을 넓혀서 달라진다.[德博而化]"라는 것은, 덕(德)을 잘 널리 넓혀서 세속을 변화시킴을 말함이다.
初爻則全隱遯避世, 二爻則漸見德行以化於俗也. 若舜漁於雷澤, 陶於河濱, 以器不窳, 民漸化之, 是也.
초효(初爻)는 곧 완전히 은둔하여 세상을 피하였고, 이효(二爻)는 덕행(德行)을 점점 드러내어 그로써 세속을 교화하는 것인데, 순(舜)임금이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고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굽는데 그로써 그릇이 이지러지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점점 교화된 것이 이것이다.
‘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者, 以其異於諸爻, 故特稱易曰.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남이 이롭다'고 함은 군주의 덕(德)이다.[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라는 것은, 그로써 여러 효(爻)에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역왈(易曰)’이라고 칭하였다.
‘見龍在田’, 未是君位, 但云君德也.
“용(龍)이 나타나 밭에 있음[見龍在田]”은, 아직 군주의 지위가 아니고 다만 군주의 덕(德)을 일러주었음이다.」
九三曰:「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何謂也?子曰:「君子進德修業。忠信,所以進德也;修辭立其誠,所以居業也。知至至之,可與幾也。知終終之,可與存義也。
구삼효(九三爻)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종일 마르도록 노력하고 저녁에도 위태한 듯이 두려워해야 허물이 없다.”는 무슨 말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덕으로 나아감을 업(業)으로 닦는다. 충실함과 진실함[忠信]은 덕(德)에 나아가는 까닭이고, 말을 닦아서 그[忠信]를 성실하게 세움이 업(業)에 거주하는 까닭이다. 이르를 데를 알고 이르러 가면 기미(幾微)에 함께 할 수 있고, 마침을 알고 마침으로 가면 옳음을 함께 보존할 수 있다.
【王弼 注】 處一體之極,是至也。居一卦之盡,是終也。處事之至而不犯咎,知至者也。故可與成務矣。處終而能全其終,知終者也。夫進物之速者,義不若利,存物之終者,利不及義。故靡不有初,鮮克有終。夫可與存義者,其唯知終者乎。
【왕필 주】 처함이 한 몸[下體]의 끝이니 이는 이르름[至]이다. 한 괘[下卦]의 다함에 거주이니 이는 마침[終]이다. 일의 이르름[至]에 처하면서 허물을 범하지 않으니 이르름[至]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허락(許諾)하여 힘써 이룰 수 있으며, 마침[終]에 처하여서는 그 마침을 온전하게 잘하여 마침[終]을 아는 것이다. 대저 사물의 빨리 나아가는 것은 옳음이 이로움과 같지 않고 사물이 마침[終]을 보존하는 것은 이로움이 옳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있지 않음이 없지만 마침[終]이 있음을 이기기는 드물다. 대저 옳음이 있도록 허락(許諾)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마침[終]을 아는 자 인가?
[孔穎達 疏]「九三曰」至「可與存義也」。
○正義曰:此釋九三爻辭也。「子曰:君子進德脩業」者,德謂德行,業謂功業。九三所以「終日乾乾」者,欲進益道德,脩營功業,故「終日乾乾」匪懈也。「進德」則「知至」,將進也;「脩業」則「知終」,存義也。「忠信所以進德」者,復解進德之事,推忠於人,以信待物,人則親而尊之,其德日進,是「進德」也。「修辭立其誠,所以居業」者,辭謂文教,誠謂誠實也。外則脩理文教,內則立其誠實,內外相成,則有功業可居,故云「居業」也。上云「進德」,下復云「進德」;上云「脩業」,下變云「居業」者,以其間有脩辭之文,故避其脩文而云「居業」。且功業宜云「居」也。「知至至之,可與幾」者,九三處一體之極,方至上卦之下,是「至」也。既居上卦之下,而不凶咎,是「知至」也。既能知是將至,則是識幾知理,可與共論幾事。幾者,去無入有,有理而未形之時。此九三既知時節將至,知理欲到,可與共營幾也。「知終終之,可與存義」者,居一體之盡,而全其終竟,是「知終」也。既能知此終竟,是終盡之時,可與保存其義。義者宜也,保全其位,不有失喪,於事得宜。九三既能知其自全,故可存義。然九三唯是一爻,或使之欲進知幾也,或使之欲退存義也。一進一退,其意不同,以九三處進退之時,若可進則進,可退則退,兩意並行。
○注「處一體之極」至「其唯知終者乎」。
○正義曰:「處一體之極,是至也」者,莊氏云:「極即至也。三在下卦之上,是至極。」褚氏云:「一體之極是至者,是下卦巳極,將至上卦之下,至謂至上卦也。」下云「在下位而不憂」,注云「知夫至至,故不憂」,此以人事言之。既云「下位」,明知在上卦之下,欲至上卦,故不憂,是知將至上卦。若莊氏之說,直云「下卦」上極是至極,儻無上卦之體,何可至也?何須與幾也?是知至者,據上卦為文。莊說非也。「處事之至而不犯咎」,是「知至」者,謂三近上卦,事之將至,能以禮知屈,而不觸犯上卦之咎,則是知事之將至。「故可與成務」者,務謂事務。既識事之先幾,可與以成其事務。「與」猶許也,言可許之事,不謂此人共彼相與也。「進物之速者,義不若利」者,利則隨幾而發,見利則行也。義者依分而動,不妄求進。故進物速疾,義不如利,由義靜而利動故也。「存物之終者,利不及義」者,保全巳成之物,不妄興動,故「利不及義」也。「故靡不有初,鮮克有終」者,見利則行,不顧在後,是「靡不有初」;不能守成其業,是「鮮克有終」。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구삼왈(九三曰)에서 가여존의야(可與存義也)까지.}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삼(九三)의 효사(爻辭)를 해석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덕으로 나아감을 업(業)으로 닦는다.[子曰君子進德脩業]"라는 것은, ‘덕(德)’은 덕(德)을 행함을 말하며, ‘업(業)’은 업(業)의 공로를 말하는데, 구삼(九三)이 종일토록 마르도록 노력하는 것은 도(道)와 덕(德)을 더하여 나아가고 공업(功業)을 닦기를 바라는 까닭이기 때문에 종일 마르도록 노력하고 게으르지 않음이다.
덕(德)에 나아감은 곧 이르름[至]을 알고 장차 나아감이며, 업(業)을 닦음은 곧 마침[終]을 알고 옳음[義]을 보존함이다.
"충실함과 진실함[忠信]은 덕(德)에 나아가는 까닭이고,[忠信所以進德]"라는 것은, 다시 덕(德)에 나아가는 일을 해석하고, 남에게 충실함[忠]을 미루어 성실함으로써 사물을 대하면 남들이 곧 친애하면서 높여 주며 그 덕(德)이 날로 나아지는데, 이것이 덕(德)에 나아감이다.
"말을 닦아서 그[忠信]를 성실하게 세움이 업(業)에 거주하는 까닭이다.[修辭立其誠 所以居業]"라는 것은, ‘사(辭)’는 글을 가르침을 말하고 ‘성(誠)’은 성실함을 말하며, 밖으로는 곧 글의 이치를 닦아서 가르치며 안으로는 곧 그 성실함을 세워서 안과 밖이 서로 이루어지니 곧 공업(功業)이 있는데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업에 거주한다.[居業]’라고 하였다.
위에서 이르기를 덕(德)에 나아간다고 하고 아래에서 다시 이르기를 덕(德)에 나아간다고 하였으며, 위에서 이르기를 업(業)을 닦는다 하고 아래에서는 변하여 업(業)에 거주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 ‘말을 닦는다[脩辭]’는 글이 있기 때문에 ‘닦는다[脩]’는 글을 피하여 이르기를 거업(居業)이라 하고, 또 공업(功業)은 마땅히 이르기를 ‘거주한다[居]’라고 하였다.
"이르름[至]을 알고 이르러 가면 기미(幾微)에 함께 할 수 있고,[知至至之 可與幾]"라는 것은, 구삼(九三)이 한 몸[體]의 끝[極]에 처하고 바야흐로 상괘(上卦)의 아래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르름[至]이며, 나아가 상괘(上卦)의 아래에 거주하면서 흉하더라도 허물은 아니며, 이것이 ‘이르름을 앎[知至]’이다.
이미 잘 알고 이에 장차 이르르면 이는 기미(幾微)를 알고 이치를 알아서 일의 기미를 함께 더블어 논할 수 있으며, ‘기(幾)’라는 것은 없음[無]을 떠나 있음[有]으로 들어가서 이치는 있으나 아직 모양이 된 때는 아님이다.
이는 구삼(九三)이 이미 시절(時節)이 장차 이르름[至]을 알고 이치를 알며 이르기를 바라며 알고서 함께 기미(幾微)를 더블어 함께 경영할 수 있음이다.
"마침[終]을 알고 마침으로 가면 옳음을 함께 보존할 수 있다.[知終終之 可與存義]"라는 것은, 한 몸[體]의 다하는 곳에 거주하면서 그 마침[終]의 경계를 온전히 함인데, 이는 마침[終]을 앎이다.
이미 마침[終]의 경계를 잘 알면 이는 마침[終]을 다하는 때에 그 옳음[義]을 함께 보존할 수 있다.
‘옳음[義]’이라는 것은 마땅함인데, 그 지위를 보전(保全)하여 상실(喪失)함이 있지 않으면 일에 마땅함을 얻었음이다.
구삼(九三)이 이미 그 스스로 온전함을 잘 알기 때문에 옳음[義]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구삼(九三)은 오직 이 한 효(爻)가 혹 그로 하여금 나아가서 기미를 알기를 바라고, 혹 그로 하여금 물러나서 옳음[義]을 보존하기를 바람이다.
한 번 나아가고 한 번은 물러나서 그 뜻이 같지 않음은, 구삼(九三)으로써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에 처하는데, 나아갈 수 있으면 나아가고 물러날 수 있으면 물러남과 같이 두 가지 뜻을 병행 함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처일체자극(處一體之極)에서 기유지종자(其唯知終者乎)까지}
○ 바른뜻[正義]을 말한다. 「"처함이 한 몸[下體]의 끝이니 이는 이르름[至]이다.[處一體之極 是至也]"라는 것은,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끝[極]에 나아가 이르름[至]은, 구삼(九三)이 하괘(下卦)의 위에 있으니 이는 지극(至極)함이다.”라고 하였고, 저씨(褚氏;褚仲都)가 이르기를 “‘한 몸[體]의 끝이니 이는 이르름이다.[一體之極 是至]’라는 것은, 이는 하괘(下卦)가 이미 끝하여 장차 상괘(上卦)의 아래에 이르렀으니, ‘이르름[至]’은, 상괘(上卦)에 이르름[至]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아래에 이르기를 “아랫자리에 있으면서도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주(注)에 이르기를 “이르름[至]이 이를 줄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일을 가지고 말을 하였음이다.
이미 이르기를 아랫자리라고 했음은, 상괘(上卦)의 아래에 있어서 상괘(上卦)에 이르고자 함을 밝게 앎이며,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음[故不憂]’은 장차 상괘(上卦)에 이르름[至]을 알아서이다.
장씨(莊氏)의 설명[說]과 같이 하여 곧바로 이르기를 ‘하괘(下卦)가 최상 끝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극[至極]함이며, 만일 상괘(上卦)의 몸[體]이 없다면 어찌 이를 수가 있으며, 어찌 모름지기 기미를 함께 하겠는가?
이 이르름[至]을 아는 것은 상괘(上卦)를 근거하여 글을 썼으니, 장씨(莊氏)의 설명[說]은 잘못이다.
“일의 이르름[至]에 처하면서 허물을 범하지 않으니 이르름[至]을 안다.[處事之至而不犯咎 是知至]”는 것은, 구삼(九三)이 상괘(上卦)에 가까우니, 일이 장차 이르를 적에 예(禮)로써 굽힐 줄을 잘 알아서 상괘(上卦)의 허물을 저촉하고 범하지 않으면 이는 일이 장차 이르름[至]을 앎을 말한다.
“그러므로 허락(許諾)하여 힘써 이룰 수 있으며,[故可與成務]라는 것은, ‘무(務)’는 사무(事務)를 말하며, 일의 미리 나타나는 기미(幾微)를 알고 그 사무를 이룸으로써 허락(許諾)할 수 있음이다. ‘여(與)’는 허락(許諾)함과 같은데, 허락할 수 있는 일을 말하고, 이 사람이 저 사람과 함께 서로 허락함을 말함은 아니다.
“사물의 빨리 나아가는 것은 옳음이 이로움과 같지 않다.[進物之速者 義不若利]”라는 것은, 이로움[利]은 곧 기미(幾微)에 따라 나타나며, 이로움이 나타나면 행하는데, 옳음[義]이라는 것은, 나눔에 의거해서 움직이는데 망령되이 구하려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이 신속히 빠르게 나아감은 옳음[義]이 이로움[利]만 못하며, 옳음[義]은 고요함을 말미암는데 이로움[利]은 움직임을 연고로 함이다.
“사물이 마침[終]을 보존하는 것은 이로움이 옳음에 미치지 못함[存物之終者 利不及義]”이라는 것은, 이미 이루어 진 사물을 온전히 보전하고 망령되이 일으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로움[利]이 옳음[義]에 미치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있지 않음이 없지만 마침[終]이 있음을 이기기는 드물다.[故靡不有初 鮮克有終]”라는 것은, 이로움이 나타나면 행하고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며, 이는 ‘처음에는 있지 않음이 없음[靡不有初]’이고, 그 업(業)을 잘 지켜도 이루지 못함이 ‘마침[終]이 있음을 이기기는 드물다.[鮮克有終]’라고 함이다.」
[孔穎達 疏]‘九三曰’至‘可與存義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구삼왈(九三曰)에서 가여존의야(可與存義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釋九三爻辭也.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삼(九三)의 효사(爻辭)를 해석하였다.
‘子曰君子進德脩業’者, 德謂德行, 業謂功業, 九三所以終日乾乾者, 欲進益道德, 脩營功業, 故終日乾乾, 匪懈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덕으로 나아감을 업(業)으로 닦는다.[子曰君子進德脩業]"라는 것은, ‘덕(德)’은 덕(德)을 행함을 말하며, ‘업(業)’은 업(業)의 공로를 말하는데, 구삼(九三)이 종일토록 마르도록 노력하는 것은 도(道)와 덕(德)을 더하여 나아가고 공업(功業)을 닦기를 바라는 까닭이기 때문에 종일 마르도록 노력하고 게으르지 않음이다.
進德則知至, 將進也, 脩業則知終, 存義也.
덕(德)에 나아감은 곧 이르름[至]을 알고 장차 나아감이며, 업(業)을 닦음은 곧 마침[終]을 알고 옳음[義]을 보존함이다.
‘忠信所以進德’者, 復解進德之事, 推忠於人, 以信待物, 人則親而尊之, 其德日進, 是進德也.
"충실함과 진실함[忠信]은 덕(德)에 나아가는 까닭이고,[忠信所以進德]"라는 것은, 다시 덕(德)에 나아가는 일을 해석하고, 남에게 충실함[忠]을 미루어 성실함으로써 사물을 대하면 남들이 곧 친애하면서 높여 주며 그 덕(德)이 날로 나아지는데, 이것이 덕(德)에 나아감이다.
‘修辭立其誠 所以居業’者, 辭謂文敎, 誠謂誠實也, 外則脩理文敎, 內則立其誠實, 內外相成, 則有功業可居, 故云居業也.
"말을 닦아서 그[忠信]를 성실하게 세움이 업(業)에 거주하는 까닭이다.[修辭立其誠 所以居業]"라는 것은, ‘사(辭)’는 글을 가르침을 말하고 ‘성(誠)’은 성실함을 말하며, 밖으로는 곧 글의 이치를 닦아서 가르치며 안으로는 곧 그 성실함을 세워서 안과 밖이 서로 이루어지니 곧 공업(功業)이 있는데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업에 거주한다.[居業]’라고 하였다.
上云進德, 下復云進德, 上云脩業, 下變云居業者, 以其間有脩辭之文, 故避其脩文而云居業, 且功業宜云居也.
위에서 이르기를 덕(德)에 나아간다고 하고 아래에서 다시 이르기를 덕(德)에 나아간다고 하였으며, 위에서 이르기를 업(業)을 닦는다 하고 아래에서는 변하여 업(業)에 거주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 ‘말을 닦는다[脩辭]’는 글이 있기 때문에 ‘닦는다[脩]’는 글을 피하여 이르기를 거업(居業)이라 하고, 또 공업(功業)은 마땅히 이르기를 ‘거주한다[居]’라고 하였다.
‘知至至之 可與幾’者, 九三處一體之極, 方至上卦之下, 是至也, 旣居上卦之下, 而不凶咎, 是知至也.
"이르름[至]을 알고 이르러 가면 기미(幾微)에 함께 할 수 있고,[知至至之 可與幾]"라는 것은, 구삼(九三)이 한 몸[體]의 끝[極]에 처하고 바야흐로 상괘(上卦)의 아래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르름[至]이며, 나아가 상괘(上卦)의 아래에 거주하면서 흉하더라도 허물은 아니며, 이것이 ‘이르름을 앎[知至]’이다.
旣能知是將至, 則是識幾知理, 可與共論幾事, 幾者, 去无入有, 有理而未形之時.
이미 잘 알고 이에 장차 이르르면 이는 기미(幾微)를 알고 이치를 알아서 일의 기미를 함께 더블어 논할 수 있으며, ‘기(幾)’라는 것은 없음[無]을 떠나 있음[有]으로 들어가서 이치는 있으나 아직 모양이 된 때는 아님이다.
此九三旣知時節將至, 知理欲到, 可與共營幾也.
이는 구삼(九三)이 이미 시절(時節)이 장차 이르름[至]을 알고 이치를 알며 이르기를 바라며 알고서 함께 기미(幾微)를 더블어 함께 경영할 수 있음이다.
‘知終終之 可與存義’者, 居一體之盡, 而全其終竟, 是知終也.
"마침[終]을 알고 마침으로 가면 옳음을 함께 보존할 수 있다.[知終終之 可與存義]"라는 것은, 한 몸[體]의 다하는 곳에 거주하면서 그 마침[終]의 경계를 온전히 함인데, 이는 마침[終]을 앎이다.
旣能知此終竟, 是終盡之時, 可與保存其義.
이미 마침[終]의 경계를 잘 알면 이는 마침[終]을 다하는 때에 그 옳음[義]을 함께 보존할 수 있다.
義者, 宜也, 保全其位, 不有失喪, 於事得宜.
‘옳음[義]’이라는 것은 마땅함인데, 그 지위를 보전(保全)하여 상실(喪失)함이 있지 않으면 일에 마땅함을 얻었음이다.
九三旣能知其自全, 故可存義. 然九三唯是一爻, 或使之欲進知幾也, 或使之欲退存義也.
구삼(九三)이 이미 그 스스로 온전함을 잘 알기 때문에 옳음[義]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구삼(九三)은 오직 이 한 효(爻)가 혹 그로 하여금 나아가서 기미를 알기를 바라고, 혹 그로 하여금 물러나서 옳음[義]을 보존하기를 바람이다.
一進一退, 其意不同, 以九三處進退之時, 若可進則進, 可退則退, 兩意竝行.
한 번 나아가고 한 번은 물러나서 그 뜻이 같지 않음은, 구삼(九三)으로써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에 처하는데, 나아갈 수 있으면 나아가고 물러날 수 있으면 물러남과 같이 두 가지 뜻을 병행 함이다.」
○注‘處一體之極’至‘其唯知終者乎’
○ 【왕필 주(王弼 注)】의 {처일체자극(處一體之極)에서 기유지종자(其唯知終者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處一體之極 是至也’者, 莊氏云“極卽至也, 三在下卦之上, 是至極.”褚氏云“‘一體之極, 是至’者, 是下卦已極, 將至上卦之下, 至謂至上卦也.”
