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정의(周易正義)》는 왕필(王弼, 226~249)의 주역 주(注)를 채용하여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주석(注釋)을 하여 지었다.
52. 간괘(艮卦)[卦象:중산간]
☶ 艮上
☶ 艮下
간(艮)[山.산]이 아래에 있고, 간(艮)[山.산]이 또 위에 있다.
艮其背, 그 등에 그치면 【王弼 注】 目无患也。 【왕필 주】 눈은 근심이 없다. |
[孔穎達 疏]正義曰:目者,能見之物,施止於面,則抑割所見,強隔其欲,是目見之所患。今施止於背,則「目無患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눈[目]”라는 것은, 잘 보는 물건이니, 얼굴에 그침을 베풀면 보는 바를 억지로 끊고 그 하고자 함을 강제로 막으니, 이는 눈이 보는 곳이 근심이다. 지금 그침을 등에 베풀면 “눈은 근심이 없음이다.”」 |
不獲其身; 그 자신을 얻지 못하지만, 【王弼 注】 所止在後,故不得其身也。 【왕필 주】 그치는 곳이 뒤에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을 얻지 못함이다. |
行其庭,不見其人。 그 뜰을 다녀도 사람을 보지 못하니 【王弼 注】 相背, 故也。 【왕필 주】 서로 등졌기 때문이다. |
无咎。 허물이 없다. 【王弼 注】 凡物對面而不相通,否之道也。艮者,止而不相交通之卦也。各止而不相與,何得无咎?唯不相見乃可也。施止於背,不隔物欲,得其所止也。背者,无見之物也。无見則自然靜止,靜止而无見,則不獲其身矣。相背者,雖近而不相見,故行其庭,不見其人也。夫施止不於无見,令物自然而止,而強止之,則姦邪並興。近而不相得,則凶。其得无咎,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故也。 【왕필 주】 모든 사물은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통하지 않으니 막힘의 도(道)이다. 간(艮, 그칠 간)괘라는 것은, 그쳐서 서로 사귀어 통하지 못하는 괘(卦)이다. 각각 그쳐서 서로 더불지 않았는데, 어찌 허물 없음을 얻겠는가? 오직 서로 보지 않아야 할 수 있다. 등에 그침을 베풀면 남[사물]이 하고자함을 막지 않아서 그 그칠 곳을 얻는다. 등이라는 것은 남[사물]을 볼 수 없으며, 봄이 없으면 스스로 그러함을 조용히 그치고, 고요하여 그치고서 봄이 없으면 그 자신을 얻지 못한다. 서로 등져 있는 것은 비록 가까운데도 서로 보지 못기 때문에 그 뜰에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함이다. 그 그침을 베풀기를 남[사물]으로 하여금 봄이 없음을 자연히 그치게 하지 못하고서 강제로 그치게 하면 간사함과 사악함이 나란히 일어나고, 가까운데도 서로 얻지 못하면 흉함이다. 그 허물이 없음을 얻음은, 그 등에 그쳐서 그 자신을 얻지 못하고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의 연고(緣故)를 보지 못함이다. |
[孔穎達 疏]「艮其背不獲其身」至「無咎」。 ○正義曰:「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無咎」者,「艮,止也」,靜止之義,此是象山之卦,其以「艮」為名。施之於人,則是止物之情,防其動欲,故謂之止。「艮其背」者,此明施止之所也。施止得所,則其道易成,施止不得其所,則其功難成,故《老子》曰:「不見可欲,使心不亂也。」「背者,無見之物也。」夫「無見則自然靜止」。夫欲防止之法,宜防其未兆。既兆而止,則傷物情,故施止於無見之所,則不隔物欲,得其所止也。若「施止於面」,則「對面而不相通」,強止其情,則「奸邪並興」,而有凶咎。止而無見,則所止在後,不與而相對。言有物對面而來,則情欲有私於己。既止在後,則是施止無見。所止無見,何見其身,故「不獲其身」。既「不獲其身」,則相背矣。相背者,雖近而不相見,故「行其庭,不見其人」。如此乃得「無咎」,故曰「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無咎」也。又若能止於未兆,則是治之於未萌,若對面不相交通,則是「否」之道也。但止其背,可得「無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간기배불획기신(艮其背不獲其身)에서 무구(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등에 그치면 그 자신을 얻지 못하지만, 그 뜰을 다녀도 사람을 보지 못하니 허물이 없다[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라는 것은, ‘간(艮, 그칠 간)’은 그침이며, 고요하여 그치게 되는 뜻인데 이는 바로 산을 모습[象]한 괘(卦)이니, 그를 가지고 ‘간(艮)’으로 이름을 하였다. 이것을 사람에게 베풀면 이는 남[사물]의 정(情)을 그치게 하여 그 움직이는 욕심을 막기 때문에 일컽기를 ‘그친다[止]’라고 하였다. “그 등에 그치면[艮其背]라는 것은, 이는 그침을 베푸는 장소를 밝힌 것이다.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으면 그 도(道)가 이루어짐으로 바뀌고,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공(功)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노자(老子)〉는 “욕심낼 수 있는데도 보지 않으니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배(背, 등 배)’라는 것은, 남[사물]을 봄이 없음이며, 그 봄이 없으면 자연히 고요하여 그친다. 그 방지 하고자함이 그치게 하는 법은, 마땅히 그 조짐이 없을적에 막아야 하며, 이미 조짐하였는데 그치면 남[사물]의 정(情)이 상하기 때문에 봄이 없는 곳에 그침을 베풀면 남[사물]의 욕심을 막지 않아서 그 그칠 곳을 얻는 것이다. 