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주소(注疏)[刑昺]/3.팔일(八佾)편

◎ 『논어주소(論語註疏)』 팔일(八佾) 卷​ 3 - 15

석담 김한희 2024. 5. 2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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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주소(論語註疏)』

◎ 『논어(論語)』

○ 팔일(八佾) 卷​ 3 - 15

3-15)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자입대묘, 매사문. 혹왈: "숙위추인지자지례호? 입대묘, 매사문." 자문지왈: "시례야.")

공자께서 주공(周公)의 사당에 들어가시면 매사를 물으셨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누가 추(鄹) 땅 사람의 아들이 예(禮)를 안다고 하는가?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묻더라”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그것을 듣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예(禮)이다.”

 

《논어집해(論語集解)》

『논어집해(論語集解)』는 중국 위(魏)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하안(何晏, 193 ~ 249)이 당시까지 전해지던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대한 주석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논어집해(論語集解)』에는 공안국(孔安國, BC156?~BC74), 정현(鄭玄, 127~200), 마융(馬融, 79~166), 왕숙(王肅, 195~256), 포함(包咸, BC6~65), 주생렬(周生烈, ?~220) 등의 주석이 실려있으며, 하안(何晏)의 견해 역시 수록되어 있다.

【集解】 子入太廟,(包曰:「太廟,周公廟。孔子仕魯,魯祭周公而助祭也。」 ◎포함이 말하였다:“태묘(太廟)”는 주공(周公)의 사당이다.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벼슬할 적에, 노나라 주공을 제사 지내는데 제사를 도왔다.) 每事問。或曰:「孰謂鄹人之子知禮乎?入太廟,每事問。」(孔曰:「鄹,孔子父叔梁紇所治邑。時人多言孔子知禮,或人以為,知禮者不當複問。」 ◎공안국이 말하였다:“추(鄹)”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다스리던 곳의 읍이다. 당시 사람들이 공자가 예(禮)를 안다고 말을 많이하니, 어떤 사람이 예(禮)를 아는 자가 거듭 묻는 것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음이다.)子聞之,曰:「是禮也。」(孔曰:「雖知之,當複問,慎之至也。」◎공안국이 말하였다:비록 그것을 알더라도, 마땅히 거듭 물었으니 신중함이 지극한 것이다.)

 
 

《논어주소(論語註疏)》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하안(何晏, 193~249 魏)이 주(註)를 달아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지었으며, 북송(北宋)의 형병(邢昺, 932~1010)이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소(疏)를 붙여서 논어주소(論語註疏)를 지었다.

 

【註疏】 「 子入」至「禮也」。

○【註疏】 논어 경문(經文)의 "[자입(子入)]에서 [예야(禮也)]까지"

○正義曰:此章言夫子慎禮也。

○正義曰:이 장(章)은 부자(夫子)께서 예(禮)를 삼가하셨음을 말한 것이다.

「子入太廟」者,子,謂孔子。太廟,周公廟。孔子仕魯,魯祭周公而助祭,故得入之也。

<경문(經文)에서> "공자께서 주공(周公)의 사당에 들어가시면[子入太廟]"라는 것의, 자(子)는 공자(孔子)를 일컫음이다. 태묘(太廟)는 주공(周公)의 사당이다. 공자께서 노(魯)나라에 벼슬하시며, 노나라 주공을 제사지내면서 제사를 도우셨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每事問」者,言太廟之中,禮器之屬,每事輒問於令長也。

<경문(經文)에서> "매사를 물으셨다[每事問]"라는 것은, 태묘(太廟) 안의 제기의 예(禮) 등속을 일 마다 번번이 수장(首長)에게 물었음을 말한 것이다.

「或曰:孰謂鄹人之子知禮乎?入太廟,每事問」者,孰,誰也。鄹人,魯鄹邑大夫孔子父叔梁紇也。

<경문(經文)에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누가 추(鄹) 땅 사람의 아들이 예(禮)를 안다고 하는가?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묻더라'라고 하였다[或曰 孰謂鄹人之子 知禮乎 入太廟 每事問]"라는 것은, 숙(孰: 누구 숙)은 누구이고, 추인(鄹人)은 노(魯)나라 추읍(鄹邑)의 대부인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다.

