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정의(周易正義)》는 왕필(王弼, 226~249)의 주(注)와 한강백(韓康伯)의 주(注)를 채용하여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주석(注釋)을 하여 지었다.
20. 관괘(觀卦)[卦象:풍지관]
☴ 巽上
☷ 坤下
곤[地.땅]이 아래에 있고, 손[風.바람]이 위에 있다.
觀 盥而不薦 有孚 顒若. 관(觀)은, 손 씻고[降神祭]서 제수(祭需)를 올리지 않아도 믿음이 있어서 엄숙한 듯하다. 【王弼 注】 王道之可觀者,莫盛乎宗廟。宗廟之可觀者,莫盛於盥也。至薦簡略, 不足復觀,故觀盥而不觀薦也。孔子曰:「禘自既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盡夫觀盛,則下觀而化矣。故觀至盥,則有孚顒若也。 【왕필 주】 왕도(王道)의 볼 만한 것은 종묘 보다 성대함이 없고, 종묘(宗廟)의 볼 만한 것은 손 씻기[降神祭] 보다 성대함이 없다. 제수 올림에 이르면 간략하여 다시 보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손 씻기는 볼만 하지만 제수 올림은 볼만하지 않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체(禘) 제사를 지내는데 이미 강신주(降神酒)를 붓고 부터 지나 간 것은, 내가 보기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이미 그것의 보임이 성대했다면 아래에서 보고 교화된다. 그러므로 보는데 손씻기[降神祭]에 이르면 믿음이 있어 엄숙한 듯함이다. |
[孔穎達 疏]「觀盥而」至「顒若」。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관관이(觀盥而)에서 옹약(顒若)까지.} ○正義曰:「觀」者,王者道德之美而可觀也,故謂之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관(觀, 볼 관)]이라는 것은, 왕자(王者)의 도(道)와 덕(德)의 아름다움인데 볼 만함이다. 그러므로 일컫기를 ‘관(觀)’이라 하였다. 「觀盥而不薦」者,可觀之事,莫過宗廟之祭,盥其禮盛也。薦者,謂既灌之後,陳薦籩豆之事,故云「觀盥而不薦」也。 “관(觀)은, 손 씻고서 제수(祭需)를 올리지 않아도[觀盥而不薦]”라는 것은, 볼 만한 일이 종묘의 제사보다 더한 것이 없고, 손 씻기[降神祭]는 그 예(禮)가 성대하다. ‘천(薦, 천거할 천)’이라는 것은, 이미 강신(降神)한 뒤에 제기[籩]와 제수[豆]의 일을 진설하여 올렸기 때문에 이르기를 “관(觀)은, 손 씻고서 제수(祭需)를 올리지 않아도[觀盥而不薦]”라고 한 것이다. 「有孚顒若」者,孚,信也。但下觀此盛禮,莫不皆化,悉有孚信而顒然,故云「有孚顒若」。 “믿음이 있어서 엄숙한 듯하다[有孚 顒若]”라는 것은, ‘부(孚, 미쁠 부)’는 믿음이며, 다만 아랫사람들이 이 성대한 예(禮)를 보면 다 교화되지 않음이 없어서 모두 믿음을 품고 있어서 엄숙[顒然]한 듯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믿음이 있어서 엄숙한 듯하다[有孚 顒若]”라고 한 것이다.」 ○注「王道之可觀」至「有孚顒若也」。 ○ 【왕필 주(王弼 注)】의 “왕도지가관(王道之可觀)에서 유부옹약야(有孚顒若也)까지” ○正義曰:「盡夫觀盛則下觀而化」者,「觀盛」謂觀盥禮盛則休而止,是觀其大,不觀其細,此是下之效上,因「觀」而皆化之矣。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미 그것의 보임이 성대했다면 아래에서 보고 교화된다[盡夫觀盛 則下觀而化]”라는 것은, ‘보임이 성대함[觀盛]’은 손 씻기[降神祭]하는 예(禮)의 성대함을 보면 쉬고 그침을 말하고, 이는 그 큰 것을 보지만 그 미세함은 것을 보지 않음이며 이는 바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본받을 적에 봄으로 인하여서 모두 교화가 됨이다. 故「觀至盥則有孚顒若」者,顒是嚴正之貌,「若」為語辭,言「下觀而化」,皆孚信容貌儼然也。 “그러므로 보는데 손씻기[降神祭]에 이르면 믿음이 있어 엄숙한 듯함이다[故觀至盥 則有孚 顒若]”라는 것은, ‘옹(顒, 엄숙한 옹)’은 바로 엄정(嚴正)한 모양이고, ‘약(若)’은 어조사이며, 아래에서 보고서 교화되어서 모두 믿음을 품어 용모가 엄숙한 듯함을 말한 것이다.」 |
《彖》曰:大觀在上, 《단전(彖傳)》에서 말하였다. "큰 보임은 위에 있으니, 【王弼 注】 下賤而上貴也。 【왕필 주】 아래는 천하고 위쪽은 귀함이다. [孔穎達 疏]正義曰:謂大為在下所觀,唯在於上,由在上既貴,故在下大觀。今大觀在於上。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큼이 보이는 바를 아래에 있게 하려면 오직 위에 있어야 함을 말하며, 위에 있으며 이미 귀함을 말미암았기 때문에 아래에 있으면서 크게 봄이다. 지금 큰 볼꺼리는 위에 있는 것이다.」 |
[孔穎達 疏]「觀盥而」至「顒若」。
○正義曰:「觀」者,王者道德之美而可觀也,故謂之觀。「觀盥而不薦」者,可觀之事,莫過宗廟之祭盥,其禮盛也。薦者,謂既灌之後,陳薦籩豆之事,故云「觀盥而不薦」也。「有孚顒若」者,孚,信也。但下觀此盛禮,莫不皆化,悉有孚信而顒然,故云「有孚顒若」。
