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 원가(怨歌)/신라향가(新羅鄕歌)

- 신충(信忠) -

 

物叱乎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潤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貌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 後句亡 >

 

 

物叱乎支栢史

(물질호지백사)

물질 좋은 잣이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추찰시부동이옥복타미)

가을 채 안되어 떨어지네

汝於多支行齊

(여어다지행제)

너 어디 진즉에

敎因隱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교인은앙돈은면의개의사호은동의야)

가르침에는 우러러 보던 낯이 계시온데

月羅理影支古

(월나리영지고)

달날이 그림자 지고

理因潤之叱行尸浪阿叱沙矣以支

(리인윤지질행시랑아질사의이지)

이치는 연못 가세 물결질 사이이지

如支貌史沙叱望阿乃

(여지모사사질망아내)

여직 모습이사 바라보니

世理都之叱逸烏隱第也

(세리도지질일오은제야)

세상 모두를 잃은 처지라네

< 後句亡 >

<후구(後句) 없어졌다>

 

 신라 효성왕 때 신충(信忠)이 지은 10구체 향가이다. 삼국유사5 ‘신충괘관조(信忠掛冠條)’에 배경설화와 함께 향찰 표기의 원문 8구가 전한다. 후구(後句)는 잃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10구체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삼국유사(三國遺事)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攴墮米

汝於多攴行齊教因隐

仰頓隐面矣攺衣賜乎隐冬矣也

月羅理影攴古理因淵之叱

行尸浪阿叱沙矣以攴如攴

皃史沙叱望阿乃

世理都之叱逸烏隐第 也

-後句亡-

질 좋은 잣나무가

가을이 채 안 되어 떨어지니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신

우러러 보던 그 얼굴이 바뀌게 되었네

달이 그림자 진 연못의

물결인냥

모습이야 바라보나

세상 모두 잃은 처지여라

-후구(後句) 없어졌다-

 

 2. 양주동 역 

뜰의 잣()

가을에 안 이울어지매

너 어찌 잊어 하신

우럴던 낯이 계시온데

달 그림자 옛 못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얼굴사 바라보나

누리도 싫은 지고

(이하 두구 잃어버림)

   

 3. 김완진 역 

질 좋은 잣이

가을에 말라 떨어지지 아니하매,

너를 중히 여겨 가겠다 하신 것과는 달리

낮이 변해 버리신 겨울에여.

달이 그림자 내린 연못 갓

지나가는 물결에 대한 모래로다.

모습이야 바라보지만

세상 모든 것 여희여 버린 처지여

(이하 두구 잃어버림)

 

 

 

▣ 『삼국유사(三國遺事)

三國遺事 卷 第五

避隐第八 信忠掛冠 효성왕이 신충과의 약속을 어기다

信忠掛冠

孝成王潜邸時, 與賢士信忠圍碁於宫庭栢樹下, 甞謂曰, “他日若㤀郷有如栢樹.” 信忠興拜. 隔數月王即位賞功臣, 㤀忠而不第之. 忠怨而作歌帖於栢樹, 樹忽黄悴. 王恠使審之, 得歌献之, 大驚曰, “萬機鞅掌㡬㤀乎角弓.” 乃召之賜爵禄, 栢樹乃蘇.

歌曰.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攴墮米,

汝於多攴行齊教因隐,

仰頓隐面矣攺衣賜乎隐冬矣也.

月羅理影攴古理因淵之叱

行尸浪阿叱沙矣以攴如攴,

皃史沙叱望阿乃,

世理都之叱逸烏隐第 也.”

後句亡.

由是龍校勘現於两朝.

신충괘관(信忠掛冠 )

효성왕(孝成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현명한 선비인 신충과 궁의 뜰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일찍이 일러 말하길, “훗날에 만약 경()을 잊는다면, 저 잣나무와 같으리라.” 하였다. 신충은 일어나 절하였다. 몇 달이 지나 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는데, 신충을 잊고 그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은 원망하여 노래를 짓고, 잣나무에 붙이자, 나무는 곧 노랗게 시들었다. 왕이 괴이하여 그것을 살펴보게 하니, 노래를 얻어서 바쳤고, [왕은] 크게 놀라 말하길, “천하의 정치(萬機)는 매우 일이 많고 번거로워, 충신(角弓)을 잊었구나!”하고는, 이내 그를 불러서 벼슬과 녹봉을 주니, 잣나무는 이에 되살아났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질 좋은 잣나무가,

가을이 채 안 되어 떨어지니,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신,

우러러 보던 그 얼굴이 바뀌게 되었네.

달이 그림자 진 연못의 물결인냥,

모습이야 바라보나,

세상 모두 잃은 처지여라.”

후구(後句)는 없어졌다.

이로 인하여 총애함이 두 왕에게서 있었다.

 

 신충(信忠)

신충은 신라의 문신으로 효성왕이 잠저(潛邸) 때 자기를 중용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므로 원가(怨歌)를 지어 항의하자 왕이 뉘우쳐 작록(爵祿)을 내렸다. 739(효성왕 3) 이찬 중시(伊粥中侍), 757년 상대등(上大等)에 승진하였다. 763(경덕왕 22) 벼슬에서 은퇴하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斷俗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