或有人曰:「誰謂鄹大夫之子知禮者也?」時人多言孔子知禮,或人以為,知禮者不當復問,何為入太廟而每事問乎?意以為孔子不知禮。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추읍 대부의 아들이 예(禮)를 아는 자라고 하느냐.”고 했는데, 당시에 공자가 예(禮)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떤 사람이 예를 아는 자라면 응당 다시 묻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면서, 어째서 태묘에 들어가서 일 마다 묻느냐고 하며, 생각하기를 공자가 예(禮)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子聞之,曰:是禮也」者,孔子聞或人之譏,乃言其問之意,以宗廟之禮當須重慎,不可輕言,雖已知之,更當復問,慎之至也。

<경문(經文)에서> "공자께서 그것을 듣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예(禮)이다.'[子聞之曰 是禮也]"라는 것은, 공자께서 혹인의 비웃는 말을 들으시고서, 곧 그 물으신 뜻을 말씀하시기를, "그로써 종묘의 예(禮)는 모름지기 신중해야 마땅하고 가벼이 말해서는 안 되며, 비록 이미 알고 있더라도 고쳐서 다시 물어야 하고 신중함이 지극해야 마땅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注「 包曰」至「助祭也」。

○ 【집해(集解)】 주(注)의 “[포왈(包曰)]에서 [조제야(助祭也)]까지"

○正義曰:云「太廟,周公廟」者,文十三年《公羊傳》曰:「周公稱太廟,魯公稱世室,群公稱宮。」故知「太廟,周公廟也」。

○正義曰:<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태묘(太廟)는 주공(周公)의 사당이다[太廟 周公廟]"라는 것은, 문공(文公) 13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말하기를 “주공(周公)의 사당을 태묘(太廟)라 칭하고, 노(魯)나라 공(公≒伯禽)은 세실(世室)이라 칭하며, 여러 공(公)을 궁(宮)이라 칭한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태묘가 주공의 사당임을 안 것이다.

云「孔子仕魯」者,《史記·孔子世家》云:「孔子貧且賤。及長,嘗為季氏吏,料量平。嘗為司職吏而畜蕃息。由是為司空。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벼슬할 적에[孔子仕魯]"라는 것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이르기를 “공자가 빈궁하고 비천하였는데, 마침내 성장하여 일찍이 계씨(季氏)의 관리를 하실적에 되질의 헤아림이 공평하고, 사직(司職)의 벼슬을 하시면서 가축이 번식하니, 이로 인해 사공(司空)이 되셨다.

其後定公以孔子為中都宰,一年,四方皆則之。由中都宰為司空,由司空為大司寇,攝相事。」是仕魯,由是故得與助祭也。

그 뒤에 정공(定公)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邑宰)로 삼았는데, 1년 만에 사방이 모두 본받게 되었다. 중도의 읍재를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司空)을 인하여 대사구(大司寇)가 되었으며 재상(宰相)의 일을 대리(代理)하셨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노(魯)나라에 벼슬이며, 이를 인해 연고로 제사를 돕는 일에 참여하시게 된 것이다.

○注「 孔曰」至「復問」。

○ 【집해(集解)】 주(注)의 “[공왈(孔曰)]에서 [복문(復問)]까지"

○正義曰:云「鄹,孔子父叔梁紇所治邑」者,古謂大夫守邑者,以邑冠之,呼為某人。

○正義曰: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추(鄹)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다스리던 곳의 읍이다[鄹 孔子父叔梁紇所治邑]"라는 것은, 옛날에 읍(邑)을 지키는 대부를 말하는 것이며, 읍명(邑名)을 가지고 붙여서 모인(某人)으로 하여 칭하였다.

孔子父,鄹邑大夫,《左傳》稱鄹人紇,故此謂孔子為鄹人之子也。《左傳》成二年云:「新築人仲叔於奚。」杜注云:「於奚守新築大夫。」即此類也。

공자의 아버지는 추읍(鄹邑)의 대부였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추인흘(鄹人紇)”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공자를 일컫기를 추인(鄹人)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2년에 이르기를 “신축인중숙우해(新築人仲叔于奚”라고 했는데, 두예(杜預)의 주(注)에 이르기를 “우해(于奚)는 신축(新築)을 지키는 대부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부류(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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