만약 얼굴에 그침을 베풀면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통하지 못하며, 그 정(情)을 강제로 그치게 하면 간사함과 사악함이 나란히 일어나서 흉함과 허물이 있게 된다. 그치면서 봄이 없으면 그치는 바가 뒤에 있어서 더불어서 서로 대하지 않는다. 남[사물]이 대면하고서 옴이 있으면 마음[情]이 하고자 함에 자기에게 사사로움이 있는데, 이미 그침이 뒤에 있으면 이는 그침을 베풀어 봄이 없음이며, 그치는 곳이 봄이 없는데 어찌 그 자신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그 자신을 얻지 못하는데, 이미 그 자신을 얻지 못하면 서로 등지는 것이다. 서로 등지는 자는 비록 가까운데도 서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뜰을 다녀도 사람을 보지 못함[行其庭 不見其人]”이다. 이와 같이 하면 비로소 허물이 없음을 얻기 때문에 “그 등에 그치면 그 자신을 얻지 못하지만, 그 뜰을 다녀도 사람을 보지 못하니 허물이 없다[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라고 말한 것이다. 또 만약 조짐이 없을적에 잘 그치면 이는 싹트기 전에 다스리는 것이며, 만약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사귀어 통하지 못하면 이는 막힘[否]의 도(道)이니, 다만 그 등에 그치면 “허물이 없음[無咎]”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孔穎達 疏] 「艮其背不獲其身」至「無咎」。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간기배불획기신(艮其背不獲其身)에서 무구(无咎)까지.}
○正義曰:「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無咎」者,「艮,止也」,靜止之義,此是象山之卦,其以「艮」為名。施之於人,則是止物之情,防其動欲,故謂之止。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등에 그치면 그 자신을 얻지 못하지만, 그 뜰을 다녀도 사람을 보지 못하니 허물이 없다[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라는 것은, ‘간(艮, 그칠 간)’은 그침이며, 고요하여 그치게 되는 뜻인데 이는 바로 산을 모습[象]한 괘(卦)이니, 그를 가지고 ‘간(艮)’으로 이름을 하였다. 이것을 사람에게 베풀면 이는 남[사물]의 정(情)을 그치게 하여 그 움직이는 욕심을 막기 때문에 일컽기를 ‘그친다[止]’라고 하였다.
「艮其背」者,此明施止之所也。施止得所,則其道易成,施止不得其所,則其功難成,故《老子》曰:「不見可欲,使心不亂也。」
“그 등에 그치면[艮其背]라는 것은, 이는 그침을 베푸는 장소를 밝힌 것이다.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으면 그 도(道)가 이루어짐으로 바뀌고,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공(功)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노자(老子)〉는 “욕심낼 수 있는데도 보지 않으니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背者,無見之物也。」夫「無見則自然靜止」。夫欲防止之法,宜防其未兆。既兆而止,則傷物情,故施止於無見之所,則不隔物欲,得其所止也。
‘배(背, 등 배)’라는 것은, 남[사물]을 봄이 없음이며, 그 봄이 없으면 자연히 고요하여 그친다. 그 방지 하고자함이 그치게 하는 법은, 마땅히 그 조짐이 없을적에 막아야 하며, 이미 조짐하였는데 그치면 남[사물]의 정(情)이 상하기 때문에 봄이 없는 곳에 그침을 베풀면 남[사물]의 욕심을 막지 않아서 그 그칠 곳을 얻는 것이다.
若「施止於面」,則「對面而不相通」,強止其情,則「奸邪並興」,而有凶咎。止而無見,則所止在後,不與而相對。
만약 얼굴에 그침을 베풀면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통하지 못하며, 그 정(情)을 강제로 그치게 하면 간사함과 사악함이 나란히 일어나서 흉함과 허물이 있게 된다. 그치면서 봄이 없으면 그치는 바가 뒤에 있어서 더불어서 서로 대하지 않는다.
言有物對面而來,則情欲有私於己。既止在後,則是施止無見。所止無見,何見其身,故「不獲其身」。既「不獲其身」,則相背矣。相背者,雖近而不相見,故「行其庭,不見其人」。
남[사물]이 대면하고서 옴이 있으면 마음[情]이 하고자 함에 자기에게 사사로움이 있는데, 이미 그침이 뒤에 있으면 이는 그침을 베풀어 봄이 없음이며, 그치는 곳이 봄이 없는데 어찌 그 자신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그 자신을 얻지 못하는데, 이미 그 자신을 얻지 못하면 서로 등지는 것이다. 서로 등지는 자는 비록 가까운데도 서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뜰을 다녀도 사람을 보지 못함[行其庭 不見其人]”이다.
如此乃得「無咎」,故曰「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無咎」也。
이와 같이 하면 비로소 허물이 없음을 얻기 때문에 “그 등에 그치면 그 자신을 얻지 못하지만, 그 뜰을 다녀도 사람을 보지 못하니 허물이 없다[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라고 말한 것이다.