○ 바른뜻[正義]을 말한다. 「"처함이 한 몸[下體]의 끝이니 이는 이르름[至]이다.[處一體之極 是至也]"라는 것은,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끝[極]에 나아가 이르름[至]은, 구삼(九三)이 하괘(下卦)의 위에 있으니 이는 지극(至極)함이다.”라고 하였고, 저씨(褚氏;褚仲都)가 이르기를 “‘한 몸[體]의 끝이니 이는 이르름이다.[一體之極 是至]’라는 것은, 이는 하괘(下卦)가 이미 끝하여 장차 상괘(上卦)의 아래에 이르렀으니, ‘이르름[至]’은, 상괘(上卦)에 이르름[至]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下云“在下位而不憂”, 注云“知夫至至, 故不憂.” 此以人事言之.
아래에 이르기를 “아랫자리에 있으면서도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주(注)에 이르기를 “이르름[至]이 이를 줄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일을 가지고 말을 하였음이다.
旣云下位, 明知在上卦之下, 欲至上卦, ‘故不憂’, 是知將至上卦.
이미 이르기를 아랫자리라고 했음은, 상괘(上卦)의 아래에 있어서 상괘(上卦)에 이르고자 함을 밝게 앎이며,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음[故不憂]’은 장차 상괘(上卦)에 이르름[至]을 알아서이다.
若莊氏之說, 直云下卦上極, 是至極, 儻无上卦之體, 何可至也, 何須與幾也.
장씨(莊氏)의 설명[說]과 같이 하여 곧바로 이르기를 ‘하괘(下卦)가 최상 끝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극[至極]함이며, 만일 상괘(上卦)의 몸[體]이 없다면 어찌 이를 수가 있으며, 어찌 모름지기 기미를 함께 하겠는가?
是知至者據上卦爲文, 莊說非也.
이 이르름[至]을 아는 것은 상괘(上卦)를 근거하여 글을 썼으니, 장씨(莊氏)의 설명[說]은 잘못이다.
‘處事之至而不犯咎 是知至’者, 謂三近上卦, 事之將至, 能以禮知屈, 而不觸犯上卦之咎, 則是知事之將至.
“일의 이르름[至]에 처하면서 허물을 범하지 않으니 이르름[至]을 안다.[處事之至而不犯咎 是知至]”는 것은, 구삼(九三)이 상괘(上卦)에 가까우니, 일이 장차 이르를 적에 예(禮)로써 굽힐 줄을 잘 알아서 상괘(上卦)의 허물을 저촉하고 범하지 않으면 이는 일이 장차 이르름[至]을 앎을 말한다.
‘故可與成務’者, 務謂事務, 旣識事之先幾, 可與以成其事務. 與猶許也, 言可許之事, 不謂此人共彼相與也.
“그러므로 허락(許諾)하여 힘써 이룰 수 있으며,[故可與成務]라는 것은, ‘무(務)’는 사무(事務)를 말하며, 일의 미리 나타나는 기미(幾微)를 알고 그 사무를 이룸으로써 허락(許諾)할 수 있음이다. ‘여(與)’는 허락(許諾)함과 같은데, 허락할 수 있는 일을 말하고, 이 사람이 저 사람과 함께 서로 허락함을 말함은 아니다.
‘進物之速者 義不若利’者, 利則隨幾而發, 見利則行也, 義者, 依分而動, 不妄求進.
“사물의 빨리 나아가는 것은 옳음이 이로움과 같지 않다.[進物之速者 義不若利]”라는 것은, 이로움[利]은 곧 기미(幾微)에 따라 나타나며, 이로움이 나타나면 행하는데, 옳음[義]이라는 것은, 나눔에 의거해서 움직이는데 망령되이 구하려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故進物速疾, 義不如利, 由義靜而利動故也.
그러므로 사물이 신속히 빠르게 나아감은 옳음[義]이 이로움[利]만 못하며, 옳음[義]은 고요함을 말미암는데 이로움[利]은 움직임을 연고로 함이다.
‘存物之終者 利不及義’者, 保全已成之物, 不妄興動, 故利不及義也.
“사물이 마침[終]을 보존하는 것은 이로움이 옳음에 미치지 못함[存物之終者 利不及義]”이라는 것은, 이미 이루어 진 사물을 온전히 보전하고 망령되이 일으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로움[利]이 옳음[義]에 미치지 못함이다.
‘故靡不有初 鮮克有終’者, 見利則行, 不顧在後, 是靡不有初, 不能守成其業, 是鮮克有終.
“그러므로 처음에는 있지 않음이 없지만 마침[終]이 있음을 이기기는 드물다.[故靡不有初 鮮克有終]”라는 것은, 이로움이 나타나면 행하고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며, 이는 ‘처음에는 있지 않음이 없음[靡不有初]’이고, 그 업(業)을 잘 지켜도 이루지 못함이 ‘마침[終]이 있음을 이기기는 드물다.[鮮克有終]’라고 함이다.」
是故居上位而不驕,在下位而不憂。
이렇기 때문에 윗 자리에 머물더라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 자리에 있더라도 근심하지 않는다.
【王弼 注】 居下體之上,在上體之下,明夫終敝,故不驕也;知夫至至,故不憂也。
【왕필 주】 아래 몸[卦]의 위에 거주하고 윗 몸[卦]의 아래에 있으니 대저 마침[終]이 황폐(荒廢)함을 알기[明] 때문에 교만하지 않으며, 그[황폐(荒廢)] 이르름[至]이 이르름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
[孔穎達 疏]「是故居上位而不驕,在下位而不憂」。
○正義曰:「是故居上位而不驕」者,謂居下體之上位而不驕也,以其「知終」,故不敢懷驕慢。「在下位而不憂」者,處上卦之下,故稱「下位」,以其知事將至,務幾欲進,故不可憂也。
○注「明夫終敝故不驕也」至「故不憂也」。
○正義曰:「明夫終敝,故不驕」者,解「知終」也。「知夫至至,故不憂」者,解「知至」也。前經「知至」在前,「知終」在後,此經先解「知終」,後解「知至」者,隨文便而言之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시고거상위이불교재하위이불우(是故居上位而不驕在下位而不憂)이다.}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렇기 때문에 윗 자리에 머물더라도 교만하지 않고,[是故居上位而不驕]”라는 것은, 아랫 몸[下體]의 윗자리에 거주하면서 거만하지 않음을 말함인데, 그로써 마침[終]을 알기 때문에 감히 교만함을 품지 않음이다.
“아랫 자리에 있더라도 근심하지 않는다.[在下位而不憂]”라는 것은, 상괘(上卦)의 아래에 처하였기 때문에 아랫자리라고 칭하였으며, 그로써 일이 장차 이르름[至]을 알고서 사무(事務)의 기미가 나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에 근심할 수가 없다.」
[孔穎達 疏]‘是故居上位而不驕在下位而不憂’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시고거상위이불교재하위이불우(是故居上位而不驕在下位而不憂)이다.}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是故居上位而不驕’者, 謂居下體之上位而不驕也, 以其知終, 故不敢懷驕慢.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렇기 때문에 윗 자리에 머물더라도 교만하지 않고,[是故居上位而不驕]”라는 것은, 아랫 몸[下體]의 윗자리에 거주하면서 거만하지 않음을 말함인데, 그로써 마침[終]을 알기 때문에 감히 교만함을 품지 않음이다.
‘在下位而不憂’者, 處上卦之下, 故稱下位, 以其知事將至, 務幾欲進, 故不可憂也.
“아랫 자리에 있더라도 근심하지 않는다.[在下位而不憂]”라는 것은, 상괘(上卦)의 아래에 처하였기 때문에 아랫자리라고 칭하였으며, 그로써 일이 장차 이르름[至]을 알고서 사무(事務)의 기미가 나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에 근심할 수가 없다.」
○注‘明夫終敝故不驕也’至‘故不憂也’
○ 【왕필 주(王弼 注)】의 {명부종폐고불교야(明夫終敝故不驕也)에서 고불우야(故不憂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明夫終敝 故不驕’者, 解知終也.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대저 마침[終]이 황폐(荒廢)함을 알기[明] 때문에 교만하지 않으며,[明夫終敝 故不驕]”라는 것은, 마침[終]을 앎을 해석하였다.
‘知夫至至 故不憂’者, 解知至也.
“그[황폐(荒廢)] 이르름[至]이 이르름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知夫至至 故不憂]”라는 것은, 이르름[至]을 앎을 해석하였다.
前經, 知至在前, 知終在後, 此經, 先解知終, 後解知至者, 隨文便而言之也.
앞의 경문(經文)은지지(知至)가 앞에 있고 지종(知終)이 뒤에 있으며, 이 경문(經文)은 마침[終] 앎을 먼저 해석하고 이르름[至] 앎을 뒤에 해석한 것인데, 글의 편리함을 따르면서 말을 하였음이다.」
故乾乾 因其時而惕,雖危无咎矣。
그러므로 마르도록 힘써서 그 때를 말미암아 조심하면 비록 위태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王弼 注】 惕,怵惕之謂也。處事之極,失時則廢,懈怠則曠。故因其時而惕,雖危无咎。
【왕필 주】 척(惕:두려워할 척)은 두려워 조심함을 일컫는다. 일의 끝에 처하여 때를 잃으면 폐하고 몹시 게으르면 비우기 때문에 그 때를 말미암아서 조심하면 비록 위태하더라도 허물이 없음이다.
[孔穎達 疏]「故乾乾」至「無咎矣」。
○正義曰:九三以此之故,恒「乾乾」也。因其巳終、巳至之時,而心懷惕懼,雖危不寧,以其知終、知至,故「無咎」。
○注「處事之極」至「解怠則曠」。
○正義曰:「處事之極,失時則廢」者,謂三在下卦之上體,是處事之極至也。至失時不進,則幾務廢闕,所以「乾乾」須進也。「懈怠則曠」者,既處事極,極則終也,當保守巳終之業;若懈怠驕逸,則功業空曠,所以「乾乾」也。「失時則廢」,解「知至」也。「懈怠則曠」,解「知終」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고건건(故乾乾)에서 천구의(无咎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삼(九三)은 이것의 연고(緣故)로써 항상 마르도록 힘씀이다.
그 이미 마침[終]과 이미 이르름[至]의 때를 말미암아서 마음에 두려움을 품으면 비록 위태롭고 편안하지 못하지만, 그로써 마침[終]을 알고 이르름[至]을 알기 때문에 허물이 없음이다.」
○【왕필 주(王弼 注)】의 {처사지극(處事之極)에서 해태즉광(解怠則曠)까지.}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일의 끝에 처하여 때를 잃으면 폐함[處事之極 失時則廢]”이라는 것은, 구삼(九三)이 하괘(下卦)의 상체(上體)에 있는데, 이는 일의 끝의 이르름[至]에 처함이고, 이르름[至]의 때를 잃고 나아가지 않으면 기미(幾微)와 사무가 폐해지고 누락됨을 말함이며, 마르도록 힘써서 모름지기 나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몹시 게으르면 비워진다.[懈怠則曠]”라는 것은, 이미 일의 지극함에 처하였으니 지극하면 마침[終]이며, 마땅히 이미 끝마친 업(業)을 보존하여 지켜야 한다. 만약 게을러 교만하고 안일하면 공업(功業)이 비게 되며, 마르도록 힘써야 하는 까닭이다.
“때를 잃으면 폐하고[失時則廢]는 이르름[至] 앎을 해석함이고, ”몹시 게으르면 비워짐[懈怠則曠]“은 마침[終] 앎을 해석함이다.」
[孔穎達 疏]‘故乾乾’至‘无咎矣’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고건건(故乾乾)에서 천구의(无咎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九三以此之故, 恒乾乾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삼(九三)은 이것의 연고(緣故)로써 항상 마르도록 힘씀이다.
因其已終已至之時, 而心懷惕懼, 雖危不寧, 以其知終知至, 故无咎.
그 이미 마침[終]과 이미 이르름[至]의 때를 말미암아서 마음에 두려움을 품으면 비록 위태롭고 편안하지 못하지만, 그로써 마침[終]을 알고 이르름[至]을 알기 때문에 허물이 없음이다.」
○注‘處事之極’至‘解怠則曠’
○【왕필 주(王弼 注)】의 {처사지극(處事之極)에서 해태즉광(解怠則曠)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處事之極 失時則廢’者, 謂三在下卦之上體, 是處事之極至也, 至失時不進, 則幾務廢闕, 所以乾乾須進也.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일의 끝에 처하여 때를 잃으면 폐함[處事之極 失時則廢]”이라는 것은, 구삼(九三)이 하괘(下卦)의 상체(上體)에 있는데, 이는 일의 끝의 이르름[至]에 처함이고, 이르름[至]의 때를 잃고 나아가지 않으면 기미(幾微)와 사무가 폐해지고 누락됨을 말함이며, 마르도록 힘써서 모름지기 나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懈怠則曠’者, 旣處事極, 極則終也, 當保守已終之業. 若懈怠驕逸, 則功業空曠, 所以乾乾也.
“몹시 게으르면 비워진다.[懈怠則曠]”라는 것은, 이미 일의 지극함에 처하였으니 지극하면 마침[終]이며, 마땅히 이미 끝마친 업(業)을 보존하여 지켜야 한다. 만약 게을러 교만하고 안일하면 공업(功業)이 비게 되며, 마르도록 힘써야 하는 까닭이다.
失時則廢, 解知至也, 懈怠則曠, 解知終也.
“때를 잃으면 폐하고[失時則廢]는 이르름[至] 앎을 해석함이고, ”몹시 게으르면 비워짐[懈怠則曠]“은 마침[終] 앎을 해석함이다.」
九四曰:「或躍在淵,无咎。」何謂也?子曰:「上下无常,非為邪也;進退无恒,非離群也。君子進德修業,欲及時也,故无咎。」
구사효(九四爻)에 말하기를 "연못에 있으면서 뛰어오르면 허물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무슨 말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올라가고 내려감에 일정함이 없음은 간사(奸邪)함을 하려함이 아니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항상함이 없음은 무리를 떠나려함이 아니다. 군자가 덕(德)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음은 그 때에 맞게 미치기를 바람이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孔穎達 疏]「九四曰」至「故無咎」。○正義曰:此明九四爻辭也。「子曰:「上下無常,非為邪」者,上而欲躍,下而欲退,是無常也。意在於公,非是為邪也。「進退無恒,非離群」者,何氏云:「所以'進退無恒'者,時使之然,非苟欲離群也。」何氏又云:「言上下者,據位也。進退者,據爻也。」所謂「非離群」者,言雖「進退無恒」,猶依群眾而行,和光俯仰,並同於眾,非是卓絕獨離群也。「君子進德脩業,欲及時」者,「進德」則欲上、欲進也。「脩業」則欲下、欲退也。進者棄位欲躍,是「進德」之謂也。退者仍退在淵,是「脩業」之謂也。其意與九三同,但九四欲前進多於九三,故云「欲及時」也。九三則不云「及時」,但「可與言幾」而巳。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구사왈(九四曰)에서 고무구(故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사(九四)의 효사(爻辭)를 밝힘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올라가고 내려감에 일정함이 없음은 간사(奸邪)함을 하려함이 아니며,[子曰上下无常 非爲邪]"라는 것은, 올라가면서 뛰기를 바라고 내려가면서 물러나기를 바라니, 이는 일정함이 없는 것이며, 뜻이 공정함에 있고 이를 간사(奸邪)하게 하려함이 아니다.
"나아가고 물러남에 항상함이 없음은 무리를 떠나려함이 아니다.[進退无恒 非離群]"라는 것은, 하씨(何氏 ;何妥)가 이르기를 “나아가고 물러감에 일정함이 없는 것의 까닭은, 때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고, 진실로 무리를 떠나기를 바람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하씨(何氏)가 또 이르기를 “상하(上下)를 말한 것은, 지위[位]를 근거함이고, 나아가고[進] 물러남[退]이라는 것은, 효(爻)를 근거함이며, 이른바 ‘무리를 떠남이 아니라’는 것은, 비록 나아가고 물러남에 항상함이 없어도 오히려 여러 무리가 아닌데도 행하며, 광채를 감추어 구부리고 우러러보며 무리에 나란히 함께하니, 이는 높이 뛰어나서 홀로 무리를 떠남이 아님을 말함이다
"군자가 덕(德)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음은 그 때에 맞게 미치기를 바람이다,[君子進德脩業 欲及時]"라는 것은, ‘덕(德)에 나아감인데, 올라가기 바라고 나아가기 바람이며, 업(業)을 닦음은 내려가기 바라고 물러나기를 바람이다.
나아감[進]이라는 것은, 자리를 버리고 뛰어오르기 바람인데, 이는 덕(德)에 나아감을 말하며, 물러남[退]이라는 것은, 물러남으로 인하여서 못에 있음이며 이는 업(業)을 닦음을 말함이다.
그 뜻이 구삼(九三)과 더블어 같으나 다만 구사(九四)는 앞으로 나아가기 바람이 구삼(九三)보다 많기 때문에 이르기를 ‘때에 미치기를 바란다.[欲及時]’라고 하였고, 구삼(九三)은 곧 때에 미침[及時]을 말하지 않고, 다만 기미(幾微)를 말함을 더블어 할 수 있을 뿐이다.」
[孔穎達 疏]‘九四曰’至‘故无咎’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구사왈(九四曰)에서 고무구(故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明九四爻辭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사(九四)의 효사(爻辭)를 밝힘이다.
‘子曰上下无常 非爲邪’者, 上而欲躍, 下而欲退, 是无常也, 意在於公, 非是爲邪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올라가고 내려감에 일정함이 없음은 간사(奸邪)함을 하려함이 아니며,[子曰上下无常 非爲邪]"라는 것은, 올라가면서 뛰기를 바라고 내려가면서 물러나기를 바라니, 이는 일정함이 없는 것이며, 뜻이 공정함에 있고 이를 간사(奸邪)하게 하려함이 아니다.
‘進退无恒 非離群’者, 何氏云“所以進退无恒者, 時使之然, 非苟欲離群也.”
"나아가고 물러남에 항상함이 없음은 무리를 떠나려함이 아니다.[進退无恒 非離群]"라는 것은, 하씨(何氏 ;何妥)가 이르기를 “나아가고 물러감에 일정함이 없는 것의 까닭은, 때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고, 진실로 무리를 떠나기를 바람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何氏又云“言上下者, 據位也, 進退者, 據爻也, 所謂非離群者, 言雖進退无恒, 猶非群衆而行, 和光俯仰, 竝同於衆, 非是卓絶獨離群也.”
하씨(何氏)가 또 이르기를 “상하(上下)를 말한 것은, 지위[位]를 근거함이고, 나아가고[進] 물러남[退]이라는 것은, 효(爻)를 근거함이며, 이른바 ‘무리를 떠남이 아니라’는 것은, 비록 나아가고 물러남에 항상함이 없어도 오히려 여러 무리가 아닌데도 행하며, 광채를 감추어 구부리고 우러러보며 무리에 나란히 함께하니, 이는 높이 뛰어나서 홀로 무리를 떠남이 아님을 말함이다
‘君子進德脩業 欲及時’者, 進德則欲上欲進也, 脩業則欲下欲退也.
"군자가 덕(德)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음은 그 때에 맞게 미치기를 바람이다,[君子進德脩業 欲及時]"라는 것은, ‘덕(德)에 나아감인데, 올라가기 바라고 나아가기 바람이며, 업(業)을 닦음은 내려가기 바라고 물러나기를 바람이다.
進者, 棄位欲躍, 是進德之謂也, 退者, 仍退在淵, 是脩業之謂也.
나아감[進]이라는 것은, 자리를 버리고 뛰어오르기 바람인데, 이는 덕(德)에 나아감을 말하며, 물러남[退]이라는 것은, 물러남으로 인하여서 못에 있음이며 이는 업(業)을 닦음을 말함이다.
其意與九三同, 但九四欲前進, 多於九三, 故云欲及時也. 九三則不云及時, 但可與言幾而已.