○注「王道之可觀」至「有孚顒若也」。
○正義曰:「盡夫觀盛則下觀而化」者,「觀盛」謂觀盥禮盛則休而止,是觀其大,不觀其細,此是下之效上,因「觀」而皆化之矣。故「觀至盥則有孚顒若」者,顒是嚴正之貌,「若」為語辭,言「下觀而化」,皆孚信容貌儼然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관관이(觀盥而)에서 옹약(顒若)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관(觀, 볼 관)]이라는 것은, 왕자(王者)의 도(道)와 덕(德)의 아름다움인데 볼 만함이다. 그러므로 일컫기를 ‘관(觀)’이라 하였다.
“관(觀)은, 손 씻고서 제수(祭需)를 올리지 않아도[觀盥而不薦]”라는 것은, 볼 만한 일이 종묘의 제사보다 더한 것이 없고, 손 씻기[降神祭]는 그 예(禮)가 성대하다. ‘천(薦, 천거할 천)’이라는 것은, 이미 강신(降神)한 뒤에 제기[籩]와 제수[豆]의 일을 진설하여 올렸기 때문에 이르기를 “관(觀)은, 손 씻고서 제수(祭需)를 올리지 않아도[觀盥而不薦]”라고 한 것이다.
“믿음이 있어서 엄숙한 듯하다[有孚 顒若]”라는 것은, ‘부(孚, 미쁠 부)’는 믿음이며, 다만 아랫사람들이 이 성대한 예(禮)를 보면 다 교화되지 않음이 없어서 모두 믿음을 품고 있어서 엄숙[顒然]한 듯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믿음이 있어서 엄숙한 듯하다[有孚 顒若]”라고 한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왕도지가관(王道之可觀)에서 유부옹약야(有孚顒若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미 그것의 보임이 성대했다면 아래에서 보고 교화된다[盡夫觀盛 則下觀而化]”라는 것은, ‘보임이 성대함[觀盛]’은 손 씻기[降神祭]하는 예(禮)의 성대함을 보면 쉬고 그침을 말하고, 이는 그 큰 것을 보지만 그 미세함은 것을 보지 않음이며 이는 바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본받을 적에 봄으로 인하여서 모두 교화가 됨이다.
“그러므로 보는데 손씻기[降神祭]에 이르면 믿음이 있어 엄숙한 듯함이다[故觀至盥 則有孚 顒若]”라는 것은, ‘옹(顒, 엄숙한 옹)’은 바로 엄정(嚴正)한 모양이고, ‘약(若)’은 어조사이며, 아래에서 보고서 교화되어서 모두 믿음을 품어 용모가 엄숙한 듯함을 말한 것이다.」
順而巽,中正以觀天下。觀盥而不薦,有孚顒若,下觀而化也。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聖人以神道設教,而天下服矣。 순하면서 공손하며 가운데[中] 바름으로써 천하에 보여준다. 손씻기[降神祭]를 보았으면 음식을 올리지 않아도 믿음이 있어 엄숙한 듯하여 아래사람들이 보고 교화된다.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보고서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으니, 성인(聖人)이 그로써 도(道)를 펼쳐 가르침을 베풀어서 천하가 복종한다.” 【王弼 注】 統說觀之為道,不以刑制使物,而以觀感化物者也。神則无形者也。不見天之使四時,而四時不忒;不見聖人使百姓,而百姓自服也。 【왕필 주】 통합하여 설명하면, 보임이 도가 됨은 형벌을 지어서 사물을 부림이 아니며 보고 감동함으로써 사물이 교화되는 것이다. 펼침[神]은 곧 모양이 없는 것이며, 하늘이 사시(四時)를 부림이 보이지 않는데도 사시가 어긋나지 않고, 성인(聖人)이 여러 성씨를 부림이 보이지 않는데도 여러 성씨가 스스로 복종한다. |
[孔穎達 疏]「順而巽」至「天下服矣」。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순이손(順而巽)에서 천하복의(天下服矣)까지.} ○正義曰:順而和巽,居中得正,以觀於天下,謂之「觀」也。此釋觀卦之名。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순하면서 어울려 공순하며 가운데[中]에 거주하며 바름[正]을 얻어 그로써 천하에 보여줌을 일컫기를 ‘관(觀)’이라 하며, 이는 관괘(觀卦)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觀盥而不薦,有孚顒若,下觀而化」者,釋「有孚顒若」之義,本由在下,觀效在上而變化,故「有孚顒若」也。 “손씻기[降神祭]를 보았으면 음식을 올리지 않아도 믿음이 있어 엄숙한 듯하여 아래사람들이 보고 교화된다[觀盥而不薦 有孚顒若 下觀而化]”라는 것은, ‘믿음이 있어 엄숙함[有孚顒若]’의 뜻을 해석함이며, 본래 말미암기를 아래에 있으면서 위에 있는 이를 보고 본받아서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에 ‘믿음이 있어 엄숙함[有孚顒若]’이다. 「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者,此盛名觀卦之美,言「觀盥」與天之神道相合,觀此天之神道而四時不有差忒。