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왕필 주

◎ 도덕경 38장/왕필 주(王弼 注)

석담 김한희 2024. 2. 2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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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 왕필(王弼)注

○  도덕경 38장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無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扔之.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최고의 덕은 덕하지 않으니 이로써 덕이 있지만,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이로써 덕이 없다.

최고의 덕은 함이 없으면서 없음으로써 하지만,

낮은 덕은 그것을 하면서 있음으로써 한다.

최고의 어짊은 그것을 하면서 없음으로써 하지만,

최고의 옳음은 그것을 하면서 있음으로써 한다.

최고의 예절은 그것을 하면서 응함이 없으면 팔뚝으로 물리쳐서 끌어 당긴다.

그러므로 도를 잃어버린 이후가 덕이고, 덕을 잃어버린 이후가 어짐이며,

어짐을 잃어버린 이후가 옳음이고, 옳음을 잃어버린 이후가 예절이다.

대저 예절이란 것은 충심과 믿음이 엷어서 혼란의 우두머리이다.

앞에 아는 것은 도의 꽃이지만 근심의 시작이다.

이로써 대장부는 두터움에 처하고 엷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열매에 처하고 꽃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도덕경 왕필(王弼)注 38장

ㅡ 왕필(王弼.226~249)

위(魏)나라 산음(山陰, 산동성) 사람이며 풍부한 재능을 타고 났으나 24살에 요절한 뛰어난 학자이다. 하안과 함께 위진(魏晉) 현학(玄學, 老莊學)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王弼 注】 德者,得也。常得而無喪,利而無害,故以德為名焉。何以得德?由乎道也。何以盡德?以無為用。以無為用則莫不載也,故物無焉,則無物不經,有焉,則 不足以免其生。是以天地雖廣,以無為心。

聖王雖大,以虛為主。故曰,以復而視,則天地之心見。至日而思之,則先王之至覩也。故滅其私而無其身,則四海莫不 瞻,遠近莫不至。殊其己而有其心,則一體不能自全,肌骨不能相容,是以上德之人,唯道是用。不德其德,無執無用,故能有德而無不為,不求而得,不為而成, 故雖有德而無德名也。

下德求而得之,為而成之,則立善以治物,故德名有焉。求而得之必有失焉,為而成之必有敗焉,善名生則有不善應焉,故"下德為之而有以為 也"。無以為者,無所偏為也。凡不能無為而為之者,皆下德也。

仁義禮節是也,將明德之上下,輒舉下德以對上德,至於無以為,極下德下之量, 上仁是也,足及於 無以為而猶為之焉。為之而無以為,故有為,為之患矣。本在無為,母在無名,棄本捨母而適其子,功雖大焉,必有不濟。名雖美焉,偽亦必生。不能不為而成,不興而治,則乃為之,故有宏普博施仁愛之者,而愛之無所偏私,故"上仁為之而無以為也"。

愛不能兼,則有抑抗正真而義理之者,忿枉祐直,助彼攻此物事而有以心為 矣,故"上義為之而有以為也"。

直不能篤則有游飾修文,禮敬之者,尚好修敬,校責往來,則不對之閒,忿怒生焉。故"上禮為之而莫之應,則攘臂而扔之"。

夫大之極 也,其唯道乎,自此已往,豈足尊哉。故雖德盛業大,富而有, 萬物,猶各得其德,雖貴以無為用,不能捨無以為體也,不能捨無以為體則失其為大矣,所謂失道而後 德也。以無為用,德其母,故能己不勞焉而物無不理。下此已往,則失用之母,不能無為而貴博施,不能博施而貴正直,不能正直而貴飾敬,所謂失德而後仁,失仁 而後義,失義而後禮也。

夫禮也,所始首於忠信不篤,通簡不陽,責備於表,機微爭制. 夫仁義發於內,為之猶偽,況務外飾而可久乎? 故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也。

前識者,前人而識也,即下德之倫也。竭其聰明以為前識,役其智力以營庶事,雖德其情,姦巧彌密,雖豐其譽,愈喪篤實。勞而事昏,務而治薉,雖竭聖智 而民愈害。舍己任物,則無為而泰。守夫素樸,則不順典制,聽彼所獲,棄此所守,識道之華而愚之首,故茍得其為功之母,則萬物作焉而不辭也。守夫素樸,則不順典制,聽彼所獲,棄此所守,識道之華而愚之首,故茍得其為功之母,則萬物作焉而不辭也。

