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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경(十三經) 유래

◎ 1. 공자(孔子)의 오경(五經)

by 석담 김한희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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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자(孔子)의 오경(五經)

○ 오경(五經)은 공자(孔子, BC551~BC479)가 산정(刪定)한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춘추(春秋)』를 말한다.

◎ 경전(經典)의 유래

 

1) 『시경(詩經)』

주(周)나라 초기인 BC1100년경부터 춘추시대 까지 약 500년 동안 각 지방에서 유행했던 다양한 계층의 노래를 모아 놓은 것인데, 그 내용은 노동, 풍자, 전쟁, 애정과 혼인, 민족의 기원 등 다양하다.

『시경』은 305편이 전하는데, 풍(風), 아(雅), 송(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풍'은 160편으로 민간의 애정이 대부분이고, '아'는 105편으로 궁중 행사에 쓰였으며, '송'은 40편으로 종묘의 제사에 쓰였다.

 

◎ 『시경(詩經)』의 첫 시

《國風》 【周南】

1. 관저(關睢)

關關雎鳩 在河之洲(관관저구 재하지주)

窈宨淑女 君子好逑(요조숙녀 군자호구)

꾸욱 꾸욱 물수리, 하수의 섬에 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 군자의 좋은 짝이라네

參差荇菜 左右流之(참차행채 좌우류지)

窈宨淑女 寤寐求之(요조숙녀 오매구지)

들쭉날쭉 마름나물 이리저리 흐르는데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 깨나 찾았다네

求之不得 寤寐思服(구지부득 오매사복)

悠哉悠哉 輾轉反側(유재유재 전전반측)

그리워도 못 얻어서 자나 깨나 잊지못해

멀구나 그립도다! 이리 저리 뒤척이네

參差荇菜 左右采之(참차행채 좌우채지)

窈宨淑女 琴瑟友之(요조숙녀 금슬우지)

들쭉날쭉 마름나물 이리저리 뜯고 있네

아리따운 아가씨와 금슬 같이 벗 하였네

參差荇菜 左右芼之(참차행채 좌우모지)

窈宨淑女 鍾鼓樂之(요조숙녀 종고락지)

들쭉날쭉 마름나물 이리저리 우거졌네

아리따운 아가씨와 쿵짝 쿵짝 즐겁구나.

 

 

2) 『서경』

중국 요순시대부터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사관이 기록한 정사(政事)에 관련된 문서인데, 군신의 대화, 신하의 건의, 백성에 대한 군왕의 통고, 전쟁에 임하는 맹서, 군왕의 명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서(書)'라고 불렀으며, 한나라 때에는 『상서(尙書)』라 하였고, 송(宋)나라 이후에는 『서경(書經)』이라 이름 붙였다.

 

◎ 『서경(書經)』 첫 장

≪虞書≫ 堯典

曰若稽古,帝堯,曰放勛,欽明文思安安,允恭克讓,光被四表,格於上下。

克明俊德,以親九族。 九族既睦,平章百姓。百姓昭明,協和萬邦, 黎民於變時雍。

옛 요임금을 상고하니 공훈(功勳)을 이루시어 밝고 문채가 빛나고 생각함이 크게 편안하시며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하시어 광채가 사방 밖으로 미치며 하늘과 땅에 이르렀다. 능히 큰 덕을 밝혀 구족을 친하게 하시니 구족이 나아가 화목하고, 여러 성씨를 고루 밝히셨다. 여러 성씨들이 덕을 밝히고, 모든 나라가 어울려 도우니 변하는 때마다 많은 백성들이 화목하였다.

 

 

 

3) 『역경(易經)』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리를 풀이한 책인데 《주역(周易)》이라고도 한다. 그 변화는 양(-)과 음(--)이 변하여 조합되는 3효(爻)의 소성 8괘(卦)가 서로 바뀌며 중첩되어 6효의 대성 64괘로 되었다. 64괘의 각 괘에는 괘사(卦辭)가 있고 각 효에는 효사(爻辭)가 있으며, 후세에 괘사와 효사를 해설한 십익(十翼)의 전(傳)이 있다.