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보고서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으니[觀天之神道 而四時不忒]”라는 것은, 이는 관괘(觀卦)의 아름다움을 성대하게 이름하였으며, 손씻기[降神祭]를 봄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와 서로 부합함을 말하였는데, 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보면서 사시(四時)가 어긋남이 있지 않은 것이다. 「神道」者,微妙無方,理不可知,目不可見,不知所以然而然,謂之「神道」,而四時之節氣見矣。 “신도(神道)”라는 것은, 미묘하고 방향이 없어서 이치를 알 수가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어서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여서 그러함이며, 일컫기를 “신도(神道)”라고 하는데 사시(四時)의 절기는 보인다. 豈見天之所為,不知從何而來邪?蓋四時流行,不有差忒,故云「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也。 어찌 하늘의 하는 바를 보며 무엇으로 부터 왔는지 알지 못한다. 대개 사시(四時)가 흘러감이 어긋남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보면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는다[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라고 하였다. 「聖人以神道設教,而天下服矣」者,此明聖人用此天之神道,以「觀」設教而天下服矣。 “성인(聖人)이 그로써 도(道)를 펼쳐 가르침을 베풀어서 천하가 복종한다[聖人以神道設敎而天下服矣]”라는 것은, 이는 성인(聖人)이 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사용하여 “보여줌[觀]”으로써 가르침을 베풀어서 천하가 복종함을 밝힌 것이다. 天既不言而行,不為而成,聖人法則天之神道,本身自行善,垂化於人,不假言語教戒,不須威刑恐逼,在下自然觀化服從,故云「天下服矣」。 하늘이 이미 말하지 않으면서 행하고, 하지 않으면서 이루는데, 성인(聖人)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본받아법하여 자신을 근본하여 스스로 선을 행하여 남에게 드리워서 교화하며, 언어를 거짓으로 하지 않고 가르침을 경계하고, 모름지기 형벌의 위엄과 핍박하여 두렵게하지 않고도 아래에 있는 이가 자연히 보고 감화되고 복종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하가 복종한다[天下服矣]”라고 한 것이다.」 |
[孔穎達 疏]「順而巽」至「天下服矣」。
○正義曰:順而和巽,居中得正,以觀於天下,謂之「觀」也。此釋觀卦之名。「觀盥而不薦,有孚顒若,下觀而化」者,釋「有孚顒若」之義,本由在下,觀效在上而變化,故「有孚顒若」也。「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者,此盛名觀卦之美,言「觀盥」與天之神道相合,觀此天之神道而四時不有差忒。「神道」者,微妙無方,理不可知,目不可見,不知所以然而然,謂之「神道」,而四時之節氣見矣。豈見天之所為,不知從何而來邪?蓋四時流行,不有差忒,故云「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也。「聖人以神道設教,而天下服矣」者,此明聖人用此天之神道,以「觀」設教而天下服矣。天既不言而行,不為而成,聖人法則天之神道,本身自行善,垂化於人,不假言語教戒,不須威刑恐逼,在下自然觀化服從,故云「天下服矣」。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순이손(順而巽)에서 천하복의(天下服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순하면서 어울려 공순하며 가운데[中]에 거주하며 바름[正]을 얻어 그로써 천하에 보여줌을 일컫기를 ‘관(觀)’이라 하며, 이는 관괘(觀卦)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손씻기[降神祭]를 보았으면 음식을 올리지 않아도 믿음이 있어 엄숙한 듯하여 아래사람들이 보고 교화된다[觀盥而不薦 有孚顒若 下觀而化]”라는 것은, ‘믿음이 있어 엄숙함[有孚顒若]’의 뜻을 해석함이며, 본래 말미암기를 아래에 있으면서 위에 있는 이를 보고 본받아서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에 ‘믿음이 있어 엄숙함[有孚顒若]’이다.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보고서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으니[觀天之神道 而四時不忒]”라는 것은, 이는 관괘(觀卦)의 아름다움을 성대하게 이름하였으며, 손씻기[降神祭]를 봄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와 서로 부합함을 말하였는데, 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보면서 사시(四時)가 어긋남이 있지 않은 것이다.