萬事存焉而不勞 也,用不以形,御不以名,故仁義可顯,禮敬可彰也。

夫載之以大道,鎮之以為名,則物無所尚,志無所營,各任其貞,事用其誠,則仁德厚焉,行義正焉,禮敬清 焉,棄其所載,舍其所生,用其成形,役其聰明,仁則誠焉,義其競焉,禮其爭焉,故仁德之厚,非用仁之所能也,行義之正,非用義之所成也。夫載之以大道,鎮之以為名,則物無所尚,志無所營,各任其貞,事用其誠,則仁德厚焉,行義正焉,禮敬清 焉,棄其所載,舍其所生,用其成形,役其聰明,仁則誠焉,義其競焉,禮其爭焉,故仁德之厚,非用仁之所能也,行義之正,非用義之所成也。

禮敬之清,非用禮 之所濟也。載之以道,統之以母,故顯之而無所尚,彰之而無所競,用夫無名,故名以篤焉。用夫無形,故形以成焉。守母以存其子,崇本以舉其末,則形名俱有而 邪不生。大美配天而華不作,故母不可遠,本不可失。仁義,母之所生,非可以為母。形器,匠之所成,非可以為匠也。捨其母而用其子,棄其本而適其末. 名則有 所分,形則有所止,雖極其大,必有不周,雖盛其美,必有憂患,功在為之,豈足處也。

【왕필 주】 덕(德)이란 것은 얻음이다. 항상 얻으면서 잃음이 없고 이로우면서 해로움이 없기 때문에 얻음으로써 그 이름을 한다. 어찌 얻음으로써 얻겠는가? 도를 말미암음이다. 어찌 다함으로써 얻겠는가? 없음으로써 사용을 함이다.

없음으로써 사용을 하면 싣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이 그곳에 없으니, 곧 사물이 없고 법도가 아닌데 그곳에 있다면 그 삶을 면함으로 부족하다. 이로서 하늘과 땅이 비록 넓어도 없음으로써 마음을 삼았다.

성스러운 왕이 비록 크더라도 비움으로써 주인을 삼는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로서 다시 보면 천지의 마음이 보인다."라고 했다. 동지 날[至日]에 생각을 하면 선왕의 지극함을 목도(目覩)한다. 그러므로 그 사사로움을 없애면서 그 자신이 없애면 세상이 우러러 보지 않음이 없고 멀고 가까이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

자기가 뛰어나면서 그 마음이 있으면 하나의 몸체가 스스로 잘 온전하지 않고 살과 뼈가 서로 잘 포용하지 않으니 이로서 높은 덕의 사람은 오직 도를 이에 사용한다.

그 얻음을 얻지 않으면 잡음이 없고 사용함도 없기 때문에 잘 얻음이 있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고 구하지 않아도 얻고 하지 않아도 이루기 때문에 비록 얻음이 있어도 이름을 얻음은 없다.

낮은 얻음을 구하면서 얻으려 하고 하면서 이루어 진다면 착함을 세움으로 사물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름을 얻음이 그곳에 있다. 구하면서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그곳에는 잃음이 있고 하면서 이루려고 하면 반드시 그곳에는 패함이 있으며 착한 이름을 낳으면 그곳에 착하지 않음이 응한다. 그러므로 "낮은 얻음을 하려고 하면서 있음으로써 한다."라고 했다.

없음으로서 하는 사람은 치우침을 하는 바가 없다. 대체로 함이 없음을 잘하지 않으면서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낮은 얻음이다.

어짊과 옳음은 이 예절인데, 장차 밝은 덕의 높고 낮음을 문득 낮은 얻음을 들어서 높은 얻음을 상대함은 없음에 으로도록 함이고 낮은 꼭대기가 낮은 얻음을 헤아림이 높은 어짐이다. 없음으로서 함에 미침이 넉넉하면 오히려 그곳에 하려 함이다. 하려고 하면서 없음으로서 하기 때문에 있음을 하며 하려고 하는 근심이다.

근본은 함이 없음에 있고 어미는 이름 없음에 있으며 근본을 버리고 어미를 버리면서 그 자식을 맞이하여 공이 비록 그곳에 크더라도 반드시 구제하지 않음이 있다. 이름이 비록 그것을 찬미하더라도 거짓 또한 반드시 생겨난다.