又若能止於未兆,則是治之於未萌,若對面不相交通,則是「否」之道也。但止其背,可得「無咎」也。
또 만약 조짐이 없을적에 잘 그치면 이는 싹트기 전에 다스리는 것이며, 만약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사귀어 통하지 못하면 이는 막힘[否]의 도(道)이니, 다만 그 등에 그치면 “허물이 없음[無咎]”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彖曰:艮,止也。時止則止,時行則行,動靜不失其時,其道光明。 《단전(彖傳)》에서 말하였다. “간(艮)은 그침이다. 때가 그쳐야 하면 그치고 때가 행하여야 하면 행해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그 때를 잃지 않으니 그 도(道)가 빛나고 밝음이다.” 【王弼 注】 止道不可常用,必施於不可以行;適於其時,道乃光明也。 【왕필 주】 그치는 도(道)가 항상 쓰이면 안 되니 반드시 행하면 안 되는 데에 베풀고, 그 때에 적당하면 도(道)가 비로소 빛나고 밝아 진다. |
[孔穎達 疏]「《彖》曰艮止也」至「其道光明」。 ○正義曰:「艮,止也」者,訓其名也。「時止則止,時行則行,動靜不失其時,其道光明」者,將釋施止有所光明,施止有時,凡物之動息,自各有時運。用止之法,不可為常,必須應時行止,然後其道乃得光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단왈간지야(彖曰艮止也)에서 기도광명(其道光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간(艮)은 그침이다[艮 止也]”라는 것은, 괘(卦)의 이름을 세김[訓]이다. “때가 그쳐야 하면 그치고 때가 행하여야 하면 행해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그 때를 잃지 않으니 그 도(道)가 빛나고 밝음이다[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라는 것은, 장차 그침을 베풂에 광명(光明)한 바가 있으려면, 그침을 베풂에 때가 있어야 함을 해석한 것이다. 모든 사물의 움직임과 고요함은 스스로 각기 시운(時運)이 있으며, 그침을 사용하는 법을 일상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모름지기 때에 응(應)하여 행하고 그쳐야 하며, 그러한 뒤에 그 도(道)가 비로소 광명(光明)함을 얻는 것이다.」 |
艮其止,止其所也。 그 그쳐야 함에 그침은 그 제자리에 그침이다. 【王弼 注】 易背曰止,以明背即止也。施止不可於面,施背乃可也。施止於止,不施止於行,得其所矣,故曰艮其止,止其所也。 【왕필 주】 등[背]으로 바꿈을 그침이라 말하는데, 그로써 등[背]이 바로 그침[止]임을 밝힘이다. 그침을 베풀기를 얼굴에 해서는 안 되고, 등에 베풀어야 비로소 가능함이다. 그칠 곳에 그침을 베풀고 행해야 할 곳에 그침을 베풀지 않아야 그 제자리를 얻기 때문에 “그 그쳐야 함에 그침은 그 제자리에 그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此釋施止之所也。「艮其止」者,疊《經》文「艮其背」也。「易背曰止,以明背」者,無見之物,即是可止之所也。既時止即宜止,時行則行,所以施止須是所。「艮」既訓止,今言「艮其止」,是止其所止也,故曰「艮其止,止其所」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이는 그침을 베푸는 장소를 해석한 것이다. “그 그쳐야 함에 그침[艮其止]”라는 것은, 경문(經文)의 ‘간기배(艮其背)’를 거듭한 것이다. “등[背]으로 바꿈을 그침이라 말하는데, 그로써 등[背]을 밝힘이다[易背曰止,以明背]”라는 것은, 봄이 없는 물건이니 바로 그칠 수 있는 장소인데, 이미 때가 그쳐야 하면 마땅히 그치고 때가 행해야 하면 행하니, 그침을 베풂이 모름지기 이 장소인 까닭이다. ‘간(艮)’을 이미 ‘그침[止]’으로 훈(訓)하였는데, 이제 ‘간기지(艮其止)’라고 말하였음은, 이 그침이 그 제자리에 그침이다. 그러므로 “그 그쳐야 함에 그침은 그 제자리에 그침이다[艮其止,止其所]”라고 말한 것이다.」 |
上下敵應,不相與也。是以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无咎也。 위와 아래가 대적(對敵)하여 응(應)하니 서로 더블지 않음이다. 이로써 그 자신을 얻지 못하고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니 허물이 없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上下敵應,不相與也」者,此就六爻皆不相應,釋艮卦之名,又釋「不獲其身」以下之義。凡應者,一陰一陽,二體不敵。今上下之位,雖復相當,而爻皆峙敵,不相交與,故曰「上下敵應,不相與」也。然八純之卦皆六爻不應,何獨於此言之者,謂此卦既止而不加交,又峙而不應,與「止」義相協,故兼此以明之也。