그 뜻이 구삼(九三)과 더블어 같으나 다만 구사(九四)는 앞으로 나아가기 바람이 구삼(九三)보다 많기 때문에 이르기를 ‘때에 미치기를 바란다.[欲及時]’라고 하였고, 구삼(九三)은 곧 때에 미침[及時]을 말하지 않고, 다만 기미(幾微)를 말함을 더블어 할 수 있을 뿐이다.」
九五曰:「飛龍在天,利見大人。」何謂也?子曰:「同聲相應,同氣相求;水流濕、火就燥、雲從龍、風從虎。聖人作而萬物覩,本乎天者親上,本乎地者親下.則各從其類也。」
구오효(九五爻)에 말하였다.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는데, 대인(大人)을 만남이 이롭다"고 하였는데 무슨 말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구하며,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으로 타 들어간다. 구름은 용(龍)을 좇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 성인(聖人)이 지으면 만물이 우러러 보고, 하늘에 근본한 자는 위에 친하고, 땅에 근본한 자는 아래에 친하므로 곧 각각 그 부류[類]를 따른다.“
[孔穎達 疏]「九五曰」至「各從其類也」。○正義曰:此明九五爻之義。「飛龍在天」者,言天能廣感眾物,眾物應之,所以「利見大人」。因大人與眾物感應,故廣陳眾物相感應,以明聖人之作而萬物瞻睹以結之也。「同聲相應」者,若彈宮而宮應,彈角而角動是也。「同氣相求」者,若天欲雨而柱礎潤是也。此二者聲氣相感也。「水流濕,火就燥」者,此二者以形象相感,水流於地,先就濕處;火焚其薪,先就燥處。此同氣水火,皆無識而相感,先明自然之物,故發初言之也。「雲從龍,風從虎」者,龍是水畜,雲是水氣。故龍吟則景雲出,是「雲從龍」也。虎是威猛之獸,風是震動之氣,此亦是同類相感。故虎嘯則穀風生,是「風從虎」也。此二句明有識之物感無識,故以次言之,漸就有識而言也。「聖人作而萬物睹」者,此二句正釋「飛龍在天,利見大人」之義。「聖人作」則「飛龍在天」也,「萬物睹」則「利見大人」也。陳上數事之名,本明於此,是有識感有識也。此亦同類相感,聖人有生養之德,萬物有生養之情,故相感應也。「本乎天者親上,本乎地者親下」者,在上雖陳感應,唯明數事而巳。此則廣解天地之閒共相感應之義。莊氏云:「天地絪縕,和合二氣,共生萬物。」然萬物之體,有感於天氣偏多者,有感於地氣偏多者,故《周禮o大宗伯》有「天產」、「地產」《大司徒》云「動物」、「植物」,本受氣於天者,是動物含靈之屬,天體運動,含靈之物亦運動,是親附於上也。本受氣於地者,是植物無識之屬,地體凝滯,植物亦不移動,是親附於下也。「則各從其類者」,言天地之間,共相感應,各從其氣類。此類因聖人感萬物以同類,故以同類言之。其造化之性,陶甄之器,非唯同類相感,亦有異類相感者。若磁石引針,琥珀拾芥,蠶吐絲而商弦絕,銅山崩而洛鍾應,其類煩多,難一一言也。皆冥理自然,不知其所以然也。感者動也,應者報也。皆先者為感,後者為應,非唯近事則相感,亦有遠事遙相感者。若周時獲麟,乃為漢高之應;漢時黃星,後為曹公之兆。感應之事廣,非片言可悉,今意在釋理,故略舉大綱而巳。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구사오왈(九五曰)에서 각종기류야(各從其類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오효(九五爻)의 뜻을 밝혔다.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는데,[飛龍在天]"라는 것은, 하늘이 여러 사물을 넓리 잘 감동(감동)시켜서 여러 사물이 호응을 함을 말하였으며, 대인(大人)을 만남이 이로운 까닭이다.
대인(大人)이 여러 사물과 더블어 말미암아서 감응했기 때문에 여러 사물이 넓게 펼쳐 서로 감응하며, 성인(聖人)이 지으면 만물(萬物)이 우러러봄을 밝혀 그로써 끝을 맺엊음이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同聲相應]"라는 것은, 만약 궁(宮) 소리를 타면[연주하면] 궁(宮) 소리가 호응하고 각성(角聲)을 타면 각성(角聲)이 움직임이 이것이다.
"같은 기운은 서로를 구하며,[同氣相求]"라는 것은, 만약 하늘이 비를 내리고자 하면 주춧돌과 기둥이 축축해 짐이 이것인데, 이 두 가지는 소리와 기운이 서로 감응함이다.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으로 타 들어간다.[水流濕 火就燥]"라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모양[形]과 모습[象]으로써 서로 감응함이다.
물이 땅으로 흐르면 먼저 습한 곳에 나아가고, 불이 섶을 태우면 먼저 건조한 곳에 나아가며, 이는 물과 불의 기운이 같아서 모두 의식(意識)이 없는데도 서로 감응함이다.
먼저 사물이 스스로 그러함을 밝혔기 때문에 최초에 말을 하여 나타냈다.
"구름은 용(龍)을 좇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는 것은, 용(龍)은 이러한 물의 짐승이고 구름은 이러한 물의 기운이기 때문에 용(龍)이 읊어 부르면 햇빛에 구름이 나오며, 이는 구름이 용(龍)을 따름이다.
범은 이러한 사나운 위엄의 짐승이고, 바람은 이러한 움직여 흔들리는 기운이며, 이 또한 같은 부류가 서로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범이 으르렁거리면 골짜기에 바람이 생겨나며, 이는 바람이 범을 따름이다.
이 두 구(句)는 의식(意識)이 있는 사물이 의식이 없음에 감응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말을 하여서 점점 의식(意識)이 있음에 나아가서 말하였음이다.
“성인(聖人)이 지으면 만물이 우러러 보고,[聖人作 而萬物覩]”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함의 뜻을 바르게 해석하였다. 성인이 지음은 곧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음이고, 만물이 우러러 봄은 곧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움이다.
위의 몇 가지 일의 이름을 나열하였는데, 본래 이것을 밝히려 함이며, 이는 의식(意識)이 있음이 의식(意識)이 있음에 감응함이다.
이 또한 같은 부류가 서로 감응함이며, 성인(聖人)은 낳고 기르는 덕(德)이 있고 만물(萬物)은 낳고 기르는 정(情)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감응함이다.
“하늘에 근본한 자는 위에 친하고, 땅에 근본한 자는 아래에 친하며,[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라는 것은, 위에서 비록 감응을 나열함이 있으나, 오직 몇 가지 일을 밝혔을 뿐이며, 이는 곧 하늘과 땅 사이에 서로 함께 감응함의 뜻을 넓게 해석하였다.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천지(天地)의 기운이 갈무리되어 두[陰과 陽] 기운이 어울려 합해져서 함께 만물(萬物)을 낳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물(萬物)의 몸은, 하늘의 기운에 편향되어 감응함이 많이 있는 것과, 땅의 기운에 편향되어 감응함이 많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하늘의 생산(生産)과 땅의 생산(生産)이 있고, 〈대사도(大司徒)〉에 이르기를 “동물(動物)과 식물(植物)”을 말하였다.
본래 하늘에서 기운을 받은 것은, 이 동물(動物)로 신령함을 머금은 등속인데, 천체(天體)가 운동하고 신령함을 머금은 사물 또한 운동하여, 이는 위쪽에 친하게 붙음이며, 본래 땅에서 기운을 받은 것은, 이는 의식(意識)이 없는 식물의 등속인데, 땅에 몸이 엉기어 메여서 식물 또한 움직여 옴기지 못하며, 이는 아래쪽에 친하게 붙음이다.
“곧 각각 그 부류[類]를 따른다.[則各從其類]”라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함께 서로 감응하여 각각 그 기운의 부류[類]를 따름을 말함이다. 이 부류[類]는 성인(聖人)이 만물(萬物)을 가지고 같은 부류를 감응시킴을 말미암았기 때문에 같은 부류[類]를 가지고 말을 하였다.
그 창조하여 달라지는 본성[性]과 도공(陶工)의 질그릇 굽는 기물은, 비단 오직 같은 부류[類]가 서로 감응하지만, 또한 다른 종류가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있다.
자석(磁石)이 바늘을 끌어당기고 호박(琥珀)이 지푸라기를 붙게하며, 누에가 실을 토하면서 상성(商聲)의 줄이 끊기고 동산(銅山)이 무너지면서 낙양(洛陽)의 종(鍾)이 호응함과 같은데, 그 종류가 매우 많아 하나 하나를 말하기가 어려우며, 모두 그윽한 이치가 스스로 그러함이며, 그 까닭이 그러함을 알지는 못한다.
감(感)이란 것은, 움직이고 응(應)이란 것은, 갚음이며, 모두 앞에 것에 느끼게 되면 뒤에 하는 것이 호응하게 된다.
오직 가까운 일만 서로 감응함이 아니고, 또한 먼 일이 멀리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있으며, 주(周)나라 시절에 기린을 잡았는데 이에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응(應)함이 되었고, 한(漢)나라 시절에 황성(黃星)은 뒤에 조공[曹公(曹操)]의 조짐이 되었음과 같다.
감응(感應)의 일이 호응함은, 한마디 말로 다할 수 있음이 아니며, 지금 뜻의 이치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대략 대강을 들었을 뿐이다.」
[孔穎達 疏]‘九五曰’至‘各從其類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경(經)의 {구사오왈(九五曰)에서 각종기류야(各從其類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明九五爻之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오효(九五爻)의 뜻을 밝혔다.
‘飛龍在天’者, 言天能廣感衆物, 衆物應之, 所以利見大人.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는데,[飛龍在天]"라는 것은, 하늘이 여러 사물을 넓리 잘 감동(감동)시켜서 여러 사물이 호응을 함을 말하였으며, 대인(大人)을 만남이 이로운 까닭이다.
因大人與衆物感應, 故廣陳衆物相感應, 以明聖人之作而萬物瞻覩以結之也.
대인(大人)이 여러 사물과 더블어 말미암아서 감응했기 때문에 여러 사물이 넓게 펼쳐 서로 감응하며, 성인(聖人)이 지으면 만물(萬物)이 우러러봄을 밝혀 그로써 끝을 맺엊음이다.
‘同聲相應’者, 若彈宮而宮應, 彈角而角動, 是也.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同聲相應]"라는 것은, 만약 궁(宮) 소리를 타면[연주하면] 궁(宮) 소리가 호응하고 각성(角聲)을 타면 각성(角聲)이 움직임이 이것이다.
'同氣相求'者, 若天欲雨而礎柱潤是也, 此二者聲氣相感也.
"같은 기운은 서로를 구하며,[同氣相求]"라는 것은, 만약 하늘이 비를 내리고자 하면 주춧돌과 기둥이 축축해 짐이 이것인데, 이 두 가지는 소리와 기운이 서로 감응함이다.
‘水流濕 火就燥’者, 此二者, 以形象相感.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으로 타 들어간다.[水流濕 火就燥]"라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모양[形]과 모습[象]으로써 서로 감응함이다.
水流於地, 先就濕處, 火焚其薪, 先就燥處, 此同氣水火, 皆无識而相感.
물이 땅으로 흐르면 먼저 습한 곳에 나아가고, 불이 섶을 태우면 먼저 건조한 곳에 나아가며, 이는 물과 불의 기운이 같아서 모두 의식(意識)이 없는데도 서로 감응함이다.
先明自然之物, 故發初言之也.
먼저 사물이 스스로 그러함을 밝혔기 때문에 최초에 말을 하여 나타냈다.
‘雲從龍 風從虎’者, 龍是水畜, 雲是水氣, 故龍吟則景雲出, 是雲從龍也.
"구름은 용(龍)을 좇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는 것은, 용(龍)은 이러한 물의 짐승이고 구름은 이러한 물의 기운이기 때문에 용(龍)이 읊어 부르면 햇빛에 구름이 나오며, 이는 구름이 용(龍)을 따름이다.
虎是威猛之獸, 風是震動之氣, 此亦是同類相感, 故虎嘯則谷風生, 是風從虎也. 此二句, 明有識之物感无識, 故以次言之, 漸就有識而言也.
범은 이러한 사나운 위엄의 짐승이고, 바람은 이러한 움직여 흔들리는 기운이며, 이 또한 같은 부류가 서로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범이 으르렁거리면 골짜기에 바람이 생겨나며, 이는 바람이 범을 따름이다.
이 두 구(句)는 의식(意識)이 있는 사물이 의식이 없음에 감응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말을 하여서 점점 의식(意識)이 있음에 나아가서 말하였음이다.
‘聖人作 而萬物覩’者, 此二句, 正釋“飛龍在天, 利見大人”之義. 聖人作則飛龍在天也, 萬物覩則利見大人也.
“성인(聖人)이 지으면 만물이 우러러 보고,[聖人作 而萬物覩]”라는 것은, 이 두 구(句)가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함의 뜻을 바르게 해석하였다. 성인이 지음은 곧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음이고, 만물이 우러러 봄은 곧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움이다.
陳上數事之名, 本明於此, 是有識感有識也.
위의 몇 가지 일의 이름을 나열하였는데, 본래 이것을 밝히려 함이며, 이는 의식(意識)이 있음이 의식(意識)이 있음에 감응함이다.
此亦同類相感, 聖人有生養之德, 萬物有生養之情, 故相感應也.
이 또한 같은 부류가 서로 감응함이며, 성인(聖人)은 낳고 기르는 덕(德)이 있고 만물(萬物)은 낳고 기르는 정(情)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감응함이다.
‘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者, 在上雖陳感應, 唯明數事而已, 此則廣解天地之間共相感應之義.
“하늘에 근본한 자는 위에 친하고, 땅에 근본한 자는 아래에 친하며,[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라는 것은, 위에서 비록 감응을 나열함이 있으나, 오직 몇 가지 일을 밝혔을 뿐이며, 이는 곧 하늘과 땅 사이에 서로 함께 감응함의 뜻을 넓게 해석하였다.
莊氏云“天地絪縕, 和合二氣, 共生萬物.”然萬物之體, 有感於天氣偏多者, 有感於地氣偏多者.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천지(天地)의 기운이 갈무리되어 두[陰과 陽] 기운이 어울려 합해져서 함께 만물(萬物)을 낳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물(萬物)의 몸은, 하늘의 기운에 편향되어 감응함이 많이 있는 것과, 땅의 기운에 편향되어 감응함이 많은 것이 있다.
故周禮大宗伯, 有天産地産, 大司徒云“動物植物”.
그러므로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하늘의 생산(生産)과 땅의 생산(生産)이 있고, 〈대사도(大司徒)〉에 이르기를 “동물(動物)과 식물(植物)”을 말하였다.
本受氣於天者, 是動物含靈之屬, 天體運動, 含靈之物亦運動, 是親附於上也, 本受氣於地者, 是植物无識之屬, 地體凝滯, 植物亦不移動, 是親附於下也.
본래 하늘에서 기운을 받은 것은, 이 동물(動物)로 신령함을 머금은 등속인데, 천체(天體)가 운동하고 신령함을 머금은 사물 또한 운동하여, 이는 위쪽에 친하게 붙음이며, 본래 땅에서 기운을 받은 것은, 이는 의식(意識)이 없는 식물의 등속인데, 땅에 몸이 엉기어 메여서 식물 또한 움직여 옴기지 못하며, 이는 아래쪽에 친하게 붙음이다.
‘則各從其類’者, 言天地之間, 共相感應, 各從其氣類. 此類因聖人感萬物以同類, 故以同類言之.
“곧 각각 그 부류[類]를 따른다.[則各從其類]”라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함께 서로 감응하여 각각 그 기운의 부류[類]를 따름을 말함이다. 이 부류[類]는 성인(聖人)이 만물(萬物)을 가지고 같은 부류를 감응시킴을 말미암았기 때문에 같은 부류[類]를 가지고 말을 하였다.
其造化之性, 陶甄之器, 非唯同類相感, 亦有異類相感者.
그 창조하여 달라지는 본성[性]과 도공(陶工)의 질그릇 굽는 기물은, 비단 오직 같은 부류[類]가 서로 감응하지만, 또한 다른 종류가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있다.
若磁石引針, 琥珀拾芥, 蠶吐絲而商弦絶, 銅山崩而洛鍾應, 其類煩多, 難一一言也, 皆冥理自然, 不知其所以然也.
자석(磁石)이 바늘을 끌어당기고 호박(琥珀)이 지푸라기를 붙게하며, 누에가 실을 토하면서 상성(商聲)의 줄이 끊기고 동산(銅山)이 무너지면서 낙양(洛陽)의 종(鍾)이 호응함과 같은데, 그 종류가 매우 많아 하나 하나를 말하기가 어려우며, 모두 그윽한 이치가 스스로 그러함이며, 그 까닭이 그러함을 알지는 못한다.
感者, 動也, 應者, 報也, 皆先者爲感, 後者爲應.
감(感)이란 것은, 움직이고 응(應)이란 것은, 갚음이며, 모두 앞에 것에 느끼게 되면 뒤에 하는 것이 호응하게 된다.
非唯近事則相感, 亦有遠事遙相感者. 若周時獲麟, 乃爲漢高之應, 漢時黃星, 後爲曹公之兆.
오직 가까운 일만 서로 감응함이 아니고, 또한 먼 일이 멀리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있으며, 주(周)나라 시절에 기린을 잡았는데 이에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응(應)함이 되었고, 한(漢)나라 시절에 황성(黃星)은 뒤에 조공[曹公(曹操)]의 조짐이 되었음과 같다.
感應之事應, 非片言可悉, 今意在釋理, 故略擧大綱而已.
감응(感應)의 일이 호응함은, 한마디 말로 다할 수 있음이 아니며, 지금 뜻의 이치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대략 대강을 들었을 뿐이다.」
上九曰:「亢龍有悔」何謂也?子曰:「貴而无位,高而无民。
상구효(上九爻)에 말하기를 "높이 올라간 용이니 후회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무슨 말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하면서 지위가 없고, 높은데도 백성이 없으며,
【王弼 注】 下无陰也。
【왕필 주】 아래에 음(陰)이 없다.
[孔穎達 疏]正義曰:此明上九爻辭也。「子曰貴而無位」者,以上九非位而上九居之,是無位也。「高而無民」者,六爻皆無陰,是無民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상구(上九)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하면서 지위가 없고,[子曰貴而无位]"라는 것은, 상구(上九)가 지위가 아닌데도 상구(上九)가 거주를 하였으니, 이는 지위가 없음이다.
"높은데도 백성이 없으며,[高而无民]"라는 것은, 여섯 효(爻)에 모두 음(陰)이 없으니, 이는 백성이 없음이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明上九爻辭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상구(上九)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子曰貴而无位’者, 以上九非位而上九居之, 是无位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하면서 지위가 없고,[子曰貴而无位]"라는 것은, 상구(上九)가 지위가 아닌데도 상구(上九)가 거주를 하였으니, 이는 지위가 없음이다.
‘高而无民’者, 六爻皆无陰, 是无民也.
"높은데도 백성이 없으며,[高而无民]"라는 것은, 여섯 효(爻)에 모두 음(陰)이 없으니, 이는 백성이 없음이다.
賢人在下位而无輔,
현명한 사람이 아래 자리에 있으면서 도움이 없으며,
【王弼 注】 賢人雖在下而當位,不為之助。
【왕필 주】 현인이 비록 아래 자리에 있으나 마땅한 자리이니, 도움을 해 주지 않는다.
[孔穎達 疏]正義曰:賢人雖在下位,不為之輔助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현명한 사람[賢人]이 비록 아래 지위에 있으나, [상구(上九)를] 위하여 도와주려 하지 않음이다.
[孔穎達 疏]正義曰:賢人雖在下位, 不爲之輔助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현명한 사람[賢人]이 비록 아래 지위에 있으나, [상구(上九)를] 위하여 도와주려 하지 않음이다.
是以動而有悔也。」
이로써 움직이면 후회가 있음이다."라고 하셨다.
