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주소(論語註疏)』 팔일(八佾) 卷 3 - 10
▣ 『논어주소(論語註疏)』
◎ 『논어(論語)』
○ 팔일(八佾) 卷 3 - 10
3-10) 子曰: "禘, 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자왈: "체, 자기관이왕자, 오불욕관지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체(禘) 제사에, 이미 강신주를 비우고 부터 진행하는 것은, 내가 그것[무례]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논어집해(論語集解)》
【集解】子曰:「禘自既灌而往者,吾不欲觀之矣。」(孔曰:「 禘、祫之禮,為序昭穆,故毀廟之主及群廟之主皆合食於太祖。灌者,酌鬱鬯灌於太祖,以降神也。既灌之後,列尊卑,序昭穆。而魯逆祀,躋僖公,亂昭穆,故不欲觀之矣。」 ◎공안국이 말하였다:“체(禘: 제사 체)”는 합사(合祀)의 예(禮)이며, 소목(昭穆)의 차례로 하기 때문에, 훼철한 사당의 신주와 여러 사당의 신주가 모두 태조(太祖)에 합하여 먹게 한다. “관(灌: 물 댈 관)”이란 것은, 울창주(鬱鬯酒)를 따르어 태조에게 잔을 부어서 그로써 신이 내리게 한다. 이미 강신(降神)을 한 뒤의 높고 낮은 배열은 소목의 순서인데도, 노(魯)나라에서 제사를 거꾸로 하여 희공(僖公)을 올리어 소목을 어지럽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이다.)
《논어주소(論語註疏)》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하안(何晏, 193~249 魏)이 주(註)를 달아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지었으며, 북송(北宋)의 형병(邢昺, 932~1010)이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소(疏)를 붙여서 논어주소(論語註疏)를 지었다.
○【註疏】 「 子曰:禘自既灌而往者,吾不欲觀之矣」。
○正義曰:此章言魯禘祭非禮之事。禘者,五年大祭之名。灌者,將祭,酌鬱鬯於太祖,以降神也。既灌之後,列尊卑,序昭穆。而魯逆祀,躋僖公,亂昭穆,故孔子曰:「禘祭自既灌己往,吾則不欲觀之也。」
○注「 孔曰」至「觀之」。
○正義曰:云:「禘祫之禮,為序昭穆,故毀廟之主及群廟之主皆合食於太祖」者,鄭玄曰:「魯禮,三年喪畢,而祫於太祖。明年,春禘於群廟。自爾之後五年而再殷祭,以遠主初始入祧,新死之主又當與先君相接,故禮因是而為大祭,以審序昭穆,故謂之禘。禘者,諦也,言使昭穆之次審諦而不亂也。」
祫者,合也。文二年《公羊傳》曰「大祫者何?合祭也。其合祭奈何?毀廟之主陳於太祖,未毀廟之主皆升合食於太祖」是也。
云「灌者,酌鬱鬯灌於太祖,以降神」者,《郊特牲》云:「周人尚臭,灌用鬯臭,鬱合鬯,臭陰達於淵泉,灌以圭璋,用玉氣也。既灌,然後迎牲,致陰氣也。」鄭注云:「灌,謂以圭瓚酌鬯,始獻神也。」 鬱,鬱金草,釀為酒,煮鬱金草和之,其氣芬芳調暢,故曰鬱鬯。言未殺牲,先酌鬱鬯酒灌地,以求神於太祖廟也。
云「既灌之後,列尊卑,序昭穆」者,言既灌地降神之後,始列木主,以尊卑陳列太祖前。太祖東鄉,昭南鄉,穆北鄉。其餘孫從王父,父曰昭,子曰穆。昭取其鄉明,穆取其北面尚敬。三年一祫,五年一禘,禘所以異於祫者,毀廟之主,陳於太祖,與祫同;未毀廟之主,則各就其廟而祭也。
云「而魯逆祀,躋僖公,亂昭穆,故不欲觀之」者,《春秋》「文二年秋八月丁卯,大事於太廟,躋僖公」。《公羊傳》曰:「躋者何?升也。何言乎升僖公?譏。何譏爾?逆祀也。」何休云:「升,謂西上禮。昭穆,指父子。近取法《春秋》惠公與莊公當同南面西上,隱、桓與閔、僖亦當同北面西上,繼閔者在下。文公緣僖公於閔公為庶兄,置僖公於閔公上,失先後之義,故譏之。」是知當閔在僖上。今升僖先閔,故云逆祀。二公位次之逆,非昭穆亂也。此注云「亂昭穆」,及《魯語》云「將躋僖公,宗有司曰:『非昭穆也。』弗忌曰:『我為宗伯,明者為昭,其次為穆,何常之有?』」如彼所言,又似閔、僖異昭穆者,位次之逆,如昭穆之亂,假昭穆以言之,非謂異昭穆也。若兄弟相代,即異昭穆,設今兄弟四人皆立為君,則祖父之廟即己從毀,知其理必不然,故先儒無作此說。以此逆祀失禮,故孔子不欲觀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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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疏】 논어 경문(經文)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체(禘) 제사에, 이미 강신주를 비우고 부터 진행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까지"
○正義曰:이 장(章)은 노(魯)나라가 체재(禘祭)를 지내는 것이 예(禮)에 어긋난 일임을 말한 것이다.