是以「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無咎也」者,此舉《經》文以結之,明相與而止之,則「無咎」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위와 아래가 대적(對敵)하여 응(應)하니 서로 더블지 않음이다[上下敵應 不相與也]”라는 것은, 이는 여섯 효(爻)가 모두 서로 응(應)하지 않음을 가지고 간괘(艮卦)의 이름을 해석하고, 또 ‘그 자신을 얻지 못함[不獲其身]’ 이하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무릇 응(應)이란 것은, 한 음(陰)과 한 양(陽)이 두 몸[體]을 대적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위와 아래의 자리가 비록 다시 서로 마주 당하여서 효(爻)가 모두 대적하여 맞서고 서로 더불어 사귀지 않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대적(對敵)하여 응(應)하니 서로 더블지 않음이다[上下敵應,不相與]”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덟개의 순괘(純卦)인데 모두 여섯 효(爻)가 응(應)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홀로 여기[艮卦]에서만 말을 한 것은, 이는 이 괘(卦)가 이미 그쳐서 더하여 사귀지 못하고 또 대치하여 응(應)하지도 않음을 말함이며, 그침[止]의 뜻과 서로 맞기 때문에 이것을 겸하여 그로써 밝힌 것이다. “이로써 그 자신을 얻지 못하고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니 허물이 없음이다[是以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也]”라는 것은, 이는 경문(經文)을 들어 그로써 맺어서 서로 더불어서 그치면 “허물이 없음[無咎]”을 밝힌 것이다.」 |
[孔穎達 疏] 正義曰:「上下敵應,不相與也」者,此就六爻皆不相應,釋艮卦之名,又釋「不獲其身」以下之義。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위와 아래가 대적(對敵)하여 응(應)하니 서로 더블지 않음이다[上下敵應 不相與也]”라는 것은, 이는 여섯 효(爻)가 모두 서로 응(應)하지 않음을 가지고 간괘(艮卦)의 이름을 해석하고, 또 ‘그 자신을 얻지 못함[不獲其身]’ 이하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凡應者,一陰一陽,二體不敵。今上下之位,雖復相當,而爻皆峙敵,不相交與,故曰「上下敵應,不相與」也。
무릇 응(應)이란 것은, 한 음(陰)과 한 양(陽)이 두 몸[體]을 대적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위와 아래의 자리가 비록 다시 서로 마주 당하여서 효(爻)가 모두 대적하여 맞서고 서로 더불어 사귀지 않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대적(對敵)하여 응(應)하니 서로 더블지 않음이다[上下敵應,不相與]”라고 말한 것이다.
然八純之卦皆六爻不應,何獨於此言之者,謂此卦既止而不加交,又峙而不應,與「止」義相協,故兼此以明之也。
그러나 여덟개의 순괘(純卦)인데 모두 여섯 효(爻)가 응(應)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홀로 여기[艮卦]에서만 말을 한 것은, 이는 이 괘(卦)가 이미 그쳐서 더하여 사귀지 못하고 또 대치하여 응(應)하지도 않음을 말함이며, 그침[止]의 뜻과 서로 맞기 때문에 이것을 겸하여 그로써 밝힌 것이다.
是以「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無咎也」者,此舉《經》文以結之,明相與而止之,則「無咎」也。
“이로써 그 자신을 얻지 못하고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니 허물이 없음이다[是以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也]”라는 것은, 이는 경문(經文)을 들어 그로써 맺어서 서로 더불어서 그치면 “허물이 없음[無咎]”을 밝힌 것이다.」
象曰:兼山,艮;君子以思不出其位。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겹친 산이 간(艮)괘 인데, 군자가 그로써 생각함이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王弼 注】 各止其所,不侵官也。 【왕필 주】 각각 그 제자리에 그치니 [남의] 벼슬을 침범하지 않는다." |
[孔穎達 疏]正義曰:「兼山艮」者,兩山義重,謂之「兼山」也,直置一山,巳能鎮止。今兩山重疊,止義彌大,故曰「兼山艮」也。「君子以思,不出其位」者,止之為義,各止其所。故君子於此之時,思慮所及,不出其已位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겹친 산이 간(艮)괘 인데[兼山 艮]”라는 것은, 두 산의 뜻이 중첩되어 일컫기를 ‘겹친 산[兼山]’이라 하였으며, 직접 하나의 산을 두더라도 이미 눌러 잘 그치게 하는데 지금 두 산이 거듭 겹쳤으니, 그치는 뜻이 더욱 크기 때문에 “겹친 산이 간(艮)괘 이다[兼山 艮]”라고 말한 것이다. “군자가 그로써 생각함이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君子以思不出其位]”라는 것은, 그침[止]의 뜻이 됨은 각각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가 이러한 때에는 생각하고 염려(念慮)함의 미치는 바가 그 자기의 지위를 벗어나가지 않는 것이다.」 |
初六,艮其趾,无咎;利永貞。 초육(初六)은 그 발에 그치니 허물이 없으며, 영원히 곧아야 이롭다. 【王弼 注】 處止之初,行无所之,故止其趾乃得无咎。至靜而定,故利永貞。 【왕필 주】 그침의 처음에 처하고 행함은 가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 발꿈치에 그치니 비로소 허물 없음을 얻는다. 고요함에 이르면서 정해지기 때문에 영원히 곧아야 이롭다. |