잘하지 않고 하지 않으면서 이루고 일으키지 않으면서 다스리면 이에 하려고 함이기 때문에 크고 넓음이 있어서 어짊을 아끼는 것을 널리 베풀면서 아끼려 함은 사사로이 치우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높은 어짊을 하려고 하면 없음으로서 한다."라고 했다.

잘 겸하지 않으면서 아끼면 바르고 참됨을 억누르며 가로막고 있으면서 옳은 이치의 사람이 굽은데 성내고 곧음을 도우니 저것을 돕지만 이것을 공격하며 사물이 일하면서 마음 삼음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높은 옳음을 하려고 하면 있음으로써 한다."라고 했다.

곧음을 도탑게 잘하지 않으면 글을 닦아 꾸며도 떠내려감이 있고 예절을 공경하는 것은 오히려 공경을 닦음을 좋아하여 가르침과 책함이 오고 간다면 상대하지 않는 사이에 분노가 그곳에 생겨난다. 그러므로 "높은 예절을 하려고 하면서 응함이 없게 한다면 팔로 물리치면서 당기려 함이다."라고 했다.

그 큼의 꼭대기는 그 오직 도일 것인가? 이로 부터 자기가 갔는데 어찌 높음이 넉넉하랴! 그러므로 비록 덕이 성대하고 업이 크고 부유하면서 있음이니, 만물이 오직 각각 그 덕을 얻으며 비록 귀함으로서 사용됨이 없고 잘 버리지 않고 없음으로서 몸체를 삼는다, 잘 버리지 않고 없음으로서 몸체를 삼으면 그 위대함을 잃으니 일컬은 바 "도를 잃은 이후의 얻음이다."라고 했다.

없음으로서 사용을 함은 그 어미의 덕이기 때문에 자기를 잘하여 수고하지 않으면서도 사물이 이치가 아님이 없다. 이 낮음이 이미 갔다면 어미를 사용함을 잃고 함이 없음을 잘하지 않으면서 귀함을 넓리 베풀고 널리 잘 배풀지 않으면서 귀함을 바르고 곧게하며 정직하지 않으면서 귀함을 공경하여 꾸미니 일컬은 바 "덕을 잃어버린 이후에 어짐이며, 어짐을 잃어버린 이후에 옳음이고, 옳음을 잃어버린 이후에 예절이다."라고 했다.

그 예절은 충실과 신의가 도탑지 않고 밝지 않은데 올곳게 통하고 겉을 갖추어서 책망하며 기미를 다투어 제어하는데에 머리로 하여 시작하는 바이다. 그 어짊과 옳음은 안에서 일어나는데 하고자 하면 오히려 거짓인데 하물며 밖을 꾸밈에 힘쓰면서 오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라는 것은 충실과 신의가 엷으면서 혼란의 머리이다."라고 했다.

앞을 아는 사람은, 남들에 앞서 앎이며 낮은 덕의 윤리에 나아감이다. 그 총명함을 다하여서 앞을 알게 되고 그 지혜의 힘을 부려서 몇가지 일을 경영하는데 비록 그 실정을 얻어도 간사함과 교묘함이 더욱 빽빽해지며 비록 명예가 풍성해져도 도탑고 알참을 더욱 잃는다.

수고로우면서 일은 어둡고 힘쓰는데 다스림은 거칠어지니 비록 성스러운 지혜를 다하면서도 백성을 더욱 해친다. 자기를 버리고 사물에 임하면 함이 없으면서도 커진다. 그 소박함을 지킨다면 법제를 따르지 않아도 남이 얻을 바를 듣고 내가 지킬 바를 버리며 도의 꽃을 알지만 어리석음의 머리이기 때문에 진실로 그 공의 어미 됨을 얻으면 만물이 그곳에 만들어지면서도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그곳에 만들어지면서 수고롭지 않음은 사용을 모양으로 않으며 거느림을 이름으로 안하기 때문에 어짊과 옳음이 드러날 수 있고 예절과 공경이 선명(鮮明)해 질 수 있다.

