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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신(修身)/3.신라 향가(新羅 鄕歌)

▣ 안민가(安民歌)/신라향가(新羅鄕歌)

by 석담 김한희 2022.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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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민가(安民歌)/신라향가(新羅鄕歌)

      - 충담사(忠談師) -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 兮生以支所音物生

此 兮 食惡支治良羅

此地 兮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支持以 支如右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

 

◎ 안민가(安民歌)

  - 충담사(忠談師) - 

 

君隱父也

군은부야

임금은 아버지요

臣隱愛賜尸母史也

신은애사시모사야

신하는 사랑 주실 어머니요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언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라고 해 주시지

民是愛尸知古如

민시애시지고여

백성이 이 사랑을 알고요

窟理叱大兮生以支所音物生

굴리질대혜생이지소음물생

굴러 질대로 생겨져서는 만물 생기면

此兮食惡支治良羅

차혜식악지치량나

이를 먹여져 다스리라

此地兮捨遣只於冬是去於丁爲尸知

차지혜사유지어동시거어정위시지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고져 하실지

國惡支持以支如右如

궁악지지이지지고지

나라 오지 잡으지요 우여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

후구군여신다지민은여위내시등언

임금요 신하는 많지 백성은요 해내시 들면

國惡太平恨音叱如

위내시등언 국악태평한음질여

나라가 태평해 져요

 

 신라 경덕왕(景徳王, 35대 왕) 때 충담사(忠談師)가 지은 10구체 향가이며 유교적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과 신하, 즉 국가의 도리가 담겨 있는 노래이다. 삼국유사2에 안민가(安民歌)와 찬기파랑가(讃耆婆郎歌)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삼국유사(三國遺事)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2. 양주동 역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백성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라고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평안할 것입니다.

 

3. 김완진 역

은 아비요

은 사랑하시는 어미요,

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진댄 이 사랑을 알리라.

大衆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할진댄 나라 保全할 것을 알리라.

아아, 답게 답게 답게

한다면 나라가 太平 持續하느리라.

 

 

▣ 『삼국유사(三國遺事)

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第二 景徳王·忠談師·表訓大徳 <경덕왕이 충담사(표훈대덕)을 만나다>

<景徳王忠談師表訓大徳>

徳經等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時或現侍扵殿庭. 三月三日王御敀正門楼上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貟榮服僧來.” 扵是適有一大徳威儀鮮潔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被衲衣負櫻筒 一作荷簣從南而來. 王喜見之邀致樓上視其筒中, 盛茶具已.  汝爲誰耶.” 僧曰 忠談”,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兹旣献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献之, 茶之氣味異常甌中異香郁烈. 王曰 朕甞聞師讃耆婆郎詞腦歌其意甚髙, 是其果乎.” 對曰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勑歌呈之王佳之封王師焉, 僧再拜固辝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隠愛賜尸母史也,

支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扵冬是去扵丁爲尸知,

國惡攴持以支知古如.

後句君如臣多支民隠如爲内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讃耆婆郎歌曰.

咽嗚爾處米, 露曉邪隠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隠安攴下. 沙是八陵隠汀理也中, 耆郎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郎也持以攴如賜烏隠, 心未際叱肹逐内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髙攴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당나라에서 보낸] 도덕경(德經) 등을 태왕[효성왕(孝成王)]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경덕왕(景徳王)]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로는 혹 대궐 뜰에 나타나 [왕을] 모셨다.

3 3(765)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측근들이 그를 보고 데려다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서 또는 삼태기를 졌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충담(忠談)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 3(重三) 9 9(重九)에는 남산(南山)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듣기로는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주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즉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이렇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찬기파랑가는 이렇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쫒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가를 쫓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신라의 도덕경(德經)

삼국사기 孝成王 二年 四月 '唐使臣刑璹 以老子道德經等文書獻于王'의 기록으로 보아 태왕(大王)은 선왕(先王)인 효성왕(孝成王)이고 왕()은 경덕왕(景徳王)이다.

 

 경덕왕(景徳王, 35대 왕)

신라 제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성은 김씨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선왕(先王)인 효성왕(34대 왕, 재위 737742)의 동생이다. 747년 중시를 시중으로 개칭했고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757년에는 주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757년에는 내외관의 녹봉(祿俸)을 없애고 녹읍(祿邑)을 부활시켰다.

 

 효성왕(孝成王, 34대 왕)

효성왕은 신라 제34대 왕(재위 737742)이며 성덕왕이 737(성덕왕 36)에 죽은 뒤에 왕위에 올랐다.

중국 당()나라의 현종(玄宗, 재위 712~756)은 성덕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738(효성왕 2)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을 사신으로 보내 조문을 하며 효성왕을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봉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당시 사신으로 온 형숙이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등의 문서를 효성왕에게 바쳤다라고 기록되어있다.

효성왕은 742(효성왕 6)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동해에 뿌려졌다. 그리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복아우인 김헌영이 왕위를 이어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으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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