【王弼 注】 處上卦之極而不當位,故盡陳其闕也。獨立而動物莫之與矣。《乾.文言》首不論乾而先說元,下乃曰乾,何也?夫乾者統行四事者也。君子以自強不息,行此四者,故首不論乾而下曰「乾,元亨利貞」。餘爻皆說龍,至於九三獨以君子為目,何也?夫易者象也。象之所生,生於義也。有斯義,然後明之以其物,故以龍敘乾,以馬敘坤,隨其事義而取象焉。是故初九、九二,龍德皆應其義,故可論龍以明之也。至於九三「乾乾夕惕」,非龍德也,明以君子當其象矣。統而舉之,乾體皆龍,別而敘之,各隨其義。
【왕필 주】 윗 괘의 꼭대기에 처 하면서 자리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 빠진것[闕]을 모두 말했으며, 홀로 서서 움직이는 사물은 함께하는 이가 없다. 《건괘·문언(乾·文言)》에, 첫 머리에 건(乾)을 논하지 않고서 먼저 원(元)을 설명하고, 아래에 이에 건(乾)을 말했는데 어째서입니까?
대저 건(乾)이라는 것은 행하는 네가지 일을 통솔하는 것이다. 군자는 그로서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고 이 네가지 것들을 행하기 때문에 머리를 건(乾)을 논하지 않고서 아래에 말하기를 '건(乾)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했다. 나머지 효는 모두 용(龍)을 설명하고 구삼(九三)에 이르러 홀로 군자를 조목(條目)함은 무엇인가? 대저 역(易)이란 것은 상(象)이다. 상(象)이 생겨나는 것은 뜻[義]에서 생겨난다. 이 뜻이 있은 연후에 그 사물이 밝아 지기 때문에 용(龍)으로서 건괘를 펼치고 말[馬]로서 곤괘를 펼치며 그 일의 뜻[義]을 따라서 그것의 상(象)을 취한다. 이 때문에 초구(初九)와 구이(九二)는 용(龍)의 덕이 모두 그 뜻[義]에 응하기 때문에 용(龍)을 논하여서 밝아 지게 할 수 있다. 구삼(九三)에 이르러 ‘마르도록 부지런하고 저녁에도 조심한다’는 용(龍)의 덕이 아니고 군자가 그 상(象)을 마땅함으로서 밝힘이다. 거느리고서 들어주는데, 건괘의 몸체는 모두 용(龍)이며 별도로 그것을 펼침은 각자 그 뜻[義]을 따른다.
[孔穎達 疏]「是以動而有悔也」。
○正義曰:聖人設戒,居此之時不可動作也。
○注「夫乾者統行四事者也」。
○正義曰:「夫乾者統行四事者也,君子以自強不息,行此四者」,注意以「乾」為四德之主,《文言》之首,不先說「乾」而先說四德者,故自發問而釋之,以「乾」體當分無功,唯統行此四德之事。行此四德,乃是「乾」之功。故《文言》先說君子以自強不息行此四德者,故先言之,發首不論「乾」也。但能四德既備,「乾」功自成,故下始云「乾元亨利貞」。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시이동이유회야(是以動而有悔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성인(聖人)이 이러한 때에 거주하면 동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를 베풀었음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대저 건(乾)이라는 것은 행하는 네가지 일을 통솔하는 것이다.[夫乾者統行四事者也]”
○ 바른뜻[正義]을 말한다. 「“대저 건(乾)이라는 것은 행하는 네가지 일을 통솔하는 것이다. 군자는 그로서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고 이 네가지 것들을 행한다.[夫乾者 統行四事者也, 君子以自强不息 行此四者]”라고 함은, 【왕필 주(王弼 注)】의 뜻이 건(乾)을 가지고 네가지 덕[四德]의 주체로 삼았는데, 〈문언전(文言傳)〉의 첫머리에 먼저 건(乾)을 설명하지 않고 4덕(四德)을 먼저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물어서 해석을 하여, 건(乾)의 몸[體]을 가지고 공(功)이 없음에 나누어 해당시키고 오직 이 4덕(四德)의 일을 통합하여 행하였는데, 이 4덕(四德)을 행함은 바로 건(乾)의 공(功)이다.
그러므로 〈문언전(文言傳)〉에 먼저 ‘군자(君子)는 그로써 스스로 힘써 쉬지 않고, 이 4덕(四德)을 행함’이란 것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것[四德]을 먼저 말하고 첫머리에 내세워 건(乾)을 논하지 않았다.
다만 4덕(四德)이 이미 잘 갖추어지면 건(乾)의 공(功)이 스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래에 비로소 이르기를 “건(乾)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다.
[孔穎達 疏]「是以動而有悔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시이동이유회야(是以動而有悔也)까지.}
○正義曰:聖人設戒,居此之時不可動作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성인(聖人)이 이러한 때에 거주하면 동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를 베풀었음이다.
○注「夫乾者統行四事者也」。
○ 【왕필 주(王弼 注)】의 “대저 건(乾)이라는 것은 행하는 네가지 일을 통솔하는 것이다.[夫乾者統行四事者也]”
○正義(取)[曰]:‘夫乾者 統行四事者也 君子以自强不息 行此四者’, 注意以乾爲四德之主, 文言之首, 不先說乾而先說四德者, 故自發問而釋之, 以乾體當分无功, 唯統行此四德之事, 行此四德, 乃是乾之功.
○ 바른뜻[正義]을 말한다. 「“대저 건(乾)이라는 것은 행하는 네가지 일을 통솔하는 것이다. 군자는 그로서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고 이 네가지 것들을 행한다.[夫乾者 統行四事者也, 君子以自强不息 行此四者]”라고 함은, 【왕필 주(王弼 注)】의 뜻이 건(乾)을 가지고 네가지 덕[四德]의 주체로 삼았는데, 〈문언전(文言傳)〉의 첫머리에 먼저 건(乾)을 설명하지 않고 4덕(四德)을 먼저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물어서 해석을 하여, 건(乾)의 몸[體]을 가지고 공(功)이 없음에 나누어 해당시키고 오직 이 4덕(四德)의 일을 통합하여 행하였는데, 이 4덕(四德)을 행함은 바로 건(乾)의 공(功)이다.
故文言先說‘君子以自强不息, 行此四德’者. 故先言之, 發首不論乾也.
그러므로 〈문언전(文言傳)〉에 먼저 ‘군자(君子)는 그로써 스스로 힘써 쉬지 않고, 이 4덕(四德)을 행함’이란 것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것[四德]을 먼저 말하고 첫머리에 내세워 건(乾)을 논하지 않았다.
但能四德旣備, 乾功自成, 故下始云“乾元亨利貞.”
다만 4덕(四德)이 이미 잘 갖추어지면 건(乾)의 공(功)이 스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래에 비로소 이르기를 “건(乾)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다.
◎ ≪文言傳≫ 第三節
潛龍勿用,下也。見龍在田,時舍也。 終日乾乾,行事也。 或躍在淵,自試也。 飛龍在天,上治也。 亢龍有悔,窮之災也。 乾元用九,天下治也。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 함은 아래 있음이고,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은 때맞게 버림이며, 종일 마르도록 힘씀은 일을 행함이고, 혹 연못에 있으면서 뛰어오름은 스스로 시험함이며,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은 위에서 다스림이고, 높은데 용이니 후회가 있음은 끝가지 간 재앙이다. 건원(乾元)이 구(九;陽)를 씀은 천하를 다스림이다.
【王弼 注】 此一章全以人事明之也。九,陽也。陽,剛直之物也。夫能全用剛直,放遠善柔,非天下至理,未之能也。故乾元用九,則天下治也。夫識物之動,則其所以然之理,皆可知也。龍之為德,不為妄者也。潛而勿用,何乎?必窮處於下也。見而在田,必以時之通舍也。以爻為人,以位為時,人不妄動,則時皆可知也。文王明夷,則主可知矣。仲尼旅人,則國可知矣。
【왕필 주】 이 하나의 장(章)은 온전히 그로써 사람의 일을 밝힘이다. 구(九)는 양(陽)이다. 양(陽)은 굳세고 곧은 사물이다. 대저 굳세고 곧음을 온전하게 잘 쓰며, 착하고 부드러움을 멀리 추방하며, 천하의 이치에 이르지 않으면 아직 잘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건원(乾元)이 구(九;陽)를 씀은 천하를 다스림이다. 대저 만물의 움직임을 안다면 그의 그러한 이치의 까닭을 모두 알 수 있다. 용(龍)의 덕(德)함은 망령됨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잠겨있으니 쓰지 말라함은 무엇인가? 반드시 아래에 처하여 궁함이다. 나타나서 밭에 있음은 반드시 때를 통함으로써 버림이다.
효(爻)로써 사람을 삼고 자리(位)로써 때를 삼아서 사람이 망령되게 움직이지 않으면 때를 모두 알 수 있다. 문왕(文王)의 밝음이 상하였으면 주인[德]을 알 수 있고, 중니(仲尼)의 사람이 나그네되었으면 나라[德]를 알 수 있었다.
[孔穎達 疏]「潛龍勿用」至「天下治也」。○正義曰:「此一節是《文言》第三節,說六爻人事所治之義。「潛龍勿用,下也」者,言聖人於此潛龍之時,在卑下也。」見龍在田,時舍」者,舍謂通舍。九二以見龍在田,是時之通舍也。「終日乾乾,行事」者,言行此知至、知終之事也。「或躍在淵,自試」者,言聖人逼近五位,不敢果決而進,唯漸漸自試,意欲前進,遲疑不定,故云「自試」也。「飛龍在天,上治」者,言聖人居上位而治理也。「亢龍有悔,窮之災」者,言位窮而致災,災則悔也,非為大禍災也。「乾元用九,天下治」者,《易經》上稱「用九」,「用九」之文,總是「乾」德。又「乾」字不可獨言,故舉「元」德以配「乾」也。言此「乾元」用九德而天下治。九五止是一爻,觀見事狹,但云「上治」。「乾元」裛包六爻,觀見事闊,故云「天下治」也。○注「此一章全以人事」至「國可知矣」。○正義曰:「此一章全以人事明之」者,下云「陽氣潛藏」,又云「乃位乎天德」,又云「乃見天則」此一章,但云「天下治」,是皆以人事說之也。「夫能全用剛直,放遠善柔,非天下至理,未之能也」者,以」乾元用九」,六爻皆陽,是「全用剛直」。「放遠善柔」,謂放棄善柔之人。善能柔諂,貌恭心狠,使人不知其惡,識之為難。此用九純陽者,是全用剛直,更無餘陰。柔善之人,堯尚病之,故云:「非天下之至理,未之能也」。「夫識物之動,則其所以然之理,皆可知」者,此欲明在下龍潛見之義。故張氏云:「識物之動,謂龍之動也。則其所以然之理,皆可知者,謂識龍之所以潛所以見,然此之理皆可知也。」「龍之為德,不為妄者」,言龍靈異於他獸,不妄舉動,可潛則潛,可見則見,是不虛妄也。「見而在田,必以時之通舍」者,經唯云「時舍」也。注云「必以時之通舍」者,則輔嗣以通解舍,「舍」是通義也。初九潛藏不見,九二既見而在田,是時之通舍之義也。「以爻為人,以位為時」者,爻居其位,猶若人遇其時,故「文王明夷,則主可知矣」。主則時也,謂當時無道,故明傷也。「仲尼旅人,則國可知矣」,國亦時也,若見仲尼羈旅於人,則知國君無道,令其羈旅出外。引文王、仲尼者,明龍潛、龍見之義。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잠용물용(潛龍勿用)에서 천하치야(天下治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바로 〈문언전(文言傳)〉의 세 번째 절(節)인데, 여섯 효(爻)가 사람의 일을 다스리는 바의 뜻을 설명하였다.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 함은 아래 있음이고,[潛龍勿用 下也]"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이 잠용(潛龍)의 때에 낮은 지위에 있음을 말함이다.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은 때맞게 버림이며,[見龍在田 時舍]"라는 것은, ‘사(舍)’는 통(通)하여 버림을 말하며, 구이(九二)는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음으로써, 이는 통하는 때에 버림이다.
"종일 마르도록 힘씀은 일을 행함이고,[終日乾乾 行事]"라는 것은, 이는 이르름[至]을 알고 끝마침[終]의 일을 알고 행함을 말함이다.
"혹 연못에 있으면서 뛰어오름은 스스로 시험함이며,[或躍在淵 自試]"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오위(五位)와 매우 가까우니, 과감하게 결단하여 나아가지 않고 오직 점점 스스로 시험하며, 뜻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지체하고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기 때문에 ‘스스로 시험한다[自試]’라고 말하였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은 위에서 다스림이고,[飛龍在天 上治]"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윗자리에 거주하면서 이치를 다스림을 말함이다.
"높은데 용이니 후회가 있음은 끝가지 간 재앙이다.[亢龍有悔 窮之災]"라는 것은, 지위가 다하여서 재앙이 이르게 됨을 말함인데, 재앙은 곧 뉘우침이며, 큰 잘못과 재앙이 됨은 아니다.
"건원(乾元)이 구(九;陽)를 씀은 천하를 다스림이다.[乾元用九 天下治]"라는 것은, 《역경(易經)》에 상[上(上九)]을 용구(用九)라 칭하였는데, 용구(用九)의 글은 건(乾)의 덕(德)을 총괄함이며, 또 ‘건(乾)’자를 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원(元)의 덕(德)을 들어서 그로써 건(乾)에 짝하였으며, 이 건원(乾元)이 구[九;陽]의 덕(德)을 쓰면서 천하를 다스림을 말함이다.
구오(九五)는 이 한 효(爻)에 그치며 살펴 보는 일이 좁아서 다만 이르기를 ‘상치(上治)’라고 하였으며, 건원(乾元)은 여섯 효(爻)를 다 포함하므로 살펴 보는 일이 넓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하를 다스린다.[天下治也]’라고 했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차일장전이인사(此一章全以人事)로 부터 국가지의(國可知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하나의 장(章)은 온전히 그로써 사람의 일을 밝힘이다.[此一章全以人事明之]"라는 것은, 아래에 이르기를 “양(陽)의 기운이 잠기어 저장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의 덕(德)에 자리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의 법칙을 본다.”고 하였는데, 이 한 장(章)은 다만 이르기를 “천하를 다스린다.”고만 하였으니, 이는 모두 사람의 일을 가지고 설명을 하였음이다.
“대저 굳세고 곧음을 온전하게 잘 쓰며, 먼데를 놓아두고 부드러움을 선양하며, 천하의 이치에 이르지 않으면 아직 잘함은 아니다.[夫能全用剛直 放遠善柔 非天下至理 未之能也]”라는 것은, 건원(乾元)을 가지고 구[九;陽]를 쓰는데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이니, 이는 온전히 굳셈과 곧음을 쓴 것이다.
‘착하고 부드러움을 멀리 추방하며[放遠善柔]’는 착하고 부드러운는 사람을 추방하여 버림을 말한다. 착하여 부드럽고 아첨을 잘함은, 모습은 공손하나 마음이 모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악함을 알지 못하게 하니, 그것을 알기가 어렵게 함이다.
이는 구(九)의 순양(純陽)을 쓰는 자인데, 바로 굳셈과 곧음을 온전히 쓰고 다시 남은 음(陰)이 없으며, 부드럽고 착한 사람은 요(堯)임금도 오히려 병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하의 지극한 이치가 아니면 잘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대저 만물의 움직임을 안다면 그의 그러한 이치의 까닭을 모두 알 수 있다.[夫識物之動 則其所以然之理 皆可知]”라는 것은, 이는 아래에 용(龍)이 잠기어 있는데 나타남의 뜻을 밝히고자 하였음이다.
그러므로 장씨(張氏;張譏)가 이르기를 “‘사물의 움직임을 앎[識物之動]’은 용(龍)의 움직임을 말함이고, ‘그의 그러한 이치의 까닭을 모두 알 수 있다.[則其所以然之理 皆可知]’라는 것은, 용(龍)이 잠기는 까닭과 나타나는 까닭이 그러함을 아는데, 이것의 이치를 모두 알 수 있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용(龍)의 덕(德)함은 망령됨을 하는 것이 아니다.[龍之爲德 不爲妄者]”라고 함은, 용(龍)은 다른 짐승보다 달리 영특하여 거동(擧動)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잠길수 있으면 잠기고 나타날 수 있으면 나타나는데, 이는 헛되고 망령되지 않음을 말함이다.
“나타나서 밭에 있음은 반드시 때를 통함으로써 버림이다.[見而在田 必以時之通舍]”라는 것은, 경(經)에 오직 이르기를 ‘때맞게 버린다.[時舍]’라고 했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반드시 때를 통함으로써 버림이다.[必以時之通舍]’라고 한 것은, 왕보사(王輔嗣)가 통함으로써 버림[舍]을 해석하였으니, 버림[舍]은 바로 통하여[通]의 뜻이다.
초구(初九)는 잠기고 감추어 나타나지 않았는데 구이(九二)는 이미 나타나서 밭에 있으니, 이는 때를 통하여 버림의 뜻이다.
“효(爻)로써 사람을 삼고 자리(位)로써 때를 삼아서[以爻爲人 以位爲時]라는 것은, 효(爻)가 그 자리에 거주함이 오히려 사람이 그 때맞음을 만났음과 같다.
그러므로 “문왕(文王)의 밝음이 상하였으면 주인[德]을 알 수 있고,[文王明夷 則主可知矣]라고 함은, 주인이 곧 때맞음인데, 당시에 도(道)가 없었기 때문에 밝음이 상하였음을 말함이며, ”중니(仲尼)의 사람이 나그네되었으면 나라[德]를 알 수 있었다.[仲尼旅人 則國可知矣]라고 함은, 나라 또한 때맞음인데, 만약 중니(仲尼)가 남에게 나그네로 객지에 나타나면 나라의 군주가 무도(無道)해서 [중니로] 하여금 그 객지의 나그네로 밖에 나가게 했음을 알게 됨이다. 문왕(文王)과 중니(仲尼)를 인용한 것은, 용(龍)이 잠기는 것과 용(龍)이 나타나는 뜻을 밝힘이다.」
[孔穎達 疏]‘潛龍勿用’至‘天下治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잠용물용(潛龍勿用)에서 천하치야(天下治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一節, 是文言第三節, 說六爻人事所治之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바로 〈문언전(文言傳)〉의 세 번째 절(節)인데, 여섯 효(爻)가 사람의 일을 다스리는 바의 뜻을 설명하였다.
‘潛龍勿用 下也’者, 言聖人於此潛龍之時, 在卑下也.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 함은 아래 있음이고,[潛龍勿用 下也]"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이 잠용(潛龍)의 때에 낮은 지위에 있음을 말함이다.
‘見龍在田 時舍’者, 舍謂通舍, 九二以見龍在田, 是時之通舍也.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은 때맞게 버림이며,[見龍在田 時舍]"라는 것은, ‘사(舍)’는 통(通)하여 버림을 말하며, 구이(九二)는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음으로써, 이는 통하는 때에 버림이다.
‘終日乾乾 行事’者, 言行此知至知終之事也.
"종일 마르도록 힘씀은 일을 행함이고,[終日乾乾 行事]"라는 것은, 이는 이르름[至]을 알고 끝마침[終]의 일을 알고 행함을 말함이다.
‘或躍在淵 自試’者, 言聖人逼近五位, 不敢果決而進, 唯漸漸自試, 意欲前進, 遲疑不定, 故云自試也.
"혹 연못에 있으면서 뛰어오름은 스스로 시험함이며,[或躍在淵 自試]"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오위(五位)와 매우 가까이 닥치니, 과감하게 결단하여 나아가지 않고 오직 점점 스스로 시험하며, 뜻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지체하고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기 때문에 ‘스스로 시험한다[自試]’라고 말하였다.
‘飛龍在天 上治’者, 言聖人居上位而治理也.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은 위에서 다스림이고,[飛龍在天 上治]"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윗자리에 거주하면서 이치를 다스림을 말함이다.
‘亢龍有悔 窮之災’者, 言位窮而致災, 災則悔也, 非爲大禍災也.
"높은데 용이니 후회가 있음은 끝가지 간 재앙이다.[亢龍有悔 窮之災]"라는 것은, 지위가 다하여서 재앙이 이르게 됨을 말함인데, 재앙은 곧 뉘우침이며, 큰 잘못과 재앙이 됨은 아니다.