큰 도로서 그것을 실어주고, 이름을 하여서 진압(鎭壓)한다면 사물을 숭상(崇尙)하는 바가 없고 뜻을 운영하는 바가 없으며 각각 그 곧음에 임하고 그 일을 성실하게 사용한다면 어진 덕이 그곳에 두텁고 옳음을 행하여 그곳을 바로잡으며 예를 공경하여 그곳을 맑게하고 그 실은 바를 버리며 그 생겨나는 바를 버리고 그 모양을 이루어서 사용하며 그 총명함을 부려서 어질어 지면 그곳이 성실하고 옳음을 그곳에서 다투고 예를 그곳에서 다툰다, 그러므로 “어진 덕의 두터움은 어짊의 잘하는 바를 사용함이 아니고 옳음을 행함의 바름은 옳음의 이루는 바를 사용함이 아니다.”라고 했다.

예의바름과 공경스러움이 맑다. 도로서 싣고 어미로서 거느리기 때문에 드러내면서도 높이는 바가 없으므로 빛을 내면서 다투는 바 없고 그 이름 없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름이 그곳에 독실하다. 그 모양 없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모양으로서 그것을 이룬다. 어미를 지킴으로서 그 자식이 존재하고 근본을 높임으로서 그 끝을 들어준다면 모양과 이름이 있음을 구비하면서도 사악함이 생겨나지 않는다. 크게 찬미하여 하늘을 배필하면서도 꽃을 지어내지 않기 때문에 어미를 멀리 할 수 없고 근본을 잃음이 불가하다. 어짐과 옳음은 어미가 낳는 바이고 어미 됨으로 할 수 있음은 아니며 모양과 그릇은 장인이 이루는 바이며 장인이 됨으로 할 수 있음은 아니다. 그 어미를 버리면서 그 자식을 사용하고 그 근본을 버리면서 그 끝을 맞이한다.

이름을 하면 나누는 바 있고 모양을 하면 그치는 바 있으며 비록 그 큼의 꼭대기라 하여도 반드시 두루하지 않음이 있고 비록 그 찬미함이 성대해도 반드시 우려하여 근심함이 있으며 공이 하고자 함에 있는데 어찌 [공에] 처함이 넉넉하겠는가?

▣ 도덕경 제38장의 왕필주는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위와 같이 길게 한 문장으로 붙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과 뜻이 통하는 부분의 왕필주를 아래와 같이 본문에 나누어 붙여서 해석했다.

上德不德,是以有德;下德不失德,是以無德。上德無為而無以為;下德為之而有以為。

<최고의 덕은 덕하지 않으니 이로써 덕이 있지만,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이로써 덕이 없다. 최고의 덕은 함이 없으면서 없음으로써 하지만, 낮은 덕은 그것을 하면서 있음으로써 한다. >

【王弼 注】 德者,得也。常得而無喪,利而無害,故以德為名焉。何以得德?由乎道也。何以盡德?以無為用。以無為用則莫不載也,故物無焉,則無物不經,有焉,則 不足以免其生。是以天地雖廣,以無為心。

聖王雖大,以虛為主。故曰,以復而視,則天地之心見。至日而思之,則先王之至覩也。故滅其私而無其身,則四海莫不 瞻,遠近莫不至。殊其己而有其心,則一體不能自全,肌骨不能相容,是以上德之人,唯道是用。不德其德,無執無用,故能有德而無不為,不求而得,不為而成, 故雖有德而無德名也。

下德求而得之,為而成之,則立善以治物,故德名有焉。求而得之必有失焉,為而成之必有敗焉,善名生則有不善應焉,故"下德為之而有以為 也"。無以為者,無所偏為也。凡不能無為而為之者,皆下德也。

【왕필 주】 덕(德)이란 것은 얻음이다. 항상 얻으면서 잃음이 없고 이로우면서 해로움이 없기 때문에 얻음[德]으로써 그 이름을 한다. 어찌 덕(德)으로써 얻겠는가? 도를 말미암음이다. 어찌 다함으로써 얻겠는가? 없음으로써 사용을 함이다.

없음으로써 사용을 하면 싣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이 그곳에 없으니, 곧 사물이 없고 법도가 아닌데 그곳에 있다면 그 삶을 면함으로 부족하다. 이로서 하늘과 땅이 비록 넓어도 없음으로써 마음을 삼았다.