“신도(神道)”라는 것은, 미묘하고 방향이 없어서 이치를 알 수가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어서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여서 그러함이며, 일컫기를 “신도(神道)”라고 하는데 사시(四時)의 절기는 보인다.
어찌 하늘의 하는 바를 보며 무엇으로 부터 왔는지 알지 못한다. 대개 사시(四時)가 흘러감이 어긋남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르기를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보면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는다[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라고 하였다.
“성인(聖人)이 그로써 도(道)를 펼쳐 가르침을 베풀어서 천하가 복종한다[聖人以神道設敎而天下服矣]”라는 것은, 이는 성인(聖人)이 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사용하여 “보여줌[觀]”으로써 가르침을 베풀어서 천하가 복종함을 밝힌 것이다.
하늘이 이미 말하지 않으면서 행하고, 하지 않으면서 이루는데, 성인(聖人)이 하늘의 펼치[神]는 도(道)를 본받아법하여 자신을 근본하여 스스로 선을 행하여 남에게 드리워서 교화하며, 언어를 거짓으로 하지 않고 가르침을 경계하고, 모름지기 형벌의 위엄과 핍박하여 두렵게하지 않고도 아래에 있는 이가 자연히 보고 감화되고 복종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하가 복종한다[天下服矣]”라고 한 것이다.」
《象》曰:風行地上,觀,先王以省方觀民設教。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바람이 땅 위에 다님이 관(觀)이며, 선왕(先王)이 그로써 사방을 살피고 백성을 보고서 가르침을 베푼다.“ |
[孔穎達 疏]正義曰:「風行地上」者,風主號令行於地上,猶如先王設教在於民上,故云「風行地上觀」也。「先王以省方觀民設教」者,以省視萬方,觀看民之風俗,以設於教,非諸侯以下之所為,故云「先王」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바람이 땅 위에 다님[風行地上]”라는 것은, 바람은 주로 땅 위에 다니며 호령(號令)하니, 선왕(先王)이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가르침을 베푸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르기를 “바람이 땅 위로 다니는 것이 관(觀)이다[風行地上觀]”라고 함이다. “선왕(先王)이 그로써 사방을 살피고 백성을 보고서 가르침을 베푼다[先王以省方觀民 設敎]”라는 것은, 만방(萬方)을 살펴 보고서 백성들의 풍속을 관찰하여 그로써 가르침을 베푸는데, 이는 제후 이하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라 한 것이다.」 |
初六,童觀,小人无咎,君子吝。 초육(初六)은 어린아이가 보는데, 소인(小人)은 허물이 없고 군자(君子)는 부끄럽다. 【王弼 注】 處於觀時,而最遠朝美。體於陰柔,不能自進,无所鑒見,故曰童觀。趣順而已,无所能為,小人之道也。故曰小人无咎。君子 處大觀之時,而為童觀,不亦鄙乎? 【왕필 주】 관(觀)의 때에 처하면서 조정의 아름다움에서 가장 멀고, 음(陰)에 몸[體]이 부드러워서 스스로 잘 나아가지 못하여 거울하여 볼 곳이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봄[童觀]”이라 말했다. 순종을 뜻할 뿐이며 잘 하는 바가 없으니, 소인(小人)의 도(道)이다. 그러므로 “소인은 허물이 없다[小人无咎]”라고 하였으며, 군자(君子)가 크게 보는[觀] 때에 처하여서 어린아이를 보려고[童觀] 한다면 또한 비루함이 아니겠는가? |
[孔穎達 疏]正義曰:「童觀」者,處於觀時而最遠朝廷之美觀,是柔弱不能自進,無所鑒見,唯如童稚之子而觀之。為「小人無咎君子吝」者,為此觀看,趣在順從而巳,無所能為,於小人行之,才得無咎,若君子行之,則鄙吝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어린아이가 봄[童觀]”라는 것은, 관(觀)의 때에 처하여서 조정의 아름다운 볼꺼리에서 가장 먼데, 이는 부드럽고 약하여 스스로 잘 나아가지 못하고 거울하여 볼 곳이 없으니, 오직 어리고 작은 아이가 보려고 함과 같다. “소인(小人)은 허물이 없고 군자(君子)는 부끄럽게[小人无咎 君子吝] 된다”라는 것은, 이 봄을 살펴보게 되면 순종하여 따름을 뜻할 뿐이며 잘 하는 바가 없어서 소인(小人)에게 행하면 겨우 허물 없음을 얻으며, 만약 군자가 행하면 비루하여 부끄럽게 된다.」 |