체(禘: 제사 체)라는 것은, 5년에 한 번씩 지내는 큰 제사의 이름이다. 관(灌: 물 댈 관)이라는 것은, 장차 제사 지내려면 울창주(鬱鬯酒)를 태조(太祖)에게 술을 부어 그로써 신(神)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미 강신(降神)을 한 뒤의 높고 낮은 배열은 소목의 순서인데도, 노(魯)나라가 제사를 거꾸로 하여 희공(僖公)을 올리어 소목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공자께서 “체(禘) 제사에서 이미 강신(降神)한 뒤부터는 나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 【집해(集解)】 주(注)의 “[공왈(孔曰)]에서 [관지(觀之)]까지"
○正義曰: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체(禘)는 합사(合祀)의 예(禮)이며, 소목(昭穆)의 차례로 하기 때문에, 훼철한 사당의 신주와 여러 사당의 신주가 모두 태조(太祖)에 합하여 먹게 한다.[禘祫之禮 爲序昭穆 故毁廟之主及群廟之主 皆合食於太祖]"라는 것은,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노(魯)나라 예(禮)는 3년상을 마치면 태조(太祖) 사당에서 협제(祫祭)를 지내고, 다음 해 봄에 여러 선군(先君)의 사당에 체재(禘祭)를 지낸다. 너의 뒤로 부터 5년이면 은제(殷祭)를 두 차례 지내고 그로써 먼 조상 신주는 처음 조묘(祧廟,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에 들이기 시작하며, 새로 돌아가신 신주는 또 선군(先君)들과 더블어 만났다. 그러므로 예(禮)에, 이로 인해서 대제(大祭)를 거행하여 그로써 소목의 순서를 살폈기 때문에 일컫기를 체(禘)라고 했다. 체(禘: 제사 체)는 살핌이며, 소목의 순서를 자세히 살펴서 혼란스럽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협(祫: 합사할 협)이라는 것은, 합함이며, 문공(文公) 2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말하기를 “대협(大祫)이란 것은, 무엇인가? 제사를 합함이다. 그 제사를 합함을 어떻게 하는가? 헐어낸 사당의 신주를 태조묘(太祖廟)에 진열하고, 아직 훼묘(毁廟)하지 않은 신주를 모두 태조(太祖)에게 올려서 합하여 지낸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관(灌)이란 것은, 울창주(鬱鬯酒)를 따르어 태조에게 잔을 부어서 그로써 신이 내리게 한다.[灌者 酌鬱鬯灌於太祖以降神]"라는 것은,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주(周)나라 사람은 내음을 숭상하여, 강신(降神)을 울창주의 향취(香臭)를 사용하였다. 울금(鬱金)달인 물을 기장술[鬯酒]에 타는 것은 냄새의 음기(陰氣)가 연천(淵泉)에 도달하게 함이고, 옥 국자[圭璋]를 가지고 강신함은 옥(玉)의 기운을 사용함이다. 이미 강신을 한 뒤에 희생(犧牲)을 맞이함은 [강신의] 음기가 [지하에] 이르도록 함이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관(灌: 물 댈 관)은, 옥 술잔[규찬(圭瓚)]으로 울창주[鬯]를 떠서 처음 신에게 올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울(鬱: 울창할 울)은 울금초(鬱金草)이며, 검은 기장으로 술을 만들고 울금초를 달여서 그솟에 타면 그 꽃다운 향기가 막힘없이 퍼지[調暢]기 때문에 울창(鬱鬯)이라 말한 것이다.
