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적가(遇賊歌)/신라향가(新羅鄕歌)
- 영재(永才) 스님-
自矣心米
貌史毛達只將來呑隱日
遠烏逸○○過出知遣
今呑藪未去遣省如
但非乎隱焉破 ○主
次弗 ○史內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
乎尸曰沙也內好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善陵隱
安支尙宅都乎隱以多
◆ 신라 원성대왕(元聖大王, 신라 제38대 왕, 재위 : 785~798) 때의 영재 스님이 대현령에서 도적을 만났는데 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도적들이 괴이하게 여겨 노래를 짓게 했다. 10구체의 향가이며 ≪삼국유사≫권 5에 <영재우적(永才遇賊)>으로 설화와 기록이 남아 있다.
◎ 우적가(遇賊歌)
自矣心米
(자의심미)
저의 마음을
皃史毛達只將來呑隱日
(모사모달지장래탄은일)
모아 모두어 장래(돈) 타는 날
遠島逸□□過出知遺
(원도일□□과출지유)
먼길을 □□ 지나가지요
今呑藪未去遺省如
(금탄수미거유성여)
이제 단숨에 가야 성한데
但非乎隱焉破□主
(단비호은언파□주)
단지 아니하온 건 파□주
次弗□□史內於都還於尸郞也
(차불□□사내어도환어시랑야)
저 불□□사 내 어데로 돌아서랴
此兵物叱沙過乎
(차병물질사과호)
이 칼 물건 사 가오
好尸曰沙也內乎呑尼
(호시왈사야내호탄니)
좋은 날 사야 내것 되네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㵛陵隱
(아야유지이오음지질한은선릉은)
아아, 오직 내 소리질러 한 선업은
安支尙宅都乎隱以多
(안지상택도호은이다)
아직사 택도 없소이다.
1. 삼국유사(三國遺事) 역
“제 마음의
모습 모르던 날에,
멀리 새 달아나듯 지나서 알고,
이제는 숲에 가고 있노라.
다만 잘못된 것은 때리는 님에,
저 세상에 다시 돌아갈 사내들,
이 칼 따위 허물
될 날 세우니,
아아 오직 내 몸의 한은 선업은 아니,
바라는 집으로 모아짐입니다.”
2. 양주동 역
제 마음에
모든 형상을 모르려 하던 날은
멀리 口口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승을
두려워할 모습으로 (내 어찌) 다시 또 돌아가리오?
이 칼이야 지내고 나면
좋은 날이 새리라 여겼더니
아, 오직 요만한 선은
새 집이 아니 되느니라
3. 김완진 역
제 마음의
모습이 볼 수 없는 것인데,
日達鳥逸 달이 난 것을 알고
지금은 수플을 가고 있습니다.
다만 잘못된 것은 强豪님,
머물게 하신들 놀라겠습니까.
兵器를 마다 하고
즐길 法을랑 듣고 있는 데,
아아, 조만한 善業은
아직 턱도 없습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三國遺事 卷 第五
卷 第五, 避隐第八, 永才遇賊. <영재 스님이 도적을 감화시키다.>
<永才遇賊>
釋永才性滑稽不累於物善郷歌. 暮嵗将隐于南岳至大峴嶺, 遇賊六十餘人. 将加害才臨刄無懼色怡然當之. 賊恠而問其名曰, 永才. 賊素聞其名, 乃命□□□作歌.
其辭曰.
“自矣心米
皃史毛逹只将來呑隐日,
逺鳥逸□□過出知遣,
今呑藪未去遣省如.
但非乎隠焉破□主,
次弗□史内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
好尸曰沙也内乎呑尼,
阿耶唯只伊吾音之叱恨隐㵛陵隐
安攴尚宅都乎隐以多.”
賊感其意贈之綾二端. 才笑而前謝曰, “知財賄之爲地獄根夲, 将避於窮山以餞一生, 何敢受焉.” 乃投之地. 賊又感其言, 皆釋釼投戈落髮爲徒, 同隐智異不復蹈世. 才年僅九十矣在元聖大王之世.
<영재우적(永才遇賊)>
스님 영재(永才)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향가(鄕歌)를 잘 하였다. 나이 들어 남악(南岳)에 은거하려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는데, 도적 60여 사람을 만났다. [도적이] 해를 입히려 하자, 영재는 칼날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온화하게 그것을 대하였다. 도적이 괴이하여 그의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말하였다. 도적은 본디 그 이름을 들어서, 이에 노래를 짓도록 하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제 마음의
모습 모르던 날에,
멀리 새 달아나듯 지나서 알고,
이제는 숲에 가고 있노라.
다만 잘못된 것은 때리는 님에,
저 세상에 다시 돌아갈 사내들,
이 칼 따위 허물
될 날 세우니,
아아 오직 내 몸의 한은 선업은 아니,
바라는 집으로 모아짐입니다.
도적이 그 뜻에 감동하여, 비단 두 단을 주었다. 영재는 웃으며 앞서 사양하며 말하길, “재물이란 것이 지옥 가는 근본임을 알아, 피하여 산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려 하거늘,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는 이를 땅에 던졌다. 도적이 그 말에 더 감동하여, 모두 칼을 풀고 창을 던지며, 머리를 깎고 [영재의] 무리가 되어, 지리산(智異)에 들어가 함께 숨어 다시는 세상을 밟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가 90에 가까운 원성대왕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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