[孔穎達 疏]正義曰:「艮其趾,無咎」者,趾,足也,初處體下,故謂之足。居止之初,行無所適,止其足而不行,乃得無咎。故曰「艮其趾,無咎」也。「利永貞」者,靜止之初,不可以躁動,故利在「永貞」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발에 그치니 허물이 없으며[艮其趾 无咎]”라는 것은, ‘지(趾, 발지)’는 발이며, 초육(初六)이 몸[體]의 아래에 처하기 때문에 일컫기를 ‘족(足)’이라 한 것이다. 그침[止]의 처음에 거주하여 행함에 갈 곳이 없어서 그 발을 그쳐서 행하지 않아야 비로소 허물이 없음을 얻기 때문에 “발에 그치니 허물이 없다[艮其趾 无咎]”라고 말한 것이다. “영원히 곧아야 이롭다[利永貞]”라는 것은, 그침의 처음에 고요하니 조급히 움직임으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로움이 “영원히 곧음[永貞]”에 있는 것이다.」 |
象曰:艮其趾,未失正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발꿈치에 그침은, 바름을 잃지 않았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未失正也」者,行則有咎,止則不失其正,釋所以「利永貞」。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바름을 잃지 않았음이다[未失正也]”라는 것은, 행하면 허물이 있고 그치면 그 바름을 잃지 않으니 “영원히 곧아야 이로움[利永貞]”의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
六二,艮其腓,不拯其隨,其心不快。 육이(六二)는 장딴지에 그쳐 그 따름을 구원(救援)하지 못하여 마음이 상쾌(爽快)하지 않다. 【王弼 注】 隨,謂趾也。止其腓,故其趾不拯也。腓體躁而處止,而不得拯其隨,又不能退聽安靜,故其心不快也。 【왕필 주】 수(隨, 따를 수)는 발꿈치를 말한다. 그 장딴지에 그치기 때문에 발꿈치를 구원(救援)하지 못함이다. 장딴지는 몸체가 조급하면서 그침에 처하고서 그 따름을 건지지 못하고 또 물러나 편안하고 고요함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불쾌한 것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艮其腓,不拯其隨」者,腓,腸也。在足之上。腓體或屈或伸,躁動之物,腓動則足隨之,故謂足為隨。拯,舉也,今既施止於腓,腓不得動,則足無拯舉,故曰「艮其腓,不拯其隨」也。「其心不快」者,腓是躁動之物,而強心之,貪進而不得動,則情與質乖也,故曰「其心不快」。此爻明施止不得其所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장딴지에 그쳐 그 따름을 구원(救援)하지 못하여[艮其腓 不拯其隨]”라는 것은, ‘비(腓, 장딴지 비)’는 장딴지이며, 발의 위에 있다. 장딴지의 체(體)는 혹 굽히고 혹 펴며 조급히 움직이는 물건이니, 장딴지가 움직이면 발이 따라 가기 때문에 ‘발’을 일컬어 따름[隨]이라 한 것이다. ‘증(拯, 건질 증)’은 들어줌이며, 지금 이미 장딴지에 그침을 베풀어 장딴지가 움직일 수 없으면 발을 들어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장딴지에 그쳐 그 따름을 구원(救援)하지 못한다[艮其腓 不拯其隨]”라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 상쾌(爽快)하지 않다[其心不快]”라는 것은, 장딴지는 바로 조급히 움직이는 물건인데도 강제로 [그칠] 마음을 먹으니, 나아감을 탐하면서 움직이지 못하면 감정이 성질(性質)과 어그러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상쾌(爽快)하지 않다[其心不快]”라고 말한 것이다. 이 효(爻)는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였음을 밝힌 것이다.」 |
象曰:不拯其隨,未退聽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그 따름을 건지지 못함은, 아직 물러나 듣지 않았음이다." |
[孔穎達 疏]正義曰:「未退聽也」者,聽,從也,既不能拯動,又不能靜退聽從其見止之命,所以「其心不快」矣。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아직 물러나 듣지 않았음이다[未退聽也]”라는 것은, ‘청(聽, 들을 청)’은 따름이며, 이미 [발을] 들어 올려 움직이지 못하고 또 고요히 물러가 그치라는 명령을 듣고 잘 따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그 마음이 불쾌함[其心不快]”이다. |
[孔穎達 疏] 正義曰:「艮其腓,不拯其隨」者,腓,腸也。在足之上。腓體或屈或伸,躁動之物,腓動則足隨之,故謂足為隨。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장딴지에 그쳐 그 따름을 구원(救援)하지 못하여[艮其腓 不拯其隨]”라는 것은, ‘비(腓, 장딴지 비)’는 장딴지이며, 발의 위에 있다. 장딴지의 체(體)는 혹 굽히고 혹 펴며 조급히 움직이는 물건이니, 장딴지가 움직이면 발이 따라 가기 때문에 ‘발’을 일컬어 따름[隨]이라 한 것이다.
拯,舉也,今既施止於腓,腓不得動,則足無拯舉,故曰「艮其腓,不拯其隨」也。
‘증(拯, 건질 증)’은 들어줌이며, 지금 이미 장딴지에 그침을 베풀어 장딴지가 움직일 수 없으면 발을 들어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장딴지에 그쳐 그 따름을 구원(救援)하지 못한다[艮其腓 不拯其隨]”라고 말한 것이다.