아직 희생을 죽이지 않고서 먼저 울창주(鬱鬯酒)를 부어 땅에 강신을 하여 그로써 태조묘에 강림하기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이미 강신(降神)을 한 뒤의 높고 낮은 배열은 소목의 순서인데도[旣灌之後 列尊卑 序昭穆]" 라는 것은, 이미 땅에 울창주를 부어 강신한 뒤에 비로소 나무 신주[木主]를 배열하여 높고 낮음으로써 태조의 신주 앞에 진열하는데, 태조의 신주는 동쪽으로 향하고, 소(昭)는 남향, 목(穆)은 북향으로 한다. 그 밖에 손자는 조부[王父]를 따르며, 부(父)를 소(昭)라 말하고, 자(子)를 목(穆)이라 말한다. 소(昭)는 그[신주]가 밝은 쪽을 향함을 취하고, 목(穆)은 신주가 북면(北面)하여 공경을 숭상함을 취한 것이다.
3년에 한 번 협제(祫祭)를 지내고, 5년에 한 번 체제(禘祭)를 지내는데, 체제가 협제와 다른 것의 까닭은, 훼묘(毁廟)의 신주를 태조묘(太祖廟)에 진열함은 협제와 같으나, 아직 훼묘하지 않은 신주라면 각각 그 사당에 가서 제사 지내는 것이다.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노(魯)나라에서 제사를 거꾸로 하여 희공(僖公)을 올리어 소목을 어지럽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이다[而魯逆祀 躋僖公 亂昭穆 故不欲觀之]"라는 것은, 《춘추(春秋)》에 “문공(文公) 2년 가을 8월 정묘일(丁卯日), 태묘(太廟)에 체제[大事]를 지내며 희공(僖公)을 [민공(閔公) 위로] 올렸다.”고 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제(躋: 오를 제)라는 것이 무엇인가? 올린 것이다. 어째서 희공(僖公)을 올렸다고 말하였는가? 비난한 것이다. 어째서 비난하였는가? 거꾸로 제사지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하휴(何休)가 이르기를 “승(升)은 서쪽을 윗자리 하는 예(禮)를 일컫는다. 소(昭) 와 목(穆)은 부(父) 와 자(子)를 가리킨다. 가까이 《춘추(春秋)》에서 법례를 취하면 혜공(惠公)과 장공(莊公)을 당연히 같이 남면(南面)하여 서쪽을 윗 자리로 했으며, 은공‧환공(隱公‧桓公)과 민공‧희공(閔公‧僖公)도 역시 당연히 같이 북면(北面)하여 서쪽을 윗쪽으로 하고, 민공(閔公)을 계승한 자[희공의 신주]를 아래에 앉힌 것이다. 문공(文公)은 희공(僖公)이 민공(閔公)에게 서형(庶兄)이 된 이유로 희공을 민공의 신주 위에 앉혀 선후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에 비난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민공이 희공의 신주 위에 있음이 마땅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희공을 민공의 신주 앞에 올렸기 때문에 이르기를 ‘역사(逆祀)’라 한 것이다. 두 공(公, 희공과 민공)의 위차(位次)가 뒤바끼었지만 소목을 어지럽힌 것은 아니다.
이 주(注)에 이르기를 “소목(昭穆)을 어지럽혔다.”고 하였으며, 《국어(國語)》 〈노어(魯語)〉에 이르기를 “장차 희공의 신주를 [민공 위로] 올리려 하자, 종유사(宗有司)가 말하기를 ‘소목(昭穆)을 어겼다.’고 하니, 불기(弗忌)가 말하기를 ‘내가 종백(宗伯)이 되어, 현명한 분을 소(昭)에 모시고, 그 다음을 목(穆)에 모시려 하는데, 어찌 일정한 규칙이 있는가?’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 말한 바와 같으면 또 민공과 희공의 소목을 달리하여 모신 것 같다. 그러나 위차를 거스른 것이 소목을 어지럽힌 것과 같기 때문에 소목을 가탁하여 말을 하였으며, 소목을 달리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형제가 대[군주]를 서로 이었으면, 소목을 달리하는데 가령 지금 형제 네 사람이 모두지위가 군주를 하였다면 그 조부(祖父)의 사당은 즉시 훼철(毁撤)을 해야 하는데, 그 이치가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선유(先儒) 중에 이런 말을 한 분이 없다.