성스러운 왕이 비록 크더라도 비움으로써 주인을 삼는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로서 다시 보면 천지의 마음이 보인다."라고 했다. 동지 날[至日]에 생각을 하면 선왕의 지극함을 목도(目覩)한다. 그러므로 그 사사로움을 없애면서 그 자신이 없애면 세상이 우러러 보지 않음이 없고 멀고 가까이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

자기가 뛰어나면서 그 마음이 있으면 하나의 몸체가 스스로 잘 온전하지 않고 살과 뼈가 서로 잘 포용하지 않으니 이로서 높은 덕의 사람은 오직 도를 이에 사용한다.

그 얻음을 얻지 않으면 잡음이 없고 사용함도 없기 때문에 잘 얻음이 있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고 구하지 않아도 얻고 하지 않아도 이루기 때문에 비록 얻음이 있어도 이름을 얻음은 없다.

낮은 얻음을 구하면서 얻으려 하고 하면서 이루어 진다면 착함을 세움으로 사물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름을 얻음이 그곳에 있다. 구하면서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그곳에는 잃음이 있고 하면서 이루려고 하면 반드시 그곳에는 패함이 있으며 착한 이름을 낳으면 그곳에 착하지 않음이 응한다. 그러므로 "낮은 얻음을 하려고 하면서 있음으로써 한다."라고 했다.

없음으로서 하는 사람은 치우침을 하는 바가 없다. 대체로 함이 없음을 잘하지 않으면서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낮은 얻음이다.

上仁為之而無以為;

<최고의 어짊은 그것을 하면서 없음으로써 하지만, >

【王弼 注】 仁義禮節是也,將明德之上下,輒舉下德以對上德,至於無以為,極下德下之量, 上仁是也,足及於 無以為而猶為之焉。為之而無以為,故有為,為之患矣。本在無為,母在無名,棄本捨母而適其子,功雖大焉,必有不濟。名雖美焉,偽亦必生。不能不為而成,不興而治,則乃為之,故有宏普博施仁愛之者,而愛之無所偏私,故"上仁為之而無以為也"。

【왕필 주】 어짊과 옳음은 이 예절인데, 장차 밝은 덕의 높고 낮음을 문득 낮은 얻음을 들어서 높은 얻음을 상대함은 없음에 으로도록 함이고 낮은 꼭대기가 낮은 얻음을 헤아림이 높은 어짐이다. 없음으로서 함에 미침이 넉넉하면 오히려 그곳에 하려 함이다. 하려고 하면서 없음으로서 하기 때문에 있음을 하며 하려고 하는 근심이다.

근본은 함이 없음에 있고 어미는 이름 없음에 있으며 근본을 버리고 어미를 버리면서 그 자식을 맞이하여 공이 비록 그곳에 크더라도 반드시 구제하지 않음이 있다. 이름이 비록 그것을 찬미하더라도 거짓 또한 반드시 생겨난다.

잘하지 않고 하지 않으면서 이루고 일으키지 않으면서 다스리면 이에 하려고 함이기 때문에 크고 넓음이 있어서 어짊을 아끼는 것을 널리 베풀면서 아끼려 함은 사사로이 치우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높은 어짊을 하려고 하면 없음으로서 한다."라고 했다.

上義為之而有以為。

<최고의 옳음은 그것을 하면서 있음으로써 한다. >

【王弼 注】 愛不能兼,則有抑抗正真而義理之者,忿枉祐直,助彼攻此物事而有以心為 矣,故"上義為之而有以為也"。

【왕필 주】 잘 겸하지 않으면서 아끼면 바르고 참됨을 억누르며 가로막고 있으면서 옳은 이치의 사람이 굽은데 성내고 곧음을 도우니 저것을 돕지만 이것을 공격하며 사물이 일하면서 마음 삼음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높은 옳음을 하려고 하면 있음으로써 한다."라고 했다.

上禮為之而莫之應, 則攘臂而扔之。<최고의 예절은 그것을 하면서 응함이 없으면 팔뚝으로 물리쳐서 끌어 당긴다. >​

【王弼 注】 直不能篤則有游飾修文,禮敬之者,尚好修敬,校責往來,則不對之閒,忿怒生焉。故"上禮為之而莫之應,則攘臂而扔之"。

【왕필 주】 곧음을 도탑게 잘하지 않으면 글을 닦아 꾸며도 떠내려감이 있고 예절을 공경하는 것은 오히려 공경을 닦음을 좋아하여 가르침과 책함이 오고 간다면 상대하지 않는 사이에 분노가 그곳에 생겨난다. 그러므로 "높은 예절을 하려고 하면서 응함이 없게 한다면 팔로 물리치면서 당기려 함이다."라고 했다.