「其心不快」者,腓是躁動之物,而強心之,貪進而不得動,則情與質乖也,故曰「其心不快」。此爻明施止不得其所也。
“마음이 상쾌(爽快)하지 않다[其心不快]”라는 것은, 장딴지는 바로 조급히 움직이는 물건인데도 강제로 [그칠] 마음을 먹으니, 나아감을 탐하면서 움직이지 못하면 감정이 성질(性質)과 어그러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상쾌(爽快)하지 않다[其心不快]”라고 말한 것이다. 이 효(爻)는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였음을 밝힌 것이다.」
九三,艮其限,列其夤,厲薰心。 구삼(九三)은 그 허리[한계(限界)]에 그치고 그 등뼈살이 분열되니, 위태로워 마음을 태운다. 【王弼 注】 限,身之中也。三當兩象之中,故曰艮其限。夤,當中脊之肉也。止加其身,中體而分,故列其夤而憂危薰心也。艮之為義,各止於其所,上下不相與,至中則列矣。列加其夤,危莫甚焉,危亡之憂,乃薰灼其心也。施止體中,其體分焉,體分兩主,大器喪矣。 【왕필 주】 한(限)은 자신의 가운데이며, 구3(九三)이 마땅히 두 모습[象]의 가운데이기 때문에 “그 허리[한계(限界)]에 그치고”라고 말하였다. ‘인(夤, 조심할 인)’은 등마루 가운데 살에 해당하니, 그침을 그 자신에 더하여 몸 가운데인데도 나누기 때문에 그 등뼈살을 나누어서 근심과 위태로움이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그침[艮]의 뜻이 됨은 각각 제자리에 그치고, 위와 아래가 서로 더불지 못하니 가운데에 이르면 분열된다. 그 등줄기에 더하여 분열하니 위태로움이 이보다 심함이 없고, 위태롭고 없어짐의 근심이 마침내 그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그침이 몸 가운데에 베풀어짐은, 그 몸이 그곳에서 나누어지니, 몸이 두 주장으로 나뉘어 대기(大器)를 상실한다. |
[孔穎達 疏]「九三艮其限」至「厲薰心」。 ○正義曰:限,身之中,人帶之處,言三當兩象之中,故謂之限。施止於限,故曰「艮其限」也。夤,當中脊之肉也。薰,燒灼也。既止加其身之中,則上下不通之義也,是分列其夤。夤既分列,身將喪亡,故憂危之切,薰灼其心矣。然則君臣共治,大體若身,大體不通,則君臣不接,君臣不接,則上下離心,列夤則身亡,離心則國喪,故曰「列其夤,厲薰心」。 ○注「體分兩主,大器喪矣」。 ○正義曰:「體分兩主大器喪矣」者,大器謂國與身也。此爻亦明施止不得其所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삼간기한(九三艮其限)에서 려훈심(厲薰心)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한限, 한할 한)’은 몸의 가운데이며, 사람이 허리띠가 처하는데, 구3(九三)이 두 모습[象]의 가운데에 해당함을 말하였기 때문에 말하기를 ‘한(限)’이라 하였으며, 그침을 허리[限]에 베풀기 때문에 “그 허리에 그친다[艮其限]”라고 말한 것이다. ‘인(夤, 조심할 인)’은 가운데 등마루의 살에 해당 하고, ‘훈(薰, 향초 훈)’은 태워서 불사름이다. 이미 그침을 그 자신의 가운데에 가하면 위와 아래가 통하지 못하는 뜻이니, 바로 그 등줄기를 나누어 벌림이다. 등줄기가 이미 나누어 벌어지고 자신이 장차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근심하고 위태로움이 간절하여 그 마음을 태워 불사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주와 신하가 함께 다스려지고 큰 몸[體]이 자신과 같으며, 큰 몸[體]이 통하지 않으면 군주와 신하가 접하지(사귀지) 못하고, 군주와 신하가 접하지 못하면 위와 아래가 마음에서 떠나며, 등줄기가 분열되면 자신이 망하고, 마음이 떠나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에 “그 등뼈살이 분열되니, 위태로워 마음을 태운다[列其夤,厲薰心]”라고 말한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체분양주대기상의(體分兩主大器喪矣)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몸이 두 주장으로 나뉘어 대기(大器)를 상실한다[體分兩主 大器喪矣]”라는 것은, ‘큰 그릇[大器]’은 나라와 자신을 말하며, 이 효(爻) 또한 그침을 베풂에 제자리를 얻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
象曰:艮其限,危薰心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그 허리에 그치니 위태하여 마음을 태운다.” |
[孔穎達 疏] 「九三艮其限」至「厲薰心」。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구삼간기한(九三艮其限)에서 려훈심(厲薰心)까지.}
○正義曰:限,身之中,人帶之處,言三當兩象之中,故謂之限。施止於限,故曰「艮其限」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한限, 한할 한)’은 몸의 가운데이며, 사람이 허리띠가 처하는데, 구3(九三)이 두 모습[象]의 가운데에 해당함을 말하였기 때문에 말하기를 ‘한(限)’이라 하였으며, 그침을 허리[限]에 베풀기 때문에 “그 허리에 그친다[艮其限]”라고 말한 것이다.
夤,當中脊之肉也。薰,燒灼也。既止加其身之中,則上下不通之義也,是分列其夤。
‘인(夤, 조심할 인)’은 가운데 등마루의 살에 해당 하고, ‘훈(薰, 향초 훈)’은 태워서 불사름이다. 이미 그침을 그 자신의 가운데에 가하면 위와 아래가 통하지 못하는 뜻이니, 바로 그 등줄기를 나누어 벌림이다.
夤既分列,身將喪亡,故憂危之切,薰灼其心矣。
등줄기가 이미 나누어 벌어지고 자신이 장차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근심하고 위태로움이 간절하여 그 마음을 태워 불사르는 것이다.