『주역』은 점치는 점술서 알려져 있는데,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연구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 『주역』의 첫 괘(卦)

01. 건괘(乾卦)[卦象:중천건]

☰ 乾上

☰ 乾下

【개요】하늘을 상징하는 소성괘 건[天.하늘]이 겹쳐져있다.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으로, 64괘 중 가장 강하고 튼튼한 괘이다. 건은 하늘과 아버지를 상징하고 굳셈을 뜻한다.

 

【卦辭(괘사)】 문왕作

乾, 元亨. 利貞.

건(乾)은, 시작은 통한다. 곧아야 이롭다.

 

【爻辭(효사)】 주공作

初九, 潛龍勿用.

초구효는 [물에] 잠긴 용이다. 쓰지 말라.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구이효는 용이 나타나 밭에 있다.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 無咎.

구삼효는 군자가 종일 부지런히 노력한다. 저녁에 두려워하며 순응[若]해야 위태하더라도 허물은 없다.

九四, 或躍在淵, 無咎.

구사효는 못에 있으면서 혹 뛰어오른다. 허물이 없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구오효는 용(龍)이 날아서 하늘에 있다.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上九, 亢龍有悔.

상구효는 용이 끝에 올랐다. 후회가 있다.

用九, 見群龍, 無首, 吉.

용구는 여러 용이 나타난다. 우두머리가 없어야 길하다.

 

 

 

4) 『예기(禮記)』

공자와 그 제자들이 예에 관하여 천자로부터 관리에 따라 달라지는 의례의 규범을 교육, 예절, 음악, 농사, 관혼상제 등 유가 문화 전반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편집해 오늘날의 『예기』가 되었다.

그런데, 『예기』의 한 부분인 ≪대학≫과 ≪중용≫편을 송나라 주희(朱熹)가 따로 분리하여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더하여 사서(四書)라 하였으며 송나라 이후 유학의 중심 철학이 되었다.

 

◎ 『예기(禮記)』 첫 장

≪曲禮上≫ 第一

曲禮曰, 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敖不可長, 欲不可從, 志不可滿, 樂不可極. 賢者狎而敬之, 畏而愛之. 愛而知其惡, 憎而知其善, 積而能散, 安安而能遷. 臨財毋苟得, 臨難毋苟免, 得毋求勝, 分毋求多, 疑事毋質, 直而勿有.

곡예편에 말하였다. “존경하지 않음이 없으며 엄숙하기를 생각하는 듯이 하며 주장을 안정하게 한다면 백성이 편안하도다! 거만한 마음이 자라게 해서는 안되며, 욕심대로 따르게 해서는 안되고, 뜻을 가득 차게 해서는 안되며 즐거움을 끝까지 누려서는 안된다.” 현명한 사람은 친하더라도 존경하며, 두려워하나 사랑하며, 사랑하나 그의 미움을 알고, 증오해도 그의 선함은 알며, [재물을] 쌓아도 흩어 쓸 줄 알며, 편안함을 편안하게 여기지만 [옮겨야 하면]잘 옮긴다. 재물에 대하여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지 말고, 어려움을 당하면 구차하게 면하려 하지 말며, 얻어서 이기려고 하지 말며, 나눔에서 많이 가지려고 하지 말고, 의심나는 일을 결정하지 말며, 곧음으로 고집하지 말라.“

 

 

5) 『춘추(春秋)』

춘추시대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데 『춘추』의 편찬 동기를 『맹자』에 "세상이 쇠퇴해져 도(道)가 없어지자 사악한 말과 폭행이 잇달았다. 또한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어버이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공자가 이를 걱정해 『춘추』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춘추』를 집필하여 '춘추필법'으로 춘추시대의 잘못된 시대 상황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공자 사후 전국시대에 『춘추』 해설서인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춘추좌전』이 쓰여져 역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춘추』 첫 장