故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

<그러므로 도를 잃은 이후가 덕이고, 덕을 잃은 이후가 어짐이며, 어짐을 잃은 이후가 옳음이고, 옳음을 잃은 이후가 예절이다. >

【王弼 注】 夫大之極 也,其唯道乎,自此已往,豈足尊哉。故雖德盛業大,富而有, 萬物,猶各得其德,雖貴以無為用,不能捨無以為體也,不能捨無以為體則失其為大矣,所謂失道而後 德也。以無為用,德其母,故能己不勞焉而物無不理。下此已往,則失用之母,不能無為而貴博施,不能博施而貴正直,不能正直而貴飾敬,所謂失德而後仁,失仁 而後義,失義而後禮也。

【왕필 주】 그 큼의 꼭대기는 그 오직 도일 것인가? 이로 부터 자기가 갔는데 어찌 높음이 넉넉하랴! 그러므로 비록 덕이 성대하고 업이 크고 부유하면서 있음이니, 만물이 오직 각각 그 덕을 얻으며 비록 귀함으로서 사용됨이 없고 잘 버리지 않고 없음으로서 몸체를 삼는다, 잘 버리지 않고 없음으로서 몸체를 삼으면 그 위대함을 잃으니 일컬은 바 "도를 잃은 이후의 얻음이다."라고 했다.

없음으로서 사용을 함은 그 어미의 덕이기 때문에 자기를 잘하여 수고하지 않으면서도 사물이 이치가 아님이 없다. 이 낮음이 이미 갔다면 어미를 사용함을 잃고 함이 없음을 잘하지 않으면서 귀함을 넓리 베풀고 널리 잘 배풀지 않으면서 귀함을 바르고 곧게하며 정직하지 않으면서 귀함을 공경하여 꾸미니 일컬은 바 "덕을 잃어버린 이후에 어짐이며, 어짐을 잃어버린 이후에 옳음이고, 옳음을 잃어버린 이후에 예절이다."라고 했다.

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

<대저 예절이란 것은 충심과 믿음이 엷어서 혼란의 우두머리이다. >

【王弼 注】 夫禮也,所始首於忠信不篤,通簡不陽,責備於表,機微爭制. 夫仁義發於內,為之猶偽,況務外飾而可久乎? 故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也。

【왕필 주】 그 예절은 충실과 신의가 도탑지 않고 밝지 않은데 올곳게 통하고 겉을 갖추어서 책망하며 기미를 다투어 제어하는데에 머리로 하여 시작하는 바이다. 그 어짊과 옳음은 안에서 일어나는데 하고자 하면 오히려 거짓인데 하물며 밖을 꾸밈에 힘쓰면서 오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라는 것은 충실과 신의가 엷으면서 혼란의 머리이다."라고 했다.

前識者,道之華,而愚之始。是以大丈夫處其厚,不居其 薄;處其實,不居其華。故去彼取此

<앞에 아는 것은 도의 꽃이지만 근심의 시작이다. 이로써 대장부는 두터움에 처하고 엷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열매에 처하고 꽃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王弼 注】 前識者,前人而識也,即下德之倫也。竭其聰明以為前識,役其智力以營庶事,雖德其情,姦巧彌密,雖豐其譽,愈喪篤實。勞而事昏,務而治薉,雖竭聖智 而民愈害。舍己任物,則無為而泰。守夫素樸,則不順典制,聽彼所獲,棄此所守,識道之華而愚之首,故茍得其為功之母,則萬物作焉而不辭也。守夫素樸,則不順典制,聽彼所獲,棄此所守,識道之華而愚之首,故茍得其為功之母,則萬物作焉而不辭也。

萬事存焉而不勞 也,用不以形,御不以名,故仁義可顯,禮敬可彰也。

夫載之以大道,鎮之以為名,則物無所尚,志無所營,各任其貞,事用其誠,則仁德厚焉,行義正焉,禮敬清 焉,棄其所載,舍其所生,用其成形,役其聰明,仁則誠焉,義其競焉,禮其爭焉,故仁德之厚,非用仁之所能也,行義之正,非用義之所成也。夫載之以大道,鎮之以為名,則物無所尚,志無所營,各任其貞,事用其誠,則仁德厚焉,行義正焉,禮敬清 焉,棄其所載,舍其所生,用其成形,役其聰明,仁則誠焉,義其競焉,禮其爭焉,故仁德之厚,非用仁之所能也,行義之正,非用義之所成也。