‘乾元用九 天下治’者, 易經上稱用九, 用九之文, 總是乾德, 又乾字不可獨言, 故擧元德以配乾也, 言此乾元用九德而天下治.
"건원(乾元)이 구(九;陽)를 씀은 천하를 다스림이다.[乾元用九 天下治]"라는 것은, 《역경(易經)》에 상[上(上九)]을 용구(用九)라 칭하였는데, 용구(用九)의 글은 건(乾)의 덕(德)을 총괄함이며, 또 ‘건(乾)’자를 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원(元)의 덕(德)을 들어서 그로써 건(乾)에 짝하였으며, 이 건원(乾元)이 구[九;陽]의 덕(德)을 쓰면서 천하를 다스림을 말함이다.
九五止是一爻, 觀見事狹, 但云‘上治’. 乾元總包六爻, 觀見事闊, 故云‘天下治也’.
구오(九五)는 이 한 효(爻)에 그치며 살펴 보는 일이 좁아서 다만 이르기를 ‘상치(上治)’라고 하였으며, 건원(乾元)은 여섯 효(爻)를 다 포함하므로 살펴 보는 일이 넓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하를 다스린다.[天下治也]’라고 했다.」
○注‘此一章全以人事’至‘國可知矣’
○ 【왕필 주(王弼 注)】의 “차일장전이인사(此一章全以人事)로 부터 국가지의(國可知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一章全以人事明之’者, 下云“陽氣潛藏”, 又云“乃位乎天德”, 又云“乃見天則”, 此一章, 但云“天下治”, 是皆以人事說之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하나의 장(章)은 온전히 그로써 사람의 일을 밝힘이다.[此一章全以人事明之]"라는 것은, 아래에 이르기를 “양(陽)의 기운이 잠기어 저장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의 덕(德)에 자리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의 법칙을 본다.”고 하였는데, 이 한 장(章)은 다만 이르기를 “천하를 다스린다.”고만 하였으니, 이는 모두 사람의 일을 가지고 설명을 하였음이다.
‘夫能全用剛直 放遠善柔 非天下至理 未之能也’者, 以乾元用九, 六爻皆陽, 是全用剛直.
“대저 굳세고 곧음을 온전하게 잘 쓰며, 먼데를 놓아두고 부드러움을 선양하며, 천하의 이치에 이르지 않으면 아직 잘함은 아니다.[夫能全用剛直 放遠善柔 非天下至理 未之能也]”라는 것은, 건원(乾元)을 가지고 구[九;陽]를 쓰는데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이니, 이는 온전히 굳셈과 곧음을 쓴 것이다.
放遠善柔, 謂放棄善柔之人. 善能柔諂, 貌恭心狠, 使人不知其惡, 識之爲難.
‘착하고 부드러움을 멀리 추방하며[放遠善柔]’는 착하고 부드러운는 사람을 추방하여 버림을 말한다. 착하여 부드럽고 아첨을 잘함은, 모습은 공손하나 마음이 모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악함을 알지 못하게 하니, 그것을 알기가 어렵게 함이다.
此用九純陽者, 是全用剛直, 更无餘陰, 柔善之人, 堯尙病之, 故云“非天下之至理, 未之能也.”
이는 구(九)의 순양(純陽)을 쓰는 자인데, 바로 굳셈과 곧음을 온전히 쓰고 다시 남은 음(陰)이 없으며, 부드럽고 착한 사람은 요(堯)임금도 오히려 병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하의 지극한 이치가 아니면 잘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夫識物之動 則其所以然之理 皆可知’者, 此欲明在下龍潛見之義.
“대저 만물의 움직임을 안다면 그의 그러한 이치의 까닭을 모두 알 수 있다.[夫識物之動 則其所以然之理 皆可知]”라는 것은, 이는 아래에 용(龍)이 잠기어 있는데 나타남의 뜻을 밝히고자 하였음이다.
故張氏云“‘識物之動’, 謂龍之動也, ‘則其所以然之理, 皆可知’者, 謂識龍之所以潛, 所以見然, 此之理皆可知也.”
그러므로 장씨(張氏;張譏)가 이르기를 “‘사물의 움직임을 앎[識物之動]’은 용(龍)의 움직임을 말함이고, ‘그의 그러한 이치의 까닭을 모두 알 수 있다.[則其所以然之理 皆可知]’라는 것은, 용(龍)이 잠기는 까닭과 나타나는 까닭이 그러함을 아는데, 이것의 이치를 모두 알 수 있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龍之爲德, 不爲妄者’, 言龍靈異於他獸, 不妄擧動, 可潛則潛, 可見則見, 是不虛妄也.
“용(龍)의 덕(德)함은 망령됨을 하는 것이 아니다.[龍之爲德 不爲妄者]”라고 함은, 용(龍)은 다른 짐승보다 달리 영특하여 거동(擧動)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잠길수 있으면 잠기고 나타날 수 있으면 나타나는데, 이는 헛되고 망령되지 않음을 말함이다.
‘見而在田, 必以時之通舍’者, 經唯云時舍也, 注云必以時之通舍者, 則輔嗣以通解舍, 舍是通義也.
“나타나서 밭에 있음은 반드시 때를 통함으로써 버림이다.[見而在田 必以時之通舍]”라는 것은, 경(經)에 오직 이르기를 ‘때맞게 버린다.[時舍]’라고 했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반드시 때를 통함으로써 버림이다.[必以時之通舍]’라고 한 것은, 왕보사(王輔嗣)가 통함으로써 버림[舍]을 해석하였으니, 버림[舍]은 바로 통하여[通]의 뜻이다.
初九潛藏不見, 九二旣見而在田, 是時之通舍之義也.
초구(初九)는 잠기고 감추어 나타나지 않았는데 구이(九二)는 이미 나타나서 밭에 있으니, 이는 때를 통하여 버림의 뜻이다.
‘以爻爲人 以位爲時’者, 爻居其位, 猶若人遇其時.
“효(爻)로써 사람을 삼고 자리(位)로써 때를 삼아서[以爻爲人 以位爲時]라는 것은, 효(爻)가 그 자리에 거주함이 오히려 사람이 그 때맞음을 만났음과 같다.
故‘文王明夷 則主可知矣’, 主則時也, 謂當時无道, 故明傷也. ‘仲尼旅人 則國可知矣’, 國亦時也, 若見仲尼羇旅於人, 則知國君无道, 令其羇旅出外. 引文王仲尼者, 明龍潛龍見之義.
그러므로 “문왕(文王)의 밝음이 상하였으면 주인[德]을 알 수 있고,[文王明夷 則主可知矣]라고 함은, 주인이 곧 때맞음인데, 당시에 도(道)가 없었기 때문에 밝음이 상하였음을 말함이며, ”중니(仲尼)의 사람이 나그네되었으면 나라[德]를 알 수 있었다.[仲尼旅人 則國可知矣]라고 함은, 나라 또한 때맞음인데, 만약 중니(仲尼)가 남에게 나그네로 객지에 나타나면 나라의 군주가 무도(無道)해서 [중니로] 하여금 그 객지의 나그네로 밖에 나가게 했음을 알게 됨이다. 문왕(文王)과 중니(仲尼)를 인용한 것은, 용(龍)이 잠기는 것과 용(龍)이 나타나는 뜻을 밝힘이다.」
◎ ≪文言傳≫ 第四節
潛龍勿用,陽氣潛藏。
見龍在田,天下文明。
終日乾乾,與時偕行。
잠긴 용(龍)이니 쓰지 말라 함은, 양(陽)의 기운이 잠기어 감추어짐이다.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음은, 천하의 문화가 밝아짐이다. 종일 마르도록 힘씀은, 때에 더블어 함께 행함이다.
【王弼 注】 與天時俱不息。
【왕필 주】 하늘의 때와 더블어 갖추어 쉬지 않음이다.
[孔穎達 疏]「潛龍勿用」至「與時偕行」。
○正義曰:此一節是《文言》第四節,明六爻天氣之義。「天下文明」者,陽氣在田,始生萬物,故天下有文章而光明也。「與時偕行」者,此以天道釋爻象也。所以九三乾乾不息,終日自戒者,同於天時,生物不息,言「與時偕行」也。偕,俱也。諸儒以為建辰之月,萬物生長,不有止息,與天時而俱行。若以不息言之,是建寅之月,三陽用事,三當生物之初,生物不息。同於天時生物不息,故言「與時偕行」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잠용물용(潛龍勿用)에서 여시해행(與時偕行)까지.}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바로 〈문언전(文言傳)〉의 네 번째 절(節)인데, 여섯 효(爻) 천기(天氣)의 뜻을 밝혔음이다.
"천하 문화가 밝아짐[天下文明]"이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밭에 있어서 처음으로 만물을 낳기 때문에 천하에 문화가 빛남이 있어서 빛이 밝음이다.
"때에 더블어 함께 행함이다.[與時偕行]"라는 것은, 이는 하늘의 도(道)로써 효(爻)의 모습[象]을 해석하였음이다.
구삼(九三)이 마르도록 힘써서 쉬지 않고 종일토록 스스로 경계하는 것은, 하늘의 때[時]에 만물을 낳음을 쉬지 않음과 한가지인 까닭에 ‘때에 더블어 함께 행함이다.[與時偕行]’라고 말하였으며, ‘해(偕, 함께 해)’는 함께함이다.
여러 유학자들은 “건진(建辰)의 달[3월]에 만물이 나고 자라며 그치고 쉼이 없어서 하늘의 때에 더블어서 함께 행한다.”고 여겼는데, 만일 쉬지 않음을 가지고 말을 하였으니 이는 건인(建寅)의 달[정월]이니 세 양(陽)이 일에 쓰인다.
삼(三;陽)은 마땅히 사물을 낳는 처음인데, 사물 낳음을 쉬지 않으며, 하늘의 때에 함께 사물을 낳음을 쉬지 않기 때문에 “때와 더블어 함께 행한다.”라고 말하였다.」
[孔穎達 疏]‘潛龍勿用’至‘與時偕行’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잠용물용(潛龍勿用)에서 여시해행(與時偕行)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一節, 是文言第四節, 明六爻天氣之義.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바로 〈문언전(文言傳)〉의 네 번째 절(節)인데, 여섯 효(爻) 천기(天氣)의 뜻을 밝혔음이다.
‘天下文明’者, 陽氣在田, 始生萬物, 故天下有文章而光明也.
"천하 문화가 밝아짐[天下文明]"이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밭에 있어서 처음으로 만물을 낳기 때문에 천하에 문화가 빛남이 있어서 빛이 밝음이다.
‘與時偕行’者, 此以天道釋爻象也.
"때에 더블어 함께 행함이다.[與時偕行]"라는 것은, 이는 하늘의 도(道)로써 효(爻)의 모습[象]을 해석하였음이다.
所以九三乾乾不息, 終日自戒者, 同於天時生物不息, 言與時偕行也, 偕, 俱也.
구삼(九三)이 마르도록 힘써서 쉬지 않고 종일토록 스스로 경계하는 것은, 하늘의 때[時]에 만물을 낳음을 쉬지 않음과 한가지인 까닭에 ‘때에 더블어 함께 행함이다.[與時偕行]’라고 말하였으며, ‘해(偕, 함께 해)’는 함께함이다.
諸儒以爲“建辰之月, 萬物生長, 不有止息, 與天時而俱行.” 若以不息言之, 是建寅之月, 三陽用事.
여러 유학자들은 “건진(建辰)의 달[3월]에 만물이 나고 자라며 그치고 쉼이 없어서 하늘의 때에 더블어서 함께 행한다.”고 여겼는데, 만일 쉬지 않음을 가지고 말을 하였으니 이는 건인(建寅)의 달[정월]이니 세 양(陽)이 일에 쓰인다.
三當生物之初, 生物不息, 同於天時生物不息, 故言與時偕行也.
삼(三;陽)은 마땅히 사물을 낳는 처음인데, 사물 낳음을 쉬지 않으며, 하늘의 때에 함께 사물을 낳음을 쉬지 않기 때문에 “때와 더블어 함께 행한다.”라고 말하였다.」
或躍在淵,乾道乃革。
飛龍在天,乃位乎天德。
亢龍有悔,與時偕極。
혹 연못에 있으면서 뛰어오름은 건(乾)의 도가 이에 변혁(變革)함이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은, 이에 하늘의 덕이 자리함이다. 높은 용이니 후회가 있음은, 때가 더블어 함께 다했음이다.
【王弼 注】 與時運俱終極。
【왕필 주】 더블어 때의 운을 갖춤이 끝가지 다했음이다.
[孔穎達 疏]「或躍在淵」至「與時偕極」。
○正義曰:「乾道乃革」者,去下體,入上體,故云「乃革」也。「乃位乎天德」者,位當天德之位,言九五陽居於天,照臨廣大,故云「天德」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혹약재연(或躍在淵)에서 여시해극(與時偕極)까지.}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의 도가 이에 변혁(變革)함이다.[乾道乃革]"라는 것은, 아래 몸[體]을 떠나 위의 몸[體]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에 바뀐다.[乃革]’라고 하였다.
"이에 하늘의 덕(德)이 자리함이다.[乃位乎天德]"라는 것은, 자리가 마땅히 천덕(天德)의 자리인데, 구오(九五)의 양(陽)이 하늘에 거주하며 비추고 임함이 광대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덕(天德)’이라고 하였음이다.」
[孔穎達 疏]‘或躍在淵’至‘與時偕極’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혹약재연(或躍在淵)에서 여시해극(與時偕極)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乾道乃革’者, 去下體, 入上體, 故云乃革也.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의 도가 이에 변혁(變革)함이다.[乾道乃革]"라는 것은, 아래 몸[體]을 떠나 위의 몸[體]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에 바뀐다.[乃革]’라고 하였다.
‘乃位乎天德’者, 位當天德之位, 言九五陽居於天, 照臨廣大, 故云天德也.
"이에 하늘의 덕(德)이 자리함이다.[乃位乎天德]"라는 것은, 자리가 마땅히 천덕(天德)의 자리인데, 구오(九五)의 양(陽)이 하늘에 거주하며 비추고 임함이 광대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덕(天德)’이라고 하였음이다.」
乾元用九,乃見天則。
건원(乾元)과 용구(用九)는 이에 하늘의 법칙이 보인다.
【王弼 注】 此一章全說天氣以明之也。九,剛直之物,唯乾體能用之,用純剛以觀天,天則可見矣。
【왕필 주】 이 한 장(章)은 온전히 하늘의 기운으로서 밝혀 나감을 설명했다. 구(九)는 굳세고 곧은 사물인데 오직 건(乾)의 몸을 잘 사용하고 순수한 굳셈을 사용하여서 하늘을 보면 하늘의 법칙이 보일 수 있다.
[孔穎達 疏]正義曰:「乃見天則」者,陽是剛亢之物,能用此純剛,唯天乃然,故云「乃見天則」。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에 하늘의 법칙이 보인다.[乃見天則]라는 것은, 양(陽)은 바로 굳셈[剛]이 높은 사물인데, 이 순수한 굳셈을 잘 사용하니 오직 하늘이 이에 그러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의 법칙이 보인다.”라고 하였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乃見天則’者, 陽是剛亢之物, 能用此純剛, 唯天乃然, 故云乃見天則.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에 하늘의 법칙이 보인다.[乃見天則]라는 것은, 양(陽)은 바로 굳셈[剛]이 높은 사물인데, 이 순수한 굳셈을 잘 사용하니 오직 하늘이 이에 그러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에 하늘의 법칙이 보인다.”라고 하였다.」
◎ ≪文言傳≫ 第五節
乾元者,始而亨者也。利貞者,性情也。
건(乾)의 원(元)이란 것은, 시작하여서 올리는[亨] 것이다. 이로움[利]과 곧음[貞]이란 것은, 본성[性]과 마음[情]이다.
【王弼 注】 不為乾元,何能通物之始?不性其情,何能久行其正?是故始而亨者,必乾元也;利而正者,必性情也。
【왕필 주】 건(乾)이 원(元)을 하지 않고서, 어찌 사물의 시작에 잘 통하겠는가? 그 마음[情]이 본성이 아니라면, 어찌 그 바름을 오래 잘 행하겠는가? 이 때문에 시작하여서 올리는[亨] 것은, 반드시 건(乾)의 원(元)이고, 이롭고 바른 것은 반드시 본성[性]과 마음[情]이다.
[孔穎達 疏]「乾元者」至「性情也」。○正義曰:「此一節是第五節,復明上初章及「乾」四德之義也。「乾元者,始而亨者也」,以「乾」非自當分有德,以元、亨、利、貞為德。「元」是四德之首,故夫子恒以「元」配「乾」而言之,欲見乾、元、相將之義也。以有「乾」之元德,故能為物之始而亨通也。此解元、亨二德也。「利貞者,性情也」者,所以能利益於物而得正者,由性制於情也。○注「不為乾元」至「必性情也」。○正義曰:「乾」之元氣,其德廣大,故能遍通諸物之始。若餘卦元德,雖能始生萬物,德不周普,故云「不為乾元,何能通物之始」?其實「坤元」亦能通諸物之始,以此《文言》論「乾元」之德,故注連言「乾元」也。「不性其情,何能久行其正」者,性者天生之質,正而不邪;情者性之欲也。言若不能以性制情,使其情如性,則不能久行其正。其六爻發揮之義,案:《略例。云「爻者,言乎變者也」。故合散屈伸,與體相乖,形躁好靜,質柔愛剛,體與情反,質與原違。是爻者所以明情,故六爻發散,旁通萬物之情。輔嗣之意,以初為無用之地,上為盡末之境。其居位者唯二、三、四、五,故《繫辭》唯論此四爻。初、上雖無正位,統而論之,爻亦始末之位,故《乾o彖》云「六位時成」。二、四為陰位,陰居為得位,陽居為失位;三、五為陽位,陽居為得位,陰居為失位。《略例》云:「陽之所求者陰也,陰之所求者陽也」。一與四,二與五,三與上,若一陰一陽為有應,若俱陰俱陽為無應。此其六爻之大略,其義具於《繫辭》,於此略言之。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건원자(乾元者)에서 성정야(性情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다섯 번째 절(節)인데, 위의 첫 번째 장(章)과 건(乾)괘 네 가지 덕(德)의 뜻을 다시 밝혔음이다.
"건(乾)의 원(元)이란 것은, 시작하여서 올리는[亨] 것이다.[乾元者 始而亨者也]"라고 함은, 건(乾)으로써 스스로 마땅히 나누는 덕(德)이 있음이 아니고,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써 덕(德)을 삼음이다.
원(元)은 이 사덕(四德)의 첫 머리이기 때문에 공자[夫子]께서 항상 원(元)을 건(乾)에 짝하여서 말씀하셨으니, 건(乾)과 원(元)이 서로 장차 가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셨음이다.
그로써 건(乾)의 원덕(元德)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시작이 잘 되어서 올라가[亨] 통(通)하는데, 이는 원(元)과 형(亨)의 두 가지 덕(德)을 풀이하였음이다.
"이로움[利]과 곧음[貞]이란 것은, 본성[性]과 마음[情]이다.[利貞者 性情也]"라는 것은, 사물에 이로움을 잘 더하면서 바름을 얻는 것의 까닭은, 본성[性]을 말미암아 마음[情]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불위건원(不爲乾元)에서 필성정야(必性情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의 원(元) 기운은, 그 덕(德)이 넓고 크기 때문에 능히 여러 사물의 시작에 두루 잘 통한다.
남어지 괘(卦)의 원덕(元德)은, 비록 만물을 처음 잘 낳음은 같으나 덕(德)이 두루 넓지 않기 때문에 이르기를 “건(乾)이 원(元)을 하지 않고서, 어찌 사물의 시작에 잘 통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실제는 곤(坤)의 원(元)도 또한 여러 사물의 시작에 통하지만 이로써 문언전(文言傳)에 건(乾)의 원덕(元德)을 논하였기 때문에 왕필 주(王弼 注)에 건(乾)과 원(元)을 이어 말하였다.