그로써 이 거꾸로 지내는 제사[逆祀]가 예(禮)를 잃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보고자 하지 않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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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주소(論語註疏)》
공자(孔子, B.C.551~B.C.479)가 지은 논어(論語)에 하안(何晏, 193~249 魏)이 주(註)를 달아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지었으며, 북송(北宋)의 형병(邢昺, 932~1010)이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소(疏)를 붙여서 논어주소(論語註疏)를 지었다.
○【註疏】 「 子曰:禘自既灌而往者,吾不欲觀之矣」。
○【註疏】 논어 경문(經文)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체(禘) 제사에, 이미 강신주를 비우고 부터 진행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까지"
○正義曰:此章言魯禘祭非禮之事。
○正義曰:이 장(章)은 노(魯)나라가 체재(禘祭)를 지내는 것이 예(禮)에 어긋난 일임을 말한 것이다.
禘者,五年大祭之名。灌者,將祭,酌鬱鬯於太祖,以降神也。
체(禘: 제사 체)라는 것은, 5년에 한 번씩 지내는 큰 제사의 이름이다. 관(灌: 물 댈 관)이라는 것은, 장차 제사 지내려면 울창주(鬱鬯酒)를 태조(太祖)에게 술을 부어 그로써 신(神)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既灌之後,列尊卑,序昭穆。而魯逆祀,躋僖公,亂昭穆,故孔子曰:「禘祭自既灌己往,吾則不欲觀之也。」
이미 강신(降神)을 한 뒤의 높고 낮은 배열은 소목의 순서인데도, 노(魯)나라가 제사를 거꾸로 하여 희공(僖公)을 올리어 소목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공자께서 “체(禘) 제사에서 이미 강신(降神)한 뒤부터는 나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注「 孔曰」至「觀之」。
○ 【집해(集解)】 주(注)의 “[공왈(孔曰)]에서 [관지(觀之)]까지"
○正義曰:云:「禘祫之禮,為序昭穆,故毀廟之主及群廟之主皆合食於太祖」者,鄭玄曰:「魯禮,三年喪畢,而祫於太祖。明年,春禘於群廟。自爾之後五年而再殷祭,以遠主初始入祧,新死之主又當與先君相接,故禮因是而為大祭,以審序昭穆,故謂之禘。禘者,諦也,言使昭穆之次審諦而不亂也。」
○正義曰: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체(禘)는 합사(合祀)의 예(禮)이며, 소목(昭穆)의 차례로 하기 때문에, 훼철한 사당의 신주와 여러 사당의 신주가 모두 태조(太祖)에 합하여 먹게 한다.[禘祫之禮 爲序昭穆 故毁廟之主及群廟之主 皆合食於太祖]"라는 것은,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노(魯)나라 예(禮)는 3년상을 마치면 태조(太祖) 사당에서 협제(祫祭)를 지내고, 다음 해 봄에 여러 선군(先君)의 사당에 체재(禘祭)를 지낸다. 너의 뒤로 부터 5년이면 은제(殷祭)를 두 차례 지내고 그로써 먼 조상 신주는 처음 조묘(祧廟,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에 들이기 시작하며, 새로 돌아가신 신주는 또 선군(先君)들과 더블어 만났다. 그러므로 예(禮)에, 이로 인해서 대제(大祭)를 거행하여 그로써 소목의 순서를 살폈기 때문에 일컫기를 체(禘)라고 했다. 체(禘: 제사 체)는 살핌이며, 소목의 순서를 자세히 살펴서 혼란스럽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祫者,合也。文二年《公羊傳》曰「大祫者何?合祭也。其合祭奈何?毀廟之主陳於太祖,未毀廟之主皆升合食於太祖」是也。