然則君臣共治,大體若身,大體不通,則君臣不接,君臣不接,則上下離心,列夤則身亡,離心則國喪,故曰「列其夤,厲薰心」。
그렇다면 군주와 신하가 함께 다스려지고 큰 몸[體]이 자신과 같으며, 큰 몸[體]이 통하지 않으면 군주와 신하가 접하지(사귀지) 못하고, 군주와 신하가 접하지 못하면 위와 아래가 마음에서 떠나며, 등줄기가 분열되면 자신이 망하고, 마음이 떠나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에 “그 등뼈살이 분열되니, 위태로워 마음을 태운다[列其夤,厲薰心]”라고 말한 것이다.」
○注「體分兩主,大器喪矣」。
○ 【왕필 주(王弼 注)】의 “체분양주대기상의(體分兩主大器喪矣)까지”
○正義曰:「體分兩主大器喪矣」者,大器謂國與身也。此爻亦明施止不得其所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몸이 두 주장으로 나뉘어 대기(大器)를 상실한다[體分兩主 大器喪矣]”라는 것은, ‘큰 그릇[大器]’은 나라와 자신을 말하며, 이 효(爻) 또한 그침을 베풂에 제자리를 얻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六四,艮其身,无咎。 육사(六四)는 그 자신에 그치니, 허물이 없다. 【王弼 注】 中上稱身,履得其位,止求諸身,得其所處,故不陷於咎也。 【왕필 주】 가운데와 위쪽이 자신을 칭하고 밟은데가 그 지위를 얻어 그침을 모두 자신에게 구하여 그 처할 곳을 얻었기 때문에 허물에 빠지지 않는다. |
[孔穎達 疏]「六四,艮其身,無咎」。 ○正義曰:「艮其身,無咎」者,「中上稱身」。六四居止之時,已入上體,履得其位,止求諸身,不陷於咎,故曰「艮其身,無咎」也。求,責也。諸,之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육사간기신무구(六四艮其身无咎)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그 자신에 그치니, 허물이 없다[艮其身 无咎]”라는 것은, 가운데[中]와 위[上]가 자신을 칭함이다. 육4(六四)가 그침[止]의 때에 거주하여 이미 윗 몸[上體]으로 들어가고 밟은데가 그 지위를 얻어서 그침을 모두 자신에게 구하여 허물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그 자신에 그치니, 허물이 없다[艮其身 无咎]”라고 말한 것이다. ‘구(求, 구할 구)’는 꾸짖음[責]이다. ‘제(諸, 모두 제)’는 감[之]이다.」 |
象曰:艮其身,止諸躬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그 자신에 그침은, 모두 자기 몸에 그침이다.” 【王弼 注】 自止其躬,不分全體。 【왕필 주】 스스로 자기 몸에 그침은 온전하게 몸을 나누지 않음이다. |
[孔穎達 疏]「《象》曰」至「止諸躬也」。 ○正義曰:「止諸躬也」者,躬猶身也,明能靜止其身,不為躁動也。 ○注「自止其躬不分全體」。 ○正義曰:艮卦總其兩體以為二身,兩體不分,乃謂之全,全乃謂之身。以九三居兩體之際,在於身中,未入上體,則是止於下體,不與上交,所以體分夤列。六四巳入上體,則非上下不接,故能總止其身不分全體。然則身是總名,而言「中上稱身」者何也?蓋至中則體分而身喪,入上體則不分而身全。九三施止於分體,故謂之「限」,六四施止於全體,故謂之「身」。非中上獨是其身,而中下非身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지제궁야(止諸躬也)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모두 자기 몸에 그침이다[止諸躬也]”라는 것은, ‘궁(躬, 몸 궁)’은 자신과 같으며, 그 자신을 고요히 잘 그쳐서 조급히 움직이려 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 【왕필 주(王弼 注)】의 “자지기궁불분전체(自止其躬不分全體)까지”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간괘(艮卦)는 두 몸[體]을 총괄하여 그로써 두 몸으로 삼았으니, 두 몸[體]이 나뉘지 않으니 마침내 일컫기를 ‘온전하다’라고 하였고, 온전하면 비로소 일컫기를 ‘자신[身]’이라 하였다. 구3(九三)은 두 몸[體]의 사이에 거주함으로써 자신 가운데에 있고 아직 상체(上體)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이는 하체(下體)에 그쳐서 위와 더불어 사귀지 못하니, 몸이 나뉘고 등줄기가 나누어져 분열되는 까닭이다. 육4(六四)는 이미 상체(上體)로 들어갔으면, 위와 아래가 접하지 못함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신을 총괄하여 그치게 해서 온전한 몸[體]을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은 바로 〈위와 아래를〉 총괄한 이름인데도 “가운데[中]와 위[上]가 자신을 칭한다[中上稱身]”라느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중앙에 이르면 몸[體]이 나뉘어져서 자신이 죽는데, 상체(上體)로 들어가면 나뉘지 않아 자신이 온전하다. 구3(九三)은 나누어진 몸[體]에 그침을 베풀기 때문에 일컫기를 ‘허리[限]’라고 하였으며, 육4(六四)는 온전한 몸[體]에 그침을 베풀기 때문에 일컫기를 ‘자신[身]’이라 하였는데, 가운데[中]와 위[上]만 홀로 이 자신이고 가운데[中]와 아래[下]는 자신이 아닌 것은 아니다.」 |
[孔穎達 疏] 「《象》曰」至「止諸躬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경(經)의 {상왈(象曰)에서 지제궁야(止諸躬也)까지.}
○正義曰:「止諸躬也」者,躬猶身也,明能靜止其身,不為躁動也。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모두 자기 몸에 그침이다[止諸躬也]”라는 것은, ‘궁(躬, 몸 궁)’은 자신과 같으며, 그 자신을 고요히 잘 그쳐서 조급히 움직이려 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注「自止其躬不分全體」。
○ 【왕필 주(王弼 注)】의 “자지기궁불분전체(自止其躬不分全體)까지”
○正義曰:艮卦總其兩體以為二身,兩體不分,乃謂之全,全乃謂之身。以九三居兩體之際,在於身中,未入上體,則是止於下體,不與上交,所以體分夤列。
○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간괘(艮卦)는 두 몸[體]을 총괄하여 그로써 두 몸으로 삼았으니, 두 몸[體]이 나뉘지 않으니 마침내 일컫기를 ‘온전하다’라고 하였고, 온전하면 비로소 일컫기를 ‘자신[身]’이라 하였다. 구3(九三)은 두 몸[體]의 사이에 거주함으로써 자신 가운데에 있고 아직 상체(上體)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이는 하체(下體)에 그쳐서 위와 더불어 사귀지 못하니, 몸이 나뉘고 등줄기가 나누어져 분열되는 까닭이다.