"그 마음[情]이 본성이 아니라면, 어찌 그 바름을 오래 잘 행하겠는가?[不性其情 何能久行其正]"라는 것의, 성(性)이란 것은, 하늘이 낳은 바탕인데 바로잡아서 간사하지 않음이고, 정(情)이란 것은, 본성[性]의 하고자 함[欲]이다.
만약 본성[性]으로써 마음[情]을 잘 제어하지 않고, 그 마음[情]으로 하여금 본성[性]과 같이 한다면 그 바름을 오랫동안 잘하지 못함을 말함이다.
그 여섯 효(六爻)가 발휘(發揮)하는 뜻은, 《주역약례(周易略例)》에 살펴보면 이르기를 “효(爻)라는 것은, 변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합하고 흩어지며 굽히고 폄이 몸[體]과 더블어 서로 드리워져서 모양[形]이 조급하면 고요함을 좋아하고 본질[質]이 부드러우면 굳셈을 좋아하며, 몸[體]과 마음[情]이 반대이면 본질[質]이 원함을 어긴다.”라고 하였다.
이 효(爻)라는 것은, 마음[情]을 밝히기 때문에 여섯 효(六爻)가 만물의 마음[情]을 발산하여 사방으로 통하는 까닭이다.
왕필[王輔嗣]의 뜻은, 초(初)효로써는 땅을 사용함이 없음으로 하고 상(上)효에 그어 경계를 하지 못하며, 그 자리에 거주하는 것은, 오직 2효(二爻)‧3효(三爻)‧4효(四爻)‧5효(五爻)뿐이기 때문에 〈계사전(繫辭傳)〉에 오직 이 네가지 효(爻)를 논하였다.
초(初)와 상(上)은 비록 바른 지위가 없으나 통합하여 논하면 이 효(爻) 또한 시작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건괘(乾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여섯 자리가 제때에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2효(二爻)와 4효(四爻)는 음(陰)의 자리가 되는데, 음(陰)이 거주하면 자리를 얻게 되고 양(陽)이 거주하면 자리를 잃게 되며, 3효(三爻)와 5효(五爻)는 양(陽)의 자리가 되는데, 양(陽)이 거주하면 자리를 얻게 되고 음(陰)이 거주하면 자리를 잃게 된다.
《주역약례(周易略例)》에 이르기를 “양(陽)이 구하는 바라는 것은 음(陰)이고, 음(陰)이 구하는 바라는 것은 양(陽)이다.”라고 하였는데, 1효(一爻)와 4효(四爻), 2효(二爻)와 5효(五爻), 3효(三爻)와 상효(上爻)가, 만약 하나가 음(陰)이고 하나가 양(陽)이면 응(應)이 있음이 되며, 만약 모두 음(陰)이거나 모두 양(陽)이면 응(應)이 없음이 된다.
이는 그 여섯 효(爻)의 대략인데, 그 뜻이 〈계사전(繫辭傳)〉의 모두를 여기에서는 간략히 말을 하였다.」
[孔穎達 疏]‘乾元者’至‘性情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건원자(乾元者)에서 성정야(性情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一節, 是第五節, 復明上初章及乾四德之義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다섯 번째 절(節)인데, 위의 첫 번째 장(章)과 건(乾)괘 네 가지 덕(德)의 뜻을 다시 밝혔음이다.
‘乾元者, 始而亨者也’, 以乾非自當分有德, 以元亨利貞爲德.
"건(乾)의 원(元)이란 것은, 시작하여서 올리는[亨] 것이다.[乾元者 始而亨者也]"라고 함은, 건(乾)으로써 스스로 마땅히 나누는 덕(德)이 있음이 아니고,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써 덕(德)을 삼음이다.
元是四德之首, 故夫子恒以元配乾而言之, 欲見乾元相將之義也.
원(元)은 이 사덕(四德)의 첫 머리이기 때문에 공자[夫子]께서 항상 원(元)을 건(乾)에 짝하여서 말씀하셨으니, 건(乾)과 원(元)이 서로 장차 가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셨음이다.
以有乾之元德, 故能爲物之始而亨通也, 此解元亨二德也.
그로써 건(乾)의 원덕(元德)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시작이 잘 되어서 올라가[亨] 통(通)하는데, 이는 원(元)과 형(亨)의 두 가지 덕(德)을 풀이하였음이다.
‘利貞者, 性情也’者, 所以能利益於物而得正者, 由性制於情也.
"이로움[利]과 곧음[貞]이란 것은, 본성[性]과 마음[情]이다.[利貞者 性情也]"라는 것은, 사물에 이로움을 잘 더하면서 바름을 얻는 것의 까닭은, 본성[性]을 말미암아 마음[情]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注‘不爲乾元’至‘必性情也’
○ 【왕필 주(王弼 注)】의 불위건원(不爲乾元)에서 필성정야(必性情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乾之元氣, 其德廣大, 故能徧通諸物之始.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의 원(元) 기운은, 그 덕(德)이 넓고 크기 때문에 능히 여러 사물의 시작에 두루 잘 통한다.
若餘卦元德, 雖能始生萬物, 德不周普, 故云“不爲乾元, 何能通物之始.” 其實坤元亦能通諸物之始, 以此文言論乾元之德, 故注連言乾元也.
남어지 괘(卦)의 원덕(元德)은, 비록 만물을 처음 잘 낳음은 같으나 덕(德)이 두루 넓지 않기 때문에 이르기를 “건(乾)이 원(元)을 하지 않고서, 어찌 사물의 시작에 잘 통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실제는 곤(坤)의 원(元)도 또한 여러 사물의 시작에 통하지만 이로써 문언전(文言傳)에 건(乾)의 원덕(元德)을 논하였기 때문에 왕필 주(王弼 注)에 건(乾)과 원(元)을 이어 말하였다.
‘不性其情 何能久行其正’者, 性者, 天生之質, 正而不邪, 情者, 性之欲也.
"그 마음[情]이 본성이 아니라면, 어찌 그 바름을 오래 잘 행하겠는가?[不性其情 何能久行其正]"라는 것의, 성(性)이란 것은, 하늘이 낳은 바탕인데 바로잡아서 간사하지 않음이고, 정(情)이란 것은, 본성[性]의 하고자 함[欲]이다.
言若不能以性制情, 使其情如性, 則不能久行其正.
만약 본성[性]으로써 마음[情]을 잘 제어하지 않고, 그 마음[情]으로 하여금 본성[性]과 같이 한다면 그 바름을 오랫동안 잘하지 못함을 말함이다.
其六爻發揮之義, 案略例云“爻者, 言乎變者也. 故合散屈伸, 與體相垂, 形躁好靜, 質柔愛剛, 體與情反, 質與願違.”
그 여섯 효(六爻)가 발휘(發揮)하는 뜻은, 《주역약례(周易略例)》에 살펴보면 이르기를 “효(爻)라는 것은, 변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합하고 흩어지며 굽히고 폄이 몸[體]과 더블어 서로 드리워져서 모양[形]이 조급하면 고요함을 좋아하고 본질[質]이 부드러우면 굳셈을 좋아하며, 몸[體]과 마음[情]이 반대이면 본질[質]이 원함을 어긴다.”라고 하였다.
是爻者, 所以明情, 故六爻, 發散旁通, 萬物之情.
이 효(爻)라는 것은, 마음[情]을 밝히기 때문에 여섯 효(六爻)가 만물의 마음[情]을 발산하여 사방으로 통하는 까닭이다.
輔嗣之意, 以初爲无用之地, 上爲盡末之境, 其居位者, 唯二‧三‧四‧五, 故繫辭唯論此四爻.
왕필[王輔嗣]의 뜻은, 초(初)효로써는 땅을 사용함이 없음으로 하고 상(上)효에 그어 경계를 하지 못하며, 그 자리에 거주하는 것은, 오직 2효(二爻)‧3효(三爻)‧4효(四爻)‧5효(五爻)뿐이기 때문에 〈계사전(繫辭傳)〉에 오직 이 네가지 효(爻)를 논하였다.
初‧上雖无正位, 統而論之, 爻亦始末之位, 故乾彖云“六位時成.”
초(初)와 상(上)은 비록 바른 지위가 없으나 통합하여 논하면 이 효(爻) 또한 시작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건괘(乾卦)의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여섯 자리가 제때에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二‧四爲陰位, 陰居爲得位, 陽居爲失位. 三‧五爲陽位, 陽居爲得位, 陰居爲失位.
2효(二爻)와 4효(四爻)는 음(陰)의 자리가 되는데, 음(陰)이 거주하면 자리를 얻게 되고 양(陽)이 거주하면 자리를 잃게 되며, 3효(三爻)와 5효(五爻)는 양(陽)의 자리가 되는데, 양(陽)이 거주하면 자리를 얻게 되고 음(陰)이 거주하면 자리를 잃게 된다.
略例云“陽之所求者, 陰也, 陰之所求者, 陽也.” 一與四, 二與五, 三與上, 若一陰一陽, 爲有應, 若俱陰俱陽, 爲无應.
《주역약례(周易略例)》에 이르기를 “양(陽)이 구하는 바라는 것은 음(陰)이고, 음(陰)이 구하는 바라는 것은 양(陽)이다.”라고 하였는데, 1효(一爻)와 4효(四爻), 2효(二爻)와 5효(五爻), 3효(三爻)와 상효(上爻)가, 만약 하나가 음(陰)이고 하나가 양(陽)이면 응(應)이 있음이 되며, 만약 모두 음(陰)이거나 모두 양(陽)이면 응(應)이 없음이 된다.
此其六爻之大略, 其義具於繫辭, 於此略言之.
이는 그 여섯 효(爻)의 대략인데, 그 뜻이 〈계사전(繫辭傳)〉의 모두를 여기에서는 간략히 말을 하였다.」
乾,始能以美利利天下,不言所利,大矣哉!
大哉,乾乎!
剛健中正,純綷精也。
六爻發揮,旁通情也。
時乘六龍,以禦天也。
雲行雨施,天下平也。
건(乾)의 시작은, 아름다운 이로움[利]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잘 하고서도,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으니 크도다!
크도다, 건(乾)이여!
굳셈이 가운데를 바로잡아 건전(健全)하니, 순수(純粹)하여 깨끗하고, 여섯 효(爻)가 발휘함은 두루 정(情)에 통한다.
때맞게 여섯 용(龍)을 타고 그로써 하늘을 재어(制御)하니, 구름이 흘러서 비가 내리니 천하가 태평해진다.
[孔穎達 疏]「乾始,能以美利」至「天下平也」。○正義曰:「乾始,能以美利利天下,不言所利,大矣哉」者,此復說始而亨、利、貞之義。「乾始」,謂乾能始生萬物,解「元」也。「能以美利利天下」,解「利」也。謂能以生長美善之道,利益天下也。不復說亨、貞者,前文「亨」既連始,「貞」又連利,舉始舉利,則通包亨、貞也。「不言所利,大矣哉」者,若《坤卦》云「利牝馬之貞」,及「利建侯」,「利涉大川」,皆言所利之事。此直云「利貞」,不言所利之事,欲見無不利也。非唯止一事而已故云:「不言所利大矣哉其實此利為無所不利此貞亦無所不貞是乾德大也,「大哉乾乎,剛健中正,純粹精」者,此正論乾德,不兼通「元」也。故直云「大哉乾乎,剛健中正,謂純陽剛健,其性剛強,其行勁健。「中」謂二與五也,「正」謂五與二也,故云「剛健中正」。六爻俱陽,是純粹也。純粹不雜,是精靈,故云「純粹精也」。「六爻發揮,旁通情」者,發謂發越也,揮謂揮散也,言六爻發越揮散,旁通萬物之情也。「時乘六龍,以御天」者,重取《乾o彖》之文,以讚美此乾之義。「雲行雨施,天下平」者,言天下普得其利而均平不偏陂。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건시능이미이(乾始能以美利)에서 천하평야(天下平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의 시작은, 아름다운 이로움[利]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잘하고서도,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으니 크도다![乾始 能以美利利天下 不言所利 大矣哉]"라는 것은, 이는 시작하여 형.이.정(亨利貞)의 뜻을 다시 설명하였음이다.
건(乾)의 시작은, 건(乾)이 만물을 처음으로 잘 낳음을 말하고 원(元)을 풀이함이며, 아름다운 이로움[利]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잘함은, 이로움[利]을 풀이하였으며, 아름다운 착한 도(道)를 낳아 기름으로써 천하에 이로움[利]을 잘 더함을 말하였다.
형(亨)과 정(貞)을 다시 설명하지 않은 것은, 앞 글은 형(亨)이 이미 시작함[始]을 이었고 정(貞) 또한 이로움[利]에 이었으니, 시작함을 들고 이로움을 들었으며, 즉 형(亨)과 정(貞)을 통합하여 포괄하였다.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으니 크도다![不言所利 大矣哉]"라는 것은, 곤괘(坤卦)에서 이르기를 “암 말의 곧음이 이롭다.”고 하고, “후(侯)를 세움이 이롭다.”고 하며,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라고 했는데, 모두 이로운 바의 일을 말했으나, 이를 곧바로 이르기를 “이정(利貞)”을 말하고, 이로운 바의 일을 말하지는 않았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고 오직 한 가지 일에 그칠 뿐만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았으니 위대하다.”라고 하였음이다.
그 실제는 이 이로움[利]이 이롭지 않은 바가 없게 되며, 이 곧음[貞] 또한 곧지 않은 바가 없는데, 이는 건(乾)의 덕(德)이 큼이다.
"크도다, 건(乾)이여! 굳셈이 가운데를 바로잡아 건전(健全)하니, 순수(純粹)하여 깨끗하고,[大哉乾乎 剛健中正 純粹精]"라는 것은, 이는 건(乾)의 덕(德)을 바르게 논함인데, 원(元)을 겸하여 통함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이르기를 “위대하다, 건(乾)이여! 굳셈이 가운데를 바로잡아 건전(健全)하다.”라고 하였으며, 순양(純陽)이 굳세고 건전(健全)하여 그 본성이 굳세고 강하며 그 행실이 굳세고 건전(健全)함을 말함이다.
‘중(中)’은 2효(二爻)와 5효(五爻)의 관계를 말하며, ‘정(正)’은 5효(五爻)와 2효(二爻)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굳셈이 가운데를 바로잡아 건전(健全)하다.”라고 하였다.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이니 바로 순수(純粹)함인데, 순수하여 섞이지 않음은 바로 깨끗한 신령(神靈)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순수하여 깨끗[精]하다.”라고 하였다.
"여섯 효(爻)가 발휘함은 두루 정(情)에 통한다.[六爻發揮 旁通情]"라는 것은, ‘발(發)’은 펼쳐 넘어감을 말하고 ‘휘(揮, 휘두를 휘)’는 휘둘러 흩음을 말하며, 여섯 효(爻)가 펼쳐 넘어가서 휘둘러 흩어지니 만물의 정(情)에 두루 통함을 말함이다.
"때맞게 여섯 용(龍)을 타고 그로써 하늘을 재어(制御)하니,[時乘六龍 以御天]"라는 것은, 건괘(乾卦)〈단전(彖傳)〉의 글을 거듭 취하여 그로써 이 건(乾)의 뜻을 찬미하였음이다.
"구름이 흘러서 비가 내리니 천하가 태평해진다.[雲行雨施 天下平]"라는 것은, 천하가 널리 그 이로움(利)을 얻어서 고르게 화평하고 치우쳐 기울지 않음을 말함이다.」
[孔穎達 疏]‘乾始能以美利’至‘天下平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건시능이미이(乾始能以美利)에서 천하평야(天下平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乾始 能以美利利天下 不言所利 大矣哉’者, 此復說始而亨利貞之義.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건(乾)의 시작은, 아름다운 이로움[利]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잘하고서도,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으니 크도다![乾始 能以美利利天下 不言所利 大矣哉]"라는 것은, 이는 시작하여 형.이.정(亨利貞)의 뜻을 다시 설명하였음이다.
乾始謂乾能始生萬物, 解元也, 能以美利利天下, 解利也, 謂能以生長美善之道利益天下也.
건(乾)의 시작은, 건(乾)이 만물을 처음으로 잘 낳음을 말하고 원(元)을 풀이함이며, 아름다운 이로움[利]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잘함은, 이로움[利]을 풀이하였으며, 아름다운 착한 도(道)를 낳아 기름으로써 천하에 이로움[利]을 잘 더함을 말하였다.
不復說亨貞者, 前文亨旣連始, 貞又連利, 擧始擧利, 則通包亨貞也.
형(亨)과 정(貞)을 다시 설명하지 않은 것은, 앞 글은 형(亨)이 이미 시작함[始]을 이었고 정(貞) 또한 이로움[利]에 이었으니, 시작함을 들고 이로움을 들었으며, 즉 형(亨)과 정(貞)을 통합하여 포괄하였다.
‘不言所利, 大矣哉’者, 若坤卦云“利牝馬之貞”及“利建侯”, “利涉大川”, 皆言所利之事, 此直云“利貞”, 不言所利之事, 欲見无不利也, 非唯止一事而已, 故云“不言所利 大矣哉.”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으니 크도다![不言所利 大矣哉]"라는 것은, 곤괘(坤卦)에서 이르기를 “암 말의 곧음이 이롭다.”고 하고, “후(侯)를 세움이 이롭다.”고 하며,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라고 했는데, 모두 이로운 바의 일을 말했으나, 이를 곧바로 이르기를 “이정(利貞)”을 말하고, 이로운 바의 일을 말하지는 않았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고 오직 한 가지 일에 그칠 뿐만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았으니 위대하다.”라고 하였음이다.
其實此利爲无所不利, 此貞亦无所不貞, 是乾德大也.
그 실제는 이 이로움[利]이 이롭지 않은 바가 없게 되며, 이 곧음[貞] 또한 곧지 않은 바가 없는데, 이는 건(乾)의 덕(德)이 큼이다.
‘大哉乾乎 剛健中正 純粹精’者, 此正論乾德, 不兼通元也, 故直云“大哉乾乎, 剛健中正”, 謂純陽剛健, 其性剛强, 其行勁健.
"크도다, 건(乾)이여! 굳셈이 가운데를 바로잡아 건전(健全)하니, 순수(純粹)하여 깨끗하고,[大哉乾乎 剛健中正 純粹精]"라는 것은, 이는 건(乾)의 덕(德)을 바르게 논함인데, 원(元)을 겸하여 통함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이르기를 “위대하다, 건(乾)이여! 굳셈이 가운데를 바로잡아 건전(健全)하다.”라고 하였으며, 순양(純陽)이 굳세고 건전(健全)하여 그 본성이 굳세고 강하며 그 행실이 굳세고 건전(健全)함을 말함이다.
中謂二與五也, 正謂五與二也, 故云“剛健中正”.
‘중(中)’은 2효(二爻)와 5효(五爻)의 관계를 말하며, ‘정(正)’은 5효(五爻)와 2효(二爻)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굳셈이 가운데를 바로잡아 건전(健全)하다.”라고 하였다.
六爻俱陽, 是純粹也, 純粹不雜, 是精靈, 故云“純粹精”也.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이니 바로 순수(純粹)함인데, 순수하여 섞이지 않음은 바로 깨끗한 신령(神靈)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순수하여 깨끗[精]하다.”라고 하였다.
‘六爻發揮 旁通情’者, 發謂發越也, 揮謂揮散也, 言六爻發越揮散, 旁通萬物之情也.
"여섯 효(爻)가 발휘함은 두루 정(情)에 통한다.[六爻發揮 旁通情]"라는 것은, ‘발(發)’은 펼쳐 넘어감을 말하고 ‘휘(揮, 휘두를 휘)’는 휘둘러 흩음을 말하며, 여섯 효(爻)가 펼쳐 넘어가서 휘둘러 흩어지니 만물의 정(情)에 두루 통함을 말함이다.
‘時乘六龍 以御天’者, 重取乾彖之文, 以贊美此乾之義.
"때맞게 여섯 용(龍)을 타고 그로써 하늘을 재어(制御)하니,[時乘六龍 以御天]"라는 것은, 건괘(乾卦)〈단전(彖傳)〉의 글을 거듭 취하여 그로써 이 건(乾)의 뜻을 찬미하였음이다.