禮敬之清,非用禮 之所濟也。載之以道,統之以母,故顯之而無所尚,彰之而無所競,用夫無名,故名以篤焉。用夫無形,故形以成焉。守母以存其子,崇本以舉其末,則形名俱有而 邪不生。大美配天而華不作,故母不可遠,本不可失。仁義,母之所生,非可以為母。形器,匠之所成,非可以為匠也。捨其母而用其子,棄其本而適其末. 名則有 所分,形則有所止,雖極其大,必有不周,雖盛其美,必有憂患,功在為之,豈足處也。

【왕필 주】 앞을 아는 사람은, 남들에 앞서 앎이며 낮은 덕의 윤리에 나아감이다. 그 총명함을 다하여서 앞을 알게 되고 그 지혜의 힘을 부려서 몇가지 일을 경영하는데 비록 그 실정을 얻어도 간사함과 교묘함이 더욱 빽빽해지며 비록 명예가 풍성해져도 도탑고 알참을 더욱 잃는다.

수고로우면서 일은 어둡고 힘쓰는데 다스림은 거칠어지니 비록 성스러운 지혜를 다하면서도 백성을 더욱 해친다. 자기를 버리고 사물에 임하면 함이 없으면서도 커진다. 그 소박함을 지킨다면 법제를 따르지 않아도 남이 얻을 바를 듣고 내가 지킬 바를 버리며 도의 꽃을 알지만 어리석음의 머리이기 때문에 진실로 그 공의 어미 됨을 얻으면 만물이 그곳에 만들어지면서도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그곳에 만들어지면서 수고롭지 않음은 사용을 모양으로 않으며 거느림을 이름으로 안하기 때문에 어짊과 옳음이 드러날 수 있고 예절과 공경이 선명(鮮明)해 질 수 있다.

큰 도로서 그것을 실어주고, 이름을 하여서 진압(鎭壓)한다면 사물을 숭상(崇尙)하는 바가 없고 뜻을 운영하는 바가 없으며 각각 그 곧음에 임하고 그 일을 성실하게 사용한다면 어진 덕이 그곳에 두텁고 옳음을 행하여 그곳을 바로잡으며 예를 공경하여 그곳을 맑게하고 그 실은 바를 버리며 그 생겨나는 바를 버리고 그 모양을 이루어서 사용하며 그 총명함을 부려서 어질어 지면 그곳이 성실하고 옳음을 그곳에서 다투고 예를 그곳에서 다툰다, 그러므로 “어진 덕의 두터움은 어짊의 잘하는 바를 사용함이 아니고 옳음을 행함의 바름은 옳음의 이루는 바를 사용함이 아니다.”라고 했다.

예의바름과 공경스러움이 맑다. 도로서 싣고 어미로서 거느리기 때문에 드러내면서도 높이는 바가 없으므로 빛을 내면서 다투는 바 없고 그 이름 없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름이 그곳에 독실하다. 그 모양 없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모양으로서 그것을 이룬다. 어미를 지킴으로서 그 자식이 존재하고 근본을 높임으로서 그 끝을 들어준다면 모양과 이름이 있음을 구비하면서도 사악함이 생겨나지 않는다. 크게 찬미하여 하늘을 배필하면서도 꽃을 지어내지 않기 때문에 어미를 멀리 할 수 없고 근본을 잃음이 불가하다. 어짐과 옳음은 어미가 낳는 바이고 어미 됨으로 할 수 있음은 아니며 모양과 그릇은 장인이 이루는 바이며 장인이 됨으로 할 수 있음은 아니다. 그 어미를 버리면서 그 자식을 사용하고 그 근본을 버리면서 그 끝을 맞이한다.

이름을 하면 나누는 바 있고 모양을 하면 그치는 바 있으며 비록 그 큼의 꼭대기라 하여도 반드시 두루하지 않음이 있고 비록 그 찬미함이 성대해도 반드시 우려하여 근심함이 있으며 공이 하고자 함에 있는데 어찌 [공에] 처함이 넉넉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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