《象》曰:初六 童觀,小人道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초육(初六)의 어린아이의 봄은 소인(小人)의 도(道)이다.” |
六二,闚觀,利女貞。 육이(六二)는 훔쳐 봄이니, 여자가 곧아야 이롭다. 【王弼 注】 處在於內,寡所鑒見,體於柔弱,從順而已。猶有應焉,不為全蒙,所見者狹,故曰闚觀。居內得位,柔順寡見,故曰利女貞,婦人之道也。處大觀之時,居中得位,不能大觀廣鑒,闚觀而已,誠可醜也。 【왕필 주】 처하기를 안[內卦]에 있어서 살펴 보는 바가 적고 몸이 부드럽고 약함에 순하게 따를 뿐이다. 오직 그곳에는 응(應)이 있어서 온전히 어리석게 되지는 않으니 보는 바가 협소하기 때문에 "훔쳐 봄[闚觀]"이라 말하였다. 안[內卦]에 거주하며 지위를 얻어서 유순하여 조금 보기 때문에 말하기를 “여자가 곧아야 이롭다.”라고 하였으니, 부인의 도(道)이다. 크게 봄[觀]의 때에 처하여 가운데[中]에 거주하고 지위를 얻었으나 크게 보고 널리 잘 살피지 못하고 엿볼 뿐이니, 진실로 추할 수 있다. |
[孔穎達 疏]「象曰」至「利女貞」。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이여정(利女貞)까지.} ○正義曰:「闚觀利女貞」者,既是陰爻,又處在卦內,性又柔弱,唯闚竊而觀。如此之事,唯利女之所貞,非丈夫所為之事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훔쳐 봄이니, 여자가 곧아야 이롭다[闚觀 利女貞]”라는 것은, 이미 이 음효(陰爻)이고 또 처함이 내괘(內卦)에 있고 성질이 또 부드럽고 약하여 오직 엿보고 훔쳐서 보는데, 이와 같은 일은 오직 여자의 곧은 바가 이롭고 장부(丈夫)가 하는 바의 일은 아니다.」 ○注「處在於內」至「誠可醜也」。 ○ 【왕필 주(王弼 注)】의 “처재어내(處在於內)에서 성가추야(誠可醜也)까지” ○正義曰:「猶有應焉,不為全蒙」者,六二以柔弱在內,猶有九五剛陽與之為應,則為有闚竊,不為全蒙。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오직 그곳에는 응(應)이 있어서 온전히 어리석게 되지는 않으니[猶有應焉 不爲全蒙]”라는 것은, 육2(六二)가 부드럽고 약함으로써 안[內卦]에 있으나 오직 구5(九五)의 굳센 양(陽)이 더불어 응(應)을 하고 있으니, 즉 엿보고 훔쳐봄이 되어서 완전히 몽매함이 되지는 않는다. 童蒙如初六也,故能闚而外觀。此童「觀」、闚「觀」,皆讀為去聲也。 동몽(童蒙)은 초육(初六)과 같다, 그러므로 잘 엿보면서 밖을 보는 것이다. 이 아이가 봄[童觀]과 훔쳐 봄[闚觀]은 모두 거성(去聲; 처음과 끝을 높은 소리)으로 하여 읽는다.」 |
《象》曰:闚觀女貞,亦可醜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엿보는 여자의 곧음이 또한 추 할 수 있다." |
[孔穎達 疏]「象曰」至「利女貞」。
○正義曰:「闚觀利女貞」者,既是陰爻,又處在卦內,性又柔弱,唯闚竊而觀。如此之事,唯利女之所貞,非丈夫所為之事也。
○注「處在於內」至「誠可醜也」。
○正義曰:「猶有應焉,不為全蒙」者,六二以柔弱在內,猶有九五剛陽與之為應,則為有闚竊,不為全蒙。童蒙如初六也,故能闚而外觀。此童「觀」、闚「觀」,皆讀為去聲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이여정(利女貞)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훔쳐 봄이니, 여자가 곧아야 이롭다[闚觀 利女貞]”라는 것은, 이미 이 음효(陰爻)이고 또 처함이 내괘(內卦)에 있고 성질이 또 부드럽고 약하여 오직 엿보고 훔쳐서 보는데, 이와 같은 일은 오직 여자의 곧은 바가 이롭고 장부(丈夫)가 하는 바의 일은 아니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처재어내(處在於內)에서 성가추야(誠可醜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오직 그곳에는 응(應)이 있어서 온전히 어리석게 되지는 않으니[猶有應焉 不爲全蒙]”라는 것은, 육2(六二)가 부드럽고 약함으로써 안[內卦]에 있으나 오직 구5(九五)의 굳센 양(陽)이 더불어 응(應)을 하고 있으니, 즉 엿보고 훔쳐봄이 되어서 완전히 몽매함이 되지는 않는다.