‘雲行雨施 天下平’者, 言天下普得其利, 而均平不偏陂.
"구름이 흘러서 비가 내리니 천하가 태평해진다.[雲行雨施 天下平]"라는 것은, 천하가 널리 그 이로움(利)을 얻어서 고르게 화평하고 치우쳐 기울지 않음을 말함이다.」
◎ ≪文言傳≫ 第六節
君子以成德為行,日可見之行也。
潛之為言也,隱而未見,行而未成,是以君子弗用也。
군자(君子)는 덕(德)을 이룸으로써 행실을 하는데,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행실이다.
감추어서 말을 함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하였는데도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이로써 군자는 쓰지 않는다.
[孔穎達 疏]「君子以成德為行」至「君子弗用也」。
○正義曰:此一節是《文言》第六節,更復明六爻之義。此節明初九爻辭。周氏云:「上第六節'乾元者始而亨者也',是廣明'乾'與'四德'之義,此'君子以成德為行',亦是第六節,明六爻之義,總屬第六節,不更為第七節。」義或當然也。「君子以成德為行」者,明初九「潛龍」之義,故先開此語也。言君子之人,當以成就道德為行,令其德行彰顯,使人日可見其德行之事,此君子之常也,不應潛隱。所以今日潛者,以時未可見,故須潛也。「潛之為言也,隱而未見,行而未成」,此夫子解「潛龍」之義。此經中「潛龍」之言,是德之幽隱而未宣見,所行之行未可成就。「是以君子弗用」者,德既幽隱,行又未成,是君子於時不用,以逢眾陰,未可用也。周氏云:「德出於己,在身內之物,故云:'成';行被於人,在外之事,故云為'行'。」下又即云「行而未成」,是行亦稱成。周氏之說,恐義非也。「成德為行」者,言君子成就道德以為其行。其「成德為行」,未必文相對。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군자이성덕위행(君子以成德爲行)에서 군자불용야(君子弗用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문언전(文言傳)〉의 여섯 번째 절(節)로 여섯 효(爻)의 뜻을 고쳐서 다시 밝혔는데, 이 절(節)은 초구(初九)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주씨[周氏(주광정:周宏正)]가 이르기를 “위의 여섯 번째 절(節)의 ‘건원(乾元)이라는 것은, 시작하여 통함이다.’는 것인데, 이는 건(乾)과 네 가지 덕(德)의 뜻을 확대하여 밝혔으며, 이 군자(君子)가 그로써 덕(德)을 이루고 행실로 삼으며 또한 여섯 번째 절(節)은 여섯 효(爻)의 뜻을 밝혔음이다.”라고 하여, 모두 여섯 번째 절(節)에 소속시키고 고쳐서 일곱 번째 절(節)로 삼지 않았으니, 뜻이 혹 그러함이 마땅하다.
“군자(君子)는 덕(德)을 이룸으로써 행실을 하는데[君子以成德爲行]”라는 것은, 초구(初九)의 잠긴 용(龍)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먼저 이 말을 열었다.
군자(君子)인 사람은 마땅히 도덕(道德)을 성취함으로써 행실로 삼아서 그 덕행으로 하여금 밝게 드러나도록 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날마다 그 덕행의 일을 볼 수 있게 함을 말하였는데, 이는 군자의 떳떳함이며 잠기고 숨어서 응하지 않음은, 오늘날 잠기는 것은 그로써 때가 아직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모름지기 잠기는 까닭이다.
“감추어서 말을 함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하였는데도 이루어지지 않더라도,[潛之爲言也 隱而未見 行而未成]”라고 함은, 이는 공자[夫子]께서 잠긴 용(龍)의 뜻을 풀었다.
이 경(經)의 안에 잠용(潛龍)이란 말은, 바로 덕(德)이 그윽하게 숨어서 베풀어 드러나지 않았으니, 행하는 바의 행실은 아직 성취할 수가 없음이다.
“이로써 군자는 쓰지 않는다.[是以君子弗用]”라는 것은, 덕(德)이 이미 그윽하게 숨겨지고 행실이 또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군자가 이 때에는 사용하지 않는데 여러 음(陰)을 만나서 아직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주씨(周氏:周宏正)가 이르기를 “덕(德)은 자기에서 나오고 몸 안에 사물로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성(成)’이라 하였고, 행실[行]은 남에게 입혀지고 밖에 일로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행실을 한다.[爲行]’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아래에 또 곧 이르기를 “행하였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行而未成]”고 하였는데, 이는 행함[行]이 또한 이루어짐을 칭하였으며, 주씨(周氏)의 설명은 아마도 뜻이 잘못된 듯하다.
“덕(德)을 이루어 행실을 한다.[成德爲行]”라는 것은, 군자가 도덕(道德)을 성취하여 그로써 그 행실로 삼음을 말하는데, 그 덕(德)을 이루어 행실[行]로 삼음은 반드시 글의 서로 대구(對句)함은 아니다.」
[孔穎達 疏]‘君子以成德爲行’至‘君子弗用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군자이성덕위행(君子以成德爲行)에서 군자불용야(君子弗用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一節, 是文言第六節, 更復明六爻之義, 此節明初九爻辭.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 한 절(節)은 〈문언전(文言傳)〉의 여섯 번째 절(節)로 여섯 효(爻)의 뜻을 고쳐서 다시 밝혔는데, 이 절(節)은 초구(初九)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周氏云“上第六節'乾元者始而亨'者也, 是廣明乾與四德之義, 此君子以成德爲行, 亦是第六節, 明六爻之義.”, 總屬第六節, 不更爲第七節, 義或當然也.
주씨[周氏(주광정:周宏正)]가 이르기를 “위의 여섯 번째 절(節)의 ‘건원(乾元)이라는 것은, 시작하여 통함이다.’는 것인데, 이는 건(乾)과 네 가지 덕(德)의 뜻을 확대하여 밝혔으며, 이 군자(君子)가 그로써 덕(德)을 이루고 행실로 삼으며 또한 여섯 번째 절(節)은 여섯 효(爻)의 뜻을 밝혔음이다.”라고 하여, 모두 여섯 번째 절(節)에 소속시키고 고쳐서 일곱 번째 절(節)로 삼지 않았으니, 뜻이 혹 그러함이 마땅하다.
‘君子以成德爲行’者, 明初九潛龍之義, 故先開此語也.
“군자(君子)는 덕(德)을 이룸으로써 행실을 하는데[君子以成德爲行]”라는 것은, 초구(初九)의 잠긴 용(龍)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먼저 이 말을 열었다.
言君子之人, 當以成就道德爲行, 令其德行彰顯, 使人日可見其德行之事, 此君子之常也, 不應潛隱, 所以今日潛者, 以時未可見, 故須潛也.
군자(君子)인 사람은 마땅히 도덕(道德)을 성취함으로써 행실로 삼아서 그 덕행으로 하여금 밝게 드러나도록 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날마다 그 덕행의 일을 볼 수 있게 함을 말하였는데, 이는 군자의 떳떳함이며 잠기고 숨어서 응하지 않음은, 오늘날 잠기는 것은 그로써 때가 아직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모름지기 잠기는 까닭이다.
‘潛之爲言也 隱而未見 行而未成’, 此夫子解潛龍之義.
“감추어서 말을 함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하였는데도 이루어지지 않더라도,[潛之爲言也 隱而未見 行而未成]”라고 함은, 이는 공자[夫子]께서 잠긴 용(龍)의 뜻을 풀었다.
此經中潛龍之言, 是德之幽隱而未宣見, 所行之行, 未可成就.
이 경(經)의 안에 잠용(潛龍)이란 말은, 바로 덕(德)이 그윽하게 숨어서 베풀어 드러나지 않았으니, 행하는 바의 행실은 아직 성취할 수가 없음이다.
‘是以君子弗用’者, 德旣幽隱, 行又未成, 是君子於時不用, 以逢衆陰, 未可用也.
“이로써 군자는 쓰지 않는다.[是以君子弗用]”라는 것은, 덕(德)이 이미 그윽하게 숨겨지고 행실이 또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군자가 이 때에는 사용하지 않는데 여러 음(陰)을 만나서 아직 쓸 수 없기 때문이다.
周氏云“德出於己, 在身內之物, 故云成. 行被於人, 在外之事, 故云爲行.” 下又卽云“行而未成.” 是行亦稱成, 周氏之說, 恐義非也.
주씨(周氏:周宏正)가 이르기를 “덕(德)은 자기에서 나오고 몸 안에 사물로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성(成)’이라 하였고, 행실[行]은 남에게 입혀지고 밖에 일로 있기 때문에 이르기를 ‘행실을 한다.[爲行]’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아래에 또 곧 이르기를 “행하였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行而未成]”고 하였는데, 이는 행함[行]이 또한 이루어짐을 칭하였으며, 주씨(周氏)의 설명은 아마도 뜻이 잘못된 듯하다.
‘成德爲行’者, 言君子成就道德, 以爲其行, 其成德爲行, 未必文相對.
“덕(德)을 이루어 행실을 한다.[成德爲行]”라는 것은, 군자가 도덕(道德)을 성취하여 그로써 그 행실로 삼음을 말하는데, 그 덕(德)을 이루어 행실[行]로 삼음은 반드시 글의 서로 대구(對句)함은 아니다.」
君子,學以聚之、問以辯之、
군자는 배움으로써 그것을 모으고, 물어서 분별을 하며,
【王弼 注】 以君德而處下體,資納於物者也。
【왕필 주】 군주의 덕(德)을 가지고서 몸을 아래에 처하여, 물자를 사물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孔穎達 疏]正義曰:此復明九二之德。「君子學以聚之」者,九二從微而進,未在君位,故且習學以畜其德。「問以辯之」者,學有未了,更詳問其事,以辯決於疑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다시 구2(九二)의 덕(德)을 밝혔음이다.
“군자는 배움으로써 그것을 모으고,[君子學以聚之]”라는 것은, 구2(九二)가 은미함을 따라 나아가서 아직 군주의 지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또 익히고 배움으로써 그 덕(德)을 쌓음이다.
“물어서 분별을 하며,[問以辯之]”라는 것은, 배움에 아직 마치지 못함이 있으면 그 일을 자세히 물어서 고치고 그로써 의심스러움을 분별하고 결단함이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復明九二之德.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다시 구2(九二)의 덕(德)을 밝혔음이다.
‘君子學以聚之’者, 九二從微而進, 未在君位, 故且習學以畜其德.
“군자는 배움으로써 그것을 모으고,[君子學以聚之]”라는 것은, 구2(九二)가 은미함을 따라 나아가서 아직 군주의 지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또 익히고 배움으로써 그 덕(德)을 쌓음이다.
‘問以辯之’者, 學有未了, 更詳問其事, 以辯決於疑也.
“물어서 분별을 하며,[問以辯之]”라는 것은, 배움에 아직 마치지 못함이 있으면 그 일을 자세히 물어서 고치고 그로써 의심스러움을 분별하고 결단함이다.」
寬以居之、仁以行之。
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君德也。
너그러움으로써 거주를 하고, 어짊으로써 행동을 한다. ≪주역(周易)≫에 말하였다.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함은 군주의 덕(德)이다.
[孔穎達 疏]正義曰:「寬以居之」者,當用寬裕之道,居處其位也。「仁以行之」者,以仁恩之心,行之被物。「《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君德」者,既陳其德於上,然後引《易》本文以結之。《易》之所云是君德,「寬以居之,仁以行之」是也。但有君德,未是君位。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너그러움으로써 거주를 하고,[寬以居之]”라는 것은, 마땅히 너그럽고 넉넉한 도(道)를 사용하여 그 지위에 거주하는 곳이다.
“어짊으로써 행동을 한다.[仁以行之]”라는 것은, 어짊[仁]으로써 은혜로운 마음으로 행하여 사물에게 입혀주는 것이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라고 함은 군주의 덕(德)이다.[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라는 것은, 이미 그 덕(德)은 위에서 서술하고, 그러한 뒤에 《주역(周易)》의 본문을 인용하여 그로써 맺은 것이다.
《주역(周易)》의 이 군주의 덕(德)을 일러준 바는, 너그러움[寬]으로써 거주를 함과 어짊[仁]으로써 행함이 이것이다. 다만 군주의 덕(德)이 있지만, 아직 이 군주의 지위는 아니다.」
[孔穎達 疏]【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寬以居之’者, 當用寬裕之道, 居處其位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너그러움으로써 거주를 하고,[寬以居之]”라는 것은, 마땅히 너그럽고 넉넉한 도(道)를 사용하여 그 지위에 거주하는 곳이다.
‘仁以行之’者, 以仁恩之心行之被物.
“어짊으로써 행동을 한다.[仁以行之]”라는 것은, 어짊[仁]으로써 은혜로운 마음으로 행하여 사물에게 입혀주는 것이다.
‘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者, 旣陳其德於上, 然後引易本文以結之.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라고 함은 군주의 덕(德)이다.[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라는 것은, 이미 그 덕(德)은 위에서 서술하고, 그러한 뒤에 《주역(周易)》의 본문을 인용하여 그로써 맺은 것이다.
易之所云是君德, 寬以居之, 仁以行之, 是也. 但有君德, 未是君位.
《주역(周易)》의 이 군주의 덕(德)을 일러준 바는, 너그러움[寬]으로써 거주를 함과 어짊[仁]으로써 행함이 이것이다. 다만 군주의 덕(德)이 있지만, 아직 이 군주의 지위는 아니다.」
九三, 重剛而不中,
上不在天,下不在田。
故乾乾,因其時而惕,雖危无咎矣。
구삼효(九三爻)는 굳셈이 거듭하면서 중(中)이 아니며, 위로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마르도록 노력하고 그 때를 말미암아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孔穎達 疏]「九三」至「無咎矣」。
○正義曰:此明九三爻辭。上之初九、九二皆豫陳其德於上,不發首云初九、九二,此九三、九四,則發首先言九三、九四;其九五全不引《易》文,上九則發首云「亢之為言」也。上下不為例者,夫子意在釋經,義便則言,以潛見須言其始,故豫張本於上。三、四俱言「重剛不中」,恐其義同,故並先云爻位並重剛不中之事。九五前章已備,故不復引《易》,但云「大人」也。上九亦前章備顯,故此直言「亢之為言」也。案:初九云「潛之為言」,上爻云「亢之為言」,獨二爻云「言」者,褚氏以初、上居無位之地,故稱言也;其餘四爻是有位,故不云「言」,義或然也。「重剛」者,上下俱陽,故「重剛」也。「不中」者,不在二、五之位,故「不中」也。「上不在天」,謂非五位;「下不在田」,謂非二位也。「故乾乾因其時而惕,雖危無咎矣」者,居危之地,以「乾乾夕惕」,戒懼不息,得「無咎」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이(九三)에서 무구의(无咎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3(九三)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위의 초구(初九)와 구2(九二)는 모두 미리 그 덕(德)을 위에서 서술(敍述)하고 초구(初九)와 구2(九二)를 첫머리에 펴서 일러주지 않았는데, 이 구3(九三)과 구4(九四)는 곧 첫머리에 먼저 펴서 구3(九三)과 구4(九四)를 말하였고, 구5(九五)는 온전히 《주역(周易)》의 글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상구(上九)는 첫머리에 펴서 이르기를 “높이 올라갔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위아래를 선례(先例)로 삼지 않는 것은, 공자[夫子]의 뜻이 경문(經文)에 해석되어 있어서 옳은 편이니 곧 말하였으며, 잠겨있음[潛]과 나타남[見]으로써 비로소 그 처음을 말하기 때문에 미리 위에서 근본을 베풀었다.
3효(三爻)와 4효(四爻)는 모두 “굳셈이 거듭하면서 중(中)의 자리가 아니며[重剛不中]”라고 말함은, 그 뜻이 같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나란히 먼저 이르기를 “효(爻)의 자리가 모두 거듭 굳세지만 가운데[中]의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구5(九五)는 앞 장(章)에 이미 갖추어졌기 때문에 다시 《주역(周易)》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다만 대인(大人)이라고 말하였고, 상구(上九) 또한 앞 장(章)에 갖추어 드러냈기 때문에 여기서는 곧바로 말하기를 “높이 올라갔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초구(初九)에 이르기를 “잠겨있음을 말하고[潛之爲言]”라고 하였으며, 상효(上爻)에 이르기를 “높이 올라갔음을 말한다.[亢之爲言]”라고 하여 홀로 두가지 효(爻)에만 ‘언(言)’을 일러준 것은, 저씨[褚氏:褚仲都]가 그로써 “초효(初爻)와 상효(上爻)는 거주하는 지위의 땅이 없기 때문에 ‘언(言)’을 칭하였으며, 나머지 네 개의 효(爻)는 이 지위가 있기 때문에 ‘언(言)’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는데, 옳음이 혹 그럴 듯하다.
“굳셈이 거듭함[重剛]”이라는 것은, 위아래가 모두 양(陽)이기 때문에 굳셈이 거듭함이다. “중(中)이 아니며[不中]”라는 것은, 2효(二爻)와 5효(五爻)의 지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부중(不中)이다.
“위로 하늘에 있지 않고[上不在天]”라고 함은, 5효(五爻)의 지위가 아님을 말하였다.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음[下不在田]”이라 함은, 2효(二爻)의 자리가 아님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마르도록 노력하고 그 때를 말미암아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더라도 허물이 없다.[故乾乾因其時而惕 雖危无咎矣]”라는 것은, 위태로운 땅에 거주하지만 마르도록 힘써서 저녁까지도 두려워함으로써 경계하고 두려워함을 쉬지 않으면 허물이 없음을 얻게된다.」
[孔穎達 疏]‘九三’至‘无咎矣’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이(九三)에서 무구의(无咎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明九三爻辭.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3(九三)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上之初九‧九二, 皆豫陳其德於上, 不發首云初九‧九二, 此九三‧九四, 則發首先言九三‧九四, 其九五全不引易文, 上九則發首云“亢之爲言也”.
위의 초구(初九)와 구2(九二)는 모두 미리 그 덕(德)을 위에서 서술(敍述)하고 초구(初九)와 구2(九二)를 첫머리에 펴서 일러주지 않았는데, 이 구3(九三)과 구4(九四)는 곧 첫머리에 먼저 펴서 구3(九三)과 구4(九四)를 말하였고, 구5(九五)는 온전히 《주역(周易)》의 글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상구(上九)는 첫머리에 펴서 이르기를 “높이 올라갔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上下不爲例者, 夫子意在釋經, 義便則言, 以潛‧見, 須言其始, 故豫張本於上.
위아래를 선례(先例)로 삼지 않는 것은, 공자[夫子]의 뜻이 경문(經文)에 해석되어 있어서 옳은 편이니 곧 말하였으며, 잠겨있음[潛]과 나타남[見]으로써 비로소 그 처음을 말하기 때문에 미리 위에서 근본을 베풀었다.
三‧四俱言重剛不中, 恐其義同, 故竝先云爻位幷重剛不中之事.
3효(三爻)와 4효(四爻)는 모두 “굳셈이 거듭하면서 중(中)의 자리가 아니며[重剛不中]”라고 말함은, 그 뜻이 같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나란히 먼저 이르기를 “효(爻)의 자리가 모두 거듭 굳세지만 가운데[中]의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九五前章已備, 故不復引易, 但云大人也. 上九亦前章備顯, 故此直言“亢之爲言也”.
구5(九五)는 앞 장(章)에 이미 갖추어졌기 때문에 다시 《주역(周易)》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다만 대인(大人)이라고 말하였고, 상구(上九) 또한 앞 장(章)에 갖추어 드러냈기 때문에 여기서는 곧바로 말하기를 “높이 올라갔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案, 初九云“潛之爲言”, 上爻云“亢之爲言”, 獨二爻云言者, 褚氏以“初‧上居无位之地, 故稱言也, 其餘四爻是有位, 故不云言.” 義或然也.