≪은공(隐公)≫

【隐公元年】春王正月。三月,公及邾儀父盟於蔑。夏五月,鄭伯克段於鄢。秋七月,天王使宰咺來歸惠公、仲子之賵。九月,及宋人盟於宿。冬十有二月,祭伯來。公子益師卒。

【은공 원년】 봄 왕의 정월이다. 3월에 공이 주나라 의보와 함께 멸땅에서 맹약하였다. 여름 5월에 정나라 임금이 단을 언에서 이겼다. 가을 7월에 천왕이 재상 훤을 보내 혜공과 중자의 장례물품을 보내왔다. 9월에 송나라 사람과 함께 숙에서 맹약하였다.겨울 12월에 채백이 왔다. 공자 익사가 졸하였다.

◎ 공자(孔子)의 생애

공자(孔子, BC551~BC479)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B.C. 551년(魯 양공 22년)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9세(B.C. 533년)에 견관씨의 딸과 혼인하여 다음해 아들 리(鯉)를 낳았다. 결혼한 해에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와 21세 때에 목장 관리를 하였는데 일 처리가 공평하고 가축들이 번성하였다. 공자의 나이 34세(B.C. 518년) 되던 해에 주나라 수도 낙읍에 가서 노자를 만난 후 공자의 명망이 더욱 높아져 이미 30대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노나라 소공이 실권을 장악한 삼환씨(三桓氏)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삼환씨에 패하여 제나라로 도주하게 되었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로 가게 되었다(B.C. 517년, 35세). 제나라에 간 공자는 제나라 경공을 만나 등용이 검토되었으나 재상 안자(晏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등용에 실패한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귀국하여 시. 서.예.악 등을 연구하며 제자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때에도 노나라 정공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난신 양호(陽虎)가 물러난 뒤인 51세 때(B.C. 501년)에 공자는 중도(中都)의 재(宰)가 되었다. 중도 고을을 다스린지 1년만에 질서가 바로잡혀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다음 해(B.C. 501년, 52세)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맹하였는데 무력으로 위협한 제나라 경공의 야비한 처사를 공자가 꾸짖었다. 이에 제나라는 사과하는 뜻으로 세 고을을 노나라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러한 공로로 공자는 다음 (B.C. 499년, 53세 때) 사공이 되었고 55세 때인 B,C. 497년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이어서 56세(B.C. 496년)에 정승의 일까지 겸하게 된 공자는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사형에 처하고 국력을 안정시키자, 이웃 제나라에서 노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와 말을 노나라에 선물로 보내게 된다. 정공과 계환자는 이 선물을 받고 혹하여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미자18-4). 정공(定公)과 계환자와 정치를 함께 할 수 없다 판단한 공자는 벼슬을 버렸다.

이듬해(B,C. 497년, 55세) 공자는 제자인 자로. 자공. 안회 등과 함께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제(齊).위(衛).조(曹).송(宋)정(鄭).진(陳).채(蔡).초(楚) 등에 대한 유세(遊說)에서 각국의 제후들이 공자의 정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시기(猜忌)를 하는 등 뜻을 펼칠 만한 기회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공자는 여러 차례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했며 송나라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또한 광(匡)에서는 양호로 오인되어 닷새 동안 잡혀 있기도 했다. 또한 진(陳).채(蔡)에서는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14년 동안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며 도덕정치를 함께할 임금을 찾기위해 끈임없이 노력했으나 당시의 제후들은 공자의 유세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생각했으며 자국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다. 도덕정치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등용에 실패한 공자는 주유천하를 마치고 68세(B,C. 484년)인 늦은 나이에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고국에 돌아온 공자는 후진 교육에 전념하여 유가의 토대를 세워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공자에게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외아들 리(鯉)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고(B.C. 483년, 공자 69세), 리(鯉)가 죽은 다음해에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또 죽었다. 2년 후(B.C. 480, 공자72세) 위나라에서 벼슬하던 자로가 내란에 휘말려 죽게 된다. 연이은 불행에 몸과 마음이 쇄약해진 공자는 73세(B,C.479년, 魯 애공16)를 일기로 생의 여정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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