동몽(童蒙)은 초육(初六)과 같다, 그러므로 잘 엿보면서 밖을 보는 것이다. 이 아이가 봄[童觀]과 훔쳐 봄[闚觀]은 모두 거성(去聲; 처음과 끝을 높은 소리)으로 하여 읽는다.」
六三,觀我生,進退。 육삼(六三)은 나의 삶을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난다. 【王弼 注】 居下體之極,處二卦之際,近不比尊,遠不童觀,觀風者也。居此時也,可以觀我生,進退也。 【왕필 주】 [육삼(六三)은] 아래 몸[體]의 꼭대기에 거주하고 두 괘(二卦; 巽과坤)의 사이에 처하며 가까이 높은데[上괘 巽]에 붙지 않고 멀리 어린아이를 보지 않으며 바람[風; 上괘 巽]을 봄[觀]이다. 거주하는 이 때는 나의 삶을 봄으로서 나아가고 물러남으로 할 수 있다. |
[孔穎達 疏]「象曰」至「進退」。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진퇴(進退)까지.} ○正義曰:「觀我生進退」者,「我生」,我身所動出。三居下體之極,是有可進之時;又居上體之下,復是可退之地。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나의 삶을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난다[觀我生進退]”라는 것은, ‘아생(我生)’은 내 자신이 움직여 나감이다. 욱3(六三)이 하체(下體)의 꼭대기에 거주하니 이는 나아갈 수 있는 때이고, 또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하니 다시 바로 물러갈 수 있는 땅[자리]이다. 遠則不為童觀,近則未為觀國,居在進退之處,可以自觀我之動出也。 멀리는 어린아이 봄[童觀; 初六]을 하지 않고 가까이는 아직 나라를 보지[觀國;六四] 못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는 곳에 거주하고 있어서 내가 움직여 나감을 스스로 볼 수 있음이다. 故時可則進,時不可則退,觀風相幾,未失其道,故曰「觀我生進退」也。 그러므로 때가 할 수 있으면 나아가고 때가 안 되면 물러나서 바람[風; 上괘 巽]이 돕는 기회를 살펴[觀]서 그 도(道)를 잃지 않기 때문에 “나의 삶을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난다[觀我生進退]”라고 말하였다. 道得名「生」者,道是開通生利萬物。故《系辭》云「生生之謂易」,是道為「生」也。 도(道)를 ‘생(生)’이라고 이름한 것은, 도(道)는 바로 열고 통하여 만물을 낳고 이롭게 함이다. 그러므로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말한다[生生之謂易]”라고 하였으니, 이 도(道)가 생(生)이 되는 것이다.」 |
《象》曰:觀我生進退,未失道也。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나의 삶을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남은, 아직 도(道)를 잃지 않았음이다.” 【王弼 注】 處進退之時,以觀進退之幾,未失道也。 【왕필 주】 【왕필 주】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에 처하고 그로써 나아가고 물러남의 기미를 보는데, 아직 도(道)를 잃지 않았다. |
[孔穎達 疏]「象曰」至「進退」。
○正義曰:「觀我生進退」者,「我生」,我身所動出。三居下體之極,是有可進之時;又居上體之下,復是可退之地。遠則不為童觀,近則未為觀國,居在進退之處,可以自觀我之動出也。故時可則進,時不可則退,觀風相幾,未失其道,故曰「觀我生進退」也。道得名「生」者,道是開通生利萬物。故《系辭》云「生生之謂易」,是道為「生」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진퇴(進退)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나의 삶을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난다[觀我生進退]”라는 것은, ‘아생(我生)’은 내 자신이 움직여 나감이다. 욱3(六三)이 하체(下體)의 꼭대기에 거주하니 이는 나아갈 수 있는 때이고, 또 상체(上體)의 아래에 거주하니 다시 바로 물러갈 수 있는 땅[자리]이다.
멀리는 어린아이 봄[童觀; 初六]을 하지 않고 가까이는 아직 나라를 보지[觀國;六四] 못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는 곳에 거주하고 있어서 내가 움직여 나감을 스스로 볼 수 있음이다.
그러므로 때가 할 수 있으면 나아가고 때가 안 되면 물러나서 바람[風; 上괘 巽]이 돕는 기회를 살펴[觀]서 그 도(道)를 잃지 않기 때문에 “나의 삶을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난다[觀我生進退]”라고 말하였다.