六四巳入上體,則非上下不接,故能總止其身不分全體。然則身是總名,而言「中上稱身」者何也?蓋至中則體分而身喪,入上體則不分而身全。
육4(六四)는 이미 상체(上體)로 들어갔으면, 위와 아래가 접하지 못함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신을 총괄하여 그치게 해서 온전한 몸[體]을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은 바로 〈위와 아래를〉 총괄한 이름인데도 “가운데[中]와 위[上]가 자신을 칭한다[中上稱身]”라느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중앙에 이르면 몸[體]이 나뉘어져서 자신이 죽는데, 상체(上體)로 들어가면 나뉘지 않아 자신이 온전하다.
九三施止於分體,故謂之「限」,六四施止於全體,故謂之「身」。非中上獨是其身,而中下非身也。
구3(九三)은 나누어진 몸[體]에 그침을 베풀기 때문에 일컫기를 ‘허리[限]’라고 하였으며, 육4(六四)는 온전한 몸[體]에 그침을 베풀기 때문에 일컫기를 ‘자신[身]’이라 하였는데, 가운데[中]와 위[上]만 홀로 이 자신이고 가운데[中]와 아래[下]는 자신이 아닌 것은 아니다.」
六五,艮其輔,言有序,悔亡。
육오(六五)는 그 볼에 그치고 말에 질서가 있으니 후회가 없다.
【王弼 注】 施止於輔,以處於中,故口无擇言,能亡其悔也。
【왕필 주】 그침을 볼에 베풀고 그로써 가운데에 처하기 때문에 입은 말을 택함이 없으니 그 후회를 없앨 수 있다.
[孔穎達 疏] 正義曰:輔,頰車也,能止於輔頰也。以處其中,故「口無擇言」也。言有倫序,能亡其悔,故曰「艮其輔,言有序,悔亡」。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輔’는 頰車(아래턱뼈와 볼)이니, 능히 輔頰에 그친 것이다. 中에 처하였기 때문에 입에 가릴 말이 없는 것이요, 말에 조리와 질서가 있으면 뉘우침을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볼에 그친다. 말에 질서가 있으니, 뉘우침이 없어지리라.”라고 한 것이다.」
象曰:艮其輔,以中正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그 볼에 그침은, 가운데로써 바로함이다."
【王弼 注】 能用中正,故言有序也。
【왕필 주】 가운데가 바름을 잘 사용하기 때문에 말이 질서가 있음이다.
[孔穎達 疏] 正義曰:「以中正」者,位雖不正,以居得其中,故不失其正,故「言有序」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以中正] 자리가 비록 바르지 않으나 거함이 中을 얻었으므로 그 바름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에 질서가 있는 것이다.」
上九,敦艮,吉。
상구(上九)는 그침이 도타우니, 길하다.
【王弼 注】 居止之極,極止者也。敦重在上,不陷非妄,宜其吉也。
【왕필 주】 그침의 꼭대기에 거주하니 지극히 그치는 자이다. 도탑고 무거움이 위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망령되지 않으니 길함이 마땅하다.
[孔穎達 疏] 正義曰:敦,厚也。上九居艮之極,極止者也。在上能用敦厚以自止,不陷非妄,宜其吉也,故曰「敦艮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敦’은 厚함(후덕함)이다. 上九가 艮의 極에 거하니 지극히 그치는 자요, 위에 있으면서 능히 敦厚함을 사용하여 스스로 그쳐서 그름과 망령됨에 빠지지 않으니, 그 吉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도타이 그침이니, 吉하다.”라고 한 것이다.」
象曰:敦艮之吉,以厚終也。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그침이 도타움의 길함은, 그로써 마침이 두터움이다."
[孔穎達 疏] 正義曰:「以厚終」者,言上九能以敦厚自終,所以獲「吉」也。
【공영달소(孔穎達 疏)】 바른 뜻[正義]을 말한다. 「[以厚終] 上九가 능히 敦厚함으로 스스로 끝마치니, 이 때문에 吉함을 얻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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