협(祫: 합사할 협)이라는 것은, 합함이며, 문공(文公) 2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말하기를 “대협(大祫)이란 것은, 무엇인가? 제사를 합함이다. 그 제사를 합함을 어떻게 하는가? 헐어낸 사당의 신주를 태조묘(太祖廟)에 진열하고, 아직 훼묘(毁廟)하지 않은 신주를 모두 태조(太祖)에게 올려서 합하여 지낸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云「灌者,酌鬱鬯灌於太祖,以降神」者,《郊特牲》云:「周人尚臭,灌用鬯臭,鬱合鬯,臭陰達於淵泉,灌以圭璋,用玉氣也。既灌,然後迎牲,致陰氣也。」鄭注云:「灌,謂以圭瓚酌鬯,始獻神也。」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관(灌)이란 것은, 울창주(鬱鬯酒)를 따르어 태조에게 잔을 부어서 그로써 신이 내리게 한다.[灌者 酌鬱鬯灌於太祖以降神]"라는 것은,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주(周)나라 사람은 내음을 숭상하여, 강신(降神)을 울창주의 향취(香臭)를 사용하였다. 울금(鬱金)달인 물을 기장술[鬯酒]에 타는 것은 냄새의 음기(陰氣)가 연천(淵泉)에 도달하게 함이고, 옥 국자[圭璋]를 가지고 강신함은 옥(玉)의 기운을 사용함이다. 이미 강신을 한 뒤에 희생(犧牲)을 맞이함은 [강신의] 음기가 [지하에] 이르도록 함이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관(灌: 물 댈 관)은, 옥 술잔[규찬(圭瓚)]으로 울창주[鬯]를 떠서 처음 신에게 올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鬱,鬱金草,釀為酒,煮鬱金草和之,其氣芬芳調暢,故曰鬱鬯。
울(鬱: 울창할 울)은 울금초(鬱金草)이며, 검은 기장으로 술을 만들고 울금초를 달여서 그솟에 타면 그 꽃다운 향기가 막힘없이 퍼지[調暢]기 때문에 울창(鬱鬯)이라 말한 것이다.
言未殺牲,先酌鬱鬯酒灌地,以求神於太祖廟也。
아직 희생을 죽이지 않고서 먼저 울창주(鬱鬯酒)를 부어 땅에 강신을 하여 그로써 태조묘에 강림하기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云「既灌之後,列尊卑,序昭穆」者,言既灌地降神之後,始列木主,以尊卑陳列太祖前。太祖東鄉,昭南鄉,穆北鄉。其餘孫從王父,父曰昭,子曰穆。昭取其鄉明,穆取其北面尚敬。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이미 강신(降神)을 한 뒤의 높고 낮은 배열은 소목의 순서인데도[旣灌之後 列尊卑 序昭穆]" 라는 것은, 이미 땅에 울창주를 부어 강신한 뒤에 비로소 나무 신주[木主]를 배열하여 높고 낮음으로써 태조의 신주 앞에 진열하는데, 태조의 신주는 동쪽으로 향하고, 소(昭)는 남향, 목(穆)은 북향으로 한다. 그 밖에 손자는 조부[王父]를 따르며, 부(父)를 소(昭)라 말하고, 자(子)를 목(穆)이라 말한다. 소(昭)는 그[신주]가 밝은 쪽을 향함을 취하고, 목(穆)은 신주가 북면(北面)하여 공경을 숭상함을 취한 것이다.
三年一祫,五年一禘,禘所以異於祫者,毀廟之主,陳於太祖,與祫同;未毀廟之主,則各就其廟而祭也。
3년에 한 번 협제(祫祭)를 지내고, 5년에 한 번 체제(禘祭)를 지내는데, 체제가 협제와 다른 것의 까닭은, 훼묘(毁廟)의 신주를 태조묘(太祖廟)에 진열함은 협제와 같으나, 아직 훼묘하지 않은 신주라면 각각 그 사당에 가서 제사 지내는 것이다.