도(道)를 ‘생(生)’이라고 이름한 것은, 도(道)는 바로 열고 통하여 만물을 낳고 이롭게 함이다. 그러므로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말한다[生生之謂易]”라고 하였으니, 이 도(道)가 생(生)이 되는 것이다.」
六四,觀國之光,利用賓于王。 육사(六四)는 나라의 빛남을 봄이니, 왕에게 손님이 되어야 이롭다. 【王弼 注】 居觀之時,最近至尊,觀國之光者也。居近得位,明習國儀者也,故曰利用賓于王也。 【왕필 주】 보는[觀] 때에 거주하고 지극히 높은데[六五]에 가장 가까우니, 나라의 빛남을 보는 자이다. 지위를 얻어 가까이 거주하여 나라의 거동을 밝게 익힌 자이다, 그러므로 “왕에게 손님이 됨이 이롭다.”라고 말하였다. |
[孔穎達 疏]正義曰:最近至尊,是「觀國之光」。「利用賓于王」者,居在親近而得其位,明習國之禮儀,故曰利用賓于王庭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가장 지극히 높은데[六五]에 가까우니, 이는 “나라의 빛을 봄[觀國之光]”이다. “왕에게 손님이 되어야 이롭다[利用賓于王]”라는 것은, 거주함이 친함에 가까이 있으면서 그 지위를 얻어서 나라의 예절과 거동[禮儀]을 밝게 익히기 때문에 “왕의 조정에 손님이 됨이 이롭다[利用賓于王庭]”라고 한 것이다.」 |
《象》曰:觀國之光,尚賓也。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나라의 빛남을 봄은, 손님을 숭상함이다." [孔穎達 疏]正義曰:釋「觀國之光」義。以居近至尊之道,志意慕尚為王賓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나라의 빛을 봄[觀國之光]’의 뜻을 해석하였으며, 그로써 지극히 높음의 도(道)에 가까이 거주하며 뜻하는 마음이 왕의 손님이 되기를 사모하고 숭상하는 것이다.」 |
九五,觀我生,君子无咎。 구오(九五)는 나의 삶을 돌아 봐야 군자의 허물이 없다. 【王弼 注】 居於尊位,為觀之主,宣弘大化,光於四表,觀之極者也。上之化下,猶風之靡草,故觀民之俗,以察己道。百姓有罪,在余一人,君子風著,己乃无咎。上為化主,將欲自觀,乃觀民也。 【왕필 주】 높은 지위에 거주하고 관(觀)의 주체이 되어 넓리 베풀고 교화를 크게하여 세상[四表]에 빛남이 마땅하며 봄[觀]의 꼭대기가 된 자이다. 위쪽이 아래를 교화함은 바람이 풀을 쓰러뜨림과 같기 때문에 백성의 풍속을 보고 그로써 자기의 도(道)를 살핀다. 여러 성씨가 죄가 있음은 나 한사람에 있음이니, 군자(君子)의 풍속이 드러나면 자기가 바로 허물이 없다. 위쪽은 교화의 주체가 되니, 장차 자신을 보고자 하면 이에 백성을 보아야 한다. |
[孔穎達 疏]正義曰:九五居尊,為觀之主。四海之內,由我而觀,而教化善,則天下有君子之風;教化不善,則天下著小人之俗,故則民以察我道,有君子之風著,則無咎也。故曰:「觀我生,君子無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구5(九五)가 높은데 거주하여 관(觀)의 주체가 되었으며, 세상[四海]의 안이 나를 말미암아서 보면서 교화(教化)가 잘 되면 천하에 군자(君子)의 풍속이 있고, 교화가 잘 안 되면 천하에 소인(小人)의 습속이 드러나기 때문에 백성을 법칙하여 그로써 나의 道를 살펴보고, 군자의 풍속이 드러나면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돌아 봐야 군자의 허물이 없다[觀我生,君子無咎]”라고 한 것이다.」 |
《象》曰:觀我生,觀民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나의 삶을 봄은, 백성을 살펴봄이다.“ [孔穎達 疏]正義曰:謂觀民以觀我,故觀我即觀民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백성을 봄으로써 나를 살펴보기 때문에 나를 봄은 바로 백성을 살펴보는 것임을 말함이다.」 |
上九,觀其生,君子无咎 상구(上九)는 그[백성] 삶을 돌아 봐야 군자(君子)가 허물이 없다. 【王弼 注】 觀我生,自觀其道者也;觀其生,為民所觀者也。不在於位,最處上極,高尚其志,為天下所觀者也。處天下所觀之地,可不慎乎?故君子德見,乃得无咎。生,猶動出也。 【왕필 주】 나의 삶을 봄은 스스로 그 도(道)를 보는 것이며, 그 삶을 봄은 백성이 보는 바가 된 자이다.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가장 위쪽 꼭대기에 처하며 그 뜻함은 오히려 높으니 천하가 보는 바가 된 자이다. 천하를 보는 바의 지위[땅]에 처하였으니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덕(德)을 보이면 이에 허물 없음을 얻는다. 삶(生)은 움직여 나감과 같다. |