살펴보건대, 초구(初九)에 이르기를 “잠겨있음을 말하고[潛之爲言]”라고 하였으며, 상효(上爻)에 이르기를 “높이 올라갔음을 말한다.[亢之爲言]”라고 하여 홀로 두가지 효(爻)에만 ‘언(言)’을 일러준 것은, 저씨[褚氏:褚仲都]가 그로써 “초효(初爻)와 상효(上爻)는 거주하는 지위의 땅이 없기 때문에 ‘언(言)’을 칭하였으며, 나머지 네 개의 효(爻)는 이 지위가 있기 때문에 ‘언(言)’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는데, 옳음이 혹 그럴 듯하다.
‘重剛’者, 上下俱陽, 故重剛也. ‘不中’者, 不在二‧五之位, 故不中也.
“굳셈이 거듭함[重剛]”이라는 것은, 위아래가 모두 양(陽)이기 때문에 굳셈이 거듭함이다. “중(中)이 아니며[不中]”라는 것은, 2효(二爻)와 5효(五爻)의 지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부중(不中)이다.
‘上不在天’, 謂非五位. ‘下不在田’, 謂非二位也.
“위로 하늘에 있지 않고[上不在天]”라고 함은, 5효(五爻)의 지위가 아님을 말하였다.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음[下不在田]”이라 함은, 2효(二爻)의 자리가 아님을 말함이다.
‘故乾乾因其時而惕 雖危无咎矣’者, 居危之地, 以乾乾夕惕, 戒懼不息, 得无咎也.
“그러므로 마르도록 노력하고 그 때를 말미암아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더라도 허물이 없다.[故乾乾因其時而惕 雖危无咎矣]”라는 것은, 위태로운 땅에 거주하지만 마르도록 힘써서 저녁까지도 두려워함으로써 경계하고 두려워함을 쉬지 않으면 허물이 없음을 얻게된다.」
九四重剛而不中,上不在天,下不在田,中不在人,故或之。或之者,疑之也,故无咎。
구사효(九四爻)는 굳셈이 거듭하면서 중(中)의 자리가 아니며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으며 가운데 사람으로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혹(或)여 한다. 혹(或)여 하는 것은 의심을 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孔穎達 疏]「九四」至「故無咎正義」。曰:此明九四爻辭也。其「重剛不中,上不在天,下不在田」,並與九三同也。「中不在人」者,三之與四,俱為人道。但人道之中,人下近於地,上遠於天,九三近二,是下近於地,正是人道,故九三不云「中不在人」。九四則上近於天,下遠於地,非人所處,故特云「中不在人」。「故或之」者,以其上下無定,故心或之也。「或之者,疑之也」者,此夫子釋經「或」字。經稱「或」是疑惑之辭,欲進欲退,猶豫不定,故疑之也。九三中雖在人,但位卑近下,向上為難,故危惕,其憂深也。九四則陽德漸盛,去五彌近,前進稍易,故但疑惑,憂則淺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4(九四)에서 고무구(故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4(九四)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그 “굳셈이 거듭하면서 중(中)의 자리가 아니며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으며[重剛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라고 함은, 나란히 구3(九三)과 같다.
“가운데 사람으로 있지 못함[中不在人]”이라는 것은, 3효(三爻)가 4효(四爻)와 더블어 모두 사람의 도(道)가 되지만, 다만 인도(人道)의 가운데인데 사람이 아래로 땅에 가깝고 위로 하늘에서 멀며, 구3(九三)은 2효(二爻)에 가까우니, 이는 아래로 땅에 가까우며 바로 이 인도(人道)이기 때문에 구3(九三)은 ‘가운데 사람으로 있지 못함[中不在人]’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구4(九四)는 곧 위로 하늘에 가깝고 아래로는 땅에서 멀며, 사람이 처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이르기를 ‘가운데 사람으로 있지 못한다.[中不在人]’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혹(或)함[故或之]”라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오르고 내림에 일정함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의혹을 함이다.
“혹(或)여 하는 것은 의심을 함이다.[或之者 疑之也]”라는 것은, 이는 공자[夫子]께서 경문(經文)의 혹(或)자를 해석하였다.
경문(經文)에 ‘혹(或)’을 칭하였음은, 바로 의혹을 하는 말인데, 나아가고자 하고 물러가고자 함이 오히려 미리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을 함이다.
구3(九三)은 가운데이고 비록 사람에 있으나 다만 지위가 낮고 아래에 가까워서 위쪽를 향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위태로움에 조심하고 그 근심이 깊다. 구4(九四)는 곧 양(陽)의 덕(德)이 점점 성대하고 5효(五爻)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서 앞으로 나아감이 다소 쉽기 때문에 다만 의혹하였지만 근심은 곧 얕은 것이다.」
[孔穎達 疏]‘九四’至‘故无咎’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4(九四)에서 고무구(故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明九四爻辭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4(九四)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其‘重剛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 竝與九三同也.
그 “굳셈이 거듭하면서 중(中)의 자리가 아니며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으며[重剛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라고 함은, 나란히 구3(九三)과 같다.
‘中不在人’者, 三之與四, 俱爲人道, 但人道之中, 人下近於地, 上遠於天, 九三近二, 是下近於地, 正是人道, 故九三不云中不在人.
“가운데 사람으로 있지 못함[中不在人]”이라는 것은, 3효(三爻)가 4효(四爻)와 더블어 모두 사람의 도(道)가 되지만, 다만 인도(人道)의 가운데인데 사람이 아래로 땅에 가깝고 위로 하늘에서 멀며, 구3(九三)은 2효(二爻)에 가까우니, 이는 아래로 땅에 가까우며 바로 이 인도(人道)이기 때문에 구3(九三)은 ‘가운데 사람으로 있지 못함[中不在人]’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九四則上近於天, 下遠於地, 非人所處, 故特云中不在人.
구4(九四)는 곧 위로 하늘에 가깝고 아래로는 땅에서 멀며, 사람이 처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이르기를 ‘가운데 사람으로 있지 못한다.[中不在人]’라고 하였다.
‘故或之’者, 以其上下无定, 故心或之也.
“그러므로 혹(或)함[故或之]”라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오르고 내림에 일정함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의혹을 함이다.
‘或之者 疑之也’者, 此夫子釋經或字.
“혹(或)여 하는 것은 의심을 함이다.[或之者 疑之也]”라는 것은, 이는 공자[夫子]께서 경문(經文)의 혹(或)자를 해석하였다.
經稱或, 是疑惑之辭, 欲進欲退, 猶豫不定, 故疑之也.
경문(經文)에 ‘혹(或)’을 칭하였음은, 바로 의혹을 하는 말인데, 나아가고자 하고 물러가고자 함이 오히려 미리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을 함이다.
九三中雖在人, 但位卑近下, 向上爲難, 故危惕, 其憂深也. 九四則陽德漸盛, 去五彌近, 前進稍易, 故但疑惑, 憂則淺也.
구3(九三)은 가운데이고 비록 사람에 있으나 다만 지위가 낮고 아래에 가까워서 위쪽를 향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위태로움에 조심하고 그 근심이 깊다. 구4(九四)는 곧 양(陽)의 덕(德)이 점점 성대하고 5효(五爻)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서 앞으로 나아감이 다소 쉽기 때문에 다만 의혹하였지만 근심은 곧 얕은 것이다.」
夫大人者,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先天而天弗違,後天而奉天時,天且弗違,而況於人乎?況於鬼神乎?
무릇 대인(大人)이란 자는 천지(天地)와 더블어 그 덕(德)을 합(合)하고, 일월(日月)과 더블어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四時)와 더블어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鬼神)과 더블어 그 길흉(吉凶)을 합한다. 하늘에 먼저하더라도 하늘이 어기지 않으며, 하늘보다 뒤에 하면 천시(天時)를 받들고 하늘 조차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일까, 하물며 귀신에게 있어서 이겠는가?
[孔穎達 疏]「夫大人者」至「況於鬼神乎」。
○正義曰:此明九五爻辭。但上節明大人與萬物相感,此論大人之德,無所不合,廣言所合之事。「與天地合其德」者,莊氏云:「謂覆載也」。「與日月合其明」者,謂照臨也。「與四時合其序」者,若賞以春夏,刑以秋冬之類也。「與鬼神合其吉凶」者,若福善禍淫也。「先天而天弗違」者,若在天時之先行事,天乃在後不違,是天合大人也。「後天而奉天時」者,若在天時之後行事,能奉順上天,是大人合天也。「天且弗違,而況於人乎,況於鬼神乎」者,夫子以天且不違,遂明大人之德,言尊而遠者尚不違,況小而近者可有違乎?況於人乎?況於鬼神乎?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부대인자(夫大人者)에서 황어귀신호(況於鬼神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5(九五)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다만 위의 절(節)은 대인(大人)이 만물과 더블어 서로 감응함을 밝혔는데, 이는 대인(大人)의 덕(德)이 부합(符合)하지 않는 바 없음을 논하였으며 넓게 합(合)하는 바의 일을 말함이다.
“천지(天地)와 더블어 그 덕(德)을 합(合)하고,[與天地合其德]”라는 것은,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일월(日月)과 더블어 그 밝음을 합하며,[與日月合其明]”라는 것은, 밝게 임함을 말함이다. “사시(四時)와 더블어 그 차례를 합하고,[與四時合其序]”라는 것은, 봄과 여름에 상(賞)을 주고 가을과 겨울에는 베어내는 부류와 같음이다.
“귀신(鬼神)과 더블어 그 길흉(吉凶)을 합한다.[與鬼神合其吉凶]”라는 것은, 선(善)함에는 복(福)을 주고 악(惡)함에는 재앙[禍]을 내림과 같음이다.
“하늘에 먼저하더라도 하늘이 어기지 않으며,[先天而天弗違]”라는 것은, 천시(天時)의 앞에 있는 일을 행하는데도 하늘이 이에 뒤에 있으면서 어기지 않음과 같은데, 이는 하늘이 대인(大人)에게 부합(符合)함이다.
“하늘보다 뒤에 하면 천시(天時)를 받들고[後天而奉天時]”라는 것은, 천시(天時)의 뒤에 있으면서 일을 행하여 위쪽 하늘을 잘 받듦과 같은데, 이는 대인(大人)이 하늘에 부합(符合)함이다.
“하늘 조차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일까, 하물며 귀신에게 있어서 이겠는가?[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라는 것은, 공자[夫子]께서 ‘하늘 조차 어기지 않음’을 가지고 드디어 대인(大人)의 덕(德)을 밝히셨으며, ‘높으면서 먼 것[하늘]도 오히려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작고 가까운 것이 어길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며, 하물며 귀신에 있어서 이겠는가?’라고 말씀하셨음이다.」
[孔穎達 疏]‘夫大人者’至‘況於鬼神乎’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부대인자(夫大人者)에서 황어귀신호(況於鬼神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明九五爻辭.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구5(九五)의 효사(爻辭)를 밝혔다.
但上節, 明大人與萬物相感, 此論大人之德无所不合, 廣言所合之事.
다만 위의 절(節)은 대인(大人)이 만물과 더블어 서로 감응함을 밝혔는데, 이는 대인(大人)의 덕(德)이 부합(符合)하지 않는 바 없음을 논하였으며 넓게 합(合)하는 바의 일을 말함이다.
‘與天地合其德’者, 莊氏云“謂覆載也.”
“천지(天地)와 더블어 그 덕(德)을 합(合)하고,[與天地合其德]”라는 것은,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줌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與日月合其明’者, 謂照臨也. ‘與四時合其序’者, 若賞以春夏, 刑以秋冬之類也. ‘與鬼神合其吉凶’者, 若福善禍淫也.
“일월(日月)과 더블어 그 밝음을 합하며,[與日月合其明]”라는 것은, 밝게 임함을 말함이다. “사시(四時)와 더블어 그 차례를 합하고,[與四時合其序]”라는 것은, 봄과 여름에 상(賞)을 주고 가을과 겨울에는 베어내는 부류와 같음이다.
“귀신(鬼神)과 더블어 그 길흉(吉凶)을 합한다.[與鬼神合其吉凶]”라는 것은, 선(善)함에는 복(福)을 주고 악(惡)함에는 재앙[禍]을 내림과 같음이다.
‘先天而天弗違’者, 若在天時之先行事, 天乃在後不違, 是天合大人也.
“하늘에 먼저하더라도 하늘이 어기지 않으며,[先天而天弗違]”라는 것은, 천시(天時)의 앞에 있는 일을 행하는데도 하늘이 이에 뒤에 있으면서 어기지 않음과 같은데, 이는 하늘이 대인(大人)에게 부합(符合)함이다.
‘後天而奉天時’者, 若在天時之後行事, 能奉順上天, 是大人合天也.
“하늘보다 뒤에 하면 천시(天時)를 받들고[後天而奉天時]”라는 것은, 천시(天時)의 뒤에 있으면서 일을 행하여 위쪽 하늘을 잘 받듦과 같은데, 이는 대인(大人)이 하늘에 부합(符合)함이다.
‘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者, 夫子以天且不違, 遂明大人之德, 言尊而遠者, 尙不違, 況小而近者, 可有違乎, 況於人乎, 況於鬼神乎.
“하늘 조차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일까, 하물며 귀신에게 있어서 이겠는가?[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라는 것은, 공자[夫子]께서 ‘하늘 조차 어기지 않음’을 가지고 드디어 대인(大人)의 덕(德)을 밝히셨으며, ‘높으면서 먼 것[하늘]도 오히려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작고 가까운 것이 어길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며, 하물며 귀신에 있어서 이겠는가?’라고 말씀하셨음이다.」
亢之為言也,知進而不知退,知存而不知亡,知得而不知喪。其唯聖人乎,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其唯聖人乎!
높이 올라감[亢]의 말을 하면, 나아감은 알면서 물러남을 알지 못하고, 존재[存]함은 알면서 없어짐[亡]은 알지 못하며, 얻음은 알면서 잃음은 알지 못함이다. 오직 성인(聖人)이라면,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알면서 그 올바름을 잃지 않는 자인데, 그는 오직 성인(聖人)이 겠지?
[孔穎達 疏]「亢之為言也」至「其唯聖人乎」。○正義曰:此明上九之義也。「知進而不知退,知存而不知亡,知得而不知喪」者,言此上九所以亢極有悔者,正由有此三事。若能三事備知,雖居上位,不至於「亢」也。此設誡辭。莊氏云:「進退據心,存亡據身,得喪據位。」「其唯聖人乎,知進退存亡」者,言唯聖人乃能「知進退存亡」也。何不云得喪者,得喪輕於存亡,舉重略輕也。「而不失其正者,其唯聖人乎」者,聖人非但只知進退存亡,又能不失其正道,其唯聖人乎!此經再稱「其唯聖人乎」者,上稱「聖人」為「知進退存亡」發文,下稱「其唯聖人乎」者,為「不失其正」發文,言「聖人」非但「知進退存亡」,又能「不失其正」,故再發「聖人」之文也。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부대인자(夫大人者)에서 황어귀신호(況於鬼神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상구(上九)의 뜻을 밝혔다.
“나아감은 알면서 물러남을 알지 못하고, 존재함[存]은 알면서 없어짐[亡]은 알지 못하며, 얻음은 알면서 잃음은 알지 못함이다.[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라는 것은, 이는 상구(上九)가 높이 끝까지 올라가[亢極]서 뉘우침이 있는 것의 까닭은 바로 이 세 가지 일을 말미암았기 때문임을 말함이다.
만약 세 가지 일을 잘 갖추어 안다면 비록 높은 지위에 거주하더라도 높이오름[亢]에 이르지는 않으며, 이는 경계하는 말을 베풀었음이다.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나아가고 물러남은 마음에 근거하고, 존재[存]함과 없어짐[亡]은 몸을 근거했으며, 어음과 잃음은 자리를 근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오직 성인(聖人)이라면,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안다[其唯聖人乎 知進退存亡]”라는 것은, 오직 성인(聖人)이라야 이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存]하고 없어짐[亡]을 잘 앎을 말함이다.
어찌하여 얻음과 잃은 것은 일러주지 않았는가? 얻음과 잃음[得喪]은 존재[存]하고 없어짐[亡]보다 가벼우니, 무거움을 거론하고 가벼운 것을 생략하였다.
“그 올바름을 잃지 않는 자인데, 그는 오직 성인(聖人)이 겠지?[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라는 것은, 성인(聖人)은 단지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알 뿐만 아니며, 또 그 바른 도(道)를 잘 잃지 않으니, 그는 오직 성인(聖人) 이겠지?
이 경(經)에 재차 칭하여 ‘그는 오직 성인(聖人)이 겠지?[其唯聖人乎]’라고 한 것은, 위에서 칭한 성인(聖人)은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알게 되어서 글을 썼고, 아래에서 칭한 ‘그는 오직 성인(聖人)이 겠지?[其唯聖人乎]’라고 한 것은, 그 바름을 잃지 않기 위하여 글을 쓴 것이며, 성인(聖人)은 다만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알 뿐만이 아니고, 또 그 바름을 잘 잃지 않음을 말하였기 때문에 두 번 성인(聖人)이라 글을 썼다.」
[孔穎達 疏]‘亢之爲言也’至‘其唯聖人乎’
【공영달 소(孔穎達 疏)】 경(經)의 {부대인자(夫大人者)에서 황어귀신호(況於鬼神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此明上九之義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상구(上九)의 뜻을 밝혔다.
‘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者, 言此上九所以亢極有悔者, 正由有此三事.
“나아감은 알면서 물러남을 알지 못하고, 존재함[存]은 알면서 없어짐[亡]은 알지 못하며, 얻음은 알면서 잃음은 알지 못함이다.[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라는 것은, 이는 상구(上九)가 높이 끝까지 올라가[亢極]서 뉘우침이 있는 것의 까닭은 바로 이 세 가지 일을 말미암았기 때문임을 말함이다.
若能三事備知, 雖居上位, 不至於亢也, 此設誡辭.
만약 세 가지 일을 잘 갖추어 안다면 비록 높은 지위에 거주하더라도 높이오름[亢]에 이르지는 않으며, 이는 경계하는 말을 베풀었음이다.
莊氏云“進退據心, 存亡據身, 得喪據位.”
장씨(莊氏)가 이르기를 “나아가고 물러남은 마음에 근거하고, 존재[存]함과 없어짐[亡]은 몸을 근거했으며, 어음과 잃음은 자리를 근거하였다.”라고 하였다.
‘其唯聖人乎 知進退存亡’者, 言唯聖人, 乃能知進退存亡也.
“오직 성인(聖人)이라면,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안다[其唯聖人乎 知進退存亡]”라는 것은, 오직 성인(聖人)이라야 이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存]하고 없어짐[亡]을 잘 앎을 말함이다.
何不云得喪者. 得喪輕於存亡, 擧重略輕也.
어찌하여 얻음과 잃은 것은 일러주지 않았는가? 얻음과 잃음[得喪]은 존재[存]하고 없어짐[亡]보다 가벼우니, 무거움을 거론하고 가벼운 것을 생략하였다.
‘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者, 聖人非但只知進退存亡, 又能不失其正道, 其唯聖人乎.
“그 올바름을 잃지 않는 자인데, 그는 오직 성인(聖人)이 겠지?[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라는 것은, 성인(聖人)은 단지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알 뿐만 아니며, 또 그 바른 도(道)를 잘 잃지 않으니, 그는 오직 성인(聖人) 이겠지?
此經再稱其唯聖人乎者, 上稱聖人, 爲知進退存亡發文, 下稱其唯聖人乎者, 爲不失其正發文, 言聖人非但知進退存亡, 又能不失其正, 故再發聖人之文也.
이 경(經)에 재차 칭하여 ‘그는 오직 성인(聖人)이 겠지?[其唯聖人乎]’라고 한 것은, 위에서 칭한 성인(聖人)은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알게 되어서 글을 썼고, 아래에서 칭한 ‘그는 오직 성인(聖人)이 겠지?[其唯聖人乎]’라고 한 것은, 그 바름을 잃지 않기 위하여 글을 쓴 것이며, 성인(聖人)은 다만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재하고 없어짐을 알 뿐만이 아니고, 또 그 바름을 잘 잃지 않음을 말하였기 때문에 두 번 성인(聖人)이라 글을 썼다.」
『주역정의(周易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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