云「而魯逆祀,躋僖公,亂昭穆,故不欲觀之」者,《春秋》「文二年秋八月丁卯,大事於太廟,躋僖公」。《公羊傳》曰:「躋者何?升也。何言乎升僖公?譏。何譏爾?逆祀也。」
[집해(集解) 주(注)에] 이르기를 "노(魯)나라에서 제사를 거꾸로 하여 희공(僖公)을 올리어 소목을 어지럽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이다[而魯逆祀 躋僖公 亂昭穆 故不欲觀之]"라는 것은, 《춘추(春秋)》에 “문공(文公) 2년 가을 8월 정묘일(丁卯日), 태묘(太廟)에 체제[大事]를 지내며 희공(僖公)을 [민공(閔公) 위로] 올렸다.”고 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제(躋: 오를 제)라는 것이 무엇인가? 올린 것이다. 어째서 희공(僖公)을 올렸다고 말하였는가? 비난한 것이다. 어째서 비난하였는가? 거꾸로 제사지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何休云:「升,謂西上禮。昭穆,指父子。近取法《春秋》惠公與莊公當同南面西上,隱、桓與閔、僖亦當同北面西上,繼閔者在下。文公緣僖公於閔公為庶兄,置僖公於閔公上,失先後之義,故譏之。」是知當閔在僖上。
하휴(何休)가 이르기를 “승(升)은 서쪽을 윗자리 하는 예(禮)를 일컫는다. 소(昭) 와 목(穆)은 부(父) 와 자(子)를 가리킨다. 가까이 《춘추(春秋)》에서 법례를 취하면 혜공(惠公)과 장공(莊公)을 당연히 같이 남면(南面)하여 서쪽을 윗 자리로 했으며, 은공‧환공(隱公‧桓公)과 민공‧희공(閔公‧僖公)도 역시 당연히 같이 북면(北面)하여 서쪽을 윗쪽으로 하고, 민공(閔公)을 계승한 자[희공의 신주]를 아래에 앉힌 것이다. 문공(文公)은 희공(僖公)이 민공(閔公)에게 서형(庶兄)이 된 이유로 희공을 민공의 신주 위에 앉혀 선후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에 비난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민공이 희공의 신주 위에 있음이 마땅했음을 알 수 있다.
今升僖先閔,故云逆祀。二公位次之逆,非昭穆亂也。
지금 희공을 민공의 신주 앞에 올렸기 때문에 이르기를 ‘역사(逆祀)’라 한 것이다. 두 공(公, 희공과 민공)의 위차(位次)가 뒤바끼었지만 소목을 어지럽힌 것은 아니다.
此注云「亂昭穆」,及《魯語》云「將躋僖公,宗有司曰:『非昭穆也。』弗忌曰:『我為宗伯,明者為昭,其次為穆,何常之有?』」如彼所言,又似閔、僖異昭穆者,位次之逆,如昭穆之亂,假昭穆以言之,非謂異昭穆也。
이 주(注)에 이르기를 “소목(昭穆)을 어지럽혔다.”고 하였으며, 《국어(國語)》 〈노어(魯語)〉에 이르기를 “장차 희공의 신주를 [민공 위로] 올리려 하자, 종유사(宗有司)가 말하기를 ‘소목(昭穆)을 어겼다.’고 하니, 불기(弗忌)가 말하기를 ‘내가 종백(宗伯)이 되어, 현명한 분을 소(昭)에 모시고, 그 다음을 목(穆)에 모시려 하는데, 어찌 일정한 규칙이 있는가?’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 말한 바와 같으면 또 민공과 희공의 소목을 달리하여 모신 것 같다. 그러나 위차를 거스른 것이 소목을 어지럽힌 것과 같기 때문에 소목을 가탁하여 말을 하였으며, 소목을 달리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若兄弟相代,即異昭穆,設今兄弟四人皆立為君,則祖父之廟即己從毀,知其理必不然,故先儒無作此說。以此逆祀失禮,故孔子不欲觀之也。
만약 형제가 대[군주]를 서로 이었으면, 소목을 달리하는데 가령 지금 형제 네 사람이 모두지위가 군주를 하였다면 그 조부(祖父)의 사당은 즉시 훼철(毁撤)을 해야 하는데, 그 이치가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선유(先儒) 중에 이런 말을 한 분이 없다.
그로써 이 거꾸로 지내는 제사[逆祀]가 예(禮)를 잃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보고자 하지 않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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