[孔穎達 疏]「上九」至「無咎」。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구(上九)에서 무구(无咎)까지.} ○正義曰:「觀其生」者,最處上極,高尚其志,生亦道也。為天下觀其巳之道,故云「觀其生」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백성] 삶을 돌아 본다[觀其生]”라는 것은, 가장 위쪽 꼭대기에 처하여 그 뜻을 높이고 숭상함이며, 삶[生]은 또한 도(道)이다. 천하가 자기의 도(道)를 보게 되기 때문에 이르기를 “그[백성] 삶을 본다[觀其生]”라고 한 것이다. 「君子無咎」者,既居天下可觀之地,可不慎乎?故君子謹慎,乃得「無咎」也。 “군자(君子)가 허물이 없다[君子无咎]”라는 것은, 이미 천하가 볼 수 있는 땅[지위]에 거주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조심하고 삼가면 비로소 ‘허물 없음[無咎]‘을 얻는 것이다.」 ○注「觀我生」至「動出也」。 ○ 【왕필 주(王弼 注)】의 “관아생(觀我生)에서 동출야(動出也)까지” ○正義曰:「生猶勸出」者,或動、或出,是生長之義。故云「生猶動出」。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삶(生)은 움직여 나감과 같다[生猶勸出]”라는 것은, 혹은 움직이고 혹은 나감이며 바로 살고 자람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삶(生)은 움직여 나감과 같다[生猶勸出]”라고 하였다. 六三、九五皆云「觀我生」,上九云「觀其生」,此等云「生」皆為「動出」,故於卦末,《注》總明之也。 육3(六三)과 구5(九五)에는 모두 이르기를 “관아생(觀我生)”이라 하고 상구(上九)에는 이르기를 “관기생(觀其生)”이라 하였는데, 이는 같이 이르기를 ‘생(生)’이라 한 것은 모두 움직여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괘(卦)의 끝 주(注)에 총괄하여 밝힌 것이다.」 |
《象》曰:觀其生,志未平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그 삶을 봄은, 뜻이 화평하지 못함이다.” 【王弼 注】 特處異地,為眾所觀,不為平易。和光流通,志未平也。 【왕필 주】 특히 다른 자리[땅]에 처하여 무리가 보는 바가 되어서 화평하게 바뀌려고 하지 않으니, 빛이 어울려 통하여 흐르지만 뜻이 화평하지 못한 것이다. [孔穎達 疏]正義曰:釋「觀其生」之義。以特處異地,為無所觀,不為平易。和光流通,志未與世俗均平。世無危懼之憂,我有符同之慮,故曰「志未平」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삶을 봄[觀其生]’의 뜻을 해석하였다. 특히 다른 땅[지위]에 처함으로써 [우러러] 보는 바가 없게 되어서 평이하게 하지 않고, 빛에 어울려 통하지 흐르니, 뜻이 세속과 더불어 균평하지 못하다. 세상은 위태롭고 두려워하는 근심이 없는데 나는 부합하여 함께하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뜻이 화평하지 못하다[志未平]”라고 말한 것이다.」 |
[孔穎達 疏]「上九」至「無咎」。
○正義曰:「觀其生」者,最處上極,高尚其志,生亦道也。為天下觀其巳之道,故云「觀其生」也。「君子無咎」者,既居天下可觀之地,可不慎乎?故居子謹慎,乃得「無咎」也。
○注「觀我生」至「動出也」。
○正義曰:「生猶勸出」者,或動、或出,是生長之義。故云「生猶動出」。六三、九五皆云「觀我生」,上九云「觀其生」,此等云「生」皆為「動出」,故於卦末,《注》總明之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구(上九)에서 무구(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백성] 삶을 돌아 본다[觀其生]”라는 것은, 가장 위쪽 꼭대기에 처하여 그 뜻을 높이고 숭상함이며, 삶[生]은 또한 도(道)이다. 천하가 자기의 도(道)를 보게 되기 때문에 이르기를 “그[백성] 삶을 본다[觀其生]”라고 한 것이다.
“군자(君子)가 허물이 없다[君子无咎]”라는 것은, 이미 천하가 볼 수 있는 땅[지위]에 거주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조심하고 삼가면 비로소 ‘허물 없음[無咎]‘을 얻는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관아생(觀我生)에서 동출야(動出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삶(生)은 움직여 나감과 같다[生猶勸出]”라는 것은, 혹은 움직이고 혹은 나감이며 바로 살고 자람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삶(生)은 움직여 나감과 같다[生猶勸出]”라고 하였다.
육3(六三)과 구5(九五)에는 모두 이르기를 “관아생(觀我生)”이라 하고 상구(上九)에는 이르기를 “관기생(觀其生)”이라 하였는데, 이는 같이 이르기를 ‘생(生)’이라 한 것은 모두 움직여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괘(卦)의 끝 주(注)에 총괄하여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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